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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글씨]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 조회 수: 2299, 2015-08-27 11:14:57(2015-08-27)
  •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등장한지도 이제 거의 20년이 흘렀다. 90년대 초중반 이념적 대중운동의 잔해 속에서 등장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의 보수화․우경화에 맞서 원칙성과 계급성을 지켜내고 2000년대 대공장하청노조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주역이 되는 등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으나 노동자계급 속에 뿌리 내리는데 실패하고 안타깝게도 점차 사멸하는 운동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창간 10주년을 맞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 한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형성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풍미한 PDR과 NDR 등 스탈린주의 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혁명론과 단절하고 보다 철저하게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 운동을 창출하려 했던 일군의 정치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해외의 사상이 아니라 8․90년대 한국 운동의 독특한 현상인 혁명적 민중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혁명운동은 대부분 북한정권과 연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외에는 대개 낭만적 자유주의 운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72년 유신체제가 성립되면서 갓 형성되고 있던 시민사회는 억압되었고,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권리조차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관철시킬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로부터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은 1970년대 후반 민청학련 세대를 거치며 급진화 되기 시작했으며, 이 세대의 일부인 이태복, 장기표, 장명국, 김승호 등은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더욱 급진화‧민중화‧이념화되었다. 특히 이태복은 1980년 한국에서의 혁명운동은 한국의 독자적인 당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민노련과 전민학련(학림)을 건설했는데, 아마 이를 한국의 자생적 좌익운동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부르주아 지식인이 주도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민중주의는 1980년대 중반 들어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 불리는 두 차례의 논쟁을 거치며 이론적으로 더욱 완결적인 운동으로 등장했다. 사구체 논쟁의 첫 번째 국면은 1984년대 말 CNP 논쟁으로 나타났는데 이 논쟁에서 전민노련/전민학련 계열이 주장한 NDR이 승리했고, 이는 CA그룹/서노련으로 이어지며 86년까지 민중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CNP 논쟁을 통해 민중운동진영 내부에서 개량주의적 CDR론이 기각되고 운동의 사상적 기초로서 ‘맑스-레닌주의’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일본어 서적을 통해 수입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입각한 정치투쟁론과 정당 건설론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85년 「강철서신」의 등장과 함께 NL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급부상하였다. 「강철서신」은 CA그룹의 엘리트주의에 소외된 “평범한” 운동권들을 빠르게 사로잡았고, NL은 짧은 시간에 CA를 압도하며 다수파로 등장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CA그룹은 결국 붕괴되고 민중운동에 NL의 주도성이 확립되었다. NL의 등장 이후 1988~89년 두 번째로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본래 좌파 성향의 소장 연구자들이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에 대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PDR론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지만, PDR을 주장하는 <현실과 과학>과 CA의 노선을 물려받아 NDR을 주장하는 사노맹의 <노동해방문학> 사이의 논쟁도 주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이 논쟁은 사실상 보다 정교한 PDR 이론의 승리로 끝났다. 사구체 논쟁을 통해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PDR 이론이 학생운동으로 침투하여 다양한 PDR론이 등장하면서 좌파 다수가 PDR론을 수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1984년에서 1989년까지 이론적 논쟁을 통해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형성과 동시에 해체될 운명을 맞고 말았다. 민중주의 이론이 사회주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동구권과 소련 등 소위 ‘현실 사회주의권’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NDR, PDR 같은 민중주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1930년대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디미트로프 테제에 기초한 인민전선 류의 스탈린주의가 민중주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민중주의의 특징은 80년대 노동운동의 미약함 속에서 이른바 기층 민중을 운동의 주체로 설정한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 노선이었다. ‘민중주의’라는 용어 역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선 민주주의혁명, 그 다음에 사회주의혁명이라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한 NDR이나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로 성장·전화 한다는 1단계 2과정 이론을 주장한 PDR이나 모두 당면 과제를 민중을 주체로 한 민주주의혁명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민중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통한 민주연합정부를 당면 목표로 설정했으며, 스탈린주의로부터 엘리트주의 전위관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ND가 조악하고 거친 스탈린주의였다면 PD는 그보다 좀 더 세련된 스탈린주의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론적으로 정교했던 PD들이 현실의 소련을 사회주의 모델로 이상화한 더욱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들이었다. 그 결과 1990년 소련이 몰락했을 때, 좌파 민중주의는 ND든 PD든 모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의심은 1990년 소련 인민들이 레닌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을 목도하고 커다란 경악으로 바뀌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들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규모 공동전선으로 백기완 선본(이하 ‘백선본’)을 결성했지만 채 1%도 안 되는 득표라는 무기력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는 이미 이론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한 민중주의 운동의 붕괴를 실제적으로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에 대한 회의가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으며 지식인 사회는 급속히 포스트 담론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민중주의 운동은 급속히 붕괴했다. 무엇보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 운동 전선이 해체되었다. 초기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 급속한 개혁정책은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들 대부분이 제도 내의 민주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변절자들이 그러했다면, 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우경화 흐름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1991년 당시 가장 큰 정치그룹이었던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폐기한 이른바 신노선을 제기했다. 기존 민중주의 정치조직들의 노선전환은 합번적인 민중정당 건설운동으로 현실화되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인민노련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사노맹은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를 건설했고, 여타 다양한 PD그룹들은 <민중회의>로 결합하여 본격적인 합법 정당건설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백선본의 강령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지향하는 정치노선은 사민주의와 유로코뮤니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정치적 절충주의에 불과했다.


    이러한 우경화 흐름을 비판하는 민중주의 운동 내의 좌익 세력들로부터 90년대 초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맹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두 가지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이론)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데, 첫째 소련 붕괴의 충격을 틈타 국내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IS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둘째 사구체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PTR론의 등장이다. 기존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의심은 1989년 천안문 사태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안문 사태 당시 거의 모든 운동진영이 이를 반혁명에 대한 당연한 진압이라고 보았으나 삼민동맹만이 이를 공산당의 배신행위이자 반(反)민주주의적 폭거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국내에 들어온 IS(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지지자들이 SWP(영국 사회주의노동당)의 이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토니 클리프의 이론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토니 클리프만 주장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가 1940년대 주창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인 이론도 아니었다. 이 이론은 1960년대를 지나며 IS 내부에서도 망각된 이론이었으나, 90년대 초 동구권 몰락 이후 트로츠키주의 진영 내부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 운동 주류와 IS간에 국제적인 논쟁이 새롭게 진행되었다. 이 논쟁은 사실상 IS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국내에서도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의 충격과 혼란을 틈타 빠르게 전파되었다. 천안문 사태를 비판한 삼민동맹 일부 역시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며 IS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IS를 이론주의, 엘리트주의, 지식인 운동이라고 비판하며 분리하여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하 ‘혁사노’)>를 형성했다.


    한편 1990년대 전진출판사는 레닌저작선집을 출판하는 동시에 PDR론과 NDR론을 비판하며 한국에서 당면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PTR)이라고 주장하는 일련의 팸플릿들을 발행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소박한 물음에서 출발했다. PD와 ND가 한국사회를 아무리 그 앞에 ‘신식민지’라는 제한을 둔다하더라도 가장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한다면, 왜 한국에서 혁명의 과제가 굳이 민주주의혁명이 되어야 하는가? 당시 전진 그룹이라 불리던 이 그룹은 이로부터 한국사회의 당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명확히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그밖에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진 그룹은 90년대 초반 한국의 운동진영을 강타한 이론적 혼란기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으로 PTR론을 받아들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 (이하 ‘노해투사’)>, <해방의 심장 (이하 ‘해심’)> 같은 새로운 그룹이 등장했고, 이 그룹들의 조직원들은 2000년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까지 인적으로 이어지며 이 운동의 주요한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초에 등장한 혁사노, 해심, 노해투사를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유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민중주의 운동단체들의 전반적인 합법화 단계를 밟았지만, 비합법 운동을 유지하는 조직들에는 탄압이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계급동맹, 혁사노, 노해투사 등 비합법 정치조직들은 93~95년 사이 공안기관의 국가보안법 탄압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 속에서 초기 사회주의 그룹들은 사실상 소멸했다.


    초기의 비합법 사회주의 그룹들은 국가의 탄압으로 활동이 정지되었지만 1994년 말부터 민중주의 운동의 전반적인 우경화 흐름 속에서 일부 민중주의 그룹에서 좌익적인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노동자투쟁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의 반영이었다. 94년에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의 파업 투쟁이 있었고, 95년에는 한국통신노조의 파업이 벌어졌으며, 같은 해 울산 현대자동차에서 양봉수 열사의 분신과 열사투쟁을 계기로 현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에서도 95년부터 김영삼 정권의 등장 이후 잠시 사라졌던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4년 말에서 1995년 초, 민중주의 운동세력의 주요한 축 중 하나였던 사노맹/전학련에서 좌익적인 분파가 분리하여 <새벽별>과 <사회주의학생연맹 (이하 ‘사학련’)>을 건설했다. IS에서도 특유의 인민전선 활동에 반발하며 전투적·노동자적 지향을 보이던 세력이 분리되어 「노동해방의 불꽃 (이하 ‘노해불’)」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초기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잔존세력들과 두 번째 분화한 그룹들이 이합집산하며 96~98년 사이에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형성되었다. 90년대 초반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을 기존의 좌파 운동과 명확히 구별되는 다른 운동으로 규정했으며, 대략 96년경부터 이들이 발간하는 팸플릿에 “비합법 사회주의” 혹은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말과 함께 기존 운동을 비판하는 ‘민중주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공통적으로 기존 스탈린주의적인 민중주의 운동과 의식적으로 단절하려고 노력하면서 스탈린주의와 구별되는 맑스-레닌주의의 원칙들을 사상적 깃발로 견고히 내세우려 했다. 90년대 말에 들어가면 이들 그룹들은 거의 모두 IS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여 소련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다. 민주집중제 원리에 기초한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 인민전선 같은 상층연대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투쟁에 입각한 전술, 평의회 권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내세운 공통의 지반이었다.


    이런 지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은 노해투사와 사학련 일부가 결합한 <노동해방의 길 (이하 ‘노해길’)>의 흐름, 새벽별에서 전환한 <빛> 그룹, 해심과 몇몇 소규모 학생그룹들이 결합한 <노동자권력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 (이하 ‘노투사’)>, 노해불과 혁사노 잔존 세력이 결합한 <선진노동자의 길 (이하 ‘선노길’)>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현장과 정치>와 <신질서> 그룹도 흔히 이들과 유사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으로 꼽히지만, 기존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에서 타락한 노동자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장과 정치>나 유고식 자주관리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신질서>는 여러 면에서 민중주의의 잔재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그리고 이후 행보를 보아서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90년대 후반까지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존재해오던 이들 그룹들은 97년 총파업과 IMF 이후 이어진 구조조정 분쇄투쟁을 계기로 선전 활동에서 현장투쟁에 대한 개입으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현장이전을 통해 주로 대공장 하청노동자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그 속에서 전투적 선진노동자 운동에 개입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이론과 전투적 조합주의의 결합을 꾀했던 것이다.


    2. 현실 노동운동으로 결합과 조합주의


    90년대 후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여전히 미숙한 운동이었다. 핵심인물들은 대개 30대 초중반을 넘지 않았고, 조직원들도 대부분 20대 초중반에 불과했다. 합법주의․의회주의로 넘어간 노회한 민중주의자들에 대한 거부와 적대감 속에서 이들은 가진 능력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한다는 지나치게 큰 과제에 짓눌려 있었으며 주장은 과장됐고 편협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활력이 있었다.


    80년대 민중주의자들의 맑스주의 문헌에 대한 이해는 천박했다. 제대로 번역된 맑스주의 서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에서 사실상 레닌의 단 두 개의 저작(<무엇을 할 것인가?>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 가지 전술>)에 남미에서 나온 종속이론과 스탈린주의 교과서를 버무린 것이 민중주의 이론의 전부라 해도 그다지 과언이 아니었다. 민중주의자들은 맑스와 레닌의 원전에 무지했으며, 스탈린주의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트로츠키 및 유럽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혁명적 전통들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했다. 소련을 포함한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붕괴한 뒤 옛 민중주의자들은 제도권 민주주의자로 변절하지 않으면 스탈린주의의 변형물인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를 거쳐 대부분 이른바 포스트주의로 넘어갔다. 합법주의 민중주의자들은 대개 사민주의나 유로코뮤니즘적인 경향으로 빠져들었다.


    한 세대 전체가 민중주의적 인식과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식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어느 정도 이론적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민중주의자들이 철지난 이론이라고 버린 맑스와 레닌, 로자, 그람시, 코민테른 테제 등을 파고들며 자신들의 노선을 정립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람시를 시민사회 이론가로 해석한 인민노련/진정추와 달리 혁사노는 초기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을 보다 좌익적으로 해석해서 아직 총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식지 않은 한국의 대공장 노조운동에 적용하려 했다. 이는 향후 십 수 년 동안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을 규정한 중요한 이론적 성과였다.


    이런 노력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IS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토니 클리프 류의 국가자본주의론으로 현실사회주의를 규정했으며 이 역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존 민중주의자들의 국유화 사회주의와 단절하고 소비에트(평의회) 형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노동자대중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초기 활동은 불가피하게 각자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 기관지 발행과 학습 중심의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미성숙의 시기를 거치며 생긴 불가피한 하나의 편향일 뿐이었다. 하지만 노해길 같은 그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보편적으로 거쳐야 할 선전적 단계가 있다고 표명했다. 다른 그룹들은 이를 선전주의라고 비판했지만, 96년 경 울산으로 중심을 옮겨 대공장 현장조직 운동과 결합한 선노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회주의 그룹들 역시 활동방식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고양되는 대중운동은 이들이 선전활동에 머무르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사이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 내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두 논쟁은 총파업 논쟁과 그에 뒤따른 선전주의 논쟁이었다. 1996년 말에서 97년 초, 예상치 못했던 총파업 투쟁이 터져 나왔다. 87년 6월 항쟁과 이어진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급속히 고양된 남한의 대중투쟁은 89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노동자 대중투쟁은 91년 열사투쟁의 패배로 급속히 꺾였고 92년 문민정부 등장 이후 완연히 하강세를 탔다. 이를 반영하여 첫 번째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벌어졌는데, 기회주의적 세력들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제기하며 노동운동이 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선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94년 전기협 투쟁, 95년 한국통신 파업투쟁 등으로부터 이미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95‧96년 NL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공안탄압이 쏟아졌지만 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사태와 함께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히 터져 나와 정권을 강타했다.


    총파업 투쟁 당시, 새벽별 그룹은 <혁명적사회주의자(RS)>라는 명의로 「활화산」이라는 유인물을 발행하며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회와 가두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민중주의 운동에서 갓 분리해 나온 새벽별의 인식은 아직 민중통일전선(즉, 인민전선)이라는 민중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혁사노, 노해투사, 해심 같은 초기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은 모두 민중주의자들이 주도한 92년 백선본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는 이들과 완전히 단절해야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노맹의 잔존세력에 뿌리를 둔 새벽별은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통합한 민중정치연합(민정련)에 대한 개입노선을 버리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민주주의 과제가 포함된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제시하고 전선체를 소비에트의 맹아라고 주장하는 새벽별의 이론적 한계로 드러났다. 이는 전진 그룹을 따라 당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소비에트를 코뮌 국가라고 이해한 노해길이나 노투사, 그리고 혁사노의 영향으로 공장평의회야말로 소비에트 같은 평의회 권력의 맹아라고 생각한 선노길의 인식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었다.


    “가자, 청와대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가두투쟁을 강화하여 정권타도 투쟁에 나서자는 <활화산>의 선동은 기존의 민중주의 노선과 크게 차별성을 갖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선노길의 전신인 <강철노동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과 코민테른 3차 대회의 「전술에 대한 테제」를 인용하며 무작정 가두시위의 강화를 외칠 것이 아니라 정치투쟁과 노동 현장의 경제투쟁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가두투쟁을 강화하자는 슬로건이 오히려 자본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현장 동력의 소진을 갖고 와 수요파업 등으로 투쟁을 통제하려 하는 민주노총 관료들에게 놀아나는 전술이라고 비판했다.


    노해길 역시 <강철노동자>의 주장을 조합주의라고 비판했으나, 이 논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강철노동자>였다. 이 논쟁을 계기로 새벽별 일부가 떨어져나가 노해길로 결합했지만, 그 다수는 <강철노동자>의 입장을 수용하며 민중주의의 잔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대다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정치투쟁과 현장투쟁의 결합이라는 <강철노동자>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강철노동자>의 주장은 총파업 전후 형성된 대공장 선진노동자 운동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총파업 이후 현장에서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같은 형태로 존재하던 현장 활동가 모임들은 총파업에서 나타난 노동운동 주류의 탈현장적 노선, 즉 사회개혁투쟁과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금속연맹 선거에서 현대중공업의 조돈희를 후보로 추대했다. 이들은 이후 자신들을 노조 체계와 다른 ‘현장조직’으로 규정하며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로 결집했고, 노동운동에서 이른바 ‘현장파’로 등장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과 사회개혁투쟁을 노선으로 삼은 우파 성향의 국민파, 흔히 단문심으로 불리던 단병호․문성현․심상정 등 금속연맹 1기 집행부를 중심으로 한 중도 성향의 중앙파, 금속연맹 조돈희 선본을 계기로 결집한 현장파로 3정립하게 되었다.


    총파업 논쟁에 이어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 내에서는 선전주의 논쟁이 뒤따랐다. 가장 극단적으로 노해길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개입하기 전에 강령을 완전히 형성하고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노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회주의 그룹에서 기존의 선전중심 활동을 비판하고 노동자투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 논쟁들은 기본적으로 1890년대 중반 노동자들의 생활에 기초한 선동활동으로 활동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대해 페테르스부르크의 맑스주의 서클 내에서 벌어진 논쟁과 비슷한 성격을 띠었다. 19세기말 러시아 맑스주의 서클의 고참 활동가들처럼 선전주의자들은 아직은 현실 노동운동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때가 아니며 이론을 강령적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96․97 총파업 이후 대공장 현장조직의 등장,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노동자의 힘 (이하 ‘노힘’)>의 결성과 같은 민중주의 세력의 정치세력화, 구조조정 공세를 앞두고 고양되고 있던 노동자운동의 분위기,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은 있었지만 대공장에서 선노길이 거둔 성과 등등으로부터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2000년대로 접어들며 모두 현실 노동운동에 대한 개입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심지어 99년까지도 선전의 강화와 실천의 산개를 주장했던 노해길도 그러했다.


    이 논쟁들은 또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에 연결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87년 이후 노동현장에서는 습관처럼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임금인상 쟁취하자!”라는 구호가 외쳐졌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 타도와 임금인상 쟁취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당시의 운동진영에서 상당히 기계적으로 이해되어졌다.


    노해길은 레닌의 원전을 근거로 정치투쟁이 우위에 서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분리하는 민중주의적 관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한국에서 당면 혁명의 성격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기한 레닌 식의 정치투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레닌의 정치투쟁관은 사실 러시아 자체의 후진성에 기인한 면이 컸다. 레닌이 외부에서 정치선동이 공장 안으로 주입되어야 된다고 얘기했을 때 그 정치선동은 “짜르 타도, 보통선거제 쟁취”와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당면 러시아혁명의 성격을 민주주의혁명이라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모순적이었으며, 노해길 류의 정경투관은 노해길의 실천을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선전주의,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조합주의로 남겨놓는 인식적 장애로 기능했다. 이런 경향은 노해길이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질적인 세력으로 취급되는 원인이 되었다.


    구조조정 분쇄투쟁 시기, 이 경향은 구조조정을 생산력의 발전을 낳는 사회발전이라고 주장하며, 구조조정 분쇄가 아니라 “국정원·백골단 해체, 김대중 정권 타도” 같은 부르주아 정치투쟁 과제와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 철폐” 같은 조합적 요구를 기계적으로 결합한 슬로건을 제기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회주의 그룹들은 이런 노선을 거부하고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현장 전투파의 입장에 서고자 했다.


    총파업 이후 선거에서 승리하고 IMF 구조조정을 수용한 김대중 정권은 재벌개혁을 압박하며 대공장의 조직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 공세를 퍼부었다. 98․99년 구조조정 분쇄투쟁이 전국의 거의 모든 대공장을 휩쓸었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98년 대공장 노조선거에서 현장파는 위기감을 느낀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어 대부분의 대공장에서 지도부로 선출되며 구조조정 분쇄투쟁의 지휘부로 등장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신자유주의 반대, 해외매각‧민영화 반대”와 같은 소부르주아적 요구에 가두어 놓으려는 민중주의 세력에 맞서 사회주의 그룹들은 각자의 강령적 내용을 들고 이 투쟁에 결합을 시도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반대, 해외매각·민영화 반대, 공기업화”가 아니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현장의 가장 전투적인 투쟁으로부터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러나 모두 다 알다시피 이 투쟁은 패배했다. 자유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시민사회 제 세력으로부터 조직노동운동은 철저히 배제됐으며, 구조조정 분쇄투쟁은 어느 사회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고립된 투쟁이 되었다. 전투적 조합주의는 투쟁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고립된 투쟁 속에서 각개 격파되었다. 노조 집행부를 장악한 현장파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일부 사업장에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비판하던 직권조인으로 투쟁을 끝냈다.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독자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자신이 배출한 집행부를 암묵적으로 비호하는데 급급했으며, 그 결과 구조조정 분쇄투쟁을 거치며 현장파 운동은 급속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대중운동의 후퇴는 조합주의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른바 전국전선이 해체되면서 사회주의 그룹들의 강령적 문제의식은 실종되었다. 개별 사업장의 고립된 투쟁들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은 “투쟁하라, 더 투쟁하라”를 외치는 것을 넘지 못했다. 더욱이 일부 사회주의 그룹은 전투성에 있어서도 민중주의자들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조조정 반대 전선이 이미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수 년 간 구조조정 반대가 관성적으로 외쳐졌으며, 보다 전투적인 사회주의 그룹들은 어떤 이슈에도 총파업을 외치는 무조건 총파업주의자로 변모했다.


    구조조정 시기가 지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전사회적으로 양극화가 강제되었고, 대형공기업과 금속대공장의 노동자들은 이 속에서 중산층으로 떠올랐다. 조직노동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 노조들의 반수가 어용으로 넘어갔고, 이른바 민주파가 계속 주도력을 발휘한 완성차대공장들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민주노총은 시간이 갈수록 무력화되었다. 대략 2002년을 거치며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유야무야 소멸되었으며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와 유사한 대공장 현장노동자들 중심의 전국적인 운동질서는 결코 다시 복원되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이 되자 선진노동자 운동의 해체를 넘어 조직노동운동 자체가 붕괴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직노동운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것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존의 조직노동운동의 보수화 속에서 상대적으로 원칙성,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 및 이와 유사한 비합법 그룹들은 비정규직 운동, 특히 대공장 하청운동에 개입해 스스로 그 지도그룹으로 등장했고, 조직노동 운동의 문제를 폭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공장 하청운동은 기존 운동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그와 함께 패배했다.


    3.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과 패배


    비정규직 혹은 비정규노동이라는 용어는 96년경부터 노동연구자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 배경에는 90년대 중반부터 YS 정권의 “세계화” 캠페인과 함께 노동유연화가 확대되면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늘기 시작한 현실이 깔려 있다. 금속대공장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크게 감소했던 하청·용역노동자들이 90년대 중반부터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사업장에서는 이미 IMF 이전에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들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상황의 반영으로 96·97년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와 현대중공업 등지에서 하청노동자들의 소규모 투쟁이 벌어졌고, 이는 1997년 말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건 최초의 노동운동 단체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97년 노동법 개악과 IMF 구조조정과 함께 비정규직은 더욱 급속히 증가했다. 99년에는 고용노동부가 비정규직이 전체 고용의 절반을 넘었다고 발표하며 커다란 사회이슈가 되었다. 전국모임은 99년 초 목포의 한라중공업(현 삼호중공업)에 활동가들을 투입해 최초의 사내하청노조인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동조합을 건설했지만, 구조조정을 앞둔 하청노동자들의 대량해고와 정규직노조와 갈등 속에 대중적으로 확대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같은 해 가을 재능교육 교사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비제조업 비정규직노조 재능교육교사노조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후 2000년과 2001년에 수도권 비제조업·중소 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비정규직노조 건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공장 구조조정 분쇄 투쟁이 패배한 뒤, 기존 조직 노동운동에 기반이 없는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노동운동의 신참자로서 자연스럽게 비정규직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국모임에도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의 조직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으며, <해방의 투혼>은 정규직운동은 더러운 거품이며 비정규직 투쟁이야말로 영국의 이스트엔드 운동처럼 노동운동을 혁신할 새로운 물결이라는 입장을 제출했다. 이 주장은 당시 대다수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로부터도 과도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기대에도 불구하고 2000~2001년 수도권 비제조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비정규직투쟁은 거의 모두 장기투쟁 끝에 패배했다.


    이 투쟁들을 지도한 것은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비정규직문제가 사회이슈로 부각되는 속에서 초기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목표로 내걸고 의욕적으로 이 투쟁에 접근했다. 그러나 신규노조를 조직하면 파업투쟁을 일으키고 그 속에서 활동가 층을 발굴하며 파업분위기가 정점에서 내려오는 시점에서 투쟁을 접어야 한다고 배운 민주노총 관료들은 수 십여 일의 장기 투쟁에도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 투쟁에 당황했고, 결국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억지로 투쟁을 종료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 슬로건에 대한 숱한 희화화가 발생했다. 몇몇 사업장에서 관료들은 용역업체의 교체와 고용안정이 정규직화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2001년 이후 비정규직 차별철폐가 민주노총의 공식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


    전투파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 역시 이 투쟁에 결합했지만 관료들의 지도력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회주의 그룹의 조직원들과 그에 연계된 연대 학생단위들은 한국통신 등 주요한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며 관료들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파로 기능했다. 그러나 비정규직투쟁에 가장 큰 의의를 부여했던 <해방의 투혼>은 장기투쟁 상황이 지속되자 질서정연한 퇴각이라는 전술을 주장했다. 그것은 결국 공공연맹 관료들이 종용하는 합의안을 받고 투쟁을 마무리해서 조직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노조의 안정을 위해 소산별 체계로 가야한다는 <해방의 투혼>의 주장은 민주노총의 관료들처럼 조직형식주의에 빠진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주장대로 합의안을 받고 투쟁이 종료되었지만 517일의 장기투쟁에도 불구하고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조직도, 활동가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최초로 나타난 비정규직 투쟁의 물결은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그 이전까지 비정규직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서기 어렵다는 사고가 팽배했으며 비정규직 문제는 대개 산별이나 지역노조 같은 조직형식 문제로 접근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0·2001년의 투쟁은 그러한 생각이 허구라는 것,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은 어디에서든지 투쟁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 투쟁의 허무한 패배는 비제조업 중소사업장이 아니라 대공장 하청투쟁으로 비정규직 투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사고를 형성시켰다. 2000년 들어 각 사회주의 그룹들은 선전주의에 승리를 거둔 현실 개입 노선에 입각하여 조직원들을 대공장에 비정규직노동자로 취업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대공장에 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길을 막혔기 때문에 그 전에도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직업운동가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청운동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현장에 취업하여 현장조직과 같은 대공장 운동질서에 개입하는 활동을 우선으로 했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새롭게 공장으로 들어간 직업 활동가들의 목표는 무엇보다 대공장에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각 공장에서 비정규직 활동가모임을 만들고 노조건투를 준비했다.


    2003년 노무현이 집권하면서 일시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유화국면이 조성되었다. 2003년 초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열사투쟁 당시 노무현 정권은 취임 전인 인수위 상태에서 노사정 합의를 직접 이끌어냈다. 이런 유화조치와 함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노무현의 발언, 아산공장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활동가들에 대한 자본의 가혹한 탄압, 각 공장에 비정규직 활동가 조직의 포진 등, 여러 조건이 결합하여 2003년 여름부터 대공장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 건설투쟁이 잇따라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공장 비정규직으로 취업해 있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건설과 함께 자연스럽게 노조 운동의 지도그룹으로 떠올랐다.


    비정규직노조 건설투쟁은 정규직노조와 정규직운동질서의 실체를 빠르게 폭로했다. 실리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비정규직을 배제했고, 이른바 현장파는 겉으로는 입바른 소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한라하청노조를 파업투쟁에서 배제하여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게 만든 한라중공업의 권성원 집행부는 당시 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가장 전투적인 활동가로 평가받았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는 현장파로 분류되는 민투위 이상욱 집행부가 비정규직노동자 류기혁 열사투쟁을 외면했다. 이는 민중주의 좌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이상욱이 노힘 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힘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기아 화성공장에서 조직통합을 앞세운 비정규직노조 파괴 공세가 들어왔을 때, 전투파라는 <금속노동자의 힘> 활동가들은 비정규직노조 집행부에게 조직통합을 결단하지 않으면 연대를 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벽에 가로막혀 하청노조는 불안정한 상태를 면치 못했다. 초기 비정규직노조들은 기존 노동조합의 형식․체계․활동방식을 모사하려 시도했지만 정규직의 배제와 교묘한 통제 속에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2004년 이후, 제조업 하청에 잇따라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지면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새로운 돌파구로 떠올랐다. 그러나 불법파견 투쟁은 태생적으로 법률 해석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자칫 계급의식의 상승이 아니라 하청노동자들의 왜곡된 신분상승 욕구에 영합하기 십상인 운동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투쟁을 발발시킬 수 있는 틈새를 활용하여 투쟁하는 노동자들 속에서 보다 높은 계급의식을 형성해내는 것을 과제로 가져가야 했으나,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노조 지도부는 부흥회라고 불리는 “잘 싸우면 우리도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신분상승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투쟁을 조직했고, 그 결과 불파투쟁이 자본의 완강한 거부와 정규직의 외면 속에 패배했을 때 노조 조직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불파투쟁 이후,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여 잦은 투쟁으로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노조의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원하청연대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 의도가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력이 취약한 하청노조의 현실에서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비정규직노조 활동가들은 대부분 그 속에 들어가서 먼저 노동조합을 강화시킨다는 방향을 취했다. 그러나 원하청연대회의 속에서 비정규직노조는 어느 정도 안정성을 얻은 반면, 그만큼 정규직 운동질서에 대한 조합원들의 종속적인 의식이 만들어지는 딜레마에 빠졌다.


    불파투쟁의 패배와 노조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2003년 이후 대공장에서 1차 하청의 고용과 노동조건은 상대적으로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1차 하청노동자들은 소수의 1차 밴드를 제외하면 부품사 정규직보다 높은 처우를 받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하청노조는 자연스럽게 1차 하청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2․3차 하청 문제는 조합 활동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안정화가 주체들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합간부를 맡은 사회주의 조직원들은 노동조합 업무에 치여서 조합원들의 의식을 상승시키거나 사회주의자로 형성시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하청운동은 정규직 운동질서에 불안정하게 의존하는 내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남았다. 이러한 취약성은 하청노조들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노조로 보였던 기아비정규직노조에 대한 1사 1조직 공세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정규직노조의 직가입 공세에 대해 하청노조는 이탈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집행부가 분열되며 김수억 집행부는 굴복하고 말았다.


    2012년 수년 동안 끌어왔던 재판에서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최병승 조합원이 불법파견을 최종인정 받으면서 불파투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지만 대공장 운동질서의 조합주의라는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자비정규직 3지회의 불파투쟁이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초기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사실상 활력을 잃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소한 기존 노조운동을 혁신하는 무기로서 더 이상 기능하기 어렵다. 교대제 전환 같은 공장체제의 재편은 정규직 조합원들을 더욱 강하게 포섭하는 동시에 더욱 다양한 형태로 불안정 고용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은 아직 미미하거나 초기 단계에 있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이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에 끼친 영향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들의 개입이 없었다면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은 훨씬 늦게 나타나거나 훨씬 조합주의적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에 의해 대공장 비정규직투쟁은 매우 전투적인 운동으로 나타났으며 비록 성과가 기대보다 미약하긴 했지만 대공장 정규직운동의 조합주의를 폭로하는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그룹들은 조직노동운동의 상층부에 개입하는 민중주의자들과 달리 직접 현장으로 파고들고자 했다. 이들은 현장투쟁에서 원칙적인 분파로서 행동했고, 그러한 활동 속에서 민중주의자들의 왜곡에 맞서 사회주의의 핵심적인 가치들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패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이 2000년대 중반 이후 확장성을 잃었다. 사회주의 그룹들이 기반으로 삼으려 한 대공장 노동자들은 그들의 정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정규직 질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토양이 되었던 전투적 조합주의는 현실에서 고립되고 점차 약화되었다. 조직노동운동의 붕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2008년 촛불투쟁이었다. 87년과 97년에 버금가는 사회적 동요에도 불구하고 조직노동운동, 특히 금속대공장 운동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파 정권의 등장과 특히 2008년 촛불투쟁 이후, 90년대 중후반 노동계급은 자신의 힘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노동운동이 부정적으로 보았던 사회적 연대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전투적 조합주의는 여기에 기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구조조정 분쇄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의 두 물결이 지나간 뒤, 사회주의 운동에 남은 것은 없었다.


    4.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해체


    2000년대 중반을 넘기며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사실상 현장에서 밀려나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미 2003년 이후 거의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이 공개단체를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아마도 구조조정 분쇄와 비정규직 투쟁에 결합했지만 조직적 성과가 미미했던 데다 정권의 교체로 보안에 대한 위험성이 감소되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 영역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그룹들의 약화는 계속되었다. 폐쇄적인 활동방식의 영향 탓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이들이 중심을 두려고 한 조직노동운동의 퇴조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진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줄어드는 입지에 따른 위기감은 2000년대 중반부터 통합운동을 본격화시켰다. 통합운동에 참가한 일부 조직은 거의 모든 전술 판단에서 일치하는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당 건설”을 절대 명분으로 내세워 내부의 불만을 누르며 통일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을 모사한 급조된 강령이 통합의 기반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통합운동은 그 주체들이 기대했던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2008년 사노련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잠깐 주목을 받았지만 그 관심이 조직의 확대로 이어지진 않았다. 결국 이 운동은 과거에 그들이 민중주의, 중도주의라고 비판했던 노힘, 해방연대 같은 조직들과 통합을 모색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는 사실 생존의 기로에서 살아 남기위한 동상이몽의 생존전략에 불과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소수 몇 사람의 의지로 추진되는 소규모 조직들의 통합은 이미 명백히 드러나 있는 전술·노선·기풍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었으며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곧 차이는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변화했다. 사회주의자들의 통일된 힘으로 민중주의자들을 분리·견인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사노련은 사노위 결성을 앞두고 그 자신이 분리되었으며, 사노위 건설에 참여했던 그룹들도 이후 수 년 동안 다시 재분리의 과정을 거치고 거의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통합운동에 나섰던 그룹들은 통합의 절대적인 명분으로 당 건설을 내세웠으나 통합운동의 실패를 통해 현 시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직면한 위기상황은 당 건설의 기초가 되어야 할 선진노동자운동의 해체, 나아가 조직노동운동의 해체라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자각과 스스로의 혁신 없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전주의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일상적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초기의 기본 전제는 분명 옳았다. 그러나 구조조정 이후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미 사회주의자들이 믿었던 만큼 생활적으로 절실하기 않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요구를 기초해야 한다는 믿음에 따라 모든 현안을 들고 총파업에 결합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선동에 조직 노동자들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으며, 2000년대 초 대우자동차 투쟁과 발전노조의 파업 이후 금속대공장과 대형공기업에서는 실질적인 대중적 파업 투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의 중산층화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속에서 일상적인 생존권 요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논리는 오히려 조합주의로 내려가는 기제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공기업과 대공장에서 상당히 높은 조직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 중 10%도 되지 않으며, 사회전반에 강제된 노동유연화로 말미암아 저임금·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미조직된 광범위한 층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직노동운동에 대한 완고한 집착은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는데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정규직 중심적 정책과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보다 조직노동운동 주변부의 운동으로 남아 있다. 대공장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며 그것이 혁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 사고가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다. 이러한 훈구학적 집착은 사회주의 운동을 도리어 전반적인 사회현실에 뒤떨어지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세력으로 만들고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민중주의자들의 소부르주아 정치와 단절하며 받아들였던 코민테른의 노선, 즉 개별 작업장의 산업투쟁이 자연적으로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고는 이런 경향을 더욱 악화시켰다.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모두 현장에 직접 기반을 가지려고 했으며 자신들의 역량을 주로 현장에 전술문제에 집중시켰다. 이는 조직노동운동의 상층부, 관료적인 위치에 포진해 있던 민중주의 운동세력들에 비해 사회주의 그룹들이 지닌 건강성의 발현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선전주의로 몰렸으며, 이러한 경제주의적인 경향은 전투적 조합주의와 별개의 독립된 사회주의 정치·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노동조합 내 반대파 활동에 머무르게 했다. 다시 말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현실 노동운동에 결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경제주의 경향을 취했으나 조직노동운동의 전투파로 하락했을 뿐 당 건설의 정치적 기초를 만드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의 노선적인 경향 속에 “정치”를 “경제”로 해소하는 경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정치투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대체하려한 노선도 틀렸지만, 대부분의 전투적·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사고와 실천 속에서도 국민파의 사회개혁투쟁 같은 소부르주아 정치와 유로코뮤니즘 류의 국가개조론과 선을 치고 현장중심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정치는 현장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선동에다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선전을 덧붙이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선거 시기에 민주노동당과 같은 제도정당에 대한 비판적인 지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에 비판적이었던 노투사 같은 그룹은 사회주의자들의 선동 활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정치선동으로 하락시키거나 노동자들의 산업적 이해에 국한시키는 경향에 맞서 “사회주의 정치선동”을 제기했으나 그것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산업투쟁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것의 전투적 급진화 그 자체가 사회주의 정치의식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 경험으로 볼 때 명백했다.


    “조직노동”에 배타적으로 천착하는 조합주의 경향은 다른 사회운동에 대해 “배척”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태생적으로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교조적 숭배와 부분주의를 폄훼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노동사안 이외에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차별화된 자기 내용을 가지지 못하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이는 후진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을 줄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투쟁의 퇴조와 함께 현실운동에 대한 개입 기반을 상실하며 각 조직 내부에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는 심각한 문제들을 낳았다. 이것이 비단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문제 뿐은 아니지만 대개 소수가 강한 발언력을 갖고 있는 작은 조직들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2000년대는 ‘100인 위원회’의 활동에서 나타나듯 반성폭력 운동의 노동운동으로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다. 2000년대 이후, 여성주의적인 인식과 실천은 새로이 운동을 시작한 건강한 젊은 활동가들에게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90년대 이른바 ‘부문주의’의 유행에 맞서 강력한 노동중심성을 채택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고참 활동가들은 여성주의와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내부의 성폭력을 방치했고, 그 결과 조직 자체가 분열하거나 붕괴하는 사건이 여러 차례 벌어졌으며, 사건에 대한 잘못된 대처로 내외적으로 신용을 잃었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도 비슷하게 지속되고 있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90년대 중반 이후 십여 년 동안 해왔던 것이 맑스-레닌주의를 문자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였다면, 이는 아마 실패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2005년에서 2010년까지 진행된 통합운동의 파산과 전투적 사회주의 운동의 전반적인 약화는 그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듯하며, 새로운 통합과 이합집산의 소식들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새로운 세대로 확대는 되지 않고 있으며, 그럴 전망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그 주체로 볼 때나, 그 현실로 볼 때나, 그 내용으로 볼 때나, 모두 90년대 중반의 참신성을 잃어버리고 낡고 노쇠한 운동이 되었다. 90년대 중반에 등장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생명은 끝났으며,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이나 재편이라는 과제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맑스-레닌주의’의 적용이 현실에서 실패했다면 이론적 지표는 무엇인가?


    5. 현실분석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경향의 창출


    맑스-레닌주의는 사실 유럽에서는 스탈린주의를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맑스-레닌주의”를 가장 배타적으로 표방한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명확하게 반(反)스탈린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국제적으로는 예외적인 양상이다. 예를 들어 국제 좌익운동의 동향에 정통한 미국의 좌익공산주의자 로렌 골드너는 2008년 사노신과 인터뷰에서 서구에 스탈린주의도 트로츠키주의도 아니면서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 그룹이 있냐는 질문에 한참 고민을 하며 난감함을 표했다.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서구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스탈린주의가 장악하기 이전의 코민테른 초기 테제들과 트로츠키에서 대안을 찾는 경우가 많았으며, 현재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의 전통을 잇는 대다수 단채들이 공식적으로 트로츠키주의를 표명하고 있다. 이는 혁명의 과제를 민주주의혁명으로 보고 있는 전통적 레닌주의가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에서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민테른 초기 노선과 트로츠키주의 역시 대규모 노조 운동의 전성시기에 형성된 정치적 경향이다. 노조가 소수 정규직 중심이 되고 저임금·비정규직노동자들이 다수화 되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 노조로 조직되지 않은 지금의 현실에 적용되기 힘든 노선인 것이다. 예컨대 이행강령에서 따온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 같은 요구는 강령적 요구로 제시하기 전에 노조 조직률이 10%도 안 되는 나라에서, 또 이러한 노동조합의 소수화가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과연 전체 노동자들의 이해가 걸린 강령이 될 수 있는가를 먼저 고민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새로운 전통을 찾아야 하는가? 1990년대 초 이른바 정통 ‘맑스-레닌주의’에 실망한 뒤, 한국의 운동은 서구 맑스주의 전통에서 전에 이단으로 몰렸던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알튀세르, 발리바르, 토니 클리프,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혁명적 전통을 찾기 위한 모색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전통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착목 속에서 그로부터 새롭게 이론을 구성해야 할 때로 보인다.


    1970년대 이후 맑스주의를 고수하는 입장들에서 크게 새로운 분석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맑스주의에 대한 훈고학적 집착이 오히려 현실분석을 막고 있는 것 같기까지 하다. 가장 중요하게는 누구를 혁명의 주체로 보느냐의 문제에 있어 투쟁에 나서지 않은지 반세기 가까이 되고 있는 전통적 노동계급에 대한 관념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통적 노동계급의 보수화는 제조업이 축소되고 서비스업이 확대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최근의 변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제조업 노동자들을 부차적으로 보는 경향은 이들을 주체로 형성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장 노동자들만을 노동계급으로 바라보거나 아직도 그들을 중심적이고 선도적인 집단으로 생각하는 “중공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경향에서 명확히 벗어난 실천적 운동집단은 국제적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이론체계”로서 맑스주의는 1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 1848년에 씌어진 공산주의자 당 선언은 당시 국제적으로 존재하던 노동자 비밀결사 운동의 한 분파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1888년 공산주의자 당 선언에 붙인 새로운 서문에서 엥겔스는 “노동자들 중에서 단순한 정치적 변혁들의 불충분함을 깨닫고 사회의 총체적 개조의 필요성을 요구했던 바로 그러한 부분은 그 당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즉,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개량 운동이 아니라 소수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 자신의 운동이었다. 이러한 비밀결사 운동이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사멸하고 1860년대 대중적으로 노동운동이 다시 등장했을 때, 맑스와 엥겔스는 이 새로운 운동의 이념적 주도권을 놓고 프루동-바쿠닌의 무정부주의와 라쌀레의 국가주의적 사회주의와 경쟁했다. 그 속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이론체계는 유럽 노동운동의 주도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대는 유럽 국가들에서 대공업이 전반적으로 확장되는 시기였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대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확고한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대공장의 조직노동운동에 기반 해야 한다는 교조적인 ‘맑스-레닌주의’는 이제 현실 파악에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대공업의 발전이 미래로 보이던 시대의 이론이 전부 맞을 리는 만무하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른바 “전통적”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현실에 대한 인식적 장애가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등장한 신(新) 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이 폄하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이러한 보수성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즉 저임금·불안정노동자는 대부분 미조직이며 조직된 운동으로는 장기투쟁 사업장이나 해고자 운동의 형태로 조직노동운동의 얇고 불안정한 비주류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과거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의 출판물에서도 그들이 90년대 중반에 부정했던 “민중” 혹은 “시민”이라는 용어가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은, 협소하게 규정된 ‘노동’ 개념 속에서 새롭게 투쟁에 나서고 있는 대중들을 지칭하는 언어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용어들에 영합할 것이 아니라 다수화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제시하고 호명해야 한다. 이들을 프레카리아트라고 부르던 뭐라고 부르던 그 이해를, 이미 “중간적” 계급들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는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로부터 분리해 독자적으로 제시하고 새로운 혁명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이 새로운 정치적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맑스 자신은 1860년대 제 1인터내셔널 운동 시기에 등장한, 주로 조롱적인 의미가 담겨있던 맑스주의라는 말에 대해 차가운 반응을 보이며 자기 자신은 맑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론에 개인의 이름이 붙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완결된 진리체계를 제시했다기보다는 앞으로 운동의 발전에 따라 함께 발전해나갈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다. ‘맑스-레닌주의’라는 도그마에 고착되기보다 맑스주의에 기반 하지만 현실 변화에 대한 창조적인 분석에 기초한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지향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동의성으로부터 혁명적 운동을 국제·국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 잉여가치 착취와 계급투쟁을 중심 범주에 놓은 자본주의 분석, 자본주의의 폐절과 사회주의의 지향, 부분적 개선이나 사회 일부에서 비자본주의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대중투쟁을 통해 무국가·무계급·비화폐 교환 사회를 지향하는 것 같은 맑스주의의 기본전제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정부주의적 경향과 달리 노동계급의 해방은 국가권력의 정치적 장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국가기구의 장악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계급과 국가의 사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여전히 지켜내야 할 핵심적인 정치적 내용들이다. 스탈린주의와 유로코뮤니즘 등 스스로 맑스주의라고 이야기하는 이러저러한 국가주의적 변종들이야말로 오히려 이러한 맑스주의의 핵심 내용에서 이탈했으며, 스탈린주의적 국가주의 뿐 아니라 민중주의 그룹들의 유러코뮤니즘적인 경향, 특히 국가 개조론과 단절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 근본적으로 무계급·무국가·비화폐 사회를 지향하며 그것으로 가는 이행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억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 체제를 파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폭력적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점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민중주의 운동과 단절하는 주요한 지점들이었다. 여기에 변화된 자본주의 현실에서 이제 혁명의 주체는 저임금·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들의 이해를 가장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동안 이 운동이 배제했던 여성·성소수자·장애인 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아 새로운 정치를 형성하고, 그것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적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것에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6. 러시아 당 모델에 대한 오해와 물신화에서 벗어나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 주체로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정당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미리 예단하고 재단하는 것보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무엇을 지향했는가, 그리고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모두 러시아의 볼셰비키 당을 모델로 그런 정당을 한국에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는 단적으로 합법·민중주의자에 맞서 “비합법 전위정당”을 건설하겠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사회주의, 폭력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신의 입장으로 공공연하게 주장한 세력은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 밖에 없었으며, 때문에 즉각 국가보안법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초기부터 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며, 90년대 후반까지 보안 문제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93년 혁사노와 노해투사 사건, 95․96년 사학련 등 학생조직들에 대한 탄압 등 국가보안법 사건들에서 핵심으로 지목된 활동가들은 대부분 1년 6개월 이상의 중형을 받았다. 조직 성원들의 연령이 전반적으로 젊고 소수인 가운데, 핵심 활동가들이 1년 6개월 이상 복역한다는 것은 대개 조직의 붕괴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그들은 비합법, 음지의 세력이 되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80년대 군사독재의 서슬이 아직 살아있는 90년대에 얇고 불안정한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극단적인 점조직의 형태를 취했다. 대중 공간에 활동할 때도 자신이 비합법 정파의 성원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고, 겉보기에는 팸플릿 밖에 보이지 않는 유령 조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볼셰비키도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이 해온 그런 방식의 비합법 조직인 적은 없었으며, 이는 오히려 19세기의 음모적 비밀결사에 가까운 운영 방식이었다.


    더 큰 문제는 2000년대 이후 비합법 서클에서 보안의 강조는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 조직관리 기술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몇몇 그룹에서 통용되던 소속 기관의 체계와 계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외에 조직원들 간의 의사소통을 금지하는 조치들은 사실상 모든 쟁점을 조직의 위계적 질서 속에서만 토론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보를 독점한 중앙의 견해에 반대하는 성원이 자신의 동조자들을 조직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조치였다.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예외 없이 민주집중제를 자신의 조직원리로 표방해왔는데, 이 역시 조직 내부의 비민주성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러시아에서 민주집중제가 등장한 맥락은 무시되고 오로지 집중과 규율, 강력한 통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십여 명에서 수 십 명 규모의 작은 단체들에서 이런 경향은 흔히 극히 비민주적인 중앙의 독재, 지도적 개인에 대한 과중한 의존으로 귀결되었다. 민주집중제에 대한 오해는 일부 그룹에서 분파형성권의 공식적인 금지로 나타나거나, 또는 형식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실제로는 억압하는 조직 기풍을 만들어왔다. 행동통일은 사상의 통일, 생각의 통일로까지 확장되었다.


    빈약한 물적·인적 자원과 결합한 이른바 강고한 통일성, 강력한 규율성의 신화는 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지속적으로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단을 생활의 최우선에 놓을 것을 강요하며 생활 전반이 조직의 지도(를 빙자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과도한 공동체 논리가 횡행했으며, 이는 개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활동하고 어디서 살 것인가 까지 ‘중앙’이라 불리는 조직의 지도부에서 결정했을 뿐 아니라, 조직원들의 연애, 결혼, 출산 등 사적 문제에 대한 간섭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조직 문화는 점점 더 보상 없는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아갔으며, 이로부터 끝없는 내부갈등과 갈등적인 조직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조직을 떠나거나 말거나의 양자택일의 길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따르면 조직성이 있다, 반발하면 없다는 식의 조직 논리는 순응적 인간을 양산하는 틀로 기능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이 취한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의 결과는 폐쇄성과 경직성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의 조직질서는 이미 2000년대 들어 현장 활동과 공개 활동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으며 민중주의자들과 통합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유지되어야할 ‘합리적 핵심’ 까지 낡은 것으로 버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분파형성 금지’ 같은 낡은 원리들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강철 같은 규율과 통일성으로 무장한 비합법전위정당 모델은 러시아 볼셰비키 운동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면이 크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레닌의 저작으로만 조직원리를 학습했을 뿐, 러시아사민당과 볼셰비키의 실제 모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1903년 러시아사민당의 실질적인 창당 직후부터 하나의 “분파”에 불과했으며, 분파 상태는 볼셰비키가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독자적인 정당으로 선언한 1912년 프라하 협의회까지 거의 십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러시아사민당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1912년에야 다시 대중투쟁이 고양되면서 볼셰비키 중심으로 당을 재건한 것에 가깝다. “당”이라는 이름으로 없어졌다 다시 조직되고 재건되는 러시아 혁명정당의 역사는 주로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었고, 지도와 지침에 의존하는 위계적인 조직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흔히 전위당이라고 불리는 당 모델은 당원의 자격을 좀 더 엄격하게 제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런 당원 자격의 심사와 중앙집중의 강조는 첫째로는 모두 알다시피 러시아 운동이 서유럽과 달리 불법적인 상태에 있었다는 것, 둘째로는 오히려 러시아 운동형태가 매우 리버럴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당 건설 운동은 독일 같은 나라와 달리 광활한 국토에서 처음부터 지방에 분산된 자생적인 서클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각 지역 서클들의 역사와 전통, 경향은 상이했고, 조직과 조직바깥의 경계도 희미한 경우가 많았다. 볼셰비키 조직의 실제 모습은 독일 사민당과 별 차이 없었으며, 오히려 규모나 운영을 보면 기존의 혁명적 사회주의 서클들보다는 차라리 진보신당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볼셰비키의 실상은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에 와서 강철 같은 전위집단으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이런 당 관념은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전통적인 선비문화나 사무라이문화 등 엘리트주의 문화와 결합되어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조직노선으로 고착되었다.


    전위라는 개념은 대중과 대립되는 엘리트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계급 자체와 대당되는 개념으로 볼 때 의미가 있다. 제 2인터내셔널의 사민당들은 가입조건이 자유롭게 열려진 대중정당의 형태를 취하며 이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나아가 엥겔스는 1885년에 쓴 「공산주의자 동맹의 역사에 관하여」라는 글의 말미에 비밀결사로 시작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서술한 다음, “지금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공개적인 것이든 비밀적인 것이든 더 이상 공식적인 조직이 필요하지 않다 ; 동일한 의식을 가진 계급적 동지 간의 단순하고 자명한 연계만 있다면, 일체의 규약, 위원회, 결의 및 그 밖의 구체적인 형식이 없더라도 독일제국 전체를 뒤흔들기 충분하다”고 계급의식의 자연적인 발달이 당이라는 조직자체 마저도 극복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밝혔다. 이것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계급적 처지의 동일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단순한 연대성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음은 곧 명확해졌다. 사민당의 대중정당 노선은 19세기 후반 근대적 정당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관료화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은 계급 자체가 아니라 계급의 선도적인 일부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등장한 것인데, 이런 개념이 계급이 아니라 대중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인식되면서 볼셰비키 당 역시 수천에서 수 만 명 규모의 대중정당이었다는 것이 흔히 망각되었다.


    대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엘리트주의적 전위정당론의 기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1890년대 중반 이후 지식인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융합하여 형성된 각 지역의 서클들을 정당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주의자들이 아직 노동자들의 수준이 안 되므로 지역의 서클 조직들은 합법적 노동조합을 지향하거나 그냥 활동가조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이스크라> 그룹의 문제의식은 그것을 체계를 갖춘 정당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위당 노선의 합리적 핵심은 당과 계급의 구분이며 그 구분의 기준은 출신계급과 상관없이 정치에 대한 동의와 선도적인 의식성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그 이론적 근거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한다는 것으로 들었으며, 따라서 당원의 자격에 어느 정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식성은 일차적으로는 성문화된 강령과 규약에 따라 활동하겠다는 결의일 수밖에 없다. 레닌은 실질적인 당 건설 과정 및 2차 당 대회에서 그것을 보장하는 기준으로 유명한 규약 1조를 제시했는데, 이 규약은 2차 당 대회에서 기각되었지만 볼셰비키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계속 유지되었다.


    레닌이 제출한 당 규약 1조의 정신은 당에 대한 단순한 지지·지원이 아니라 당의 기관에 소속된 활동을 통해 당원들이 평균적인 정치적 동일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역의 위원회나 공장위원회 등 당의 특정 기관에 소속되어서 일상적인 토론과 활동을 하는 것이 당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문화적·기풍의 동질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줄 것이라는 사고이다. 이것은 정당한 사고이며 여전히 유지되어야 한다. 다만 이것이 한국에서 상당히 경직되게 해석된 폐해가 있을 뿐이다.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은 멤버십을 얻기 위해 논문을 쓰거나, 테스트를 하는 등 지나치게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해왔다. 때로는 이도 모자라 후보/지지자와 같은 중층적인 회원 구조를 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입희망자에 대해 시험을 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동의성 뿐 아니라 지도부의 의중에 맞는 사람들을 골라 뽑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방식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성, 조직의 순응성과 수동성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동시에 이런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에 있어서 엘리트주의적 의식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중층적 체계 역시 조직의 위계적 성격을 강화하고 선발된 자들에게 선민의식을 불어넣는 기제로 작용했다.


    전위라는 개념이 객관적 기준에 의거한 가입의 제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전히 유효성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가입문턱이 있으되 충분한 개방성을 가지면서도 정치적으로 하락하거나 이질성이 심화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이 표방하는 정치적 지향과 규약이 명확히 성문화할 필요성이 있다.


    비합법성이라는 것 역시 비밀결사와는 다르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면 여전히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공공연한 선동․선전이 실정법을 위반하는 사회에서 비합법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물론 과거와 달리 사노련 사건의 예에서 나타나듯 사회주의 그룹에 대한 탄압은 과거처럼 1년에서 2년 이상 복역해야 하는 중죄로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며, 당분간 보안문제가 전처럼 아주 긴급한 실질적인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더욱 공개적이고 전면적으로 활동할 필요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 진보당에 대한 내란음모죄의 적용, 이명박 정권에서 벌어진 사노련과 해방연대 두 사건에서 불법성의 기준으로 폭력혁명, 무장봉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선거와 의회제에 대한 반대 등이 제시되는 것으로 볼 때,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명한 자기 정치로 내세우는 정당이 합법적인 등록 정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 확실하다. 이른바 선진적인 민주국가라고 하는 곳에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체제 자체에 대한 선동을 불법화하고 있는 곳이 많다.


    그렇다면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면 과연 그것을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가? 19세기 노동자들의 정당 운동은 정당운동이 선거 활동을 중심으로 놓는 제도 정당으로 고착화되기 전 노동자들 자신의 대중운동의 산물이었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당 역시 계급의 위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지도”를 내리는 위압적인 당이나 소수의 선전집단이 아니라 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일부를 담지 하는 대중운동의 구현체로서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의 일부로서 계급과 조곤조곤 대화하며 생활공간에서 일상적인 실천에 기초한 투쟁 정당인 동시에, 정치적으로 명확하면서도 혁명을 실제로 준비하는 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레닌은 사회주의 정당이 봉기의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여전히 타당한 개념으로 보인다. 생활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호흡을 함께 하는 당이면서 구체적인 정세에 따라 일반적 방향을 선동하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봉기의 실천적 준비를 조직하는 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당은 언제든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탄압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사회주의 그룹들에서 비합법성이 희화화되거나 조롱받고 있는 분위기는 오히려 사회주의자들의 실천적 무력함을 반영하고 있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국가의 탄압에 자신의 보호하고 공세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활동기풍을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이런 정당을 지향함에 있어 과거 볼셰비키의 것이라고 오인 되어 온 폐쇄적인 전위정당의 복원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의식적인 새로운 조직형태와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대중성을 지향하되 조직의 자격에 어느 정도 제한이 있는 조직이 폐쇄적인 서클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개방적적이고 철저히 민주적인 문화가 필요하다. 참관이나 외부의 의견 개진이 반영되는 구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며, 조직 구성원 뿐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외부로부터의 의사가 반영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이상적인 조직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이는 토론과 실천, 조직문화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직 내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나이, 학연, 지연, 활동 연차에 의한 위계 구조를 깨고, 내부 토론을 가로막는 폭력적 언사나 행동을 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 누구나 과도하게 헌신하지 않고 개인적 삶의 자기결정권을 가지면서도 부르주아적인 공사 분리 원리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문화를 만들 때,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비로소 새로운 세대의 운동,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와 교감하고 그들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이태영|사회주의노동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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