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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에서의 학살 : 테러리즘은 썩어가는 부르주아사회의 표현이다.
  • 조회 수: 27866, 2015-01-18 21:48:53(2015-01-18)
  • 파리에서의 학살 : 테러리즘은 썩어가는 부르주아사회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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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월 7일과 9일 파리에서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20명 중에서 까뷔(Cabu), 샤브(Charb), 틴유(Tignous), 볼린스키(Wolinsky), 이 네 명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주요 표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어리석음에 대항해 지성을, 광신주의에 대항해 이성을, 복종에 대항해 반항을, 비겁함에 대항해 용기1)를, 증오에 대항해 동감을, 그리고 순응주의와 우둔한 독선에 대항해 특히 인간적인 특징인 유머와 웃음을 주장했다.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들 일부를 거부하거나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부르주아적이다2) . 그러나 공격당한 것은 그중에서 가장 최상의 것이었다. 단지 만화가나 슈퍼마켓의 평범한 쇼핑객에 불과했던 사람들에 대한 야만적 난폭행위는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상당히 이해할만하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모든 면허받은 대표자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는 방식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1월 7일 자생적으로 거리 시위로 나가게 한 그 분노와 노여움과 깊은 슬픔이 야만의 이러한 경멸적인 행위에 대항한 기본적이고 건강한 반응이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부패의 순수한 산물

     

    테러리즘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3).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이 지니게 된 형식이고, 이것은 80년대 중반부터 발전해 나가서 전대미문의 전 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소규모의 고립된 그룹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국가의 소인이 찍힌, 1985-86년 파리를 강타한 일련의 무차별 공격들은 테러리즘의 활용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고 그렇게 테러리즘은 지금까지 알려진바 없던 수준에 이르러 점점 더 많은 수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이슬람교 광신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공격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세기의 역사는 이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2015년 1월 초의 파리 공격들보다 더 훨씬 더 큰 규모로 목격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가미카제 비행기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우리의 견해로는, 미국 비밀정보부가 이 공격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뒀고 심지어는 용이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이 사건들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가 예견하고 원하기도 했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미 해군기지 공격이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에의 개입에 적절한 구실로 작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4).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그 비행기를 조종한 자들이 대규모의 살상을 자행하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완전히 망상적 광신주의자들이었음도 분명하다.

     

    뉴욕사태가 있은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 끔찍한 학살사태가 일어났다. 아토샤(Atocha) 역에서 “이슬람주의자”의 폭탄들로 인해 200명이 살해당하고 1,700명이 부상당했다. 시체들이 너무 뒤엉겨서 DNA 검사를 통해서만 신분식별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다음 해인 2005년 7월 7일 이번에는 런던에서 역시 대중교통수단에서 4차례의 폭발로 56명이 죽고 7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러시아도 2000년대에 몇 차례 이슬람주의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인 2010년 3월 29일 사태에서는 39명이 사망하고 102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지엽적인 나라들이라고 무사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2003년 미국의 침략 이래 이라크에서 그리고 우리가 최근 페샤와(Peshawar)지역에서 다시 보게 된 것처럼  파키스탄에서 그러한 공격들이 있었다. 페샤와에서는 지난 12월 132명의 아이를 포함해 141명이 한 학교에서 살해당했다5).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이 공격은 그 모든 공포를 통해 이 “지하드” 추종자들의 점증하는 야만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7일 파리에서의 공격은, 비록 파키스탄의 그것보다 훨씬 덜 끔찍하고 덜 두렵다 할지라도 야만으로의 이러한 경향에서 새로운 차원을 표현한다.

     

    이전의 모든 경우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이 얼마나 경악스러울지언정, 어떤 “합리성”이 존재했다. 국가와 그 무장 세력에 보복하거나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2004년의 마드리드학살은 스페인이 미국을 도와 이라크에 개입한 것에 대해 “처벌” 하는 것이 의도였다. 2005년 런던의 폭탄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페샤와에서의 공격은 파키스탄군부의 아이들을 학살함으로써 그 군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1월 7일의 파리 공격들의 경우에서는 조금이라도 심지어 가상으로라도 “군사적 목표”가 전혀 없었다. 샤를이 앱도(Charlie Hebdo) 만화가들과 그 동료들은 그 신문에 모하메드의 캐리캐처가 실렸기 때문에 “예언자의 복수를 하려”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으로 황폐해지거나 종교적 반계몽주의에 의해 지배당하는 어느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민주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공화적인”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증오와 허무주의는 항상 테러리스트들의 행동들에서 핵심 동인이다. 가능한 한 대대적으로 살해하려고 일부러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이들에게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그러나 이때 인간을 무고한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차별로 살해하는 냉혹한 살인 기계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증오는 또 다른 “살인 기계”, 즉 국가를 그 주요 표적으로 한다. 하지만 1월 7일 파리에서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반계몽주의적 증오와 복수에의 광신적 갈증이 그 순수한 형식으로 보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표적은 타자,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 특히, 생각 자체를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즉, 인간에게 알맞은 이 생각하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1월 7일의 학살은 그렇게 대단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우리는 상상하기도 조차도 어려운 어떤 것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해서, “문명화된” 나라에서 교육된 인간 정신이, 책을 불태우고 유대인을 절멸시키려던 가장 광신적인 나치들의 그것과 유사한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계획에 빠져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최악인 것도 아니다. 최악은 쿠아치(Kouachi)형제들의, 아메디 쿨리발리(Amery Coulibaly)와 그 공모자들의 극단적 행위는, 주로 빈곤지역에서 번창 하고 있는 한 운동 전체로 볼 때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운동은, 많은 젊은이가 “샤를이 에도는 예언자를 모욕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과 만평가들을 살해한 것이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단언할 때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야만주의의 전진, 우리 “문명화된” 사회들의 붕괴의 한 징후이다. 이민 과정을 거친 이들뿐만 아니라 일부 젊은이들의 이러한 증오와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로의 전락,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의 부패의 여러 증상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현 위기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특히 중요한 지침(pointer)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럽에서도,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 연속적인 패배로 문화적 사회적 빈곤으로 모욕당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무 미래도 없이 무질서한 일상을 살고 있다. 이들은 무원칙한 일종의 신병 모집관(종종 국가나 ISIS와 같은 정치적 표현들과 관련된)들의 쉬운 먹이가 된다. 이 모집관들은 예상치 못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대화들을 통해 그러한 부적응자들을 그들의 네트워크에 끌어들여 “지하드”를 위한 잠재적인 공격수나 포탄 받이로 전환시킨다. 경제체계이지만 또한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문화적 체계이기도 한 자본주의의 현 위기로 인한 자신들의 전망 부재와 발밑에서 썩어가며 모든 구명으로부터 파멸을 분출해 내는 사회에 직면한 많은 젊은이에게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인다. 그들의 절망은 종종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복종이라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며 온갖 종류의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부추기고 자살적인 허무주의로 부채질 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예를 들어 우간다, 콩고 및 차드에서, 특히 1990년대 초이래) 엄청난 수의 소년병들을 만들어내는, 부패 중인 자본주의사회의 공포는 지금, 유럽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은 채 최악을 저지를 수 있는 젊은 정신병자들을, 냉혈 적 전문 살인자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자체의 병적이고 야만적인 동력에 내맡겨진 이 썩어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인류 전체를 처참한 무질서로, 살인적인 광기와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테러리즘의 성장에서 보일 수 있듯이 그것은 점점 더 많은 완전히 절망적인 개인들을 생산해 내고, 이들은 최악의 잔혹 행위도 저지를 수 있는 지점까지 전락해가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그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게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을 주조해낸다. 만약 그러한 “괴물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괴물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계몽주의적 허무주의적 경향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 모두가 스스로 직접 “지하드”에 가입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이 단계를 선택한 이들을 “영웅들”이나 “정의”의 요원들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사회를 침투해오는 절망과 야만성의 점증하는 무게를 증명해준다.

     

    추악한 “민주주의적” 활용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의 야만성은 이러한 테러리스트 행위들과 그러한 행위들에 대해 일부 젊은이들이 보이는 동감에 의해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드라마들을 활용하는 비열한 방식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 세계는 주요한 “민주주의” 지도자들을 선두로 가장 치사한 작전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 1월 11일 일요일 파리에서 거대한 거리집회가 계획되었다. 올랑드 대통령과 모든 국내 정치지도자들 주위로, 안겔라 메어클, 데이비드 카메른, 스페인과 이태리 및 여러 다른 유럽국가들의 정부수뇌들뿐만 아니라 요르단국왕, 마흐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자치구 대표 및 벤야민 네탄야후 이스라엘수상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6).

     

    1월 7일 저녁 수십만 민중들이 자생적으로 거리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프랑스와 올랑드를 시작으로 한 정치인들과 프랑스 대중매체는 그들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위협당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다”, “나서서 단합하여 우리 공화국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점점 더 빈번하게 우리는, 1월 7일의 시위에 뒤이은 집회들에서 프랑스국가, “마르세예즈(Marseillaise)”를 들었다. 그 합창은 “우리의 고랑을 불결한 자들의 피로 적시자!” … “국민단합”, “민주주의의 수호”, 이것들이 지배계급이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넣길 원하는 메시지들이다. 즉, 20세기 두 개의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의 탄압과 학살을 정당화했던 그 강령들이다. 올랑드도 그의 첫 번째 연설에서 그것을 말했다. 아프리카로, 특히 말리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프랑스는 테러리즘에 대항한 전쟁을 이미 시작했다고(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때 부시도 이와 같은 목적이라 설명했던 것처럼).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이해들은 명백히 이러한 개입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가련한 까뷔, 샤브, 틴유, 볼린스키! 광신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들을 처음 한 번 죽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러한 대표들과 “팬들”, 인류사회를 침투해오는 야만의 책임이 있는 부패하는 세계체제인 자본주의의 국가와 정부 수뇌들에 의해 두 번째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정치 지도자들은 이 체제와 그 지배계급, 부르주아지의 이해들을 방어하면서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암살과 강탈을 서슴지 않는다.

     

    1월 7일 파리에서의 학살 때문에 표현된 이러한 야만성의 끝은 이러한 야만성을 생산하는 경제체제의 주요 지지자들이고 보장자들인 그런 이들의 행동들로부터는 도래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끝은 오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즉, 그 연합이 사회 대부분의 부를 생산하는 그 계급이 이 체제를 전복함으로써, 그리고 더는 이윤과 경쟁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인류 선사의 이러한 자취의 폐지에 기반을 둔 진정으로 세계적인 인류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결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7)이 될 사회, 공산주의 사회를 이룸으로써만.

     

    세계혁명(2015년 1월 11일)

     

     

    <주>

     

    1. 이 만화는 볼렌스키가 1968년에 그린 것이다.:노동자들이 혁명을 요구하자 노동조합간부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들은 제정신이 아니군? 정부와 사장들은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테니.”
    이 만화가들은 수년간 정기적으로 살해위협을 받아왔다.

     

    2. '68세대'인 볼렌스키는 프랑스 공산당기관지, "류마니테(L'Humanite)"에서 수년간 일하지 않았던가?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던가? "우리는 68년 5월을 우리처럼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3. 19세기에는,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과 프랑스나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처럼 작은 규모의 소수들이 국가에 대항한 반항으로 테러행위에 의존했다. 이러한 무모하고 폭력적인 행동들은 항상 부르주아지에 의해 노동자운동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4. 우리 웹사이트의 다음 기사를 참조: '1941년 진주만, 2001년 쌍둥이빌딩: 미국 부르주아의 마키아벨리주의(Pearl Harbor 1941, the 'Twin Towers' 2001: Machiavellianism of the US bourgeoisie)'. Http://en.internationalism.org/ir/108_machiavel.htm

     

    5. 그리고 파리에서의 공격들이 있기 며칠 전, 나이지리아의 이슬람주의 그룹, 보코하람(Book Harem)은 그 최악의 잔악 행위를, 즉 바가(Baga)지 주민 2,000명에 대한 무차별적 살상을 자행했다.

     

    6. “국민단합”을 위한 시위에 대한 요구는 노조와 정당 측에서 만장일치였다(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만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도. 심지어 스포츠신문, 팀(L´Équipe) 도 시위를 요구했다.

     

    7. 마르크스, 공산주의자 선언, 1848

     

    <번역>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원문출처>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01/11878/massacre-paris-terrorism-expression-rotting-bourgeois-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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