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10호] 코뮤니스트의 발자취를 따라 2
  • 코뮤니스트의 발자취를 따라

    기억과 망각의 도시를 찾아 -



    기억과 망각의 도시, : 트리어(Trier)에서 브뤼셀(Brussels)까지

     

    다섯째 날, 이날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긴 시간, 긴 거리를 이동한 날이다. 새벽 5시 반에 숙소에서 출발한 우리는 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A로 시작되는 유럽의 고속도로를 끝없이 달리고 달렸다. 파리를 조금 벗어나자 가로등도 없고 지나는 차량도 별로 없는 어두운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게 되었다. 한밤중처럼 너무 깜깜해서 주변 풍경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한참을 가다가, 운전이 마치 우주선을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쯤,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동부 농촌 지역은 정말 넓고 평탄했다. 중세와 근대에 이곳에서 벌어진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몸도 숨길 곳이 없는 전투, 그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아니 희생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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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4> 드넓은 프랑스 동부 농촌 지역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의 경계에 가까워졌을 때 주유도 할 겸 휴게소에 들렀다. 정말 신기하게도 각자 출발해 다른 경로로 독일에서 만나기로 한 일행과 여기서 만났다. 우리가 한 팀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걸까? 사실 오늘 늦게 합류하는 동지를 위해 한 동지가 독일 행을 포기하고 파리에 남았기에 우리가 일찍부터 움직일 수 있었다. 누군가는 동지 사이의 고마운 배려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희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러한 배려는 여행 기간 내내 모두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특별한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함께 여행한다는 것 자체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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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5> 프랑스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주유를 위해 토론하는 일행


    프랑스에서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에서 독일, 독일에서 룩셈부르크, 다시 벨기에까지 다섯 번 국경을 넘었지만, 이정표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언제 국경을 넘었는지 알 수 없는 고속도로였다. 다만, 고속도로 통행료가 있는 프랑스와 무료인 나머지 나라, 휴게소 화장실이 유료인 벨기에와 무료인 나머지 나라, 속도제한이 있는 프랑스와 없는 독일로 구분하는 게 편했다.

     

    트리어(Trier)에 진입하면서도 길을 잘못 들어, 독일의 시골 마을 몇 개를 작은 강을 따라 드라이브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6시간 넘게 걸려 드디어 트리어에 진입했다. 이곳은 맑스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유명한 도시라서 우리의 방문이 특별하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맑스 생가는 박물관처럼 꾸며져 볼거리도 많고 사람도 꽤 있었다. 유료로 입장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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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6> 맑스 생가, 독일 트리어

     

    어제는 파리에서 맑스의 신혼집을 보았고, 아르장퇴이에서는 그의 말년을 보고 왔는데, 오늘 방문한 이 집은 그의 일생 전체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수많은 망명지와 이주의 삶...


    가난하고 고단한 혁명가의 삶이란 2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혁명과 반혁명의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서 망명 생활까지 하면서 투쟁하는 코뮤니스트는 찾기 어렵다. 그래서 조직 활동과 기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혁명운동을 한다거나 직업적인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109년 전의 볼셰비키처럼 학습을 조직하고 (당 건설을 위한)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을 규합하는 것이 혁명운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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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7> 맑스 생가 뒤편 정원

     

    이곳에는 맑스와 가족, 그리고 엥겔스 등의 동지뿐 아니라 그들의 후예라고 불리는 혁명가들도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레닌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야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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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8> 맑스 생가 전시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이다. 3층으로 올라가자 내 눈을 의심할 만한 전시물이 계속 펼쳐져 있었다. 맑스주의를 심각하게 왜곡했거나 사회주의/코뮤니즘과 무관한 이들이 맑스의 전시관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과거 스탈린주의 국가의 (향수에 젖은) 관광객과 자신들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임을 감추기 위해 맑스주의,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나라의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이라고는 한다. 할 말을 잃은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시를 하느니 차라리 파리에서처럼 작은 문패 하나 걸어 놓고 전시실은 없애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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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9> 트리어, 칼 맑스 버스 정류장

     

    트리어에서 맑스와 맑스 후계자들에 대한 기억을 과도하게 접하고 난 우리는 맑스의 망명 도시 브뤼셀로 향했다. 트리어에서 지체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에 들러 피크닉 분위기를 느끼며 샌드위치 도시락이라도 먹고 출발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부족해 최선을 다해 브뤼셀로 달렸다.

     

    브뤼셀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그랑플라스(Grand Place)로 향했다. 물론 브뤼셀 입구에서도 길을 잘못 들어, 아담하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길을 십여 군데 지나치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거리마다 하나씩 있는 회전교차로는 정말 벨기에 운행의 진수였다.

     

    브뤼셀 중심에 있는 그랑플라스는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유명해서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 관광명소에도 맑스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랑플라스 입구의 전망 좋은 곳에 있는 레스토랑이 그곳이다. 여기서 맑스는 브뤼셀 망명 시절 유럽의 여러 동지들과 자주 회합했고,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었다. 1846년 맑스는 브뤼셀에서 코뮤니스트 통신위원회를 결성하고, 184711월에 개최된 코뮤니스트 동맹 2차 회의에 따라 조직의 강령으로 코뮤니스트 선언을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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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20> 맑스가 자주 방문했다는 그랑플라스 레스토랑, 벨기에 브뤼셀

     

    이 레스토랑에는 맑스가 유럽의 동지들과 신년회를 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 맑스 명판을 붙여놓은 것도 신기했지만, 한국인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이곳에 브뤼셀 야경이나 벨기에 맥주의 맛을 즐기러 온 게 아니라 맑스의 흔적을 찾아온 우리가 있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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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1> 브뤼셀, 그랑플라스 야경

     

     이렇게 우리는 트리어를 거쳐 브뤼셀까지 즐기고중간에 워터루라는 작은 마을도 들르고안전할 것 같지만위험천만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려 자정이 지나 숙소에 도착했다이날 운행한 총 거리는 알 수가 없지만운전 시간은 14시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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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2> 브뤼셀에서 체포되는 맑스

     

    여섯째 날은 오후에 차량을 반납하고, 드디어 대중교통을 이용한 두 번째 투어가 시작되었다. 넷째 날과 이날 방문한 파리 코뮨의 역사적 장소, 파리 시내 투어를 하면서 방문한 68혁명 관련된 이야기는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 사진으로 대신한다. 그런 역사는 책으로 제대로 읽어야 하고, 타자의 눈이 아닌 본인의 관점으로 보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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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3> 1871521~28, 파리 코뮨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 총살당한 전사들을 기리는 벽, 페르라셰즈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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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4> 파리 코뮨의 첫 전투가 있던 몽마르뜨


    그전까지 몽마르뜨는 공동묘지와 오래된 교회와 포도밭이 있던 곳으로 유명했다. 그뿐이었다. 화가들이 모여들었다는 몽마르뜨는 파리 코뮨의 패배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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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5> 1968년 맑스의 사진 아래 앉아있는 소르본대학의 학생, 세르지오 델 그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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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6> 소르본대학 근처의 카페 거리, 1686년 문을 연 카페

     

    맑스가 태어난 지 200년이 넘었고, 4대가 지나갔다. 그는 떠났어도 코뮤니스트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코뮤니스트 정신은 무덤에 묻혀 있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혁명의 기운으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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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7> 맑스의 증손자 칼장 롱게의 묘(1904~1981), 페르라셰즈 공동묘지



    10월의 어느 날, 그리고

     

    먼저 가신 혁명가/코뮤니스트를 기억하고 제대로 계승하는 일은 원칙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꼭 필요한 기억은 망각되고, 어떤 기억은 왜곡되고, 어떤 기억은 과장되어 후세대들에게 제대로 전해지는 것조차 힘든 게 우리 운동의 현실이다. 나는 이전 세대 코뮤니스트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일에 있어 그들을 우상화하거나 일상적인 삶까지도 특별하게 보존하고 상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의 이른바 운동권 좌파들은 혁명가들과 혁명의 역사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발전과 조직화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파, 지위, 세력 유지에 이용하면서 코뮤니스트 정신을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코뮤니스트의 발자취는 계속 남아있고,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행이 꼭 지리적 방문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코뮤니스트의 사상과 삶, 그리고 당대의 생생한 투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앞서간 코뮤니스트들이 지켜왔던 원칙과 함께할 동지만 있다면 언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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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8> 자유여행 일정


    이번 여행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하는 여행이라서 이 정도로 정리하고 다음을 준비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을 준비하고 안내하고 무사히 마칠 수 있게 애써주신 파리의 정 선생님, 일정상 다소 무리가 있었음에도 기꺼이 함께하고 서로를 배려해준 동지들이 있었기에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감동적이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도시는 잊혀 질수도 있으나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잊지 않을 것이다.


    코뮤니스트의 발자취! 인터내셔널을 향한 발걸음!

    우리의 삶은 여행! 여행은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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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29> Montreuil 역사박물관 맑스 조형물 앞에서


    2019년 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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