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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3
    • 1917~2017 승리와 실패의 교훈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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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혁명의 교훈

     

    우리는 러시아 혁명 승리와 실패의 유산 모두를 기억하고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러시아혁명의 주요한 교훈은 첫째,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오래 생존할 수 없으며,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 모든 정치, 경제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산하는 데 복무해야만 한다.

     

    둘째, 사회주의는 명령경제가 아니며, 러시아 혁명의 실패는 생산수단이 국가 소유로 되었다고 해서 자본과 임노동의 사회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코뮤니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지배 아래 생산수단이 사회화되고, 사회 계급들이 노동계급의 사회화된 부문으로 통합되어 점진적으로 소멸하면서 모든 사회계급이 폐지되고, 반(半)국가-국가소멸로 향해야 한다.

     

    셋째, 계급이 존재하는 한 이행기 국가는 불가피하게 필요하지만, 국가 기관은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인 본질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평의회의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에서 국가기구는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고, 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소수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으며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 나가야 한다.

     

    넷째, 코뮤니스트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당의 역할은 필수이지만, 당이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의 집단적 권력을 당이 가질 수 없다. 당의 역할은 노동계급을 재구성하고 전체 계급의식을 코뮤니스트 혁명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당은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

     

    다섯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지배계급에 대항하기 위한 폭력은 필수적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폭력은 이전 지배 계급의 국가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혁명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폭력’은 자본주의와 그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전 동안 반혁명 계급의 저항과 폭력에 맞서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이것과 상관없는 노동계급 내부의 폭력은 코뮤니즘을 건설하는 데 어떤 건설적인 과업도 담당할 수 없다. 이러한 폭력은 노동계급의 활동들을 일탈시키고, 다른 노동 계층과의 관계를 교란하고, 대중의 정치적인 성숙도(집단 이성)에 기초한 해결책을 왜곡할 뿐이다. 이것이 '크론슈타트 비극'의 교훈이다.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최고로 꽃피어 언론, 회합, 집단 의사결정의 자유가 최대로 이루어지고, 이것만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원동력을 줄 수 있다. 누구도 전체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 없이 코뮤니즘을 만들 수 없고, 누구도 코뮤니즘을 미리 준비해서 노동계급에 넘겨줄 수 없으며, 노동계급의 집단적 실천과 의식만이 어떠한 오류라도 정정하면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혁명적 소수의 역할과 교훈

     

    그렇다면 러시아혁명에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과 교훈은 무엇인가?

     

    1. 혁명적 소수는 1905년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에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자발적으로 출현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당시의 자본주의는 발전의 정점에 있었고, 전 세계를 하나의 경제 및 정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에 노동계급의 투쟁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분출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96년부터 1896년,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직물 노동자들의 총파업, 남부 러시아 일대를 뒤흔들었던 1903년, 1904년의 주요한 파업 등 줄곧 수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최초의 소비에트 출현 배경이다. 이때 혁명적 소수였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끊임없는 정치 선동과 조직 활동이 소비에트의 출현에 크게 기여했다.

    소비에트는 본질에서 노동계급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다양한 계획, 토론,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온 제안, 모든 사건의 발전, 그리고 혁명적 소수의 적극적인 개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다. 이 과정에는 ‘대규모 토론과 투쟁의 급격한 급진화’라는 두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여기서 대중의식의 주목할 만한 성장(자신의 규율과 성숙함을 유지하면서 질서 있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토론하고 심사숙고하여 처리하는 집단적 흐름)이 있었는데, 여기서 혁명적 소수의 역할이 중요했다.

     

    2. 혁명적 소수는 10년간 사라졌던 소비에트를 부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1905년 12월 혁명의 패배 이후 소비에트를 되살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서서히 쇠약해졌고 1907년 봄 결정적으로 사라진다. 소비에트의 자발적 참여와 집중을 경험한 정권이 파업 투쟁과 새로운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위해 끔찍한 탄압을 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1917년 부활하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러시아에서 사라진다.

    소비에트가 사라진 1905년에서 1917년 사이 소비에트는 단지 소수 투사의 정치 투쟁 지향점이었다. 혁명적 소수파들, 특히 1905년 이후 볼셰비키는 투쟁을 단호하게 밀고 나아가기 위해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발상을 방어하고 전파했다. 이 소수파들은 노동계급의 집단 기억에서 소비에트의 불씨를 살려냈다. 순식간에 확산된 2월 파업과 함께 소비에트를 세우기 위한 수많은 계획과 호소가 있었다. 볼셰비키는 오랜 기간 소수파들에 국한되어 왔던 소비에트라는 발상을 투쟁하는 대중 안에서 광범위하게 전파하고 이끌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출현에 기여한 것은 소비에트 형성을 위한 중개 조직의 역할이 아니라 정치 투쟁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정치적으로 투쟁했다. 1915년 레닌은 제국주의적 반동적 전쟁으로 나가는 군수사업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면서, 파업위원회의 선거, 전 러시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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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볼셰비키는 1917년 6~7월 소비에트의 위기와 대중들의 이반이 나타났을 때, 부르주아의 도발과 함정에 맞서 참을성 있게 대중을 설득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며 10월 봉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사건은 가장 선진화된 노동자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져 완전히 사기가 꺾이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뒤에 숨지 않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면서 왜 지금 시기가 권력을 쟁취하는데 무르익지 않았는지 설명했다. 이것은 당시에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독일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중상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풀뿌리 소비에트 조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비에트의 부활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고,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열정적이고 친밀하고 인내심 있는 볼셰비키당의 토론’5)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타깝게도 1919년 독일 베를린 노동자들과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함정을 피하지 못했고,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한다.

     

    4. 볼셰비키당의 오류 : ‘소비에트와 국가 문제’에서 볼셰비키당은 국가를 끊임없이 강화시켰다. 소비에트 국가는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를 배제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만의 국가가 아니라서 소농계급, 쁘띠부르주아지 및 여러 중간계층을 포괄했다. 이 계급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편협한 이익을 방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방해했다. 혁명의 일차적 과제는 이러한 쁘띠부르주아 사고방식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전과 세계혁명의 지체는 전직 차르 관료의 재고용과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하게 했고,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새롭게 나타난 관료를 포함하여 자신을 소비에트 국가와 동일시하는 관료 계층을 형성케 한다. 결국, 관료주의의 성장과 국가기구의 강화는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를 제압했고, 국가의 이익이 노동계급의 이익보다 우선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강화는 볼셰비키당의 흡수로 이어진다. 레닌은 볼셰비키당과 중요한 당원들이 정부의 관여한다면, 스스로 그 체계에 갇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세계적인 관점을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1918년 7월 소비에트 정부가 최종적으로 볼셰비키화되자 볼셰비키당은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 전직 차르 관료들, 멘셰비키 전향자들로 들끓었다. 그들에게 당은 출세와 취업의 수단이었다. 그 후 볼셰비키당은 수많은 숙청을 통해 이런 유입과 싸웠지만,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강력해진 국가기구와 볼셰비키당의 통합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로 이론화되었고, 볼셰비즘은 당국가로 변화한다.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치적 장악과 당의 지배를 결정했고, 카메네프는 “공산당(볼셰비키당)은 러시아의 정부이다. 60만 명의 당원이 러시아를 지배한다.” 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920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모든 의식적인 노동자는 노동계급의 독재는 계급의 전위인 공산당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결국,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일부로서 전위 역할을 포기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전위로서 볼셰비키당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웠다 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기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끊임없는 투쟁과 토론, 참여의 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기구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노동대중의 욕구를 반영하며, 토론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진정한 계급의 기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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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리는 러시아혁명의 교훈에서 혁명적 소수-볼셰비키를 비판하는 또 다른 혁명적 소수에 대해서도 정확히 비판해야 한다.

     

    먼저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세계혁명 패배의 한복판에서 볼셰비키의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소비에트)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 동안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소비에트를 약화시켰고, 1921년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소멸로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당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 실패로 인한 고립 속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안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런 오류들은 범하지 않거나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훈은 앞으로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혁명적 소수는 국제적 전망을 갖고 국제적 수준에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하는 평의회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과도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평의회주의자들은 또한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 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 조치의 채택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도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과업(세계혁명)에 대한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

     

    (필자 -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방해되는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코뮤니스트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평의회주의자들의 볼셰비키 비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세계혁명의 관점이다.

     


    과제

     

    세계혁명의 첫 출발이었던 러시아혁명 승리와 실패의 교훈은 우리에게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 체제 위기, 전쟁과 핵무기로 인한 인류와 문명 파괴의 위험, 환경의 파괴, 범죄의 급격한 증가, 극단적 테러리즘과 인종주의로 인한 의식의 황폐, 사회관계의 도덕적 부패 등 혁명은 1917년보다 더욱 필수적으로 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부패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혁명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혁명은 오직 세계 혁명을 의미하며, 전 지구상의 자본주의 체계를 일소하고 세계 인류 공동체로 대체하는 것이며, 시장과 이윤이라는 비인간의 요구로부터 생산과 분배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1917년 혁명의 진정한 의미였다. 세계혁명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며, 지금은 당시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지난한 길에 서 있다.  <계속>



    <주>


    5)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하게 하려면 모든 토론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었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생 시몽(Saint Simon)과 오웬(Robert Owen)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 문화 : 계급투쟁의 무기>>, ICC, )International Review no.130 - 3rd quarter 2007)



    • 2017.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 토론회>에 발표한 글이며, 지면상 생략했던 내용과 각주를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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