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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 1장 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 <경제적 조건의 물질적 변환>
  •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1장

    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

     

    자본주의 쇠퇴를 정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접근한다:

     

    - 역사적 과정의 주요 사회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생산양식의 쇠퇴라는 보편적 개념을 도출하고 이러한 보편적 개념을 자본주의의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여 그로부터의 정치적 귀결을 연역한다.

     

    - 이렇게 함에 있어서 맑스와 같이 첫째, “생산의 경제적 조건의 물질적 변환” 그리고 둘째로 “법적, 정치적, 종교적, 미적 또는 철학적, 한마디로 인간이 이러한 갈등을 의식하고 투쟁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형식”을 고찰한다.

     

     

    경제적 조건의 물질적 변환

     

    원시공산주의의 종말

     

    인류 시초의 사회조직 형식은 맑스가 “원시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기후, 역사 또는 기타 요소의 중요한 국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원시사회의 본질적 특성은 생산수단(본질적으로 토지)의 집단적 소유와 농업 및 수렵에서의 집단노동, 산출물의 공동배분이었다. 사적 소유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이라는 사상은 18세기 이래 부르주아 경제학자에 의해 통속화된 신화이며, 그 목적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 본성에 가장 들어맞는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평등주의적 관계는 형제애 이념의 산물이나 창조물 사이의 평등을 보증하기를 바라는 신의 작업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사용하는 공동체 안에 살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이러한 사회적 결속의 필요성을 강제한 것은 바로, 인간의 기술이 취약한 그만큼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자연환경에 직면한 인류의 역량 부족이었다. 존재했던 평등주의 이념은 이러한 관계의 결과이지 그 원인은 아니었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 (맑스,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2권, 477쪽)

     

    마찬가지로, 원시공산주의의 소멸은 이념에서의 변화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회를 발생하게 한 물질적 조건의 소멸 결과였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사회가 계급과 사유재산의 출현과 함께 착취의 사회로 변환되었던 방식을 검토해 보면, 그것이 생산기술 발전의 결과였음이 명백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발전’이 15세기 말부터의 유럽 식민주의적 학살의 문명화된 작업의 결과였던 사례들은 제외할 것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그리고 다양한 지역적 역사적 조건 속에서 원시공산주의 사회가 해체되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나 노예 사회에 자리를 내주었다.

     

    노예제

     

    한 공동체 연고지의 비옥함이 소진되었을 때나, 혹은 그것의 사냥감이 고갈되었을 때, 혹은 인구가 생존수단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증가했을 때, 그 공동체는 새로운 지역으로 그 지배를 확장하거나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지중해 지역처럼 인구밀도가 비교적 높은 지역에서 이러한 확장은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킴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었다.

     

    초기에 이러한 이동의 결과로 촉발된 전쟁은 불필요한 학살이나 식인행위의 형식을 취할 뿐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정복된 인민의 땅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사회 생산성의 수준으로 인해 한 사람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겨우 생산할 수 있는 한 정복자는 굶주린 공동체에 새로운 식구를 더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피정복 인민이 스스로 자급자족할 만큼 생산하면서도 정복자를 위하여, 대가 없이 그리고 강제로, 일하는 것이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1)

     

    원시공산주의 관계는 더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전쟁과 정복의 맥락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포기되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

     

    매우 잘못 이해된 이 경제체제는 일반적으로 특정 지역에서 자연이 부과한 문제들(건조, 홍수, 아열대 등)에 대처하기 위한 특정 공동체의 필요 결과였다. 이러한 지역의 공동체는 곧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의 순환을 연구하고 관개 작업을 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작업의 복잡성, 그것이 요구하는 기술적 지식, 그들을 조정하기 위한 권위의 필요성은 전문가층을 만들어 냈다(자연의 연구와 관찰에 통달한 성직자들이 종종 이러한 계층의 기원에 있었다) 공동체에 봉사하는 특정 과업을 책임지는 이러한 전문가는 새로운 부의 창조자로 나타나면서 스스로 지배계급을 구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집단성을 희생시키며 사회적 잉여를 전유하였다. 생산력의 발전은 이러한 사회 공복을 착취자로 변환시켰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공동체적 생산 관계를 생산의 기본세포로서 변함없이 남겨두었다. 지배계급은 공동체의 작업에 의해 생성된 잉여를 전유할 뿐이었다. 그러나 원시공산주의로부터의 첫 번째 이행이 이뤄졌다. 새로운 생산기술을 적용할 필요성은 새로운 생산관계의 출현과 낡은 것의 폐기를 가져왔다.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입은 그 후 이 사회에서 평등주의의 잔재를 없애버렸다. 보기를 들어 토지의 비옥화 문제와 작업자와 경작지 사이를 더 긴밀하게 연계할 필요성은 관습이나 가족의 필요에 따른 소규모 토지의 체계적 재분배를 포기하게 했다. 작은 토지를 유지하면서 더 큰 지속성을 보장할 필요성이나 재정적 압력의 무게는 공동재산으로부터 사유재산으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그리고 사유재산과 함께 불평등이 서서히 증대되어 마침내 사회의 일부는 생산결과의 일부를 대가로 가장 비옥한 토지에서 일해야만 했다. 사회는 농노제 또는 봉건제의 사회형식을 취하면서 완전히 계급화되었다.

     

    그러나 노예제나 동양 전제주의(그 후 농노제로)로 나아갔든지 간에, 공산주의적 관계는 낡은 틀에 더는 순응할 수 없는 생산력 발전의 압력 아래에 함몰되었다.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생산력은 기존하는 생산 관계 또는 그것이 지금까지 운신해온 소유 관계와 충돌하게 된다." (맑스, 같은 책)

     

    노예제의 종식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는 특정 지역에서 생산력 발전의 결과인 노예제는 하나의 사회집단이 그 사회의 나머지가 실현한 잉여노동을 전유하게 했다. 노예 소유자는 이윤과 특권을 갈망하는 지배 계급으로서 생산력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노예의 수적 증가 그리고 정복한 나라의 약탈을 촉진하는 거대한 공사의 수적 증가 형태를 띠는 정복 전쟁에 엄격하게 한정되었다. 이것이 고대 희랍과 로마가 그들의 문명을 발전시킨 기초였다.

     

    그 쇠퇴가 봉건제로의 문을 열게 되는 로마 노예경제는 정복된 인민의 약탈과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 그것은 로마에 기본적 생존수단(식량, 공물, 노예)을 제공했다. 수입 상품이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다른 착취양식 아래에서 생산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본국 자체는 노예제에 의존했는데, 노예제는 특히 대규모의 착취(올리브 과수원과 가축 농사)와 거대 공사 등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공사는 종종 식민지 착취(도로, 구름다리 등)에 사용됨으로써 군사적 요구에 봉사했다. 동시에 그것은 지배계급의 사치를 보장하려는 관심을 반영했다.

     

    그래서 정치권력은 매우 빈번히 승승장구하는 군사계층과 연관되었다. 그러므로 경제번영은 본국의 전투력에 밀접하게 의존했다.

     

    로마 문명의 중대한 발전은 그것의 승리와 정복의 시기와 일치했다. 그 정점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그 이익을 전취했을 때였다. 같은 방식으로 로마 쇠퇴의 징후는 그 확장이 끝나는 기원후 2세기에 이러한 확장의 종결로 그리고 3세기에 로마제국의 첫 번째 패배로 나타났다(251년 데시우스 황제는 고트족에 의해 살해되고 260년에 발레리안 황제는 페르시아 왕에게 나포되어 모욕을 당했다. 3세기 동안 식민지에서 반란이 처음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그 시기에 가능했던 제한적인 기술적 수단으로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어려움이 로마 확장의 종말을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의 반란의 궁극적 성공을 보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로마 노예제의 경제적 생산성과 식민지(아시아적 양식하에서 종종 더 우월한 생산성을 발전시킨)에서 생산성 사이의 틈이었다.

     

    노예제 생산 관계는 낮은 노동생산성을 그 특징으로 했다. 그 시기의 조건에서 생산성의 증가는 쟁기사용, 비옥화의 발전, 경작자와 토양 사이의 긴밀한 연결 형성과 같은 작업방법의 개선을 요구했고, 작업자에게 생산기술을 사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작업자의 생계가 그 생산성 여하에 상관없이 그 주인에 의해 유지되고, 벌의 공포만이 노예에게 생산을 강요해서 가능한 한 무성의하게 작업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노예제의 포기를 요구했다.

     

    노예제는 정복한 인민을 착취하는 수단으로서만 이득이 있었다. 일단 정복이 멈추거나 줄어들고, 전리품, 공물 그리고 노예의 수가 줄어들 자(반대로 노예의 가치가 오르자) 노예제는 이득이 없는 체제로 변환되면서 생산발전의 족쇄가 되었다.

     

    새로운 생산 관계로 나아갈 필요성은 본국에서 봉건적인 착취 유형을 초래했는데, 이 경우 대재산가가 생산물의 일부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가족들에게 토지를 양도했다. 그러나 노예제의 극복은 또한 지배계급의 특권에 대한 공격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그때까지 존재했던 생산 관계 사이의 “충돌”은 로마가 쇠퇴기로 전락하게 했다.

     

    생산의 발전은 느려졌거나 멈추었다. “그들(부유한 로마인)은 목초지나 숲을 반황무지 지대로 만들며 광산의 산출물을 ‘주워 모으고’ 토양을 훼손했다. 노동력은 작업에서의 불만과 무관심을 자극하면서 끊임없이 착취되었다. 그들은 심지어 새로운 방법의 적용을 금지했고 관개와 배수 작업이 아주 중요한 지역들에서 그런 일들을 소홀히 했다. 전쟁, 전염병과 기아로 인해 제국의 인구 3분의 1이 감소되었다. 사망률은 3세기 동안 이탈리아 자체에서는 더 높았던 것 같다.” (Shepard B Clough,『문명의 장대함과 쇠퇴(Grandeur and Decadence of Civilizations)』 Editions Payat 140쪽)

     

    봉건제

     

    노예제 또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뒤이은 봉건제는 수 세기 동안 사회의 생산력에 새로운 지평을 허용했다.

     

    자급자족적인 봉건적 관계 속에서 토지에 대한 작업은 비할 바 없는 수준의 개선(경작의 개선, 작업 동물의 편자 박기, 마구 채우기(배 대신에 머리와 목), 관개와 비옥화의 발전 등)을 달성했다. 더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업노동의 개선은 장인노동의 상당한 발전을 수반했다. 그것은 농업경제의 단순한 부속물로 존재하면서 노동 도구와 지배계급을 위한 소비 용품(주로 옷과 무기)을 공급했다.

     

    장인은 농업 생산성의 발전 덕분에 귀족계급이 누릴 수 있는 자원이 증대된 점의 혜택을 입었다. 이 마지막 요인은 귀족 계급이 부르주아지의 특수한 특성인 축적에 관여하지 않고 개인소비를 위해 모든 이윤을 사용한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12세기부터 봉건제는 경작 가능한 표면의 확장 가능성의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작 가능한 표면의 확장이 국내 인구 성장보다 열악했음을 제시하기 위해 13세기 말 토지 부족을 입증할 지표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리고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확장은 노동생산성의 저하 경향을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홀랜드, 색소니, 라인랜드, 바바리아 그리고 티롤에서 1200년 이후 토지 부족은 동쪽으로의 이민을 초래한 요인들의 하나였다. 14세기 말에 산림으로부터 토지를 획득하는 한계가 독일 동북지역과 보헤미아에서는 이미 도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Maurice Dobb,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59쪽)

     

    “세인트루이스의 동시대인 그리고 특정 지역에서는 필립 드 벨의 사람들은 농토의 발전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항상 더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산출물을 증가시킬 다른 방법을 몰라서 경작공간이 항상 증대되어야 했기 때문에, 가장 대담한 개간이 시도되었다. 영구 습지와 불모지는 사라지는 것 같았다. 숲이 줄어들었다. 영국 해변의 늪과 소택지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한계까지 배수되고, 청소되고 착취되었다.” (J. Favrier, 『마르코 폴로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까지 (De Marco Polo a Christopher Columbus)』 125쪽)

     

    그때부터 사회는 오직 노동생산성의 새로운 발전을 통해서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그 당시 노동 생산성은 가내 장인 생산의 맥락 속에서 다소 그 극단적 한계에 도달했었다. 개인 노동으로부터 수많은 관련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그리고 더욱 복잡한 분업과 더욱 복잡한 생산수단의 사용으로의 이전만이 이러한 조건으로 생산성의 성장을 허용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봉건제 아래에서 장인노동의 발전이 또한 마을의 재건에 공헌했고 이들이 보다 집단적 노동 형식의 기초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봉건적 틀은 이러한 경제형식의 질적 발전을 허용할 수 있는 조건의 부정이었다.

     

    - 봉건제는 노동력의 거대한 이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노동자의 분리를 요구하는 반면, 봉건제는 인간을 봉건 영주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에 일생동안 복속시키는데 기초했다.

     

    - 봉건제는 다른 봉건적 소유지를 통한 상품의 이동 경로에 수많은 사용세를 무는 지방 권력의, 자급자족의, 폐쇄된 봉토의 체제였다. 반대로 제조업자는 수많은 다른 장소로부터의 생산물을 한 생산 장소로 집중시키고 그 자신의 상품을 가장 자유롭게 분배할 수 있도록 원료와 상품 일반의 이동을 해야 했다.

     

    - 공장제수공업 생산은 분업에 기초한 생산을 허용하는 기계를 획득, 대체 확대하기 위하여 이윤을 축적, 집중하는데 기초해야 한다. 그러므로 작업을 통한 성공의 정신 그리고 작업에 대한 보상을 축적할 권리를 요구한다. 반면에 봉건적 특권은 최초에는 전쟁을 일으킬 능력에 기초하고 그 후에는 오직 유전에만 기초한다.

     

    일하는 능력의 수준에서 봉건영주는 농노와 동등하거나 열등했다. 그러므로 봉건사회의 일에 대한 경멸은 천시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봉건영주는 그의 전 수입을 소비할 능력을 과시하는 것을 명예의 문제로 만들었다. 봉건 경제가 생산의 성장을 목적으로 한 축적을 무시하고 경멸했을 때 이는 공장제수공업으로의 길을 가로막는 태도였다.

     

    “중세경제의 확장 시기는 14세기 초에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진보가 모든 영역에서 지속적이었다. 그러나 14세기 초기에 이 모든 것은 끝났다. 퇴행은 없었지만 더 이상 진전도 없었다. 유럽은 그야말로 그 명예 위에 안주하고 있었다. 경제 전선에서는 안정이 있었다… 이전의 경제적 추진이 중단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무역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플랜더스와 브라반테의 직물산업은 그 세기 중반까지 전설적이었던 번영을 증가시키지 못하고 유지되다가 갑자기 내리막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랫동안 화폐시장을 지배해왔던 대다수의 큰 은행들이 연속적으로 파산했다….샴페인 시장의 쇠락은 14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시기는 인구의 증가가 멈춘 시기였는데, 바로 이점은 그 진화의 마지막 지점에 다다른 안정된 사회의 상태의 가장 중요한 증상을 구성했다”

     

    (H. Pirenne,『중세의 경제사 및 사회사(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 du Moyen Age)』, PUF, 158쪽)

     

    노예제에서와같이 봉건제의 쇠퇴는 기근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생산력의 성장은 인구 성장에 훨씬 못 미쳤기 때문이다. 기근에 전염병이 뒤따랐고, 이것은 다시 영양부족으로 인해 급속히 퍼졌다. 1315년부터 1317년까지 끔찍한 기근이 전 유럽을 황폐화했으며 그 30년 이후 흑사병이 발생하여 1347부터 1350년까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

     

    “폴란드 그리고 특히 보헤미아같이 경제발전의 주요지역 밖에 있었던 국가들이 바로 이 시기에 경제발전에 좀 더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뒤늦은 각성은 서구세계 전체에 어떠한 중요한 결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가 더 많은 것을 생산하기보다는 보존하는 시기에, 사회불안이 더는 인간의 필요에 상응하지 않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욕망과 무능력을 증언하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음이 명확했다.” (Pirenne, 윗줄, 158쪽)

     

    봉건제의 쇠퇴는 14세기에 시작되어 영국과 프랑스에서 17, 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에 의해 그 마지막 법률상의 흔적을 전복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새로운 생산관계인 자본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낡은 봉건적 족쇄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발전하면서, 14세기의 곤경으로부터의 주요 수혜자로서 경제적 삶의 위대한 부흥을 가능케 했다.

     

     

    쇠퇴의 일반개념

     

    생산력 발전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1. 주어진 생산성 수준에서 생산에 결합하는 노동자 수의 성장

     

    2. 주어진 노동자 수에서 노동생산성의 발전

     

    완전히 확장된 체제 안에서 두 가지 조합이 나타난다. 위기에 처한 체제는 동시에 두 가지 국면에서 한계에 다다른 체제이다.

     

    체제 확장에 대해서 우리는 ‘외적 한계’(활동영역을 확장할 수 없음)와 ‘내적 한계’(생산의 일정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음)를 말할 수 있다. 노예제의 종말, 로마제국 종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외적 한계는 제국의 범위 확장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 의해 구성되었다. 내적 한계는 노예의 지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즉 사회 체계 그 자체를 전복하지 않고서는 노예의 생산성 증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봉건제의 경우에는 외적 한계로 작용한 것은 토지개간의 종식, 새로운 경작 토지의 부재였던 반면, 내적 한계는 농노를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하거나 자본에 의해 연합된 노동의 도입 없이는, 즉 봉건적 경제 질서의 전복 없이는 농노와 개별적인 장인의 생산성을 증진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한계 유형의 접근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로마는 생산의 한계 때문에 제국을 무한정 확장할 수 없었다. 역으로, 확장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생산성 발전에 매달리게 되고 더욱 한계의 극단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유사하게, 봉건적 개간은 봉건적 기술 수준에 의해 한계를 가졌던 반면, 토지의 부족은 도시와 농촌에서 수행된 생산적 활동의 창조성을 촉진했다. 이는 역으로 봉건적 생산성을 자본주의 경계로 밀어 올렸다.

     

    최종적 분석에서, 낡은 사회를 난국으로 이끄는 것은 그 사회에서의 생산성 수준의 한계이다. 이러한 생산성이 바로 생산력 발전 수준의 진정한 척도로서, 인간노동과 생산수단, 즉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일정한 조합을 양적으로 표현한다.2)

    생산력 발전의 매 단계에, 즉 생산성의 매 전반적 수준에 특정한 생산 관계 유형이 상응한다. 이러한 생산성이 그것에 상응하는 체제 내에서 마지막으로 가능한 한계에 도달할 때, 그리고 그 체제가 전복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경제적 쇠퇴의 단계로 들어선다. 눈덩이 효과가 일어난다. 그 위기의 첫 번째 결과는 그 위기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전환한다. 보기를 들어, 로마제국 말기와 봉건제의 하강기에 지배계급의 수입 하락은 고갈의 시점까지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만들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노동자의 점증하는 무관심을 낳았고 이는 소득의 하강만을 가속할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노동자들을 생산에 결합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회는 수입의 또 다른 유출을 구성하는 비활동 계층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현상은 로마제국 말기뿐만 아니라 중세 말기 화폐의 급속한 평가절하였다. “로마는 과세를 늘림으로써 정부지출을 감당하기를 바랐지만, 그 결과가 불충분하여지자 인플레이션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다(제2 로마제국 말기에). 이러한 첫 번째 조치는 3세기 동안 종종 반복되어야만 했는데 어떤 화폐는 액면가의 2%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로마제국의 화폐 통일은 파괴되었고 각 지역은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다.” (Shepard B. Clough, 앞글, 141쪽)

     

    그리고 중세 말기: “화폐량이 불충분하게 되어버린 세계에서 (강탈과 전쟁에 대한 보호조치로 사용된 군인의) 임금증서는 귀금속의 필요성을 증가시켰고 이는 통용되는 현금을 과대평가하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지배자는 권한을 사용해서 동전의 무게를 줄여 이제까지 2수스의 가치가 있던 동전은 그 순은양이 줄고 납이 더 많아졌지만 이제 3수스의 가치가 되었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이었다!” (J Favier, 앞 글, 127쪽)

     

    이러한 경제적 귀결들에 병행하여, 위기는 일련의 사회적 격변을 초래하고 이러한 격변은 다시 이미 약화된 경제생활을 방해한다. 생산성의 발전은 체계적으로 기존 사회구조와 갈등을 일으키고 생산력의 새로운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낡은 사회를 극복할 필요가 의제에 오르게 된다.

     

    “한 사회질서는 그것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생산력 모두가 발전하기 전에는 절대 몰락하지 않는다.” (맑스, 앞 글)

     

    사실 어떤 체제도 생산력이 용어의 적절한 의미에서 이론상 내포할 수 있는 “모두”를 발전시키지는 않았음이 주목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본 경제적 귀결과 그러한 최초의 거대한 경제적 곤란이 초래하는 일련의 사회적 재앙은 그 체제가 실제로 한계에 도달하지 않도록 막는 많은 족쇄다. 경제체제는 인간이 그들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그리고 생산력 수준에 맞춰 확립하게 된 생산 관계의 총체임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 생산도구가 햇빛을 보기 전에, 생산이 인간의 욕구보다 더 느리게 성장하기 시작한다면, 그 체제는 역사적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사회의 모든 것은 그의 한계에 대항해서 나아가는 경향을 띠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압력 아래에, 새로운 사회의 경제적 기초가 낡은 사회 내에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낡은 사회를 전복시킨 계급이 피착취계급이 아니었던 과거 사회에만 적용된다. 봉건제는 로마제국 내에서 자랐다. 로마에서의 최초의 봉건적 농원은, 국가가 설립하여 세금징수를 위임한 시 원로원의 전직 의원들이 주도했다. 비슷하게 봉건제 말기에는 귀족이 사업가가 되었고, 도시에서는 종종 지방 영주에 대한 투쟁 속에서 자본주의를 예견하는 최초의 공장제수공업이 발전했다.

     

    이러한 “미래체제의 중심”(로마의 대농원, 부르주아 도시)은 대부분 옛 체제의 해체 결과로서 탄생했다. 그들은 체제를 벗어나려 하는 모든 종류의 인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쇠퇴의 결과이던 이러한 중심은 스스로 그러한 쇠퇴를 재촉하는 요소로 재빨리 변신했다.

     

    물질적 조건은, 기존 사회 내에 이미 그 전제가 존재하고 또 이러한 전제의 압력이 새로운 체제의 창립을 시작할 만큼 충분한 그러한 새로운 사회 유형으로의 진행을 허용한다.

     

    “더 발전한 새로운 생산 관계는 자신의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부화가 되기 전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맑스, 앞글)

     

    생산이 낡은 사회 내의 마지막 한계에 다다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극복할 수단이 이미 존재하거나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것 또한 필요하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역사적으로 실현될 때, 사회가 새로운 생산 관계를 채택하는 것이 의제가 된다. 그러나 낡은 사회의 저항(옛 특권계급, 관습과 습관의 관성, 이데올로기, 종교 등)과 두 조건의 실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은 그러한 변혁이 점진적이고 직선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퇴행, 파국, 질적 도약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체제의 쇠퇴기는 그 안에 역사적 도약이 일어나지 않는 시기이다.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의 증대하는 모순의 표현이자, 옷이 너무 꼭 끼게 되어버린 육체의 병이다. <계속>

     

     

    <주>

     

    1) 전쟁의 발전은 평등적 사회관계의 포기에 적극적 요소였다. 즉 반영구적 교전상태라는 조건은 특화된 전사 층의 출현을 요구했는데, 이들은 집단 전체에게 부의 제공자처럼 보이는 경향이었고 그래서 그 공동체의 나머지가 그러한 전사들의 유지를 보증하면서 그 공동체 내에서 위계적 관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요소 자체는 단지 생산성의 성장이 노예제로의 길을 허용했을 때만 중요하게 되었다.

     

    2) 이러한 관계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c/v(불변자본 나누기 가변자본)에 의해 부분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작성

    오세철 옮김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section1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section2

     

    자본주의의 쇠퇴 1장 - 하나.pdf



    <이전 글>

    서론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33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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