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
  • [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 김용균 동지 2주기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임성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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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홀 작업을 하던 노동자 세 명이 질식했다. 지하에 들어차 있던 가스 때문이었다. 세 명의 노동자들이 나오지 못하자, 작업반장은 맨홀 안으로 다시 세 명의 노동자들을 내려보냈다. 그들도 역시 나오지 못하고 쓰러졌다. 질식한 세 명의 노동자를 포함해서 구조하러 간 사람 중의 한 명까지 네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재료 분배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회사에 안전고리의 교체를 요구했다. 고리가 낡아서 사고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작업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안전고리를 교체해주지 않았다. 그 노동자는 작업 중에 고리가 끊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 결국 그는 사망했다. 이것이 과연 안전사고일까?

     

    맨홀이나 탱크 같은 밀폐공간에서 작업을 할 때는 사전에 환기가 필수이다. 이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점검과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 노동자를 무조건 밀어놓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행위가 작업책임자의 과실이며 안전을 등한시한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안전고리 하나만 제 때 교체를 해주었으면 낙하물에 의한 사망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업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업의 부도덕과 안전불감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살인'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일들이 노동현장 곳곳에서 일어난다. 똑같은 사고가 똑같이 반복된다. 날마다 노동자를 죽이는 '살인'은 지속된다. 그러나 기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사망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도 않는다.

     

    20181211일 새벽,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졌다. 김용균은 스물네 살, 사회에 첫발을 디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는 끝내 스물다섯 살이 되지 못했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 노동자들에겐 무엇이 바뀌었고 노동현실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김용균의 죽음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법이 27년 만에 국회에서 개정되었지만, 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변한 게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민주노총 등 249개 단체(2020923일 현재)가 참여하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이번 정기국회 내 진행시킬 것을 요구하며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매일같이 5~6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다. 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 우리 곁에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멀쩡한 팔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터지고, 허리가 끊기고, 온몸이 피투성이로 짓이겨져 목숨을 잃고 있는가. 핏물이 타고 뼈마저도 녹아서 없어지는가. 어떤 악독한 살인자들이 무기를 쥐고 있는가? 친기업 정부라고 하는, 오로지 자본가를 위한 권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살인교사자'들은 아닌가?

     

    어제의 김용균이 오늘의 김용균이다. 어제의 김용균이 오늘도 손전등을 들고 밤을 꼬박 새우고 있다. 저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까마득한 철제 난간 위에서, 지하의 깊은 가스실 안에서 비좁은 기계 틈을 기어가고 있다. 살이 발린 생선가시처럼, 비 맞은 새처럼 떨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나라인가? 자꾸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자랑만 넘쳐난다. 한국은 전 세계 200여 개의 국가 중에서 경제규모 11위의 경제대국이라고 한다. 군사력은 세계 6위 수준의 강국이라고 한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고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풍요와 번영의 나라라고 하는데, 노동자들은 OECD 국가 산재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죽어간다.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힘들고 어디에서건 비정규직으로 밀려나고 있다. 하루아침에 푸른 생명의 종지부를 찍고 통곡 속에 누워 있다.

     

    우리는 기억한다.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민호라는 특성화고 학생이 야간일을 혼자 하다가 기계에 몸이 눌려서 죽은 일을. 민호는 한 달 잔업만 100시간이 넘었다고 한다. 열여덟 실습생을 그렇게 죽도록 부려먹다가 끝내 죽이고야 말았다. 그와 같은 일은 50년 전에도 있었다. 전태일을 분신하게 만들었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다락방 소녀들도 그랬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본격적으로 산업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30년 전에도 그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세계가 놀랄만한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아마 이대로 간다면 30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고 다쳐도 그들의 고통을 세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무수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기업도 정부도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떼죽음을 당해도 뉴스에서는 그저 흔히 발생하는 사고로만 보도한다. 슬픔과 애도는 앰뷸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보다도 짧다. 노동문제가 되거나 사회적 의제가 되는 경우는 김용균의 경우처럼 극히 일부일 뿐이다.

     

    2020521,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의 발표문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에서는 창사 이래 467번째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아무 탈 없이 배를 만든다. 최고경영자는 467명의 목숨을 앗아간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예방조치를 취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별다른 비용을 쓰지도 않았다. 기업에겐 볼펜 값도 안 되는 돈으로 과태료나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 한국의 대기업, 건설현장, 고위험사업장, 하청업체 등 모든 곳이 다를 바 없다.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네, 공정개선 명령을 내리네, 하면서도 기껏해야 현장 소장이나 과장 같은 하급책임자를 기소하면 끝이다. 노동자의 사망사고로 기업주가 인신 구속된 적은 거의 없다. 벌금이라야 고작 몇 백만 원에 불과하고 많아야 1000~2000만 원이 상한선이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를 죽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정부가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나쁜 정부와 더 못된 시어미 노릇을 하는 국회에서 노동자를 살릴 수 있는 보호법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동자의 사망을 살인의 범주로 보지 않고 단순한 과실로 처리하는 노골적인 방관행위이다.

     

    꿈 많은 청년 김용균의 몸이 찢겼지만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컨베이어는 다섯 시간 동안이나 계속 돌았다. 주변엔 비명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었다. 본래 정규직이 담당했던 일은 외주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맡겨졌고, 그의 젊은 피는 한줌의 검은 먼지를 가라앉히는 데 쓰이지도 못했다.

     

    김용균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은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과 만납시다라고 적힌 손팻말이었다. 그의 유품은 작업모를 쓴 사진과 고장난 손전등, 그리고 컵라면 세 개였다.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숨진 김 군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면서 일하다 가방 속에 컵라면을 남겨두고 갔다. 두 죽음이 닮은 것은 컵라면뿐일까? 이들의 죽음은 원청과 하청, 외주화와 용역, 간접고용과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한국 노동자들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이윤이 종교가 된 기업, 노동자의 하소연이 들리지 않는 정부의 공모가 어제의 김용균과 오늘의 김용균이라는 죽음을 낳고 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컵라면과 촛불을 분향소에 놓고 외쳤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죽음의 외주화를 멈춰라" "일하다 죽지 않게 해달라". 그러나 김용균 2주기가 되는 올해에도 2000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사망했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에도 끼임, 추락, 압착 등의 인재에 가까운 중대재해로만 한정해도 매년 600여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차고 넘치는 김용균의 죽음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죽음의 아가리에서 꺼낼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믿음은 퇴색되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노동자가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마저도 관철되지 않는 나라는 분명 큰 문제가 있다. 노동자가 노동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복지국가 대한민국'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김용균이 죽어야 정상적인 사회가 될까.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국·캐나다·호주 등 외국은 '기업 살인법'으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는다. 사망사고는 매출액보다도 많은 벌금을 물려 기업의 문을 닫게 하기도 한다.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면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기업의 주의 의무와 책임 태만에 따른 근로감독과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이 노동자의 목숨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이 일하는 사람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또 그럼에도 저기, 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청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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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김용균

     

    내 영정을 들고

    내가 걸어가네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부르르, 주먹을 쥐었다 펴면

    핏빛 햇살 한 줌

    저기 떨어진 내 머리

    저기 끊어진 내 몸통을

    내가 끌고 가네

    맑게 빛나는 내 눈이

    차갑게 감긴 내 눈을 보네

    내 영정에 양복을 입히고

    파란 넥타이 꿈을 동여매고

    울먹울먹 절하네

    스물다섯이 되지 못한

    내가 먼저 가네

    차마 돌아서지 못한 나를 안고

    내가 울며 붙잡고 있네

     

    |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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