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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 조회 수: 2205, 2022-06-20 18:53:23(2022-05-25)
  •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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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에 이어 또 하나의 선거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지방 권력과 교육감을 뽑는 선거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측면에서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는 본질에서 같다. 오히려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치에서는 중앙정치보다 계급적이라 볼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는 노동자들에게 전혀 특별한 것이 없지만, 일부에서는 부르주아 양대 분파에 대한 심판과 자신들을 대변할 세력을 선출하는 장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투표는 속임수일 뿐이다. 우리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실업자이든 퇴직자이든 현재의 선거는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지난 4년 전에도, 8년 전에도, 그 이전에도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수많은 약속을 해왔다. 노동자들이 조금 더 참고 함께 위기를 극복한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생활과 노동조건은 좋아질 것이라 약속했었다. 말 그대로 4년 후, 8년 후 변화된 상황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나빠지는 쪽으로의 변화였지, 개선이 아니었다. 끝 모를 경제위기는 모든 노동자에게 중압감을 느끼게 했고, 그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복지와 연금은 줄어들고, 주거와 생활비용은 비싸져만 가고, 상시적인 해고 위협과 불안정한 일자리, 장기적인 실업,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다수의 노동자가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정도만 허락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약속한 변화의 전부였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그리고 1991년 부활하여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 지방선거 이래 30여 년이라는 기간,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하거나 누구도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각종 차별에 직면해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으며, 투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노동 정당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노동자를 팔아 정치판에 뛰어들어 엄청난 재정적, 인적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투쟁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환상과 좌절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를 서커스환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며, 투표행위로 자신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라는 이벤트에서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 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차려놓은 서커스 공연에 곡예사로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선거를 통해 투쟁을 확산시킨다거나 후보를 내세워 투쟁의 구심을 세우겠다는 발상 역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유권자의 측면에서도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노동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계급은 작업장, 회사의 동료들과도 투쟁 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자본가를 포함한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으니 따르라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그런데 왜 의회 제도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 또는 자칭 혁명 세력조차 선거에 참여하거나 선거 전술을 사용하는 것일까? 정말 선거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합법적인 사회주의 선전선동의 연단이 선거시기에는 열리기 때문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는 거짓이고 하나는 환상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선거 참여는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레닌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선거에 대한 입장과 1930년대 트로츠키의 투항 전술이 혁명적 의회주의’, ‘선거 전술이라는 논리로 포장되어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원칙으로 받아들여져 온 결과이기도 하다. 이른바 선거 전술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현재까지도 전혀 시정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논쟁의 본질은 의회 전술 자체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 상황과 그에 따른 적용 문제, 즉 러시아의 후진적 정치 상황에 적합한 볼셰비키의 의회 전술을 일반화하여 유럽 국가들에도 적용하려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 수준 괘도에 올라 의회의 이용 자체가 혁명운동에 걸림돌이 된 유럽 코뮤니스트 좌파들의 반()의회 혁명 전략의 대립이었다. 당시 서유럽은 이미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계급 일부가 되어버렸고, 이들이 진출한 의회가 오히려 노동계급을 학살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혁명적 코뮤니스트들은 의회를 이용하기보다는 의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반()의회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과거의 논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선거 전술과 의회의 혁명적 이용이 가능해지려면, 현재의 부르주아 선거제도에서 의회 제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연단을 열 수 있어야 하며, 의회제도의 활용이 계급의식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의 경험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결과만을 보여주었다. ‘혁명적인 의원단은 의회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없으며, 설사 그러한 전략이 있는 정당이었더라도 부르주아 정치에 적응하면서 타락하여 결국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물론 이들에게 표를 던진 노동자들은 혁명적 경험이 아닌 타락의 경험만을 갖게 되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부르주아 의회와 민주주의는 혁명적 의원?’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애국가를 강요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철의 원칙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의회제도의 활용은 바로 이런 것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민주주의 규칙과 선거제도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이거나 투표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선거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인, 그리고 삶에 직접 도움이 되는 투쟁을 위한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미래는 노동계급 스스로 일어서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선거운동과 선거 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위한 행동을 준비하자. 고립되거나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는 우리의 노동자 투쟁에 하나의 계급으로 연대하자.

     

    자본주의 쇠퇴기 모든 부르주아 선거는 사기와 다름없다. 매일 세계 곳곳에서 수백 번 넘는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1년에만 수만 번의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고작 몇 년에 한 번 치루는 선거만으로 노동계급은 자신이 누려야 할 권력을 빼앗기고, 일상의 대부분을 지배받는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선거를 통해 노예가 되는 민주적인 권리의 실체다. 노동자들이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와 선거제도에 복종하는 한,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노동계급의 정치는 투표소가 아니라 저항하고 투쟁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살아 숨 쉬며 토론하고 행동하는 곳,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2022년 5월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 이 글은 코뮤니스트4호에 실린 글을 축약하여 재발행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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