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
  • 아픈 몸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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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사회는 아픈 몸을 차별, 배제, 혐오한다.

    질병은 생명체에게 필연이고, 과거 인류에게 생로병사는 삶의 일부였으나 자본주의와 의료 권력은 생·로·병·사를 특수이자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과 의료가 결합하면서 건강의 기준은 더욱 높아지고, 아픈 몸은 의료시장의 소비자가 되었으며, 더 많은 의료 소비를 낳았다. 자본은 강도 높은 노동이 가능한 몸만을 ‘좋은 몸’, ‘표준의 몸’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산다.

    산업재해, 장시간 노동, 성폭력과 성차별, 불안정 노동, 불안정 주거, 성별임금격차, 관리되지 않는 위험물질, 심화되는 불평등, 극심한 경쟁과 혐오, 오염된 생태계 등은 모두 건강을 직접적으로 훼손시키는 요소다.

    이처럼 개인의 건강과 질병은 사회적이고 복합적인 결과임에도 개인이 노력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는데, 자기 관리 실패로 질병이 온 것으로 규정하는 ‘질병의 개인화’ 프레임이 심각하다. 이는 질병을 개인의 잘못이자 불행으로 간주함으로서 아픈 몸에게 자책감을 심어주고, 차별의 대상이 될 뿐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방해한다. 또한 ‘질병의 개인화’는 건강과 질병을 탈정치화시키는 효과를 부른다.

    건강중심 사회에 반대한다.

    문제는 아픈 몸이 아니라, 아픈 몸을 배제하는 사회다. 우리는 건강한 몸을 기본값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몸을 무조건 열등하고 불행한 몸으로 취급하는 건강중심 사회에 반대한다. 아픈 몸은 건강중심, 의료중심, 자본주의 사회에 질문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균열을 내는 존재다.

    우리 사회에는 질병권(잘/아플권리)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픈 몸이 회복되지 않아도 평등하고 온전한 삶이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질병권을 주장한다. 질병권은 건강권을 포함하지만 초점을 이동시킨 개념으로서 아픈 몸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읽고, 질서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픈 몸이거나 아플 몸이다. 사회는 약자를 기준으로 설계할 때, 모두에게 좋은 사회가 된다. 잘 아플 수 있는 사회에서는 아픈 몸이 기본 몸이 되고, n개의 표준의 몸이 존재하며, 누구나 서로를 돌보는 것이 책임이자 즐거움이 된다.

    아픈 몸의 세계를 발굴하고 연대한다.

    여성, 이주민,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 난민 등 사회적 소수자에게 질병은 다르게 경험된다. 이들의 경험과 맥락을 저항적 질병서사로 복원함으로써 질병이 사회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면밀히 드러낸다. 질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그 자체로 사회적 결과이며,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이 보다 밀도 있게 밝혀져야 한다. 그리하여 질병의 언어를 급진적으로 정치화하고, 아픈 몸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도록 하는 사회에 저항한다.

    아픈 몸의 공동체적 실천을 제언한다.

    질병권 운동을 통해, 아픈 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기존의 질서에 질문한다. 혐오와 낙인 속에서 고통받았던 우리의 경험을 변혁의 새로운 자양분으로 만든다. ‘주관적’이고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것들을 공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것으로 재전유할 것이다.

    과거 ‘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듯, 현재 건강중심사회에서 우리는 ‘아픈 몸에게 권력을’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혁명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제언이고 실천이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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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꽉 쥔 주먹이 하늘을 향해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1. 우리는 평등한 돌봄을 원한다

    ① 모든 몸은 평등하다. 성, 계급, 국적, 연령, 장애 등의 차이로 인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② 의료는 공공의 영역이며 무상의료는 국가의 책무이다. 모든 사람은 사회, 경제, 문화에 따른 차별 없이 공정한 치료 받을 권리가 있다.

    ③ 모든 사람은 아플 때 필요한 물적 토대, 문화, 정서적 지지 그리고 돌봄 받을 권리가 있다.

    2. 아픈 몸들이 차별받지 않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① 아픈 몸은 아픈 상태를 의심받지 않고, 아프지 않은 몸으로 회복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② 아픈 몸은 수치와 자책의 대상이 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아픈 것은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③ 아픈 몸은 자신의 몸에 맞게 적절히 원하는 만큼 노동하고 사회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노동과 사회활동이 가능하도록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④ 병명, 발병 과정, 투병 과정으로 아픈 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⑤ 아픈 몸은 가정, 일터, 그 외의 사회 공동체에서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3. 우리는 전인적 회복을 지향한다

    ① 아픈 몸이 처해지는 상황은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다학제적 개입을 통해 아픈 몸이 통합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전인적 의료가 시행되어야 한다.

    ② 아픈 몸에 대한 연구와 지식은 의료 전문인, 보건 활동가뿐만 아니라 아픈 당사자의 경험과 증언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③ 국가는 아픈 몸들이 의료 정보에 접근하기 쉬운 경로를 개발해야 한다. 지식이 특정 의료 종사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투명한 정보공개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상업적이지 않은 양질의 의학 정보의 대중화에 힘써야 한다.

    ④ 아픈 몸에 대한 정책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의 요구에 맞추어진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소수자들이 자신의 건강에 대한 주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제공, 모니터링과 정책 개발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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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꽃을 두고 두 사람이 거리를 둔 채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언스플래시

    4. 아픈 몸들은 저항하고 연대할 권리를 지닌다

    ① 아픈 몸은 자신의 질병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인식하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행동을 할 권리를 지니며, 이에 대해 각 영역에서 지속적인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체를 구성할 권리를 가진다.

    ② 아픈 몸은 현재의 가부장제, 경제적 불평등, 이성애중심주의, 국가주의, 연령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등의 정상화의 패러다임에 의해 지속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집단에 연대하며 이들의 자유, 기회, 역량의 증진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이러한 구조적 억압이 아픈 몸과 연결되는 지식과 실천의 생산에 힘쓸 수 있도록 하는 대안적 가능성의 권리가 있다.

    ③ 아픈 몸은 회복되어 돌아가야 할 정상 상태를 욕망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확장 시켜 나가는 가운데 자신의 아픈 몸을 위치 짓고 성찰할 수 있는 관계성과 연대성의 권리를 가진다.

    ④ 아픈 몸은 자신의 질병이 지워지거나 부정되어야 할 경험이 아니라 발언 되고 다른 아픈 몸들과 공유되어야 하는 자원으로 인식하는 자기 서사의 권리를 가진다.

    ⑤ 아픈 몸은 공식적이고 전문화된 지식이나 상업적인 지식과 같이 현재 유통되고 있는 지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과 맥락에 처한 아픈 몸의 경험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리에서 시작되는 연구와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⑥ 아픈 몸은 자신의 몸에 대한 온전한 경험을 살아내는 시간 동안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실존의 필요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그에 따라 코뮌을 구성할 권리와 더불어 코뮌의 요구를 알리고 아픈 몸의 권리를 국가에 강제할 수 있는 청원권을 가진다.

    ⑦ 아픈 몸은 현재 자본화·상업화되어 있는 의료 시스템의 불균형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하여 공공성과 호혜성의 원리에 따라 의료 시스템이 다시 재구축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⑧ 아픈 몸은 아픈 몸을 배제하고 아픈 몸 간의 위계를 발생시키며 그로 인한 차별을 심화시키는 현재의 진단 기준을 폐지하고 누구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불안이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평등한 진료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⑨ 아픈 몸은 아픈 몸을 둘러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차별로 인한 일상에서의 폭력에 반대하며 누구나 안전하고 편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주거·교육·의료·복지에서의 포괄적인 혜택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⑩ 아픈 몸은 셈해지지 않는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아픈 몸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삶의 권리를 주기 위해 생애 주기에 맞는 복지 서비스와 아픈 몸의 욕구에 기반한 요구를 반영하도록 함으로써 누락되는 아픈 몸이 없이 모두가 사회적 성원권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함께 연대한다.

    ⑪ 아픈 몸은 자신의 질병을 규정하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수치나 자책을 강요받는 일이 없어야 하며 아픈 몸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 낼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지원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로써 아픈 몸을 새롭게 규정하고 아픈 몸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는 자유로운 운동을 제안할 수 있도록 한다.

    ⑫ 아픈 몸은 자신이 아픈 몸 때문에 겪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문제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다만 법정 장애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픈 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가시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국가와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와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어야 하며 실제로 이들의 요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아픈 몸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 아픈 몸을 “살”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 할 과도기적인 단계로 보는 한 “죽게 내버려”지는 삶들을 구제할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 자본의 소모품으로 “살”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 우리는 “죽게 내버려 두는” 시스템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연대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아픈 몸들의 연대는 우리 사회 곳곳을 가로지르는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픈 몸들의 투쟁은 당신의 삶 어딘가에서 반드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픈 몸들의 투쟁은 그러할 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줄 것이다. 함께 해 줄 사람들이 있으며 당신의 한 걸음이 아픈 몸 모두가 내딛는 한 걸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우리가 보내는 이 선언문은 당신에게 보내는 저항에의 초대장이다. 이제 우리의 연대에 함께 하자. 우리에게는 저항하고 연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20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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