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
  • [혁명운동가 이수갑 선생 8주기] "혁명가는 대중 속에서 원칙을 갖고 창의성과 역사의식을 갖고 활동해야 돼”
  • "혁명가는 대중 속에서 원칙을 갖고 창의성과 역사의식을 갖고 활동해야 돼 ”

     

    글 ㅣ 남궁원

     

    <편집자 주>

    이 글은 고 남궁원 동지가 2009년에 이수갑 선생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을 보완해서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첫째, 이수갑 선생과 남궁원 동지 모두 고인이 되었고, 평생에 걸쳐 코뮤니스트의 삶을 치열하게 살다간 두 사람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둘째는 독재와 반공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짧지만 소중한 코뮤니스트 운동의 경험자로서 최선을 다해 혁명가의 길을 걸었던 이수갑 선생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계승을 다짐하며, 현재의 코뮤니스트 운동은 그와 그 시대의 경험조차 혁명적으로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코뮤니스트가 현재의 운동을 넘어서야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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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의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라면,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 일어난 혁명운동과 그 속에 뛰어든 혁명적 삶과 활동을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크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래서일까, 이 수갑 선생(84세)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연과 집필로 바쁘다. 선생은 강연과 집필을 통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세력에 ‘거침없이’ 쓴 소리와 비판을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선생은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내는 신문에, 민주노총 비판과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선생은 모 사회주의 정치조직 고문도 그만두셨다고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탈퇴를 했다. 쉽지 않은 정치 행보다.


    그런데 나는 선생을 꿋꿋한 민족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본 것은 96~7년 총파업 범국민대책위 시절, 전국민중연대 중앙 상황실에 파견돼서 일할 때였다. 대개 중앙 전선체 조직은 공동대표 명단에 이름 있는 명망가 선생을 올리곤 했는데, 그때 나는 민족정기수호협의회 상임대표이자 범민련 활동을 하는 선생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민족정기수호’, ‘범민련’ 단체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선생을 ‘꼿꼿한 민족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의 ‘변신(?)’은 놀라웠다. 선생의 생각이 바뀐 걸까? 이런 의문을 갖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구속노동자 후원회 사무실에서, 선생을 두 차례 걸쳐 7시간 쯤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의 의문은 인터뷰 과정에서 풀렸다.

     

    선배 코뮤니스트의 엄명

     

    “조직이 붕괴됐을 때, 혁명가는 대중 속에서 혁명적 원칙을 갖고 창의성과 역사의식을 갖고 활동해야한다.” 조선공산당, 남로당, 전평이 탄압을 받아 붕괴되면서, 선배 공산주의자들이 준 마지막 ‘엄명’이다.


    이 말은 선생이 평생 갖고 있는 코뮤니스트의 ‘조직 활동 원칙’이 되었다. 선생은 이 엄명을 평생 가슴 속에 품고 27년간 수배생활, 6번의 옥중 구속생활을 견디면서 활동을 했다.


    선생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청년연맹, 남로당, 전평 활동을 거쳐, 사회당, 진보당 중앙위원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노총(지금의 한국노총) 분쇄 배후조종(?)기를 거쳐, 87년 공개 대중운동 전면에 나선다. 그 출발이 민족정기수호협의회다. 뒤에 범민련,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민주노동당 활동 등을 전개한다. 지금은 전국철도노동조합, 운수산별노조, 구속노동자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이렇듯 선생은 20대 청년의 나이에서 65여 년 동안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실천운동 속에서 살아왔다. 선생은 한국 현대사에서 굵직한 정치조직에서 활동해왔고, 노동운동에 깊숙이 개입한다. 그러면서도, ‘민족주의’ 조직 운동 계열에도 참가했다. 이런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선생의 정치적 행보와 실천 활동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하는 철저한 코뮤니스트  ‘조직가형’이다. 선생의 장점은 원칙적인 코뮤니스트이면서도, ‘종파주의’와 명백히 거리를 두는 데 있다. 자신의 운동 논리로만 역사 분석을 하지 않고, 계급투쟁 현장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한다.

     

    선생은 인터뷰 내내 선배들이 활동한 코뮤니즘(공산주의), 계급운동의 원칙과 역사의식을 줄곧 강조하면서, 가족사를 얘기할 때는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제 노 혁명가가 후배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는 ‘운동의 삶’과 ‘원칙’을 들어본다.

     

    계급 본능으로 조선공산당 청년연맹에 참가


    한국사에서 격동의 시대는 1945년 해방 직후 시기다. 해방되던 다음 날 형무소에 쏟아져 나온 공산당 관련자만 수천 명이었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숫자가 수개월 만에 3만 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을 사고하면서, 뛰어든 노동자는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당시 1946년 미군정청 설문조사를 보면, “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가운데 어느 쪽을 찬성하느냐는 설문에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사회주의 70%, 모른다 8%였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1)


    3대째 머슴 집안에서 자란, 21살 청년 이수갑이 ‘운동’과 ‘혁명’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출신 성분에 따른 계급 본능이었다.

     

    나는 3대째 머슴 자손인데, 소작인들은 남의 농사를 해서 사는데, 우리 집은 소작도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가 부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일제 때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신문배달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입학금이 없어 정규 초등학교에 입학을 못하고, 부산에 있는 사설 진수사립학원에 입학금 없이 6년 초등학교 과정을 다녔습니다. 아버님은 중풍에 걸려서 머슴살이도 못하고 집에 누워있었습니다. 집에 형님 두 분과 누님 한 분이 계셨고, 나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연필이 없어서, 친구들이 버린 쪼가리 연필을 주워서 쓰고, 헤진 고무신을 주워서, 철사로 꿰매서 신고 다녔습니다. (선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가 부잣집 대문을 두드려서, 소쿠리에 밥을 얻어오는데, 흰밥, 보리밥이 섞여있었습니다. 걸인 노릇을 하면서 어머니가 여러 군데 동냥을 해서 얻어온 밥이었습니다.


    19살에 내가 일본에 징용을 갔는데, 해군시설부였습니다. 그전에 경산일산자동차 주식회사에 급사로 취직해서, 급사질 하면서 자동차기술을 배웠습니다. 나는 19살까지 견습공을 하면서 일곱 식구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일본 강제징용 갔다가 고국에 21살 때 돌아왔습니다. 그때 45년 해방이 되면서, 일본, 중국, 만주 등에서 강제 징용되거나 연행됐던 귀환동포들이 돌아오는데, 부산 부두에 도착합니다. 나는 부산 수용소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우리 동포들이 부둣가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힘을 주면서) 워~낙 고생 짓을 해서 그런지, 그런 동포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난한 동포들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귀환동포 정착 도우는 일을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때 조선공산당 청년동맹이 귀환 동포 정착시키는 활동을 합니다. 당시 부산 범촌1동에서 일본 놈들이 관리하던 집을 노숙자들과 투쟁해서 얻어냈습니다. 내가 귀환동포 구조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조직에서,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위에서, 내 출신성분과 성향을 검토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는 청년회에 가입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공산당 산하조직인줄 모르고 가입했는데 열흘 후에 알고 보니 조선공산당 청년동맹이었습니다.

    해방 되던 해 3일 후 8월18일, 조선공산당 청년동맹에 가입한 셈입니다.

     

    아! 이제 활동을 해야겠다.

     

    당시 조선공산당 청년조직에서, 조직 가입할 때 출신성분을 중요하게 따졌습니다. 엄격했죠. 나는 기본(무산자 계급)출신이고, 환경이 변질 요소가 없다고 봐서 그런지, 조직에서 중요한 과업을 맡겼습니다.


    나는 자동차 기술을 갖고 있어서, 취직을 했습니다. 내가 자동차를 고쳐 준 사람이, 부산 철도국장으로 가게 됩니다. 그 사람의 주선으로 21살에 철도 취직을 하게 됩니다. 철도 수송계입니다. 당시 왜놈들이 물러나서, 기술자가 없어서, 부산에 있는 공업대 교수의 부탁으로 대학교에서 자동차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조직선(조선공산당)에서, 45년 10월초인데, 철도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사전모임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삐라(전단지)가 막 뿌려지는데, 삐라 내용을 보니까, “빈곤이 없어야 한다.”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는 7가지 슬로깡(구호)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찡했습니다. 아! 이제 내가 꼭 여기에서 활동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도 170개 수송 책임자인 좋은 직장을 관뒀습니다.


    조직선에서 나를 부산 철도 분회장을 시키더구만. 나중에 알았는데, 조선공산당이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2)을 조직하는데, 내 출신성분과 성향을 봐서 한 겁니다. 그래서 철도노조 산별건설 과정에 참석하게 됩니다. 11월1일 2일 철도 산별이 만들어지고, 11월 5일 전평이 결성되면서 나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 선생님은 처음에 조선공산당인줄 모르고 가입하셨는데, 철도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때 조직 활동과 투쟁경험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전평을 조직하라

     

    부산에서 철도 활동을 하는데, 부산에서 조선공산당 시당 이름을 사용안하고 활동했습니다. 부산에서 지구책을 맡고, 철도에 공장 분회장 활동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노동자가 제일 많았는데 1,700명입니다. 제일 투쟁이 강한 조직이었고, 그 조직화사업을 내가 했습니다. 46년도라, 투쟁을 하면 탄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부청년단, 친일파, 극우 테러 반동 조직들이 좌익계에 위협을 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21살 때였죠. 12월 달에 철도공장을 조직하는데, ‘전평으로 조직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아지트 (지하비밀본부)에 연결돼서 가는데, (상부에서 내려왔다고) 한복을 입고 두루마기를 입은 47살, 48살 쯤 되는 사람한테서 조직지도를 엄격하게 받았습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때 나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당에서 나를 3대 머슴 자손 출신에다, 철도현장, 기본계급 출신이라 해서, 일절 변절하지 않고 전투적이고,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춘 노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점적으로 일을 맡겼는데, 전평조직이라는 말을 일체 말하지 말고,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뭉쳐야 하는 방법을 먼저 현장에서 조사하라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자본과 권력, 공장장, 운영 간부들에 대한 불만을 조사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희망하는 가 이것을 먼저 알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사업을 열심히 해서 갔습니다. 1,700명의 불평은 임금인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동무, 이거는 형식적인 조사”라고 굉장히 비판을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상부에서 (힘주어서) “가장 수월하고, 전체 노동자들 절대 다수가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는 불평을 다시 발견해서 조사”해서 오라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다시 세 번을 조사했습니다.

     

    우동 젓가락 투쟁

     

    그래서 결론 내린 것이 우동 젓가락이었습니다. 당시 공장식당에서 우동으로 점심을 주는데 나무젓가락을 구정물에 씻어서 그 이튿날 다시 써요. 정말이지 노동자가 생산의 주인공인데, 노동자가 우동 먹는 것조차 구정물에서 나온 나무젓가락을 다시 쓰다니.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불평들을 조사해서 다시 (아지트에) 갔는데, “우동 젓가락 투쟁이 가장 적당하다. 이거부터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현장에서 우동 젓가락 투쟁을 하는데, 공장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나무젓가락을 바꿔달라고 대표자 5-6명이 공장장에게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직에서) “야단을 막칩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하는 것이 대중투쟁이구, 조직사업이냐”고. 다시 공감대를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3일 동안 고민을 해서 공감대를 다시 조사했습니다.


    조사 방법은, 식당에서 내가 우동을 먹으면서, 식탁을 탁 치면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어떻게 나무젓가락을 구정물에 씻어서 다시 써, 에이 더러워서 못 먹겠다.” 하면서, 주변의 노동자들 반응을 며칠 동안 체크를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관심과 반응을 보였는지, 추상적인 공감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누구누구가 항의하러 갈 때 갈수 있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노동자를 조직해서 결속된 힘을 갖고 공장장한테 가서 우동 젓가락투쟁을 해서, 나무젓가락 바꾸는 것을 관철했습니다. 이후에 우동에서 보리밥 쟁취 투쟁까지 조직화했습니다. 이렇게 단결해서 뭉치고, (우동 젓가락, 보리밥 쟁취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 스스로 자신감을 갖게 했습니다. 이제 양에서 질로 변하는 투쟁을 하는데, 대중투쟁을 통해, 혁명투쟁요구로 나아가야 한다. 이게 제가 선배들에게서 철저하게 배운 교육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평을 조직하는데 20여일 걸렸습니다. 80여명을 조직했는데, 전평을 하자고 하니까 남은 사람이 30여명이었습니다. 이 30여명이 다시 철도 선반, 용접, 부문별로 1,700명을 조직하는데 배치가 됐습니다. 전평 투쟁을 대중 속에서, 현장 분위기를 대중화시켜서, 실천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직에서 다시 삼화고무신공장, 조선방직공장 조직 사업을 맡겼습니다. 전부 여성 공장인데, 2천명 규모였습니다. 철도에서 배운 조직화 경험을 방식으로 여성들을 조직화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조선공산당 내 여성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전평조직을 노책, 여성을 여책, 청년들을 청책, 농민들을 농책이라 해서, 대중단체 책임구성원들이 당의 핵심골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은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야에서 대중 속에서 지도하고, 선봉대, 전위역할을 하면서 모인 것이 경상남도 남로당입니다.


    나는 철도에 있으면서 조선공산당, 남로당 부산 노책을 맡으면서, 당의 입장을 지도했습니다.

     

    - 선생님 그러면서 해고가 됐죠.

     

    (남로당) 조직 활동과 대중단체 활동을 했는데, 철도 현장에 형사들이 매일 잠복해 있어서, 현장에 못 들어가서 결국 해고통보가 왔습니다. 그때 조선공산당, 남로당 조직 활동은 들키지 않았고, 전평활동가로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구속이 5번이나 됐습니다. 거의 내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내부규율이 있었는데, 체포당하면 당 조직도 파괴된다. 체포를 당하면 그 자체가 이적행위다. 그때 고문이 무지막지했습니다. 결사적으로 보위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엄격하게 이런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말하면 (웃음).


    부산에서 체포 기사도 나고 그랬습니다.

     

    - 선생님은 그러니까 계속해서 비밀스럽게 지하조직 활동을 하신 거죠. 경험하신 전평 9.23 총파업 투쟁에 대해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평가도 좋습니다.

     

    합법적일 때도 46년 초에 나는 반지하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에도 나는 암호로만 접촉을 하면서 활동을 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전평 9월 총파업4)을 통해서 무너졌다고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조직핵심은 다 지하로 들어갔습니다. 조직 핵심이 무너지지 않으면, 절대 조직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는 도당에서 지구책으로, 다시 수습책으로 내려가서 일선투쟁을 했습니다.

     

    전평 9월 총파업 배경, 광주 노동자 대학살

     

    9월 총파업 배경은 한 달 전에 일어난 광주에서 노동자 대학살이었습니다. 해방1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46년 8월 15일 화순탄광 노동자 1,000명이 광주로 집결했고, 전국 어는 곳보다도 노동자의 기세가 드높았던 광주 기념식장이었습니다. 이곳에 대한노총이 미군정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쳐들어왔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현장에서 7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후에 나는 사망자가 300명이 넘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는데, 목격자들은 그 처참함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대한노총의 깡패들은 대회장에 모여 있는 노동자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고, 도망치는 노동자들을 쫒아가서 때려죽이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일당이 광주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이 노동조합의 탈을 쓴 대한노총 깡패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당시의 슬프고 분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습니다.


    광주 노동자 학살이 알려지자, 노동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내가 있던 부산에서도 연일 항의시위를 조직했습니다. 나를 비롯해 부산지역의 노동자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노동자학살에 대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미 1920년대 노동조합 전국조직이 분열되었을 때, 영호남의 노동자들이 연대해 중앙조직을 통합시켰던 역사가 있었던 만큼 영호남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은 각별했던 것입니다. 먼저 철도노동조합의 당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대규모 해고로 인해 노동자 대중들이 분노하고 있었고, 식량부족으로 매일 고통 받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광주 노동자들의 학살은 기름을 붓는 격이었고 파업을 조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철도파업이 대규모 감원에 의해 벌어진 경제투쟁이고, 이것이 급속히 정치투쟁으로 발전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경제주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런 관점은 9월23일 일어난 총파업이 10월1일의 대구인민항쟁으로 발전한 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노동자들의 전위는 (당시 전위는 국가기간산업을 장악하고 있던 철도노동자들이다) 자신들의 파업이 조선의 해방투쟁에서 제기되는 정치투쟁임을 강렬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40년간 일제의 억압 하에 노예생활을 강요받았던 노동자들이 가졌던 해방 당시의 기쁨과 미군정과 우익의 테러를 당하면서 느껴야 했던 좌절감을.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해방 기념식에서 노동자들을 학살한 미군정과 대한노총을 위시한 우익테러집단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독립국가 열망이 결합한 정치투쟁이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23일 부산기관창에서 기적소리와 함께 부산항에 있던 배들이 고동을 함께 울리는 것을 신호로 파업을 감행했습니다. 9월 23일 7,000명의 부산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다음날 15,000명의 철도서울본부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26일에는 전평의 총파업결의가 승인되고, 28일 전화국 노동자들을 위시해 29일까지 전국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80년 광주항쟁이 고립무원상태에서 진압되고 전국이 숨죽이는 것과 달리 46년 당시 전평은 미군정하에서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광주노동자 학살에 항의해 총파업에 나섰습니다. 이 투쟁은 당에서 총지도를 했습니다. 당시 나는 조직선에서 지역책으로 있었습니다. 조선공산당, 전평 9월 총파업 투쟁은 좌익모험주의가 아닙니다.


    11월 3당 합당 후 남로당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이 다시 미군정에 대한 투쟁을 조직했습니다. 조직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 선생님 활동 약력을 보면, 빨치산 활동이 없습니다. 빨치산 활동은 안하셨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죠. 조직에서 당성이 강한 사람을 특선(특별조직에 보낸다는 의미로 빨치산에 사람을 보낸다는 의미)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핵심 성원들을 만나서 특선으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나는 그 성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남동생을 빨치산으로 보내

     

    하루는 아지트에서 제주도 빨치산 윤 장군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특선으로 한명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내게 가장 믿을만한 동무를 소개시켜달라고 했습니다. 내 남동생이 이수건인데, 좌익계 학생동맹위원장 출신입니다. 동생이 정부수립 5.10반대투쟁을 격렬하게 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으로, 동생을 특선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빨치산 활동을 하다 23살에 학살을 당했습니다. 당시 나도 수배가 돼서 전라도에 피해있어서, 그 사실을 20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결국 내가 동생을 빨치산으로 보냈던 거죠.


    지금 진상규명을 신청해놨는데,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동생이 재판도 받지 않고, 부산 원동 근처에서 총살당한 것 같습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진상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철도 활동을 계속하는데, 아지트를 정해놓고, 부산, 진주, 마산을 다니면서, 철도노동자들과 만났습니다. 9월 총파업 투쟁 이후에도 전평은 상당히 많은 기간 동안 건재해 있었습니다. 나는 진주 마산에 가서 기관사, 각 분회원을 만나면서 활동을 해 왔습니다.


    일부 진보적 학자들이 조선공산당, 남로당, 전평이 미군정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곡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가 당시 조선공산당, 남로당, 전평 조직에 있었는데, 조직에서는 미군정을 적대적으로 인식했습니다. 미군이 조선을 도와준다는 착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직의 핵심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원칙문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박헌영 씨가 미군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갖지 않았습니다. (미국) 루즈벨트의 조선 30년 신탁통치 전략이다, 우리는 이런 교육, 교양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북에서 박헌영 씨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봅니다. 당시 남로당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면서 5개 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합니다.


    이승만의 무력북진통일정책에 반대, 진보당 참여

     

    남로당으로 구속돼서 나온 이후, 지하조직 다 무너졌습니다. 제 마지막 직책은 전평 철도노조 경남지부 위원장이고 남로당 경남도당 노책입니다. 남로당이 철도를 중요하게 여겨서 제게 중책을 맡겼던 것 같습니다.


    4∙19가 일어나서, 혁신정당이 많이 생겼을 때 최근우 씨가 만든 사회당에 가입했습니다.


    최근우 씨는 1961년 5·16군사정권에 의해 체포, 수감되었는데 옥사했습니다. 사회당 참여 계기는, 그 당시 혁신세력이 우유부단했는데, 사회당이 계급적 입장을 표방했고, 정강 정책을 보고 가입했습니다. 수적으로 많지 않았습니다. 사회당 경남도당 당무위원 겸 울산지역 위원장 활동을 했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당 깨지면서, 전국적으로 수배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노동자계급 입장에서 통일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부산역전에서 선동하다가 구속당했습니다. 10일 동안 엄청나게 고문을 당했는데, 저는 심문을 거부했습니다. 조사 받을 때 반국가 단체로, 김일성 지시를 받았느냐고 집요하게 캐묻더군요. 나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결상태에서, 독방에 수감됐습니다. 나중에 박정희 정권이 일괄 5만 명 석방할 때 석방됐습니다.


    그 다음에 조봉암이 만든 진보당 발기인으로 사전 활동을 했습니다.


    부산에서 전평 출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조봉암은 반동이다,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승만이 무력 북진통일정책에 반대해서 조봉암이 평화통일 입장이었습니다. 전평 출신들 사이에서 북진통일정책에 반대했는데 평화통일노선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나도 그때 평화통일 노선으로 정리해서 진보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조봉암은 공산독재, 자본독재를 반대했습니다. 나는 자본독재에는 반대했는데, 조봉암의 공산독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진보당 전체 노선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적의식적으로’ 이승만의 극우 무력북진통일정책과 미 제국주의에 절대 반대하기 위해서 진보당에 들어간 것입니다. 진보당 중앙위원 활동을 했습니다. 진보당 탄압당하면서, 도피했습니다. 병역기피자로 수배도 당했습니다.

     

    상부선이 프락치였다니

     

    저는 미군정의 탄압 학살 만행에 남로당이 무너지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 봅니다. 남로당 중앙서부터 각 도당에 프락치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간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공장생활을 하는데, 중앙당에서 김00라는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내 오르그 상부선이었습니다. 극비리에 만났는데,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중국집을 가더니, 신분증을 보여주고 권총을 탁 내밀어요. 신분증을 보니 경남도 정보분실 경찰 경위입니다. 김00라는 사람이 “내 임무가 이 동지를 나 같이 (프락치로)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살고 싶으면 자기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머리카락이 쭈삣 서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내가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 그 자리를 겨우 모면했습니다. 그 뒤에 알고 보니 김00라는 사람 때문에, 경남도당이 치명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경남도당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프락치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경찰이 조직적인 활동을 한 거죠. 남로당, 전평이 무너지게 돼는 내부 계기라고 봅니다. 나는 바로 그 뒤로 짐을 싸가지고 밀양으로 갔습니다.

     

    남로당 조직이 무너질 때, (처음에 나를 지도하던) 두루마기 입고 나타났던 그 사람이, 경상도 남로당 ․전평 전체를 지도하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진정한 혁명가로서, 혁명적인 조직생활을 하면서, 생을 바치는데, 상부 조직선이 없어도, 독자성을 갖고 대중 속에서 기본원칙을 확대해야한다. 혁명운동에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

     

    대한노총 분쇄 투쟁

     

    밀양에 내려가서 자동차 수리공을 하면서, 대한노총을 내부에서부터 분열시켜, 분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배들이 준 마지막 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말룡5)씨한테 접근했습니다. 김말룡 씨는 가죽잠바 입고 권총 차고 전평을 파괴한 사람입니다. 자기 회고록에도 나왔다고 합니다.


    부산에서는 수배가 돼서 못 움직여서, 서울에 단신으로 올라왔습니다. 현장에서 날품팔이로 일을 하면서 남로당 전평 출신 사람들을 조직해서 만났습니다. 대한노총 부정 폭로를 조직하자고 결의를 모았습니다. 삼성 이병철이가 경상남도에서 직물공장을 하면서, 한 달에 2만 명 체불 노임을 연장하고 있었습니다. 대한노총 부정 사례를 전부 조사해서, 김말룡 그 친구가 투쟁하게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대한노총에서 대립을 하다가 노동운동가로 나서게 됩니다. 나는 김말룡 씨가 명동성당 근처에 천주교 노동상담 할 때도 자주 찾아가서 일을 했습니다. 김말룡 씨는 죽는 날까지 우리가 전평 출신인지 몰랐습니다. (선생은 2005년 KBS 815 특집 방송촬영을 하면서 전평 활동이 공개됐다) 비밀로 했습니다. 김말룡 씨에게 핵심 일꾼을 두 명 배치해서 공작 활동을 하면서, 대한노총 분쇄투쟁을 노동자 현장에서부터 투쟁으로 만들어갈려고 했습니다. 근데 김말룡이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김대중하고 선이 닿았죠. 김말룡 씨, 본질이 드러났죠.


    그 당시에 참 처참하게 투쟁을 했습니다. 나는 이런 과정에서 전노협, 민주노총이 탄생됐다고 봅니다. 나는 선배들의 마지막 말 (혁명가는 기본원칙을 갖고 대중 속에서 창의성을 발휘한다)을 항상 생각하면서, 현장에서 23년의 세월을 보낸 거죠.

     

    - 선생님은 그러면 어떤 계기로 공개운동에 나서게 됩니까? 왜 민족정기수호협의회였습니까?

     

    선배 코뮤니스트의 과업 계승

     

    이제, 단체를 만들어서 표면적으로 활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87년도에 들었습니다. 일제 때 조선공산당 노동운동 선배들이, 친일파 척결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계승해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민족반역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결탁을 해서 조선노동자들을 억압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숙청하는 것을 과업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미 일본제국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정기수호협의회는 완전히 민족주의 입장에서 활동을 하거든. 민족정기수호협의는 87년 7월30일 창립했습니다. 그때 일본 동경에서 한일협력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동경에서 열렸는데, 한국 측에서 제안하기를 조선에서 공산주의를 척결하기위해서, 일본군이 다시금 조선 주둔하기를, 한국 측이 요청했습니다. 이것이 일본 아사히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습니다.


    남조선에 공산주의를 척결하기 위해 군대를 요청 한다는 사실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일협력위원회가 학계, 정계, 경제계 3계 대표자들이 참여합니다. 30일 날 아사히신문을 확인했습니다. 그 기사를 수 만장 복사를 해서 한일협력위원회 반민족분자를 척결한다는 민족정기수호협의회 결성을 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운동을 합니다. 전국 주요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민족단체들을 규합하면서 기획실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때 투쟁을 하면서, 전민련(전국연합 전신)하고 연대를 합니다. 그 이후 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개인 운영위원으로 참여를 하고, 범민련 실행위원으로 활동을 합니다. 천영세, 문익환 목사와 같이 자주통일민족회의 공동의장으로 활동도 하게 됩니다. 그때도 내가 남로당 전평 활동을 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 선생님 노동운동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선생님은 요새 민주노총 비판을 많이 하시는데, 직선제를 포함해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사회주의 당 공동토론회에도 참가를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정치운동과 관련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9월 총파업이후 대한노총 해체투쟁을 전개해 왔던 내 입장에서 민주노총은 각별합니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총의 내부 민주주의 수준은 테러집단 대한노총이나 그 후신인 한국노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위험스러운 민주노총, 직선제5) 시행해야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는 대의원대회에서 선출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의 직접투표에 의해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연맹단위에서 임의적으로 선발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의기구를 두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대의기구 성원들이 조합원대중으로부터 온전한 대표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조합원의 대표성을 갖추진 못한 대의기구에서 간선으로 선출된 지도부는 그 정당성이 없습니다. 혹자는 전노협 때도 의장을 대의원대회에서 간선으로 뽑지 않았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전노협 의장은 투쟁을 이끌고 감옥에 가는 자리였습니다. 레닌의 표현대로 민주주의를 가지고 장난을 칠 여력이 없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분명 다르고 유보되었던 조합원의 권리를 당장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합원들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행위에 대해서 지도부를 견제하고, 소환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일본 경우를 보더라도 노조가 대기업 중심과 정규직 중심으로 변질해서, 자본의 전락기구로 타락했습니다. 일본노동운동 사태를 우리 한국에서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는 민주노조 활동가로 치장하지만 속으로 어용행각을 하는 자들을 우리는 프락치라 부릅니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부르주아와 타협을 일삼으면 그것이 바로 프락치입니다. 민주노총에는 지금 프락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내 경험으로 남로당 전평이 깨지는 것도 프락치 영향이 컸습니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연대하겠다고 하면서, 노사정위 참여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노사정위 참여는 자본의 논리입니다. 과거에도 대의원들이 반대했는데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 지도자회의 편법으로 참가했습니다.


    노동자계급대중이 고통 받고 있는 시대에 민주노총은 투쟁하는 조직으로 혁신되어야 합니다. 그 혁신은 조합원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비민주적인 간선제에 선출된 지금의 집행부는 정당성이 없으므로 당장 대의원들과 위원장에 대한 직선제가 시행돼야 합니다.


    이런 취지로 내가 민주노총 경기, 수원, 부산 등 9개 지역본부를 돌면서, 민주노총이 자본의 프락치라고 비판했더니, 민주노총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투쟁을 하지 않는 실리주의는 도태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정규직 중심 민주노총, 비정규직 1,000만 명이 발생하는데, 정규직이 나서야 합니다. 노동자 계급의식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투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본이 노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주의정치활동 제대로 못하는 써클 조직은 더 이상 안 돼

     

    사노준, 해방연대, 사노련 활동 다 듣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써클 정치조직 4-5개 있습니다.6) 이 써클들이 사회주의정치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현장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써클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써클들은 자기조직 목적만 달성할려고 합니다. 조직이기주의이자 파벌주의입니다. 지하조직, 이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으로 집중적인 효과를 내야 할 때입니다. 어떤 분들은 시기상조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투쟁으로 돌파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공동으로 논의하고, 서로 비판하면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선진노동자들이 나서야 합니다.


    제가 강연회 하면서 느낀 것입니다만, 좌파 현장 노동조직들은 조합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조합 활동에만 갇혀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 선생님은 평생 조직가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신 조직 활동의 원칙을 듣고 싶습니다.

     

    조직대상이 공장이면, 현장에 계획을 수립해서 전체의 노동자들이 공감하는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먼저, 현장에서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제1조사 사업을 실질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 주관을 갖고 수립을 하면, 현장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잘못된 조사를 수립해서는 안 됩니다. 계획을 수립해서 조사사업 실제 주체가 돼야 합니다.


    현장에 맞는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고, 주관이나 관념이 작용돼서는 안 됩니다. 조직 활동은 산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수행해야합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합니다.


    현장 실정을 모르고, 집행부가 회의를 주관적으로 해서 현장조합원 지시 내리면, 관료주의가 됩니다. 현장 실정하고 동 떨어집니다. 조사사업, 계획, 추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 선생님 인터뷰하느라 힘드셨습니다. 선생님 기억력도 좋고 건강도 좋아보이시는데 특별하게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조직 활동하는데 뒷풀이를 많이 하니까 술 담배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건강한 것은 현장 활동하는 동지들 만나고, 역시 계급의식을 갖고 혁명 운동을 생각하니까, 신념이 강해져서 건강한 것 같습니다. 담배는 3년 전에 끊었습니다. 친구인 일본 공산당 구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그 친구 부인이 남편 수술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 내게 담배를 끊으라고 전화를 하더군요. 그래서 담배를 아주 끊었습니다.


    부자로 잘 먹고 편하게 살았으면, 이렇게 건강하지는 못했겠죠.



     

    <이수갑 선생 약력>


    -1925년 3월 25일 경남 양산 웅상면 출생

    -1940년 부산 진수학원 6년 졸업(사립초등학교)

    -1943년 진해 해군시설부에 징용으로 강제연행

    -1945년 8월18일 조선공산청년동맹 가입

    -1945년 9월 부산철도국 용품사무소 수송계 취직

    -1945년 10월2일 철도노조 용품사무소 분회장

    -1945년 10월5일 전평노조 창립 참가(철도산별)

    -1946년 9월23일 부산철도노조 파업 참가

    -1946년 11월23일 남조선노동당 당원 활동

    -1947년 2월 구속, 해고

    -1947년 11월 경남도당 조직책

    -1954년 7월 부산 철도경찰에 구속

    -1960년 사회당 경남도당 당무위원 겸 울산지부장, 진보당발기위원, 진보당경남도당 조직차장,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활동

    -1961년 부산 육군형무소 구속

    -1961년부터 대한노총(어용노조 분쇄 활동)

    -1987년 7월 민족정기수호회 결성, 상임대표로 어용노조분쇄와 친일파숙청활동

    -1990년부터 재야민중운동참가, 범민련실행위원으로 고 문익환목사님과 자주통일민족회의 공동의장

    -2005년 11월 철도노조 명예조합원 위촉<철도노조, 운수산별노조, 구속노동자후원회 등 고문 활동>

    -2013년 12월 24일 운명

     


    <주>

     

    1)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

     

    政治自由를 要求

    階級獨裁는 絶對反對

    軍政聽 輿論局 調査

     

    軍政廳輿論局에서는 朝鮮人民이 어떤 種類의 政府를 要望하는가를 관찰키 爲하야 三十項目의 設問을 列擧하고 輿論을 조사하였는데 設問에 反映된 民意는 다음과 같다.

    問一, 一身上의 행복을 爲하야 가장 重要한 것은 어느 것이라고 生覺합니까

    가. 生活安定을 實現할 機會 3,473명(41%)

    나. 政治的 自由 4,669명(55%)

    다. 모름니다 311명(4%)

     

    問二, 貴下께서 찬성하시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어느 것입니까

    가. 個人獨裁(民意와는 無關係) 219명(3%)

    나. 數人獨裁(民意와는 無關係) 323명(4%)

    다. 階級獨裁(他階級의 意志와는 無關係) 237명(30%)

    라. 大衆政治(代議政治) 7,221명(85%)

    마. 모름니다 453명(5%)

     

    問三, 貴下의 贊成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資本主義 1,189명(14%)

    나. 社會主義 6,037명(70%)

    다. 共産主義 574명(7%)

    라. 모름니다 653(8%)

     

    問四, 貴下는 朝鮮政府가 個人의 權利와 自由, 市民의 義務, 政府의 責任과 構造等을 規定한 成文法에 依據하여야 하겟다고 生覺합니까

    가. 예 7,358명(87%) <'나'는 없음>

    다. 아니요 242명(30%)

    라. 모름니다 853명(10%)

     

    問五, 만일 <예>라면 이 憲法作成時期는 언제야 하겟습니까

    가. 只今 1,857명(27%)

    나. 全朝鮮人이 統一된 때 5,232명(71%)

    다. 모름니다 269(2%)

     

    問六, 이 憲法은 何者가 作成할 것임니까

    가. 民選憲法會議 5,907명(70%)

    나. 重要政黨이 選出한 憲法委員會 1,134명(13%)

    다. 美蘇共委가 選出한 憲法委員會 610명(7%)

    라. 美軍政의 選出한 憲法委員會 159명(2%)

    마. 美蘇共委 145명(2%)

    바. 美國政府 49명(1%)

    사. 모름니다 447명(5%)

     

    問七, 朝鮮의 最高法이 되기 前에 이 憲法은 누가 通過시켜야하겟다고 생각합니까

    가. 이 憲法을 作成하는 團體 926명(11%)

    나. 朝鮮人民 6,785명(80%)

    다. 美蘇共委 239명(3%)

    라. 기타 155명(2%)

    마. 모름니다 347명(4%)

     

    2) 1946년 11월 6일 자유신문 기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

     

    전조선의 150만명 노동자 중 50만의 조직로동자를 대표하는 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는 5일 오전 9시부터 서울 永樂町 중앙극장에서 전조선 각지로부터 참집한 대의원 505명을 비롯하여 각정치단체, 문화단체, 학술단체의 방청객으로 입추할 여지도 없는 가운데 개회의 막을 열었다. 금속, 철도, 교통, 토건, 어업 전기, 통신, 섬유, 식료, 출판, 목재, 화학, 광업, 조선, 합판 등 각부문의 산업별 단일노동조합을 대표한 전국노동자들의 해방후 최고의 이 모임은 과거의 형극의 길을 밟아 온 조선의 노동운동사상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인데 대회는 먼저 개회사에 이어 애국가제창이 있고 해방운동희생동지를 위한 묵상이 있은 다음 임시집행부를 선거하고 명예의장으로 「레온치오」(세계로동회의대표), 毛澤東, 金日成, 朴憲永을 추대하였다.

    이어 대의원의 자격심사를 마치고 준비위원의 경과보고 다음 朝鮮共産黨, 人民共和黨, 서울市人民委員會, 朝鮮文化建設中央協議會, 建國婦人同盟, 푸로藝術同盟 등의 축사가 있고 긴급동의에 의한 일반적인 요구에 따라 대회의 결의로써

    一. 조선노동운동을 교란하는 李英一派(長安派를 指稱)를 배격하고 朴憲永 동지의 지도하에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지지하고 조선무산계급의 영도자 朴憲永 동지에게 감사 「메세지」를 보낼 것

    一. 朴憲永 동지의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노선을 절대지지할 것

    一. 연합국의 노동계급과 사령관에 대하여 감사의 「메세지」를 보낼 것

    등을 결의 채택하였다. 계속하여 각산업별 노동조합의 현황보고 행동규약, 강령통과, 임원선거, 일반정세와 운동방침에 대하여 토의가 있고 제1일의 회의를 마치었다.

     

    3) 1946년 8월 20일, 미군정 운수부는 ‘산업합리화’를 내세우며 철도 노동자 25%를 줄이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였다. 4만여 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전평에서도 가장 힘이 셌던 철도노조의 힘을 빼려는 의도였다. 9월 13일 철도국 서울공장 노동자 3천 7백여 명이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반대, 임금인상을 요구하였다. 미군정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으니 행복하다”며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9월 23일 오전 0시 부산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부산 철도 노동자들이 제시한 요구 조건은 1)일급제 반대, 2)임금인상, 3)해고감원 절대반대, 4)급식제를 종전대로 실시, 5)식량배급(노동자 4홉, 가족 3홉)이었다. 부산 발 상행선 모든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그때 철도노조의 부산지부장은 뒷날 공화당 정책의장을 지낸 백남억이었다.

    24일에는 서울 철도노동자 14,949명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전국의 4만여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전국의 철도가 멈추었다.

    9월 25일 인쇄 출판 노동자들이 결집한 조선출판노동조합은 33개 노조분회에 파업을 지시하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9월 26일에는 경전(京電)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전평은 9월 26일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쌀을 달라, 임금인상, 공장폐쇄와 해고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자유 보장, 검거 투옥 중인 민주주의 운동가 석방과 지명수배 및 체포 철회” 등 8개 요구를 내걸었다. 철도노조의 투쟁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은 10월 초까지 금속, 체신, 섬유, 전기, 해운 같은 전평 산하 각 산별노조로 확대되었다. ......

    <출처. http://www.cmedia.or.kr/2012/view.php?board=total&id=3941&service_mode=mobile&category1=1&mcate=>

     

    4) 김말룡 (1927~1996) 조선기계제작소 노조 선전부장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에 참가, 1960년 노총 의장, 70년대부터 천주교노동문제상담소장을 지낸다. 5.18 관련해서 구속되기도 하고, 신민당을 거쳐 민주당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5) 민주노총의 직선제 선거는 조직 혁신과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도입됐으며, 공직선거를 제외하곤 한국사회의 최대 규모 선거가 될 전망이다. 해외에서 직선제를 실시하는 노동조합총연맹 조직은 네덜란드노총(FNV)과 아르헨티나노총(CTA) 뿐인 것으로 민주노총은 파악했다. 이렇듯 직선제는 노동조합 총연맹 조직에서 드물게 실시하는 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총은 실시 가능성과 의미를 놓고 오랜 논의와 숙고를 거쳐 왔다.

    1995년 11월 11일 창립된 민주노총의 직선제 논의는 1998년 3월 제2기 지도부인 이갑용 위원장이 “1년 임기 중에 직선제를 실시 준비”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어 처음 등장했다. 당시 ‘직선제 공론화’ 공약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3기 단병호 집행부의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를 통해 ‘직선제’를 비롯한 선거제도 개혁 문제가 다시 제기된 바 있으며, 4기 이수호 집행부에서도 ‘직선제’ 논의와 준비 등이 검토되기도 했으나 조직적 결정으로까지 발전하진 못했다.

    이후에도 직선제 논의는 강도를 달리하며 꾸준히 제시됐다. 2006년 조준호 집행부는 9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선거제도 개선(임원선출-선거인단제도, 파견대의원 직선 등)을 논의하려 했으나, 역시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7년 1월 26일 정기대의원대회 5기 임원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임원직선제’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같은 대의원대회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직선제 논의’가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성안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4월 19일 40차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총 투표자 579명중 407명 찬성(반대 172)으로 민주노총 임원(위-수-사) 직접선거제 도입이 최종 결정됐다. 그럼에도 직선제는 실시되기까지 여러 해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8년 5기 지도부 총사퇴 후 둥장한 임성규 집행부는 2009년 9월 28일 47차 대의원대회에서 ‘직선제 실시 3년 유예’를 결정했다. 또한 김영훈 집행부도 2012년 대의원대회에서 또 다시 준비부족을 이유로 ‘직선제 3년 유예’를 결정하려 했으나, 대회 정족수 미달문제로 유예 결정 또한 무효처리 되고, 직선제 미실시 책임을 지고 김영훈 위원장이 사퇴하기도 했다.

    마침내 2013년 1월 24일 56차 대의원대회에서 2014년 12월 31일 이전에‘직선제’를 완료하기로 다시 확인하였고, 민주노총은 2013년 ‘임원 직선위원회’를 구성하여 민주노총 직선제 준비체제로 접어들었다.

    <출처 – 노동과 세계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243806>

     

    6) 당시의 사노준과 사노련 일부는 2010년에 사노위를 결성했다. 사노련은 서클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인자들이 다시 한 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사노위 결성제안이 있었고,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 활동을 하였으나, 결국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이후, 사노위와 분화된 세력이 노혁추와 노동해방으로 각개약진하고 사노련의 잔존그룹은 노건투로 각각 실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2012년 총선 선거전술 문제로, 노혁추에서 다시 코뮤니스트 좌파 세력이 정치적 차이로 분화하여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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