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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 룩셈부르크 - 유니우스 팸플릿] 제4장 전쟁의 뿌리: 제국주의 이해관계의 대립
  • 조회 수: 4233, 2017-06-23 13:59:48(2017-06-10)
  • 제4장 전쟁의 뿌리: 제국주의 이해관계의 대립



    독일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활동 마당은 터키였다. 그 페이스메이커는 도이취방크i와 이 은행이 아시아에서 벌이는 막대한 사업들이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독일 동방정책의 핵심을 이루었다. 1850년과 1860년 터키의 아시아부분에서는 주로 영국 자본이 활동했다. 이 자본은 스미르나ii부터 철로를 건설하고 아나톨리아 철도의 첫번째 구간을 이스미트iii까지 임차했었다. 1888년 독일 자본이 그 계획에 뛰어들어, 영국인들이 이미 건설한 구간의 경영권을 술탄 압뒬하미드로부터 얻어냈다. 그리고 이스미트에서 앙고라iv까지의 새로운 구간의 건설권도 따냈다. 이 새로운 구간에서는 스쿠타리v, 브루싸vi, 코니아vii 그리고 카이자릴방향으로 이중노선이 놓이게 되어 있었다. 1899년 도이취방크는 하이다르 파샤viii에 있는 한 항구와 그 시설들의 건설 및 경영 인가를 그리고 그 항구에서의 통상과 관세부문에 대한 독점지배권을 얻었다. 1901년 터키정부는 페르시아만까지의 거대한 바그다드철도ix의 건설을, 1907년에는 카라비란호수의 간척과 코니아평야의 관개를 도이취방크에 인가해 주었다.


    이러한 거대한 ‘평화적인 문화 사업들’의 이면에는 소아시아 농민층의 ‘평화적이고’ 거대한 몰락이 있었다. 엄청난 사업들의 비용은 당연히 널리 가지를 친 공채 시스템을 통해 도이취방크가 미리 지불했다. 터키국가는 이전에 영국자본, 프랑스자본 그리고 오스트리아자본의 경우에 그랬듯이, 영원히 지멘스x, 그비너xi, 헬페리히xii등과 같은 주인들의 채무자가 되었다. 이 채무자는 그 때부터 채무의 이자를 갚기 위해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거대한 총액을 뽑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건설된 철로의 총이익도 보장해야 했다. 가장 현대적인 교통수단과 시설들이 여기서 전적으로 후진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자연경제적인 상태들에, 원시적인 농업경제에 강요되었다. 동양의 전제정치로 이미 수 백 년 동안 무자비하게 착취당해서, 국세를 제하고 나면 농민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것이라고는 거의 없도록 생산하는 이러한 농업 경제의 메마른 대지로부터는 철도를 위해 필요한 거래와 이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상품거래와 여객운수는 그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에 걸맞게 그 발전 정도가 낮았고 아주 느리게 증가했다. 요구되는 자본주의적 이윤의 형성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이제 이른바 ‘킬로미터 개런티’xiii라는 형태로 터키정부가 철도회사를 매년 지원했다. 터키의 유럽부분에서 오스트리아자본과 프랑스자본이 바로 그 방식으로 철로를 건설했는데, 터커의 아시아부분에서는 도이취방크가 그 시스템을 사업들에 이용했다. 보조금 지불을 담보하고 보장하기 위해 터키정부는 유럽자본의 대리자, 즉 이른바 공채행정위원회에 터기 국가수입의 주요 원천인 십일조를 일련의 지방들로부터 송금했다. 1893년부터 1910년까지 터키정부는 예를 들어 앙고라까지의 철도구간에 대해 또 에스키-쉐히르-코니아xiv구간에 대해 그런 식으로 약 9천만 프랑스 프랑을 ‘보조’했다. 터키국가가 유럽의 채권자들에게 늘 다시 저당잡힌 ‘십일조’는 곡물, 양, 비단 등 아주 옛적부터 이뤄져온 농업 공물들이었다. 그러한 십일조는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세금임차인들에 의해, 대혁명 이전 프랑스의 그 악명높은 징세관의 방식으로 걷혀졌다. 이때 국가가 각 빌라엣츠(지방)의 세금수익을 사전에 개별적으로 경매를 통해, 즉 최고 값을 부르는 이들에게 현금지불을 전제로 팔았다. 한 빌라엣츠의 십일조가 한 투기꾼이나 신디케이트에 의해 낙찰되면, 이 낙찰자는 다시 그 빌라엣츠를 분할해서 개별 산트샥스(군)의 십일조를 다른 투기꾼들에게, 그리고 이들은 다시 그들의 몫을 분할해서 다른 더 작은 중개업자들에게 양도했다. 누구나 자신의 부담금을 충당하고 가능한 한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하기에, 그 십일조는 농부들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임차인이 잘못 계산했다면, 그는 농부를 희생해서 배상할 궁리를 했다. 농부는 거의 항상 빚을 진 채 자신의 수확물을 팔 수 있을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추수를 해도 탈곡을 못한 채 십일조임차인이 제몫을 챙겨갈 적절한 시기를 정할 때까지 종종 몇 주씩 기다려야만 했다. 보통의 경우 그 임차인은 동시에 곡물거래상이기도 하기에, 최저가로 그 수확물을 쥐어짜내기 위해서, 수확물이 모두 들판에서 썩을 위기에 처한 농부들의 이러한 절박한 사정을 이용했다. 그는 불평하는 농부들의 불만에 대해 관리들 특히 묵타스(지역장)의 도움을 확보할 줄도 알았다. 임차인을 찾기 힘든 경우에 정부는 그 십일조를 정부가 현물로 걷어서 창고에 옮긴 뒤 빚진 ‘보조금’으로 자본가들에게 보냈다. 이것이 유럽자본의 문화활동을 통한 ‘터키의 경제적인’ 재생의 내부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이중의 결과가 성취되었다. 소아시아의 농업이 유럽자본, 이경우에는 특히 독일의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이득을 위해 잘 조직화된 착취과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이해관계의 영역들’이 터키에 성장했다. 이것은 다시 터키를 정치적으로 ‘보호’할 토대이자 계기를 제공했다. 동시에, 농부층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데 필요한 착취기구, 즉 터키정부는 독일외교정책의 순종적인 도구이자 노예가 되었다. 이전부터 이미 터키의 재정, 관세정책, 세금정책, 국가지출은 유럽의 통제 아래 있었다. 독일의 영향력은 특히 군사조직에서 강력해졌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독일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려면 터키의 국가권력을 강화해야 했고, 그래서 이 권력의 때 이른 붕괴가 방지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터키가 급속히 해체된다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그리스 사이에서 분할될 것이고 그러면 독일자본의 원대한 활동의 유일한 토대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그와 함께 지중해 국가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영국의 세력이 놀랍게 커질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제국주의는 터키가 독일자본에 의해 안으로부터 갉아먹혀 결국 독일의 품안에 익은 과일로서 떨어질 때까지 ‘독립 터키국가’라는 편리한 기구를, 터키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전에 이집트에서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최근에 모로코에서 프랑스인들이 그랬듯이. 예를 들어 제국주의의 유명한 대변인 파울 로어바흐는 공공연하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터키가 사방에 탐욕적인 이웃들로 둘러싸인 채, 동양에서 되도록 어떤 영토적인 이해관계도 갖지 않는 세력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독일이다. 우리는 한편 터키가 사라지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러시아와 영국이 터키의 주요 상속자들이라면, 그렇게 해서 이 두 국가들의 세력이 상당히 강화될 것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상당한 부분이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터키가 분할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에게 끝없는 어려움을 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와는 달리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현재 터키 소유지의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로로든 해로로든 또는 양쪽 모두로든 그들의 몫을 점령하고 방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달리 동양과 어떤 식으로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독일의 소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는, 먼저 적어도 러시아와 그와 더불어 프랑스가 현재 정치적인 목표와 이상을 포기하도록 강제된 경우에만, 즉, 먼저 세계대전의 결과가 결정적으로 독일의 이해관계에 유리하게 결정될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독일정치』, [드레스덴 1914.] 36/37쪽) [강조-R.L.]


    독일은 1898년 11월 8일 다마스쿠스의 큰 살라딘나무 그늘 아래에서 마호메트의 세계와 그 예언자의 녹색기를 보호하고 감싸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다.xv 그래서 독일은 10년 동안 피의 술탄 압뒬하미드의 군대를 열심히 강화했고, 짧은 기간의 소원한 휴식기를 거친 뒤 청년터키xvi 체제에서도 활동을 계속했다. 그 사명은 도이취방크의 수익성 있는 사업들 이외에 주로 골츠-파샤를 수뇌로 한 독일 교관들이 터키 군국주의를 재편하고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군대의 이러한 근대화로 인해 당연히 새로운 억압적 부담이 터키농민들의 등을 더 휘게 만들었지만, 크룹xvii과 도이취방크에게는 새로운 멋진 사업기회가 열렸다. 동시에 터키군국주의는 프로이센-독일 군국주의의 부속물이 되었고, 지중해와 소아시아에서 독일정책의 중점지역이 되었다.


    독일이 진행한 터키의 ‘재생’이 시체에 시행된 이른바 인위적인 전기충격요법 시도라는 점은 터키혁명의 운명이 가장 잘 보여준다. 그 첫째 단계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청년터키 운동에서 압도적이었다. 그 혁명은 생명을 기약하는 진실한 봄에 대해 그리고 터키의 내부적 쇄신에 대해 비상하는 계획들과 자기환상을 품고 있었다. 바로 그 첫번째 단계에는 청년터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눈에 자유주의적 근대국가로 보였던 영국을 향해 정치적으로 결연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반면에 낡은 술탄의 신성한 체제의 오랜 공식적 보호자 독일은 적대자로서 등장했다. 1908년 혁명은 독일동방정책의 파산처럼 보였고 전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었다. 압뒬하미드의 폐위는 독일 영향력의 폐위처럼 보였다. 그런데 청년터키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할 수록, 어떤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민족적인 거창한 현대적 개혁을 하기에도 전적으로 무능함을 내보일 수록, 그들의 반동적인 마각이 드러나면 날 수록, 그들은 필연적으로 압뒬하미드의 낡은 지배방식으로, 즉 그 나라를 떠받치는 두개의 주춧돌들로 회귀했다. 그 주춧돌 중 하나는 연이어 서로 사주당한 피정복민족들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조직화된 학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나라 농민층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근동적인 수탈이었다. 이로써 다시 그 폭력체제의 인위적인 유지는 ‘청년터키’에게도 주요한 근심거리가 되었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재빨리 압뒬하미드의 전통들로, 즉 독일과의 제휴로 회귀했다.


    터키 국가 내부에는 아르메니아, 쿠르드, 시리아, 아랍, 그리스(얼마 직전까지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등의 여러 민족문제들이 폭발적으로 존재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제국 내 여러지역들에서는 다양한 경제-사회문제들이 있었다. 이웃 신생 발칸국가들에 유포되는 강력하고 생명력있는 자본주의도 문제였고, 특히 국제자본과 국제외교에 의해 오랫동안 해체당해 온 터키경제도 문제였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볼 때 터키국가의 진정한 재생은 전혀 가망 없는 시작이며, 썩고 무너진 파편더미를 결합시키려는 그 모든 시도는 반동적인 계획으로 나아갈 것임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이미 1896년의 크레타대봉기xviii 를 계기로 독일 사회민주당 언론에서는 동양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찰이 이뤄졌고 그 결과, 크림전쟁xix시대로부터 유래하고 한 때 마르크스가 옹호했던 입장이 수정되었다. 그리고 유럽 반동의 유산의 하나인 ‘터키 통합성’이 결정적으로 폐기되었다. 청년터키 체제의 내적 사회적 불모성과 그 반혁명적 성격은 그 어디에서보다도 독일 사회민주당 언론이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했다. 터키국가처럼 그렇게 썩은 병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지 신속한 동원을 위한 전략적 철도와 단호한 군사교관들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은 참으로 프로이센적인 발상이었다. 1*


    이미 1912년 여름에 청년터키 체제는 반혁명세력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 전쟁에서 터키를 ‘재생’시키려는 최초 행동은 특징적이게도 쿠테타, 헌법의 폐기였다. 말하자면 이 측면으로도 압뒬하미드 체제로의 공식적인 복귀였다.


    독일측이 훈련시킨 터키군국주의는 제 1차 발칸전쟁xx에서 이미 비참하게 파산했다. 그리고 지금의 전쟁, 터키가 독일의 ‘심복’으로서 그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간 이 전쟁은 터키제국을 계속적으로 아니 심지어 결정적으로 해체시킬 것이다.


    독일제국의의 입지로 인해, 그리고 그 핵심에 놓인 도이취방크의 이해관계로 인해 독일제국은 동양에서 모든 다른 나라들과, 특히 영국과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은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경쟁적 사업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기름진 자본이윤을 경쟁자 독일에게 내줘야 했고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의 영향 아래 이뤄진 전략적인 철도건설과 터키군국주의의 강화가 영국에게 있어 세계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지점인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와 인도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집트가 놓이게 되는 교차지점인 바로 이곳에서.


    로어바흐가『바그다드철도』에서 쓴 것에 따르면, “영국은 유럽으로부터는 육로로 단지 한 지점, 즉 이집트를 통한 공격으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집트와 더불어 영국은 수에즈운하에 대한 지배권 그리고 인도와 동아시아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아마도 중앙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있는 그의 점령지들을 잃게 될 것이다. 터키와 같은 회교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한다면 또한, 인도에 있는 영국의 6천만 회교도 백성들에게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에게 위험한 반작용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터키는 첫째,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증축된 철도체계를 가지고, 둘째, 아나톨리아 철도를 연장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며, 셋째, 그 군대를 증대 및 개선하고, 마지막으로 그 전반적인 경제상태와 재정이 진전된다는 그런 전제들 아래에서만 이집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xxi


    또한 세계대전의 시작 즈음에 출간된 그의 책,『전쟁과 독일정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그다드철도는 처음부터, 콘스탄티노플 및 터키제국의 소아시아 내 군사적 요충지들을 시리아와 그리고 유프라티스 및 티그리스지역의 지방들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목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철도가 부분적으로는 계획된 상태이고 부분적으로는 공사 중에 있거나 이미 완성된 시리아와 아라비아 내의 철도노선들과 결합되어 터키군대를 이집트 쪽으로 이동시킬 가능성을 보장할 것임은 예견될 수 있었다.… 독일-터키동맹을 전제하여 그리고, 그 동맹에 비해서 실현하기에 어느 정도 더 간단한 기타의 조건들을 전제로 할 때 바그다드철도는 독일에게 있어서 일종의 정치적인 생명보험을 의미함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xxii


    그렇게 공공연하게 독일제국주의의 반공식적인 옹호자는 동양에서의 계획들과 의도들을 말했다. 여기서 독일정치는 확고하고 원대한 윤곽을 드러냈다. 즉 지금까지의 세계정치의 균형에 대해 극도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경향과 영국에 대한 공격성을 뚜렷히 드러낸 것이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그렇게 1899년 개시된 해군정책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 것이었다.


    동시에 독일은 터키 통합성 유지 강령으로 인해, 그 국가들의 역사적 성립 및 내적 도약이 터키의 유럽부분의 해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발칸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은, 제국주의적 탐욕이 우선적으로 터키의 소유지들로 향해 있던 이탈리아와 적대관계에 빠졌다. 1906년 알제시라스에서 개최된 모로코회의xxiii에서 이탈리아도 이미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6년 뒤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합병에 연이어 일어나 제 1차 발칸전쟁에 발단을 제공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원정xxiv은 이미 이탈리아의 도전이었다. 여기에서도 3국동맹의 파괴와 독일의 고립을 의미했다.


    독일의 팽창노력의 두번째 방향은 모로코사건을 통해 서쪽에서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다른 그 어느 지역보다도 더 과격하게 비스마르크의 정책으로부터의 방향전환이 표현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비스마르크는 내륙에서의 쟁점, 즉 알자스-로렌으로부터 프랑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노력을 이롭게 했었다. 독일의 새로운 노선은 그와 달리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모로코에서의 체스판은 이제 터키의 아시아부분에서의 그것과는 특히 다르게 짜여졌다. 독일자본의 정당한 이해관계라고는 모로코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로코위기 동안 비상책으로 독일제국주의자들은, 모로코의 술탄에게 돈을 꾸어주고 대신 광산채굴 허가를 받은 렘사이드의 자본회사 마네스만xxv의 요구들을 마치 세력 확대를 위한 ‘조국의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인 것 처럼 과장했다. 그런데 모로코에서 경쟁하는 두 자본그룹들, 즉 마네스만그룹과 크룹-슈나이더xxvi사는 모두 독일, 프랑스 및 스페인기업가들의 국제적인 혼합체라는 공공연한 사실로 볼 때, 진지하고 성공적으로 ‘독일의 이해영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독일제국이 모로코문제의 결정에 공동 영향권을 주장하며 그리고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대해 항의하며 보여준 그 결연함이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첫번째 세계정치적인 충돌이었다. 1895년에만 해도 아직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와 함께, 일본이 중국에 대해 거둔 승리를 제맘대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시모노세키에서 방해하기 위해 승리한 일본의 품에 안겼었다. 이제, 모로코에서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 독일 정책의 극히 새로운 지향이 드러나게 되었다. 7년 동안 지속되면서 2번씩이나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위기로 아슬아슬하게 치달았던 모로코위기에서는 더 이상 ‘복수’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 두 국가들 사이의 그 어떤 대륙적인 적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는 독일제국주의가 프랑스제국주의의 영역을 침해함으로써 초래된 완전히 새로운 적대관계가 드러났다. 그 위기의 결과 독일은 프랑스의 콩고지역을 얻음으로써 만족했고, 그럼으로써 모로코에는 방어해야할 자체의 어떤 이해관계도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모로코사건에서 독일의 돌격은 계속적인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다. 장악목표와 요구가 불확실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독일의 모로코정책 전체는 무제한의 식욕을, 사냥감에 대한 염탐과 탐색을 나타냈다. 그것은 프랑스에 대해 완전히 총체적으로 이뤄진 제국주의적 선전포고였다. 이 두 나라들의 대조는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쪽은 느린 산업발전, 침체하는 인구, 간신히 결합된 채 있는 거대한 식민제국을 거느리고 주로 외부로의 재정사업을 하는 정년퇴직자들의 국가이고, 다른 한쪽은 자본주의의 제 1위의 자리를 노리며 식민지 사냥을 위해 세상으로 이제 막 나선 막강하고 젊은 국가였다. 영국의 식민지를 정복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굶주린 독일제국주의는 터키의 아시아부분을 제외하면 우선적으로 프랑스의 유산들을 겨냥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유산은 또한 만일의 경우, 발칸에서 오스트리아의 팽창욕구에 대해 프랑스를 댓가로 이탈리아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그래서 공동사업을 통해 이탈리아를 3국동맹에 묶어두기에 편리한 미끼를 제공했다. 만약 독일이 모로코의 어느 한 지역에 자리잡고 무기를 공급한다면, 그 국민들이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살고 있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제국 전체를 정복자 프랑스에 대항하도록 사방에서 불지르는 것을 독일이 계속 좌지우지 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걱정을 놓고 보면 모로코에 대해 독일이 제기한 요구가 프랑스제국주의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음은 자명했다. 독일이 결국 그 요구를 포기하고 만족함으로써 즉각적인 위험은 해결된 셈이었지만 프랑스의 전반적 불안과 일단 형성된 세계정치적 적대관계는 계속 존재했다.2*


    하지만 모로코정책을 통해 독일은 프랑스와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영국과 다시 적대관계에 빠졌다. 이곳 모로코에, 즉 대영제국의 세계정치적 대로들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교차점이 있는 지브랄타에 매우 가까운 이곳에 독일제국주의가 갑자기 나타나 그 권리를 주장하며 단호하고 강력하게 행동하는 것을 영국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시위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도 독일의 첫번째 항의는 모로코와 이집트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1904년 만들어진 합의xxvii를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독일의 요구는 모로코문제의 결정에서 영국을 제외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지향했다. 이러한 입장이 독일-영국관계에 미치게 될 불가피한 영향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형성된 상황은 1911년 11월 8일자 『프랑크푸르트신문』의 영국통신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결국, 콩고의 1백만명의 검둥이들, 대단한 회한, 그리고 ‘음흉한 영국인들’에 대한 강한 분노로 종합된다. 그러한 회한을 독일인들은 극복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지금 이대로는 절대로 지속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확율을 계산해 보면, 악화되거나, 즉 전쟁을 초래하든가 아니면 곧 개선되어야만 할 것이다. … 전함 ‘판터’호의 출항은 『프랑크푸르트신문』의 베를린통신문이 최근 정확하게 표현했듯이, 독일도 이제 여기에 있다는 것을 프랑스에게 알리려는 일종의 옆구리 찌르기였다.… 이러한 돌출 행동이 여기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는 베를린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나 분명할 것이다. 적어도 이곳 신문사통신원이라면 그 누구도 영국이 정력적으로 프랑스 측으로 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떻게『북독일 일반신문』에서는 여전히, 독일은 ‘프랑스 하나와’ 담판하면 된다는 논조를 유지할 수 있는지! 지난 몇 백 년 이래 유럽에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들의 분규가 끊임없이 증가되어 왔다. 하나가 학대당하면, 그것이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정치의 자연법칙에 따라 다른 이들을 부분적으로는 기쁘게 또 부분적으로는 근심하게 만든다. 2년전에 오스트리아인들이 러시아와 보스니아협상을 했을 때, 나중에 들리는 바에 따르면 비엔나에서는 혼자서 대적하면 더 좋았겠는데도, 독일이 ‘군사적으로 참견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이제 겨우 결연히 반독일적인 기운의 시기를 극복한 상태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베를린에서는 이 영국인들이 프랑스와 우리의 협상들이 전혀 그들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설득되리라 생각하는지 이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세력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직은 아무리 우애적으로 보일지라도 옆구리 찌르기는 구체적 행동이고 그에 뒤이어 어떻게 곧 이빨에 주먹이 날아올지 아무도 예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래 상황은 덜 심각해졌다. 로이드 조오지가 말한 그 순간에는, 우리가 매우 정확한 정보를 통해 알고 있듯이, 독일과 영국 사이에 전쟁의 시급한 위험이 존재했다.… 에드워드 그레이경과 그의 대변자들이 오랜동안 주시해온 그리고 그 정당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을 이러한 정책 이후에 모로코문제에 있어 그들로부터 다른 태도를 기대할 수 있을까? 베를린에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베를린의 정책은 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근동에서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서 제국주의정책은 프랑스와 뿐만 아니라 영국과 독일 사이에 날카로운 적대관계를 형성했다. 그런데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여기에는 충돌의 뿌리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전쟁의 첫 몇 주 동안 독일여론을 사로잡았던 박해 분위기 속에서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었다. 벨기에 여자들이 독일 부상병들의 눈을 찌른다고, 코사크인들이 스테아린초를 먹어치우고 갓난아이의 팔다리를 잡고 갈기갈기 찢는다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은 러시아의 전쟁목적이 독일제국을 합병하고 독일문화를 말살하여 바르테강에서 라인강까지, 키일에서 뮌헨까지 독일 전역에 전제정치를 도입하려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회민주주의적인의 캠니츠의『민중의 소리』는 8월 2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이순간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압제에 대항해 투쟁할 책무를 느낀다. 독일 여자들과 아이들이 러시아의 잔악함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독일국가가 코사크인의 사냥감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3국협상xxviii이 승리하면 영국 지사나 프랑스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가 독일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순간,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적에 대항해, 독일의 문화와 자유의 모든 것을 지킨다.”


    같은 날『프랑크일보』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모든 국경지역을 이미 장악한 코사크인들이 우리나라로 몰려와서 우리의 도시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화선언이 공표된 그날에 조차 그의 평화사랑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믿지 않았던, 러시아 민중들의 최대의 적인 러시아의 차르가 독일민족에게 명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쾨니히스베르크민중신문』은 8월 3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군역의 의무가 있든 없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점은, 전쟁이 치뤄지는 동안 저 비열한 차르 무리가 우리의 국경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승리한다면 수천의 우리 동지들이 러시아의 잔혹한 감옥으로 유배될 것이다. 러시아의 지배하에서는 민족자결권이란 흔적조차 없으며, 어떤 사회민주주의적 언론도 그곳에는 허락되어 있지 않고, 사회민주주의적 협회나 회합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들 중 누구도 러시아의 승패가 지금 중요한 문제가 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전쟁 반대 입장을 유지하면서, 러시아에 군림하는 저 철면피들의 전율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데 협력하길 원한다.”


    독일문화의 러시아 차리즘에 대한 관계, 즉 이 전쟁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에 있어서 그 자체로 한 장을 표현하는 그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독일제국에 대한 차르의 합병야욕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마치 러시아가 유럽이나 달나라를 합병하려 애쓴다고 추측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다. 현재의 전쟁에서 오직 두 나라, 즉 벨기에와 세르비아에게만 그 존립이 문제가 된다. 독일의 존립이 걸린 문제라는 외침 아래 독일의 대포들이 이 두 나라들을 향해서 조준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신제물의 열렬신자들과는 어떤 토론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민본능 또는, 서민을 노려서 민족주의적인 선동언론들이 마련한 대단한 구호들이 아니라 정치적인 견지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러시아의 차리즘이 달나라를 합병할 생각을 하지 않듯이 독일합병이라는 목표도 추구하지 않음은 틀림없이 분명할 것이다. 러시아 정치의 정점에는 노회한 불한당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미치광이들은 아니다. 절대주의의 정책은 그 모든 고유한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책도 사물들이 서로 심하게 충돌하는 실제적인 가능성들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독일동지들의 염려스런 체포와 시베리아로의 무기한의 유배 그리고 러시아 절대주의의 독일제국으로의 도입과 관련하여, 잔혹한 차르의 정치가들은 모든 정신적인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당의 편집자들 보다는 더 나은 역사적 유물론자들이다. 왜냐하면 그 정치가들은 어떤 정치적인 국가형태를 어디에든 마음대로 ‘도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형태는 특정한 경제적-사회적 기초에 상응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러시아 자체에서 조차도 그들의 지배관계들이 거의 낡았음을 스스로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결국 그들은 각 나라에서 지배적인 반동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들만을 필요로 하고 견뎌낼 수 있음을 그리고 독일의 계급관계와 당관계에 알맞는 절대주의의 변종이 호엔쫄러의 경찰국가이고 프로이센의 3등급선거권xxix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냉철하게 살펴보면, 러시아의 차리즘이 진지하게 독일문화의 이러한 산물들을 털어버리지나 않을까 조바심할 근거라곤 전혀 없었다. 심지어 러시아가 완전히 승리한다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경우에 마저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는 전혀 다른 대립관계가 걸러 있었다. 이 두 나라 사이에는 공통적인 경향과 내적 연결관계로 인해 백 여년이나 전통적인 친교가 지속되어 왔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러한 친교가 받치고 있는 내부정치 부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정치의 연대와는 상반되게 그리고 그러한 연대에도 불구하고 외부정치의 영역에서, 세계정치적 사냥터에서 충돌했다.


    러시아에서 제국주의는 서구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종류의 요소들로 직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직조물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실은 독일이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축적에 굶주린 자본의 경제적 팽창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였다. 러시아의 산업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전형적이듯, 내수시장의 미완성으로 인해 이미 오래 전부터 동양으로, 즉 중국,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로 수출로를 찾아야 했다. 차르정부는 이러한 수출을 자신의 “이해관계 영역”에 대한 바람직한 토대로 여기고 모든 수단을 다해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국가정책은 여기서 추동되는 부분이 아니라 추동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차리즘의 정복 경향 속에서 이 거대 제국의 전통적인 팽창이 드러난다. 현재 1억 7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이 제국은 전략적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들로 인해, 열린 세계대양으로, 즉 동으로는 태평양, 남으로는 지중해로의 진입로를 얻으려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의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가 여기서 동시에 문제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외국에서 재정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정치 마당에서 강대국들의 전반적 경쟁 속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유지할 필요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차관 없이 차리즘은 절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모든 군주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조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정부형태가 대다수의 국민들에 대해 점점 더 살벌하게 대립함에 따라, 내부적 곤란들로부터 국민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과 외형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정치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종의 가정상비약처럼 지속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적인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들만도 차르제국의 제국주의의 한 요소로서 점점 주의 깊은 고려의 대상이 된다. 절대주의체제 아래에서는 당연히 완전하게 발전할 수 없고 대략적으로 원시적 약탈체제의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젊은 러시아 자본주의는 그래도 그 거대제국의 무수한 천연자원들에서 자기 앞에 놓인 거창한 미래를 본다. 절대주의가 제거되자마자 러시아는, 계급투쟁의 국제적인 상황이 아직도 이 시한을 보장한다는 전제 하에, 급속히 제 1위의 근대적 자본주의국가로 발전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인식과 말하자면 앞당겨진 축적탐욕으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매우 뚜렷한 제국주의 열망에 가득 차서 세계분할에서 열심히 요구를 제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열망은 동시에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현재의 매우 강렬한 이해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첫째, 군수산업과 그 납품자들의 구체적인 이해관계들인데, 러시아에서도 카르텔화된 중공업이 큰 역할을 한다. 두번째, ‘내부의 적’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대립관계가 그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군국주의와 그 세계정치적 복음이 갖는 주의분산 작용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그래서 그 반혁명적 체제 아래에 결집했다. 러시아에서 부르주아권의 제국주의, 특히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권의 제국주의가 혁명의 뇌우 기운 속에서 현저하게 성장했고, 이러한 근대적 세례를 통해 차르제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에 일종의 근대적 인상을 부여했다.


    이제 차리즘의 전통적 정책 뿐만 아니라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근대적 탐욕의 주요 목표는,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흑해 연안의 러시아 소유지들로 향한 열쇠에 해당한다는 다르다넬스해협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러시아는 18세기 이후 일련의 유혈전쟁을 터키와 치뤘다. 발칸에서는 해방자의 사명을 떠안았다. 그러면서 이스마일xxx에서, 나바린xxxi에서, 시노페xxxii와 실리스트리아xxxiii와 세바스토폴xxxiv에서, 플레브나xxxv와 쉬프카xxxvi에서 거대한 시체언덕을 쌓았다. 슬라브의 형제들과 기독교도들을 터키의 공포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은, 지금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러시아의 공포에 대항해 독일문화와 자유를 지킨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농부들에게는 흡인력있는 전쟁전설로 기능했다.


    그러나 러시아 부르주아지도 만주와 몽고에서의 문화적 사명보다는 지중해로의 전망에 훨씬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특히 무의미한 모험이라며 날카롭게 비난했다. 이는 그 전쟁이 러시아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발칸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켰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패배한 전쟁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동일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서, 티벳까지 그리고 페르시아쪽으로까지 뻗어나간 러시아세력의 확장은 영국제국주의의 경각심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거대한 인도제국에 대해 염려하면서 영국은 러시아제국의 이러한 아시아진출의 추이를 점점 더 의심스런 눈초리로 주시했다. 사실 아시아에서 러시아-영국의 대립관계는, 오늘날의 이 전쟁 이후 장래 제국주의 발전의 촛점이 될 것이 아주 확실하듯이 20세기 초 국제상황의 가장 강력한 세계정치적 대립관계였다. 1904년 러시아의 떠들썩한 패배와 혁명xxxvii의 발발은 상황을 변화시켰다. 차르제국이 현저하게 약화됨에 따라 영국과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심지어 1907년에 두 나라는 페르시아를 공동으로 먹어치는 것xxxviii과 중앙아시아에서의 친선관계에 관한 조약xxxix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쪽에서 러시아의 중대한 활로가 차단되자 그 에너지는 그만큼 더 강렬하게 오랜 목표, 즉 발칸정책으로 이동했다. 이제 바로 여기에서, 차르의 러시아는 지난 백년 동안 독일문화와 소중한 우정을 잘 다져온 이래 처음으로 독일과의 고통스런 대립관계에 빠져 있었다. 다르다넬즈해협으로의 길은 터키의 시체 위로 지나가는데, 독일은 지난 10여년간 이 시체의 ‘통합성’을 자신의 가장 귀중한 세계정치적 과제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발칸정책에서 방법의 변경이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러시아도 한 동안은 터키의 ‘통합성’ 강령을 대변하기도 했었다. 터키로부터 해방된 발칸 슬라브인들이 차르제국의 노예신세을 벗어나려 하는 ‘배은망덕’에 분노해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리한 시기가 될 때까지 분할이 미뤄져야 함을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고서. 하지만 지금은 터키의 종국적 해체가 러시아의 계획에 뿐만 아니라 영국의 정책에도 적절했다. 이때 영국은 인도와 이집트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그 중간에 놓인 터키지역들인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영국이 통치하는 거대한 회교제국으로 통합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동양에서 러시아 제국주의는 이전에 이미 영국 제국주의가 그랬듯이 터키 해체의 특혜받은 부당이득자로서, 터키의 보초역할을 떠맏아 보스포러스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독일 제국주의와 충돌하게 되었다.3*


    그러나 러시아의 발칸정책은 직접적으로 독일보다는 오스트리아와 더 충돌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주의는 독일 제국주의의 정치적 보완물로서, 샴쌍둥이 형제이자 불행이었다.


    자신의 세계정책 때문에 사방으로 고립된 독일은 오직 오스트리아에서만 동맹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1879년 비스마르크 당시에 이뤄져서 오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 성격은 완전히 변했다. 프랑스와의 대립관계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도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비스마르크는 1864~1870년 전쟁들xl로 생성된 소유물을 보호하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가 체결한 3국동맹은 철저히 보수적 성격을 띠었다. 오스트리아의 발칸편향은 비스마르크에게는 독일이 남아프리카를 얻으려하는 것만큼이나 못마땅했다. 그의 회고록,『상념과 회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나우분지의 주민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주국의 지금의 국경 너머로 확장해 나가기를 바라고 계획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독일 제국헌법은 오스트리아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물질적 이해관계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루마니아 민족의 동쪽 경계와 카타로만xli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웃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빌려주는 것은 독일제국의 임무가 아니다.”[강조- R.L.]


    그가 한 때, 보스니아는 단 한명의 포머른 척탄병이라도 희생할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로 매우 단호히 표현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든, 비스마르크가 그 3국동맹을 오스트리아의 팽창노력을 위해 내줄 생각은 사실상 하지 않았음은 1887년 러시아와 체결된 ‘상호보장조약’xlii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조약에 따르면 독일제국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시 후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우호적인’ 중립을 지켜야 했다.


    독일의 제국주의 전환정책이 완성된 이래,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일의 관계도 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독일과 발칸 사이에 놓여 있다. 즉, 독일 동방정책의 중심으로 향한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적대자로 삼는다는 것은 독일이 자신의 정책을 통해 초래한 전반적인 고립으로 볼 때, 모든 세계정치적 계획들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주국이 약화될 경우, 그리고 터키의 즉각적 해체와 그와 더불어 러시아와 발칸국가들과 영국의 엄청난 강화를 의미하게 되는, 그 군주국의 붕괴의 경우 독일제국의 국가적 통일과 강화는 실현될지 몰라도 제국주의정책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져버릴 것이다.4* 터키의 유지가 독일의 주요과제인 것 만큼 합스부르크군주국의 구제와 유지는 논리적으로 독일제국주의에게 부수적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발칸에서 항상적인 잠재적 전쟁상태를 의미했다. 터키의 해체라는 제어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옆에 발칸국가들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그 이후 이 합스부르크국가와 젊은 이웃나라들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독립적이고 생명력이 왕성한 민족국가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민족들의 파편들로 구성된 그리고 이러한 민족들을 독재적인 조항의 창칼로 다스릴 줄만 아는 이 군주국의 아주 가까이에 출현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흔들릴 대로 뒤흔들린 그 나라의 해체가 가속될 수 밖에 없음은 명백하다. 오스트리아 내부에 생명력이 없음은 바로 발칸정책에서, 특히 세르비아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났다. 오스트리아는 때로는 살로니키xliii로 때로는 듀라쪼xliv로 마구 덤벼들던 그 제국주의적 탐욕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를 합병할 수가 없었다. 아직 세르비아가 두 차례의 발칸전쟁을 통해 힘과 규모를 확대하기 이전에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세르비아를 합병했다면, 오스트리아는 자체의 잔인하고 우둔한 반동체제로는 거의 길들이기 불가능한 가장 저항적 남슬라브민족 하나를 위험스런 방식으로 오스트리아의 내부에 강화시켰을 터였다.5*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적이고 정상적 발전을 묵인하며 정상적 통상관계를 통해 세르비아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이는 합스부르크군주국이 부르주아국가의 정치조직이 아니라 사회적 기생충 몇몇 패거리들의 엉성한 신디케이트이기 때문이다. 이 패거리들은 그 군주국의 썩은 구조물이 아직 지탱하는 한 국가권력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풍족하게 강탈하길 원했다. 헝가리의 농업을 위해 그리고 농산물의 인위적 가격등귀라는 이득을 위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로부터의 가축과 과일 수입을 금지했다. 그렇게 해서 그 농업국에겐 생산물의 주요 판로가 두절되었다. 오스트리아 카르텔 산업의 이득을 위해서는 세르비아에게 오직 오스트리아로부터만 그것도 최고의 가격으로 공산품을 공급받도록 강요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경제정치적으로 계속 종속되어 있도록, 세르비아가 동쪽으로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어 흑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고, 서쪽으로 알바니아의 항구를 얻어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는 것도 방해했다. 오스트리아의 발칸정책은 한 마디로 세르비아의 목죄기를 지향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발칸국가들을 통틀어 그들 사이에 어떤 상호간의 친교나 내적 도약도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을 지향했다. 그 정책은 발칸국가들에게는 항구적인 위험을 의미했다. 하여간 오스트리아 제국주의는 한 때는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한 때는 산트샥 노비라자르xlv와 살로니키를 요구함으로써, 또 한 때는 알바니아해안을 요구함으로써 발칸국가들의 존립과 발전가능성을 위협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경향으로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쟁 결과로, 제 2차 발칸전쟁 이후 한 독일 제후의 휘하에 ‘독립 알바니아’라는 비웃음거리가 창립되었다. 이 나라는 그 첫 순간부터 제국주의 경쟁자들의 음모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렇게 지난 10년간 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정책은 발칸의 정상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에 족쇄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군주국이냐 발칸국가들의 자본주의적 발전이냐라는 불가피한 딜레마를 스스로 초래했다. 터키의 지배에서 해방된 발칸은 여전히 오스트리아라는 장해물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터키붕괴의 계속에 불과하고, 그 붕괴와 함께 역사 발전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딜레마에 대해 전쟁, 그것도 세계대전 이외의 어떤 해답도 없었다. 세르비아의 뒤에는, 동양에서 자신의 제국주의 강령 전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발칸에 대한 영향력과 ‘보호자’역할을 내줄 수가 없었던 러시아가 있었다. 러시아의 정책은 당연히 발칸국가들을 러시아의 보호령 아래 결합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대립되었다. 1912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터키의 유럽부분을 거의 완전히 없애버린 발칸연맹은 러시아의 작품이었고, 그 러시아의 의도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자신의 적으로 삼아야 했다. 곧이어 제 2차 발칸전쟁에서는 러시아의 그 모든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발칸연맹은 공중분해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가 숙적인 것인 만큼 러시아와의 동맹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독일은 합스부르크왕정의 운명과 함께 묶인 채, 그 왕정의 철저히 반동적인 발칸정책을 한발 한발 엄호하며 이제 러시아에 대해 이중으로 첨예한 대립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발칸정책은 게다가, 오스트리아와 터키 양쪽 모두의 해체에 많은 관심이 있던 이탈리아와의 대립을 초래했다. 이탈리아 제국주의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내 소유지 안에서 자신의 팽창욕구에 대해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대중적이기에 가장 편리한 구실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팽창욕구는 새로운 방침의 결정과 함께 발칸을, 특히 건너편 알바니아해안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트리폴리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던 3국동맹은 두 번의 발칸전쟁 이후 존재하는 긴급한 위기로 인해 완전히 빈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 중심세력 둘은 전 세계와 날카로운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 제국주의는 두개의 썩어가는 시체들에 결박된 채, 세계대전으로 향한 직항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운항은 철저히 의식적이었다. 특히 추동력으로서 오스트리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매우 맹목적으로 파멸로 치닫고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과 그 하수인 폰 클루미에츠키남작을 우두머리로 하여 오스트리아의 카톨릭-군국주의적 지배집단은 돌격을 위한 형식적 핑계를 찾기에 급급했다. 1909년는 필요한 전쟁열을 독일 내에서 부추기기 위해 특별히 프리드만교수가 그 유명한 문서를 작성하게 만들었다. 이 문서는 합스부르크군주국에 대한 세르비아의 전세계에 걸친 악독한 결사를 폭로했는데, 단지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는 작은 결점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몇 년 뒤, 오스트리아영사 프로하스카가 윜스퀴브에서 순교했다는 황당한 소식xlvi이 며칠 동안 울려 퍼졌다. 이 소식은 점화의 불씨처럼 화약통에 떨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프로하스카는 건강하고 명랑하게 휘파람을 불며 윜스퀴브를 산책하고 있었다. 결국,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격분스런 진짜 범죄,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터졌다. “어떤 유혈사태의 희생자가 해방적인, 구원적인 영향력을 가졌다면 이것이 바로 그러하다”라며 독일 제국주의의 옹호자들은 환호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주의는 더 크게 환호하며 대공의 죽음이 아직 생생한 동안에 결연히 이를 이용하려 했다.6* 베를린과 신속히 협의한 뒤 전쟁이 결정되었고 그 최후통첩이 자본주의 세계 전역을 불붙히게 될 성냥개비로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사라예보에서의 사건은 핑계만을 제공했다. 원인들, 대립들과 관련해서는 오래전 부터 전쟁을 위한 모든것이 성숙해 있었다. 우리가 오늘 접하는 상태는 이미 십년 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지난 시기의 매년은, 터키혁명, 보스니아합병, 모로코위기, 트리폴리원정 그리고 두 차례의 발칸전쟁과 같은 매번의 정치적 사건은 전쟁을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었다. 지난 시기의 모든 군사법안들은 이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불가피한 총정산을 위한 의식적 준비로서 입안되었다. 이 전쟁은 지난 여러 해 동안 다섯 차례나 간발의 차이로 발발할 뻔했다. 1905년 여름 처음으로 독일이 모로코 사안에 대해 결정적 형식으로 자신의 요구를 제기했을 때, 1908년 영국,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가 모로코문제로 레발에서 군주회동xlvii을 가진 뒤 터키에 최후통첩을 하자 독일이 터키 방어를 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려 했으나 갑자기 터키혁명이 일어나서 이 한번만은 전쟁을 방해했을 때7*, 1909년 초 러시아가 동원령으로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합병에 대응하고 이에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페테스부르크에 모든 형식으로 선언했을 때, 1911년 여름 독일이 모로코에서 자신의 몫을 포기하고 콩고로 만족하지 않았다면 기필코 전쟁을 초래했을 뻔 했던 전함 판터호의 아가디어 파견이 있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3년 초 러시아의 아르메니아로의 진군계획xlviii을 놓고, 독일이 전쟁태세가 되어있음을 두번째로 페테스부르크에서 모든 형식으로 선언했을 때가 그러했다.


    그런 식으로 오늘의 전쟁은 지난 8년간 계속 발발 직전에 있었다. 항상 다시 지연될 때 마다, 그것은 단지, 늘 관련국 중 하나의 전쟁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그 때문이었다. 특히, 1911년의 ‘판터’모험에서는 이미 지금의 이 전쟁이 성숙해 있었다. 암살된 대공부부 없이도, 뉘른부르크 상공의 프랑스 전투기 없이도 그리고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략 없이도. 독일은 자신에게 더 적당한 순간까지 그것을 그냥 지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과 같이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허심탄회한 서술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지금 이른바 범독일주의 측이 1911년 모로코위기 동안 독일정책의 약점을 비난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함 ‘판터’호를 아가디어로 보낼 당시 북동해운하xlix의 개조는 아직 진행중이었고 헬골란트l의 거대한 해군요새로의 확장은 완성되려면 한참이나 남았으며 우리 해군은 노급전함과 보조병기에 있어서 영국해군력에 비해서 그 3년 이후보다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운하와 헬골란트뿐만 아니라 해군력도 올해1914년에 비해서 부분적으로는 매우 뒤쳐져 있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전혀 전쟁에서 이용될 수 없었다. 나중에 훨씬 더 유리한 기회가 있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전쟁을 자극하길 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되었을 것이다.”8*[강조-R.L.] 먼저 독일 해군이 정리되고 그 중요한 군사법안들이 제국의회li에서 명확해져야 했다. 1914년 여름, 독일은 전쟁준비가 완료된 것으로 생각되었던 반면, 프랑스는 3년 복무제를 실험하고 러시아는 해군강령도 육군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그 상황을 정력적으로 활용할 때였다. 독일에서 제국주의의 가장 진지한 옹호자이자 독일 정책의 지도권과의 정확한 접촉에 있어서 거의 그들의 공식적인 입에 해당했던 바로 그 로어바흐는 1914년 7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에게,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있어서 이번에 주된 걱정거리는 러시아의 잠정적이고 표면상의 승복으로 인해서 우리가 러시아와 프랑스의 준비가 진정으로 완료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데 있다.”9* 다시 말해, 1914년 7월의 주된 걱정거리는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승복해서 독일정부의 ‘평화노력’이 성공을 거두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들이 전쟁을 하도록 강제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일은 성공했다. “매우 고통스럽게도 우리는 세계평화유지를 향한 우리의 부단한 노력이 실패하는 것을 보았다” 등등.


    독일 군대가 벨기에로 진군했을 때는, 독일제국의회가 전쟁의 이러한 완결된 사실과 점령상태를 마주했을 때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진행된 뒤였기에 그것은 전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아니였다. 새롭고 전대미문인 상황이 전혀 아니였다. 그 정치적 연관성들을 사회민주당 원내분파가 일종의 경악스런 것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을 그런 사건이 전혀 아니였다. 8월 4일 공식적으로 개시된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주의의 정치와 국제적인 제국주의 정치가 몇 십년에 걸쳐 부단하게 준비해온 바로 그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부단히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지난 10년간 거의 매년 예언해왔다. 사회민주당의 의원들과 신문들과 팜플렛들은 그것이 문화와도 민족의 이해관계와도 전혀 상관 없고 오히려 이 양자에 정반대하는 야비한 범죄에 다름 아니라고 수 천 번이나 낙인찍어 왔다.


    그리고 사실이 그러했다. 이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말하듯이 “독일의 생존과 자유스런 발전”도 아니고, 사회민주당의 언론이 쓰듯이 독일문화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터키의 아시아부분에서 도이취방크의 현재의 이윤이고, 모로코에서 마네스만과 크룹의 미래의 이윤이다. 그것은,『전진』이 1914년 7월 26일자에 썼듯이, 오스트리아, 즉 합스부르크군주국이라 자칭하는 이 “조직화된 부폐 더미” 의 존재와 반동이며, 헝가리산 돼지와 자두이고, 제 14조항, 어린이트럼펫과 프리드만-프로하스카문화이며, 소아시아에서 터키의 바쉬-보수크lii의 패권과 발칸에서의 반혁명의 유지이다.


    대부분의 우리 당 신문들은 독일의 적들이 ‘유색인들과 미개인들’, 즉 흑인들, 시크교도들, 마오리인들을 전쟁에 나서도록 선동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격분했다. 지금, 오늘의 이 전쟁에서 이러한 민족들은 유럽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들과 거의 동일한 역할을 행한다. 또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들 사람들이 영국왕을 위해 두개골이 으깨지도록 내달리고자 열망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의식함에 있어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와 같다. 이 분파는 합스부르크군주국과 터키와 도이취방크 돈궤의 유지를 독일민족의 존립, 자유 및 문화와 혼동했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에서 큰 차이 하나는 단지 마오리족들은 한 세대 이전만 해도 식인관행을 행했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있다.


    1*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앞으로 저자의 원주는 *표시를 덧붙힘, 단 (*)표시는 룩셈부르크의 원주 속의 내용에 대한 역자의 주를 나타냄): 제 1차 발칸전쟁 이후 1912년 12월 3일에 사회민주당 원내 대변인 다비트는 제국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했다.


    “어제 여기서, 독일의 동양정책은 터키의 붕괴에 대해 책임이 없다, 독일의 동양정책은 좋았다라고 언급되었소. 제국수상은 우리가 터키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으며 바서만은 우리때문에 터키가 합리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소. 후자에 대해는 나에게 전혀 알려진 바가 없고(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통쾌한 웃음), 좋은 일이라는 것의 뒤에 나는 물음표를 붙이고 싶소. 왜 터키는 붕괴했는가? 그곳에서 붕괴한 것, 그것은 우리의 엘베강 동쪽지역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그런 융커체제였소.(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참으로 옳소!’라는 외침. – 오른쪽에서는 웃음). 터키의 붕괴는 중국 만주의 융커체제의 붕괴(1*1)에 병행한 현상의 하나요. 그런 귀족체제들이 도처에서 점점 종국으로 치닫는 것 같소(사회민주주의자들의 외침, ‚바라건대!’): 그런 체제들은 현대의 요구들에 더이상 부응하지 않소.


    나는 터키의 관계들이 어느 정도 동엘베지역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했소. 터키인들은 지배하는 정복자카스트로서 단지 극소수에 불가하오. 그들 이외에, 회교를 받아들인 비터키인들이 있소. 그러나 원래의 토종터키인들은 극소수이며, 전사카스트로서, 프로이센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정과 외교와 군사등에서 모든 지도적인 지위들을 차지한 카스트요, 그 경제적 지위를, 바로 동엘베지역에서처럼 대토지에 기반한 그리고 그에 속한 농민들의 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그런 카스트요, 낯선 종족과 낯선 종교를 갖는 소작농들에 대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농민들에 대해, 동엘베지역에서 우리의 터키기병들처럼 똑같이 무자비한 지주정책으로 박해를 가했던 그 카스트요(유쾌한 웃음들). 터키에 자연경제가 존재하던 동안은, 그래도 괜찮았소.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지주가 그들의 소농들을 그렇게 족치지 않아서 그런 지주체제가 그런대로 견딜만 했으니까, 그는 먹고 살기에 좋으면 만족했으니까. 하지만 터키가 유럽과의 접촉을 통해 근대적인 화폐경제로 들어선 그 순간에, 터키귀족들이 그들의 농민들에 가한 압력은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되었소. 이러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생기고, 농민들 대부분은 거지가 되도록 억눌려졌소, 많은 수가 도적이 되었소. 이들이 바로 코미타치시(1*2)들이요!(오른편의 웃음). 터키의 귀족들은 외부적인 적에 대항해서 전쟁을 한 것만이 아니오, 아니오, 외부의 적에 대항한 전쟁중에, 터키에서는 농민반란이 생겨났소. 그것이 바로, 터키인들의 등뼈를 부쉰 것이요, 그것은 바로 그들 귀족체제의 붕괴였소!


    독일정부가 좋은 일을 했다고 이제 누군가 말한다면- 지금, 그들이 터키에게 또 청년터키 체제에게 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그일을 독일정부는 하지 않았소. 그것은 그들에게, 베를린의정서(1*3)에 따르면 터키의 의무인 그 개혁을 수행하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그랬듯이 그 농민들을 진정으로 해방하도록 충고했어야 했소. 그러나 어떻게 프로이센-독일외교가 그일을 할 수 있었겠소! …


    폰 마샬(1*4)씨가 베를린에서 받은 지령들은 어쨌듯, 청년터키주의자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소. 그것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나는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싶지 않소, 그것이 터키 장교들의 몸에 불어 넣은 특정한 정신, 즉 ‘엘레얀트 야더오피찌어(1*5)’의 정신(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유쾌한 웃음)이었소, 이 투쟁에서 터키군 사이에서 특히 퇴폐적으로 드러난 그 정신이었소. 에나멜가죽구두를 신은 장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들 하오. 무엇보다도, 민중들 위에, 장병 대중들 위에 군림하는 장교들의 월권, 이러한 상명하달이 터키군대에서 신뢰를 뿌리째 파괴했고, 그렇게 해서 이러한 정신이 그와 더불어 터키군대의 내부적인 해체를 초래하는데 기여했음은 자명하오.


    신사 여러분, 누가 터키의 붕괴에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래도 이견들을 갖고 있소. 특정한 프로이센의 정신의 도움만이 터키의 붕괴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물론 그렇지야 않지요, 그러나 그 정신은 붕괴 과정에 기여했고, 가속했소. 그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이미 설명한 것처럼, 경제적인 원인들이었소.“[제국의회의 심리들, 제 13임기, 제 1회기, 286권, 속기록, 2513/2514쪽.][강조-R.L.]


    (1*) 1911년 10월 우창봉기와 더불어 중국에서 부르주아혁명이 시작되었다. 봉기의 지도자들은 공화국선포를 결정하고, 봉기에 참여할 것을 중국 전역에 요구했다. 1911년 11월말까지 15지역(Provinzen)이 만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912년 1월 1일 중국공화국이 선포되고 손문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2) Komitatschi, 세르비아의 자원민병대, 제 2차 대전때는 tschetniks로 불리게 된다.


    (1*3) das Berliner Protocol, 1878년 6월 13일부터 7월 13일까지의 베를린회의의 결과로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거리,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터어키에 의해 1878년 7월 13일 서명된 베를린회의 의결서에 따르면 터어키는 종교의 자유와, 모든 제의식의 자유 그리고 그 제의식을 공공연히 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지방들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작성하여 크레타섬에 대한 1868년의 규정을 변경할 의무를 가졌다.


    (1*4) Adolf Freiherr Marschall von Bieberstein, 1897년부터 1912년까지 터키주재 독일제국대사로서 독일 제국주의 정책을 대변했다.


    (1*5) elejanter Jardeoffizier, 근사한 근위장교(eleganter Gardeoffizier)라는 말을 프로이센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2* 독일제국주의 측이 모로코전쟁 때문에 수년간 자행한 소란스런 교사 및 선동도 프랑스의 걱정을 진정시키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전독일협회(der Alldeutsche Verband)는 독일에게는 당연한 ‘생사의 문제’로서 모로코합병 프로그램을 소리높혀 주창하며 협회장 하인리히 클라스가 작성한 「모로코 서부는 독일의 것!(Westmarokko deutsch!)」이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유포했다. 콩고협상이 타결된 후 쉬만교수가 외무부의 그 결정과 모로코 포기를 「십자가-신문(Kreuz-Zeitung)」에서 옹호하려 했을 때, ‘보도(die Post)’는 그를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쉬만 교수는 태생이 러시아인으로, 아마 순수한 독일계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제국독일인의 가슴에 있는 민족의식과 애국적 긍지를 가장 예민하게 건드리는 그 문제들에 대해 냉정하고 경멸적이라 해서 아무도 그를 나쁘게 여길 수 없다. 독일민족의 두려운 영혼의 고통스런 떨림과 애국적 심장고동에 대해서 정치적인 환상이니 콘지스타도르적 모험이니 하고 말하는 이방인의 판단은, 이 이방인이 베를린대학의 선생으로서 프로이센의 손님에 대한 후대를 향유하는 만큼 더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경멸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이, 독일보수당의 주도적 기관지에 감히 독일민족의 가장 성스러운 감정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는 이 사람이 선생이자 우리 황제의 정치고문이고, 정당하든 부당하든 하여튼 황제의 대변자로 통한다는 점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여길 수 밖에 없다.”

     

    3* 1908년 독일언론에 따르면 러시아의 자유주의정치가 페터 폰 스트루베는 이렇게 썼다: “대러시아를 건설하려면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임을 이제는 말할 때이다. 그 길은 러시아문화의 실제적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한 지역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지역은 흑해 분지 전체, 즉 유럽과 아시아에서 흑해로의 출구를 갖는 모든 국가들이다. 여기에 우리의 확고한 경제적 지배를 위한 진정한 기반, 즉 인력과 석탄과 철이 있다. 이러한 실제적 토대 위에서, 오직 그러한 토대 위에서만 사방에서 국가지원을 요구하는 끈길긴 문화작업을 통해 경제적으로 강력한 대러시아가 건설될 수 있다. “


    오늘의 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바로 그 스트루베는 아직 터키공격이 있기도 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정치가들 사이에서 항구적인 터키정책 하나가 출현했다. 이는 독일의 보호 아래 터키를 이집트화한다는 생각과 프로그램으로 축약되었다. 보스포러스와 다르다넬즈해협은 독일의 수에즈로 탈바꿈할 터었다. 터키를 아프리카로부터 내쫓은 이탈리아-터키전쟁 이전에 그리고 터키를 유럽에서 거의 내쫒아버린 발칸전쟁 그 이전에 이미 독일에게는, 자신의 경제정치적 확고한 입지를 다진다는 이해관계를 위해 터키와 터키의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과제가 생겼다. 이미 언급된 전쟁들 뒤에 이 과제는, 터키의 외부적 약점들이 드러난 단지 그만큼만 변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실상의 연맹은 일종의 보호령이나 후견으로 변형되어야 했다. 이것은 오스만제국을 결국 이집트 수준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흑해와 마르마라해에 있는 독일의 이집트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전혀 참을 수가 없는 것임은 전적으로 분명했다. 그래서, 당장 그러한 정책을 목표로 한 발걸음을 위해 터키군대를 재편할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군대를 명령하게 될 리만 폰 산더스장군의 사절단에 대해 러시아정부가 항의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러시아는 이 문제에 대해 보상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13년 12월 러시아와 독일사이에 전쟁 발발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리만 폰 산더스의 군사절단의 경우가 터키의 이집트화를 지향하는 독일정책을 폭로했던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무력 충돌을 초래하기에 독일정책의 이런 새로운 지향이면 이미 충분했을 것이다. 우리는 1913년 12월에, 불가피하게 세계적 충돌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충돌 하나가 성숙하는 시기에 진입했다.”

     

    4* 제국주의적 전단, 『왜 그것은 독일의 전쟁인가(Warum es der deutsche Krieg)?』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읽게 된다.


    “러시아는 전에 이미, 1866년과 1870/71년의 우리민족의 국가적 통일로 인해 바깥에 남게 된 1천만 독일인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독일-오스트리아를 제안함으로써 우리를 유혹하려 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낡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넘겨준다면, 우리는 그 배반에 대한 대가를 받을 거라 한다.”


    5* 『쾰른신문』은 사라예보의 암살사건이 있은 뒤, 즉 전쟁전야에, 공식적인 독일정책의 카드들이 아직 들춰지지 않았을 때 다음과 같이 썼다.


    “관계들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에서 행한 자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서 전혀 사랑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42%의 인구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 답은 진정으로 그 민족과 그 관계들을 알고 있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고, 국외자들, 특히 유럽의 개념들과 상태들에 익숙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답은 명명백백하다. 즉, 보스니아의 행정은 그 기획과 근본이념에 있어서 완전히 서투르게 망가졌다. 이에 대한 책임은, 부분적으로는 (점령이래)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오늘에도 그 나라의 실제적인 상황을 지배하는 바로 그 터무니없는 무지 바로 그것에 있다.”

     

    6* 『왜 그것은 독일의 전쟁인가?』 21쪽을 참조, 대공 패거리의 기관지, 『대오스트리아』는 몇 주 내내 다음과 같은 식의 격분기사를 썼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황태자의 죽음을 위엄 있는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에 응당한 방식으로 보복하길 원한다면, 제국 남쪽의 관계의 불운한 발전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의 정치적인 유언을 가능한 신속히 집행하라. 지금까지 지난 6년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우리 정치 전체에서 도처에서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는 모든 억압적 긴장들의 궁극적 해결을 기다려 왔다. 전쟁에 의해서만 대오스트리아, 자기 국민을 만족시키는 행복한 대오스트리아가 탄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기에,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 발칸민족들에게 자유와 문화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의 국가이념, 오스트리아의 사명의식이 위대하고 행복한 미래의 햇빛 속에 꽃피는 그런 강력한 대오스트리아라는 우리의 이상이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과격하고 급작스런 방법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내부 가장 깊숙이 자리한 신념이기에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 그의 강력한 손, 그의 불굴의 에너지가 대오스트리아를 창조한 이 거인이 서거한 이래, 그 이래 우리는 이제 그 무엇보다도 전쟁을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이다! 이 암살사건 이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세르비아에 대해 만연한 엄청난 동요가 세르비아에 대항한, 더 나아가서는 러시아에 대항한 폭발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은 고독하게 이 제국을 준비해왔지만 그것을 관철 시킬 수는 없었다. 그의 죽음이 전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적 열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유혈적 희생이 되길 바란다.”


    7*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독일정책 측은 당연히 보고를 받았고, 유럽의 다른 해군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해군력이 그 당시 즉각적인 전투동원태세에 있었음은 이제는 비밀이 아니다.” (로어바흐, 『전쟁과 독일정치』, 32쪽)(강조-R.L.)


    8* Paul Rohrbach, Der Krieg und die deutsche Politik, Dresden 1914, S.41


    9* Paul Rohrbach, Der Krieg und die deutsche Politik, Dresden 1914, S. 82-83


    iDeutsche Bank, 해외무역과 사업에 중점을 두고 1870년에 설립된 독일은행. 현재 독일에서 가장 큰 금융회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은행들중의 하나다.


    iiSmyrna, 현재 터기의 3대도시인 이즈미르의 옛이름. 이즈르는 이스탄불 다음으로 가장 큰 항구로 에게해의 이즈미르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주의 주도이다.


    iiiIsmid, 터키도시Izmit의 영어식 이름, 터키의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코자엘리주의 주도. 마르마라해와 인접한 항만도시이다.


    ivAngora, 1923년이래 터키의 현 수도인 앙카라의 옛이름


    vSkutari, 터키의 현 윜스퀴다르의 옛이름. 이 도시는 터키 이스탄불주의 윜스퀴다르지방의 중심도시, 아나톨리아쪽에 위치한다


    viBrussa, 현재의 이름으로는 Bursa, 터키의 아나톨리아북서쪽 마르마라지역에 위치한, 현재 터키에서 네번째로 큰 대도시, 같은 이름의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viiKonya, 터키 아나톨리아 내륙에 위치한 도시


    viiiHaidar Pascha,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와 아시아쪽 마르마라 사이에 있는 항만지역


    ixBagdadbahn, 1903년부터 1940년까지 오스만제국과 그 후계국가들에 의해 건설된 코니아(현재의 터키지역)에서 바그다드(현재 이라크지역)까지의 철도. 이스탄불-코니아의 아나톨리아철도의 연장. 독일자본과 기술의 주도와 그 정치적 군사적 함의때문에 1차 대전전 큰 쟁점중의 하나였다.


    xSiemens


    xiGwinner


    xiiHelfferich


    xiiiKilometergaranti: 아나톨리아 철도노선의 건설 초기에 모든 비용이 킬로미터당으로 환산되었다. 터키정부는 운영수입과 환산된 전체비용사이의 차액을 그 철도회사에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이 금액의 지급을 보장하기 위해 터키국가 재정수입을 그 배상용으로 제공해야 했다.


    xivEski-Schehir-Konia, Eskischehir-Konya


    xv빌헬름2세는 1898년 10월과 11일 동양을 여행하는 동안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여, 자신이 터키의 술탄과 모든 회교도들의 후견인임을 천명했다.


    xvi1908년 7월 시작된 부르주아적 청년터키혁명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술탄 압뒬하미드2세의 절대주의적 지배를 끝냈다. 이 술탄은 1909년 혁명을 진압하려 시도한 때문에 폐위되었다. 청년터키의 우익은 군사독재를 세웠고, 이 독재하에 민중과 민족주의운동이 억압당했다. 청년터키는 1912년 친영국-봉건 콤프라도르당에 의해 밀려나지만 1913년 1월 다시 권력을 잡았다.


    xviiKrupp, 1811년 프리드리히 크룹에 의해 동명의 주식회사로 창립되어 한때 독일 최대 철강회사로 성장. 1999년 합병을 통해 현재 튀센크룹사로 되었다.


    xviii1869년 크레타섬의 그리스민족들이 터키지배에 대항한 무장투쟁을 위해 봉기했다. 1897년 2월 그리스군대의 지원을 받은 봉기자들은 그리스로의 합병을 선언했다. 강대국들이 개입하여 크레타를 “유럽의 후견아래 있는” 자치국으로 선언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및 러시아군대가 이 섬을 점령했다.


    xixDer Krimkrieg(1853~1856),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근동에서의 지배와 영향력을 걸고 터키에 맞서 싸웠다. 이때 터키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참담하게 패배했고 이와 더불어 터키에 대한 유력한 영향력을 잃게 된다.


    xxDer erste Balkankrieg(1912년 10월 8일 ~1913년 5월 30일), 1912년 초 러시아의 지원 아래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사이에 맺어진 발칸연맹(Balkanbund)이 터키에 맞서 치른전쟁, 이때 터키가 패배하면서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가 터키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이 전쟁 후 발칸연맹은 터키로부터 해방된 지역의 분배를 놓고 발생한 내부분쟁으로 인해 해체된다.


    xxiPaul Rohrbach, Die Bagdadbahn, Berlin 1911, S.18/19


    xxiiPaul Rohrbach, Der Krieg und die deutsche Politik, Dresden, 1914, S.18/19


    xxiii원저에는 1905년으로 되어있으나 정확히는 1906년. 4월 7일 알제시라스회의에서 1905년 1차 모로코위기를 종결짓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은 모로코의 공식적 독립을 보장했지만, 그 나라 경찰을 5년간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독일은 제국주의적 모험정책 때문에 대외정책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는 3국동맹의 파트너인 독일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에서 영향권역 분할관련 비밀협정과 비밀중립협정을 맺은 프랑스를 지지했다.


    xxiv1911년 9월 이탈리아는 터키에 대한 전쟁을 자극했다. 모로코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적대관계들을 이용해 이탈리아는 1912년 10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트리폴리와 씨레나이카를 합병할 수 있었다.


    xxvMannesmann


    xxviKrupp-Schneider


    xxvii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4월 8일 화친협정(Entente cordiale)에 서명함으로써, 분쟁의 원인이 된 식민지문제에 합의했다. 프랑스는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에 동의한 한편, 영국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묵인했다.


    xxviiiDer Dreiverband, 다른 이름으로는 트리플-앙탕트(Triple-Entente), 1차 세계대전 이전, 3국동맹에 대응해 1907년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 그리고 프랑스는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사이의 화친협정(Entente cordiale, 1904)과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프랑스-러시아연합(1894)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xxixDas Dreiklassenwahlsystem, 3등급선거시스템은 일종의 불평등한 간접선거방식으로서, 각 선거구의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직접세의 크기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뉜다. 각 등급은 공개적 의결에서 동일한 수의 선거인단을 선택하고 이 선거인단들이 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민주적 선거권은 1849년부터 1918년까지 프로이센주회의의 하원선거에 적용되었다.


    xxxIsmail,우크라이나남서부의 도나우강변 도시, 1484년부터 1812년까지 오스만제국에 속했다. 1770년부터 1791년까지 러시아에의 의해 세차례 점령되고 오스만제국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이후 러시아, 루마니아 결국 우크라이나에 속하게 되었다.


    xxxiNavarin, 1827년 10월 20일의 나바리노해전의 장소, 그리스독립전쟁 당시 그리스 나바리노만에서 프랑스-영국- 러시아군대는 그리스편에서 오스만제국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함으로써 그리스의 독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xxxiiSinope, 1853년 11월 30일 터키북부의 항구도시, 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제국함대가 오스만제국함대를 대파했다. 고전적인 의미의 해전의 마지막 예로, 크림전쟁 최초의 해전으로 간주된다.


    xxxiiiSilistra, 도나우강변에 위치한 불가리아의 요새. 크림전쟁(1853~1856)당시 러시아는 2차례에 걸쳐 오스만제국에 속한 이 요새를 공격했으나 엄청난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xxxivSewastopol, 러시아 크림반도에 위치한 상업도시로 크림전쟁당시 이 도시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이뤄졌다.


    xxxvPlevna, 불가리아에 위치한 도시, 러시아-오스만전쟁(1877~78)당시 러시아-루메니아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유럽의 다른 열강들은 이때 오스만제국을 도왔다.


    xxxvi Schipka, 불가리아 남부의 도시, 러시아-오스만전쟁당시 결정적인 전투가 있었다.


    xxxvii 1905년의 러시아혁명을 말한다.


    xxxviii 먹어치우기(Verspeisung) – 원전에는 봉쇄하기(Versperrung)으로 되어 있다.


    xxxix 1907년 8월 31일 영국과 러시아의 조약에 따라 페르시아는 이 두 나라 사이에 분할되어,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중국의 티벳에 대한 지배권이 인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1904년 만들어진 영프화친협정(Entente Cordiale)이 3국협상(Triple-Entente)으로 확대되었다.


    xl 1864년 독일-덴마크전쟁, 덴마크지배하에 있던 슐레스비히공국을 놓고 일어난 분쟁이 계기가 되어 발발. 덴마크에 대항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연합군이 싸운 이 전쟁 결과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및 라우덴부르크 지역을 포기하고 프-오가 이지역들을 공동 관리하게 된다. 1866년 프로에센-오스트리아전쟁과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전주곡과 같다.


    xli Die Bucht von Cattaro, 현재명은 Kotor만. 달마시아의 아드리아해변지역에 위치한 만. 나폴레옹전쟁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렸으나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왕제국에 속하게되어 전쟁항만으로 재무장되었다. 현재 몬테네그로에 속한다.


    xlii 원저에는 1884년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상은 1887년. 이해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상호보장조약(Rückversicherungvertrag)을 통해, 이 양국 중 하나가 제 3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그 다른 하나는 우호적인 중립을 지킬 의무를 가졌다.


    xliii Saloniki, 현재 그리스의 도시 테살로니키의 옛이름. 제 1차 발칸전쟁 발발전까지 오스만제국에 속했었다.


    xliv Durazzo, 현재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안에 위치한 대도시, 두레스(Durrës)의 이탈리아식 명칭. 옛 오스만제국 영토였으나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알바니아에 속하게 되었다.


    xlv Sandschak Novibaza, 남동유럽에 위치한 옛 오스만제국의 행정구역(sandschak)의 하나. 현재 세르비아의 남서부, 몬테네그로의 북동부 그리고 코소보의 일부에 해당된다.


    xlvi 1차 발칸 전쟁 중 1912년 11월, 그 당시 터키의 지배하에 있던 도시 프리츠렌으로 세르비아군대가 진군할 때, 윜스퀴브(Üchsküb)에서 진군군대와 그곳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영사 프로하스카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영사는 포로가 되어 박해를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사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정부는 세르비아정부에 대한 외교적 조처의 빌미로 삼았다.


    xlvii 1908년 6월 9일과 10일 당시의 러시아제국에 속했던 도시 레발(Reval)에서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회동이 있었다. 이때 1907년 체결된 조약들과,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과 마케도니아의 상황에 관해 의견일치가 확인되었다. 한편, 1908년 7월 27일과 28일에는 프랑스의 A. 팔리에르가 프랑스-러시아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레발에서 차르를 만났다.


    xlviii 터키는 1912년 12월 1차 발칸전쟁 당시 협상에서, 승전국인 발칸국가들의 요구들, 즉 에게해의 섬들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불가리아의 요구에 따라 아드리아노펠시를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음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를 위해 특히 애쓰며 아드리아노펠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는 코카시아국경에 군대를 집결했다. 터키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은, 터키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유럽평화에의 위협”으로 간주된다고 페테스부르크에게 선언했다. 1913년 재집권한 청년터키정부는 이 선언에 고무되어 교전을 다시 시작하지만 또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xlix Nordostseekanal, 독일의 북해와 동해를 덴마크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연결하는 운하, 키일운하(Kiel canal)라고도 불린다. 프로에센-덴마크전쟁(1864)년 당시 비스마르크에 의해 그 기획이 시작되어,1887년 착공, 1895년 완공되었다. 이 운하건설계획은 처음부터 군사적-전략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l Helgoland, 독일의 북해에 위치한 섬. 1807년 영국에 의해 점령되어 대영제국에 속했다가 독일과 영국간의 협정에 의해 1890년부터 다시 독일에 속하게 되었다.


    li 1913년 3월말 독일제국의회에서는 독일제국 창건 이래 최대의 군대증강을 계획하는 군사법안과 자금준비법안이 마련되었다. 부가적으로 필요한 자금의 일부는 특별군사분담금을 통해, 그리고 만 마르크이상의 모든 재산에 대한 과세를 통해 충당되고 그 나머지는 노동하는 민중의 어깨에 놓여질 계획이었다. 1913년 6월 30일 제국의회는 그 법안들을 가결했다.


    lii Basch-Bosuk, 그 잔혹한 행동과 약탈 때문에 악명 높았던 터키의 잘 무장된 비정규군대. 그들은 1853년 러시아-터키전에 최초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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