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창간호] 코뮤니스트 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 이형로
  • 조회 수: 20415, 2020-10-30 11:55:11(2013-01-07)
  • 코뮤니스트 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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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동아시아 끝자락 한반도, 냉전체제가 저물었음에도 여전히 제국주의 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지정학적 위치, 분단과 반공, 그리고 장기간의 독재와 혹독한 착취체제 아래 수많은 프롤레타리아의 고통과 죽음으로 얼룩진 이곳에서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조직은 아직 모두에게 낯설다. 하지만 기나긴 단절과 짧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코뮤니스트 조직이 출범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Internationalist Communist Perspective)을 준비해온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은 약 6개월간 10여 차례의 정치토론을 통해 코뮤니스트 정치운동의 기본 원칙을 정립해왔다.


    코뮤니스트 조직의 정치원칙은, 한국에서 2005년 이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노혁추 과정에서 벌인 강령토론, 사상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반영하면서 출발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맑스와 엥겔스의 코뮤니스트 연맹(1847~52) 이후, 1920년대 코민테른에 이르기까지 혁명적 맑스주의의 연속 선상에 있었던 코뮤니스트들과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들의 공헌, 그리고 반혁명과 파시즘 시기 맑스주의 원칙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했던 빌랑(Bilan) 주변의 이탈리아 좌파 분파와 망명 중이었던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의 논쟁과 원칙, 1970~80년대 개최된 코뮤니스트 국제대회의 역사와 논쟁, 그리고 오늘날의 혁명적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형성에 이바지할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주의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1)


    이러한 사상적 토대와 역사적 조건에서 시작한 국제코뮤니트스전망의 정치원칙은, 인터내셔널과 세계혁명을 목표로 국제 코뮤니스트 운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혁명적 맑스주의 연속성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기준이 될 강령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진행하는 정치원칙 토론과 실천적 검증과정은 혁명 강령 정립과정의 일환이며, 계급의식의 발전과 혁명조직(당)의 출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하게 인식하려면 먼저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 혁명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과 부르주아 의식의 차이를 구분해야 하며, 혁명에 필수적인 두 조직인 혁명당과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눈앞의 이해관계나 생존권 방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어떻게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량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킬 혁명의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계급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사회에서 부르주아의 전면적 공격에 맞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떻게 투쟁해야 계급의식을 방어하고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며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많이 늦은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이러한 목적과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적인 운동에 돌입할 것이다. 모든 것을 열어놓고 토론하고 실천할 것이다. 정치토론은 사상투쟁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통해 검증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계급투쟁에 함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풍부한 경험과 새로운 조건을 흡수 정제하여 정치입장으로 정립하고, 계급운동의 정치적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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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조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를 뒤흔드는 위기는,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우연히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쇠퇴에 빠진 자본주의 경기침체가 70년대 말부터 수차례 이어져 왔고, 수십 년간의 실업은 사회의 지속적인 현상이 되었고, 그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경험해왔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수많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빈곤에 빠지고 기아에 직면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판매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상품들이 과잉되어 있지만, 세계인구의 절대다수는 생산된 상품을 살 구매력이 없다. 그동안 자본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인위적인 시장의 창출을 통해 잠시 비켜나가곤 했으나, 부채에 의지한 위기의 탈출은 신용의 대대적인 상환의 시기가 오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상황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관리, 또는 금융자본의 투기, 은행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수호자인 이들 모두는 단지 자본주의의 법칙들에 충실해 왔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주의 법칙들이 바로 체제의 재앙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국가와 중앙은행들이 쏟아 부은 천문학적 자금들은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빚더미만 키워 놓았다. 자본은 이러한 구제계획들의 실패를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전가하며 더욱 깊은 공황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치명적이고 불치의 병에 걸려 있어서 진정한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아직 이에 맞서 전면적 투쟁으로 나서지 못하는 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에 머물러 있다. 점거운동, 와일드캣 투쟁 등 아래로부터의 계급운동이 분출되기 시작했으나, 비대해지고 정교해진 자본가계급의 물리력과 국가 폭력 앞에 여전히 무기력하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 정치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더욱 넓혀가게 했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계급 내부에서도 사민주의 개량주의 노동자(노동당, 좌파당, 사회당, 공산당)정당들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도 노동자계급 안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상태이다. 이들은 그동안 자본이 계급투쟁을 억누르는데 실질적 도움을 주었고, 그것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제 자본은 자신들이 만든 위기를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전가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을 싹부터 잘라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끝 모를 위기 속에서 세계적으로 분출되는 계급투쟁의 파도는,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깨고 프롤레타리아계급 고유의 연대와 단결력, 계급투쟁에서의 창발성과 전투력을 회복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타도할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열어주고 있다. 이것은 대대적인 계급투쟁의 파도가 우리에게도 언제든 몰아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이며, 꼬뮤니스트 노동자들은 이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정치운동의 조건이다.


    우리는 이러한 객관적 조건에서 출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치입장을 옹호하며, 현실의 투쟁 속에서 끊임없는 토론과 실천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정립해 나갈 것이다.2)

     


    자본주의 역사적 쇠퇴와 코뮤니스트 혁명의 필요성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시대, 독점자본주의 단계, 쇠퇴하는 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라는 역사적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었다. 쇠퇴기에 접어든 자본주의는 두 차례에 걸쳐 인류에게 위기, 세계대전, 재건 그리고 새로운 위기의 야만적 반복을 해야만 했다. 자본주의 쇠퇴기에는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윤율 하락 경향과 잉여가치 실현과정에서 나타나는 시장포화의 한계법칙이 결합하여 자본주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만성화시킨다.


    1970년대 이래 만성적인 위기 상태는 해소되지 못했고, 1980년대-2007년까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 동안 누적, 가중되면서 마침내 오늘날 세계공황으로 폭발하였다. 또한,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국면은 국지적, 지역적 갈등, 강대국들에 의한 경찰행위, 기근과 생태적 파괴 등으로써 인류의 생존에 파멸적 위협과 재앙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살아있는 한, 인류는 그 생존을 위협당하면서 이 죽어가는 체제가 부과하는 파국의 증대를 감수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파국 속에서  코뮤니즘이냐 야만이냐, 즉 코뮤니스트 세계혁명이냐 아니면 인류의 파멸이냐의 선택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에 달렸다. 코뮤니즘을 실현할 물질적 조건은 이미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았다. 코뮤니즘은 오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과 혁명의 결과로서 탄생할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역사적 쇠퇴의 새로운 국면이 코뮤니스트 혁명의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킨 것을 넘어, 혁명의 주체를 공격하고 새로운 사회의 기반을 파괴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는 코뮤니즘을 절실하게 요구하지만, 단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코뮤니스트 혁명이 모든 순간에 구체적인 가능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의 반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왜곡 속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수차례 패배했고, 계급의식과 조직화 모든 면에서 부르주아계급에 대적하기에는 너무 약해져 버렸다. 수많은 패배와 후퇴, 그리고 파괴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제야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부흥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시간의 압박 속에서 투쟁과 조직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하나 열린 것이며, 적대적 계급 간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의 조건이 성숙하여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스스로 무장 없이, 계급의식과 전투력을 발전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조급한 대응으로 준비되지 않은 격전을 벌인다면, 또다시 처참한 패배와 나아가 계급분쇄의 기나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 부르주아계급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준비하는 일은, 장기적 전망에서 계급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코뮤니스트 혁명의 최종목표에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 위기와 쇠퇴의 국면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새로운 조건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신들의 운동 속에서 그동안 투쟁을 패배로 이끈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낡은 운동, 즉 여전히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지배하는 여러 분열적이고 반혁명적 경향의 민족주의와 개량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계급운동이 근본적으로 빠져나오려면, 반드시 현실의 계급투쟁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이때 혁명적 계급의식은 계급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의 최종목표 사이에 어떠한 중간단계나 대리과정(조직)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계급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조직화를 이루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이 과정은 길고도 험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계급 내부에 코뮤니스트 강령을 방어하면서 현실의 계급투쟁에 끝까지 전략적으로 함께하는 정치운동(조직)이 필요하다. 즉, 운동의 최종목표와 당면과제를 명확히 밝혀주는 공산주의 운동과 새로운 계급운동이 직접 만나야 한다.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주변에는 현 자본주의 위기 상황을 일시적이거나 주기적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자본주의 개혁과 보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노동정치,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계급에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사실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복지정책, 기본소득, 실업해결, 비정규직 철폐’ 등 법 제도를 통해 자본주의를 개선할 수 있다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조금 더 고통을 견뎌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미 불치의 병에 걸려 회생할 수 없어서, 혁명을 통해 낡은 체제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접 사회를 운영하는 것만이 기나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진실을 감추고 오히려 자본주의 회생의 가능성과 환상을 노동자계급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럴듯하게 유포시키는 이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진정한 수호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와 국가기구에 참여하면서 자본의 좌익에 있는 사민주의, 의회주의, 조합주의 정치운동이 아닌, 부르주아 정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이들의 조력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사상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운동이 부르주아 영향으로부터의 독립, 자기 조직화하는 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다.

     

     

    소련사회의 경험과 스탈린주의 반혁명, 그리고 코민테른의 타락


    앞서 언급한 현재의 ‘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반혁명 시기로부터 시작한다. 또한, 80년대 말 반혁명의 주범인 스탈린체제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승리와 계급투쟁의 종말을 선전하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과 더불어 다시 한 번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과 전투력에서의 심각한 후퇴를 가져왔다.


    우리가 러시아혁명과 소련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 그리고 스탈린주의 반혁명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건설할 코뮤니스트 사회의 상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현재 직면한 계급투쟁에서 과거의 후퇴와 패배를 다시 반복하지 않고, 계급 역관계를 공세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기초를 세우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인식하면서 단호하게 지지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의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당시의 법적, 제도적인 혁명적 조치에도 소련의 노동자계급은 소비에트 생산의 주체, 권력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1차 대전의 패배와 내전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세계분업 내의 후진적이고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나려고, 일부 자본주의적 이행 형식을 들여와 이행을 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의 도입과 농업의 집산화로 소련이 사회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다. 당이 곧 계급이라는 잘못된 판단 속에 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당이 노동자계급을 대신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3) 레닌의 죽음과 세계혁명의 명백한 침체에 힘입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선언은 사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의 공개적 단절이었으며, 세계 제국주의 권력으로 러시아를 건설하는 약속이었다.


    우리는 소련사회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고착된 사회의 퇴행에서 일어나는 왜곡된 사회로 보기보다는, 상대적 저발전의 지위로부터 자본주의로의 강제적 이행으로의 시도로부터 발생하는 왜곡된 사회로 판단한다.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은 국가가 주도하고 명령하는 특수한 형식을 취했고, 이것은 10월 혁명의 이행과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핑계로 민족경제의 재조직화로 나타났다. 이 과정은 그 후 중국, 동유럽, 쿠바, 북한 등등에서 추진되었고, 이들 모든 국가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계급적인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를 스스로 칭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인 자본과 관료의 독재가 가장 쇠퇴한 형식으로 지배할 뿐이다.


    소련의 경험은 우리에게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소련에서의 국가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가 폐지되고 부르주아지가 축출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일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주의 이론 및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노동자 국가에 대한 환상은 이러한 은폐에 모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국가기구가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며, 이행기에 계급과 국가 사이의 관계 문제의 복잡성과 난해성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가들은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으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사전준비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시대였던 1930년대를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들로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테러들이, 혁명운동이 그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특히 그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들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당시 혁명의 원래 원칙들로의 회귀를 위해서 계속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투쟁했던 비타협적 반대파들은 30년대의 말엽 스탈린주의의 테러로 거의 제거 당했다.


    유럽 혁명운동의 패배와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의 과정은 코민테른을 구성하는 당들에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하고, 동시에 그 당들이 사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도록 하면서 코민테른에 반영되었다.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활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노동조합과 의회주의 활동에 대한 강조, 통일전선전술 등의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을 가져왔다. 이러한 유산은 현재에도 노동자운동에 만연되어 있다.


    한편, 볼셰비키 내부의 다양한 반대파들은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것을 조직화한 표현들에 대한 어떤 감상적인 충성과도 단절하는 것이 핵심적인 논점이 되어갔다. 이것은 트로츠키와 러시아 코뮤니스트 좌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입증하게 된다. 트로츠키가 소련의 옹호 관념에 심지어는 스탈린주의 당들의 노동자 계급적 본질에 집착한 채 평생 남아있었던 반면에, 코뮤니스트 좌파들은 스탈린주의 승리가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적대적 세력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과 새로운 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당시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적나라한 표현인 일국사회주의 이론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지만, 러시아국가 방어라는 관념에 굴복하고 만다. 결국, 트로츠키와 그의 좌익반대파는 "대중의 정복"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점점 더 기회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사민주의 당으로의 회귀였던 프랑스 전환(French turn), 반파시즘으로의 투항 등, 이러한 노정의 최종 결과 트로츠키주의는 1940년대 동안 부르주아 전쟁기계로 편입되었다. 그 후 트로츠키주의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정치도구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의 모든 사회주의적 외피와 혁명적 언사들에도, 혁명적 맑스주의의 연속성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


    반면, 타락해버린 코민테른과 우경화된 트로츠키주의의 궤적과는 반대로, 혁명이론지 빌랑(Bilan) 주변의 이탈리아 좌파 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다. 첫째, 전쟁으로의 행진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혁명 물결의 특히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 대조표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당시 혁명가들에게 특히 혹독한 시험이었고, 많은 혁명가가 반파시즘의 나팔소리에 사로잡혀서, 그 전쟁이 양 진영 모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이며,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총연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빌랑(Bilan)은 꿋꿋이 나서, 제1차 대전시 레닌이 양쪽 진영 모두를 비판했듯이, 파시스트들과 부르주아의 공화파들 양자 모두에 대항한 계급투쟁을 호소했다. 현재 현존하는 혁명적 환경 내부의 그룹 대부분이, 조직문제 및 손상되지 않은 혁명전통의 보존 필요성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던 이탈리아 좌파 경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참담한 결과 속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수많은 사회주의자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계급을 배신한 세력들의 그늘에 놓여 있다. 요즘도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의회와 노동조합 개입전술’, ‘통일전선전술’, ‘입당전술’, ‘민족해방투쟁’ 등은 사실은 유럽혁명의 패배와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부산물이며, 노동자계급이 반드시 넘어서야 할 큰 장벽일 뿐이다.

     


    민족주의 vs 국제주의


    오늘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의 결과는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의 대치로 나타난다. 민족해방투쟁은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서 지속적인 분쟁 속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다. 그러한 투쟁들은 어떤 경우에도 제국주의를 약화시키지 못하는데, 그것들이 제국주의의 뿌리,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제국주의 블록 하나를 약화시키면, 그것들은 그와 더불어 단지 다른 하나를 강화시킬 뿐이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계급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단결할 때만 모든 민족적 억압의 기반은 무너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인종적 또는 문화적 분리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계급 연대를 방해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민족의 독립', '민족자결권' 등과 같은 모든 민족 이데올로기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프롤레타리아트에는 해롭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중 한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고, 자신들의 계급을 위한 전쟁이 아닌 부르주아 지배계급 간의 전쟁에서 서로 희생당하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일어난 혁명적 대중투쟁과 제국주의 군사적 개입을 두고, 반제국주의 입장에 서 있다는 일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정파들이 제국주의 중심세력에 저항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약한 민족자본, 독재 권력을 방어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국제주의를 왜곡시키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국가자본주의와 기형적 착취체제인 중국, 쿠바, 북한의 국가를 방어하자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자신들의 착취자들 간의 전쟁에서 착취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공격하고 죽이게 한다. 그것의 결과는 제국주의 약화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희생만을 일으키며, 사실은 국제주의를 포기한 반노동자적 정치노선일 뿐이다. 이들의 뿌리 역시 타락해버린 코민테른과 우경화된 트로츠키주의에서 유래한다.


    20세기 이래 국제무대에서의 모든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이며, 이 전쟁들은 인류에게 고통과 죽음과 더 심한 파괴만을 가져왔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이러한 전쟁에 대해 국제적인 연대와 모든 국가에서 민족이 아닌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투쟁을 통해 저항해야 한다.

     
    한편, 냉전체제가 해체된 현재에도 제국주의 사이 적대의 첨예한 표출이 항상 분출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 주변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평화' 그룹들과 시민단체들, 민족주의-사민주의자들, 좌파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평화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평화주의자들은 유엔과 국제법에, 부르주아 권력 간의 협정에 호소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그 법의 장벽들을 파괴할 때에만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 간의 전쟁은, 오직 방어할 어떤 국가적인 이해관계도 맺지 않은 운동,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국제적인 운동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하는 부르주아 계급 간의 어떠한 연대도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들의 기만적 연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내려는 시도들이야말로 계급 전체의 진정한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첫걸음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제국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착취와 이윤추구의 자본주의 경쟁 관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절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모든 테러리즘에 대해서도 분명히 반대하는데, 테러리즘은 결코 코뮤니스트 혁명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당한 투쟁수단이 아니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미래가 없는 계층들의 극단적 폭력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테러리즘은 항상 전쟁을 일으키는 수단이 되거나 부르주아계급의 조작에 이용당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을 곤경에 처하게 해왔다. 적색 테러를 포함하여 몇몇 소수의 비밀스러운 행동을 옹호하는 테러리즘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이고 조직화한 집단행동에 기반을 둔 계급의 정당한 물리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의회 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들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에 자신들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들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관의 파괴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와 의회선거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들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의 19세기 동안, 그리고 1970~80년대까지도 독재정권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사회에서의 보통 선거권을 위한 투쟁과 선거개입은, 노동자계급이 그것을 위해 자신을 조직했던 가장 중요한 요구 중의 하나였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자계급의 강령을 위한 선전 및 선동 가능성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사회주의 강령과 투쟁을 걸고 선거에 개입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선거참여는 사회주의 강령을 위한 선전선동의 연단으로도,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의회주의를 강화시켰고, 노동자 정치에서도 대리주의가 정착하여 노동자 정치참여의 수동성만을 조장했다.


    게다가 코뮤니스트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공황, 쇠퇴의 시기에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한다. 의회와 선거개입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으로 이미 굳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리주의는 부르주아 선거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노동조합 등에도 이미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다. 따라서 노동자투쟁과 직접행동에 기반을 둔 노동자정치가 아닌, 노동조합-의회주의 정치와 연결된 선거개입, 후보전술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정치를 구현하고, 투쟁의 구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리주의로 다가올 뿐이다.

     
    후보를 내세워 노동자투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환상과 조급성이 후보중심의 전술을 강제하고, 위로부터의 공동전선, 심지어 사민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을 허용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게 되어, 결국 선거개입은 항상 대리주의와 선거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더욱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에도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10여 전으로 후퇴하여, 사민주의자들도 상당수 수용하는 경제 요구를 노동자계급의 행동강령이라고 내걸고, 사민주의 세력과도 기꺼이 연합하면서, 대중투쟁과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개입이야말로, 사회주의운동을 급격하게 퇴보시키는 정치적 타락행위이다.


    계급투쟁의 화창한 날 제대로 투쟁하지 않고 옷만 더럽혀놓고, 굳이 부르주아 선거의 비가 오는 날 빨래를 하는 격이다. 결국, 잘 마르지 않는 옷을 말리거나 입어야 하는 사람은 선거판에 동원된 노동자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결과는 정세의 절박성, 선거운동의 명분, 득표로 표현되는 지지 세력의 숫자와 관계없이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이며, 노동자계급의 투쟁확산과 자기 조직화를 저해할 뿐이다.


    대중들의 정권에 대한 반대투표와 정권교체 열망(야권연대) 현상은 뿌리 깊은 불만의 결과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행동이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도 야권연대나 투표를 통해 얻을 수 없고, 오직 노동자 투쟁을 대중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권연대를 반대하는 대중투쟁을 선거공간과 후보를 통해 인위적으로 창출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 선거에 합법적으로 참여하는 모든 정치세력은 선거 기간에는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공약들과는 무관하게, 부르주아 정치에 속해있는 부르주아 계급 하나의 분파로 작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르주아 계급에 민주주의와 선거제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바로 의회 민주주의가 다른 여러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에는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는 투쟁만이, 계급 간의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노동자정당과 공동전선 비판, 혁명조직(당)의 역할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민족수호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를 방어하지 않았다. 또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일국 사회주의론을 수용하고 인민전선에 참여했고,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가재건에 참여를 수용함으로써 민족자본의 하수인 역할과 반혁명적 실체를 드러냈다.


    인민전선(popular fronts)과 공동전선(united fronts)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전술들의 현실은 노동자정당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정당인, 자본의 좌익 정파들에 "노동자계급적" 실체에 대한 환상을 유지해줄 뿐이며, 더욱이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을 지연시킬 뿐이다.


    노동자운동 내의 공동전선전술은 특정 정세와 이슈에 대한 투쟁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목표를 위해, 개량주의나 중도주의 조직들과 공동으로 투쟁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성과 계급적 연대의 표현인 공동투쟁(계급투쟁에서의 공동행동)이 아닌, 정치적인 공동전선전술은 인민전선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훼손하고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이다. 계급투쟁에 임하는 혁명조직(당)의 원칙은 노동자 공동투쟁을 통해 계급투쟁을 확산시키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지, 자신들의 정파 이해에 따라 투쟁의 목표를 섞어버리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고,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들이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는 소수이지만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세력들도 일부 포함된다. 그들은 항상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한결같이 노동자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고 있는지, 아니면 노동자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한국에는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개량과 개혁이 아닌 혁명적 이행전략을 가진 혁명세력이라면서 반자본주의, 사회변혁, 노동해방, 사회주의 노동자, 노동자혁명을 내걸면서 노동자 민중운동에서 이른바 좌파블록을 형성하고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좌파블록을 형성하고 것은 한국사회 운동 내부에서 온갖 폐해를 끼치며 기득권을 누려온 다수파 운동(주사파,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반사작용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보면 여전히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지 못한 미성숙에 있다.


    이중의 상당수는 혁명적 이행전략인 노동자(평의회)권력 창출이라는 전략적 과제를 현실에서 꾸준한 실천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시시때때로 전술을 바꾸면서 전략적 과제를 혼란에 빠트리는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즉, 계급이 처해있는 현실에서 출발하면서도 장기적 전망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기 위한 실천을 통해, 주체들의 혁명적 계급의식 획득과 자기 조직화라는 목표로 꾸준히 나아가지 않고, 단기적이고 정파적인 득실에 따라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공동전선체의 일종인 좌파블록이 정치노선과 전술적 명확성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파에 대한 상대적 반정립으로 형성되는 경향은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


    더욱이 이들이 개량주의 세력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입당전술, 공동전선은 개량주의 세력에게 노동자성을 부여하고 혁명세력과 함께한다는 환상을 유포시켜, 오히려 이들의 본질을 가려주고 입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동맹은 자신들이 다수파를 장악하지 않는 한 이들과 함께하는 내내 개량주의 노선을 묵인하게 되거나, 아니면 깨고 나와 모든 것을 무효화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개량주의 세력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옹호하는 전술들의 결말은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의 단절하는 시간을 지연할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술의 남발 탓인 연합과 분열의 반복은 노동자들에게 정치운동의 신뢰를 잃게 할 뿐 아니라, 현장 투쟁에서 단결을 실질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급의 전위역할을 해야 한다는 착각과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자만에 빠져, 온갖 계급투쟁에 개입(주로 노동조합운동에 개입)하면서 계급의식과 조직화 상태를 자신들에게 맞춰 인위적으로 재단해 왔다.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에 기반을 두지 않고, 당면한 정세에 조급하게 개입하는 운동이, 장기적 전망이나 운동의 본질에 접근하는 투쟁을 계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급의 전위란 자임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의 발전과 계급투쟁의 상승, 전면화 과정에서 계급의 가장 단호한 부위와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하는 혁명 강령을, 투쟁하는 계급이 스스로 방어하고 옹호하면서, 모든 투쟁의 중심으로 세울 때 비로소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전위(혁명조직)가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혁명적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모든 투쟁을 함께하면서 집단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전히 노동자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에의 개입을 계급투쟁을 대리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투쟁의 배후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중심의 공동전선(투쟁)체, 입당전술, 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균질화하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정치원칙)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내용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널리 전달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치를 대중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당 건설에 대해서도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 검증에 따른 혁명적 코뮤니스트 세력의 재구성을 통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들과 코뮤니스트 운동이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계급 안에서 혁명적 주체를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을 통해 당 건설을 해나가는 것이 가장 원칙적이고 현실적이다.


    그런데 이들은 강령적 실천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 조직화라는 본질을 망각한 채, 조급한 정세대응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자기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면서 당 건설 운동을 후퇴시켜왔다.

     
    이제는 그것의 만회를 위해, 공동전선을 통한 당 건설이라는 희귀한 변종무기를 들고 나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진공상태에서 당 건설을 할 수 없다면서, 정치노선이 불분명하고 조합주의에 포위된 노동조합 활동가 그룹과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을 포기한 써클이 추진 중인 계급정당 흐름에 영합하고 있다. 이들과 사민주의 정치세력을 포함하여 준비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대선투쟁(후보전술)을 통해, 실패한 진보정당운동과 야권연대에 대한 반정립 운동을 통해, 투쟁동력과 당건설 주체를 확보하여 당 건설을 할 수 있다면서, 공동전선을 통한 단계론적 혁명당(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이제라도 혁명당 건설운동을 포기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신의며,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자본주의 착취체제가 지속하는 한 계급투쟁에 진공상태는 없으며, 오히려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계급투쟁의 깊이는 당 건설의 주체를 담보해주고, 계급의식의 발전은 강령으로 표현된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진공상태에서의 당 건설과 같다. 더욱이 진공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진흙탕에 빠져버리는 것은, 그동안 진공상태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혁명의 승리는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근접했을 때 현실화된다. 이때 당과 계급은 차이는 가장 가까워지며,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 프롤레타리아 대중정당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계급의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혼란스러운 일상시기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혁명과는 거리가 먼 개량주의 당을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강령에 입각하지 않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가 당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계급의 일을 대신하거나 관료적으로 관리하는 대리주의 당을 만들 위험에 빠진다.


    혁명조직의 역할은 불균등한 계급의식을 일반화(균질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의 일반화는 주로 실천적인 경험들의 결과이기 때문에 혁명조직이 계급 전체의 활동을 대체할 수 없다. 혁명조직의 역할과 계급 전체의 과업을 혼동하여, 조급하게 계급의 활동을 대체하려 해서 진공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것은 명확한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서 명령하거나 지시한다는 의미를 강조해, 지도한다는 것으로 도약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경향은 혁명조직의 역할을 대중을 지도하는 것과 지도력 획득을 위한 권위 창출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자칫 준비되지 않은 대중들을 기다려줄 수도, 대중투쟁에 꾸준히 함께 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수동적으로 지도를 받고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것은, 그들이 권력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히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정치적 전망을 갖는 것이 아니다. 혁명의 승리는 전체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을 조직하는 것으로 보장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혁명조직의 선결 과제는 명확한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고, 모든 선전 작업과 실천을 통해 그것을 확산시키는 것에 있다. 정치적 전망이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이해관계와 운동의 최종 목표를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서 말한 코뮤니스트 운동의 최종목표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적인 운동에 돌입할 것이다. 모든 계급투쟁에 결연하고 전투적인 투사로서 참여할 것이다. 항상 우리 조직의 이해관계가 아닌 계급 전반적인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할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과 투쟁을 위해 활동하며, 인터내셔널 건설과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수립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활동할 것이다.


    -코뮤니트스들의 정치역량 강화와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면화를 통해 인터내셔널 건설의 기본토대를 마련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계급투쟁의 확산과 계급의식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에 따라 세계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과 실질적으로 교류, 연대하며, 인터내셔널 건설과 세계혁명을 향한 공동의 행동을 직접 조직한다.


    2012년 10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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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1) 우리의 근원  :  맑스와 엥겔스의 코뮤니스트연맹(1847-52), 3개의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연합 1864-7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1889-1914, 및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1919-1928), 1920년대에 타락해가는 제3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리해 나왔던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들의 공헌과 1928년 이후 스탈린주의 반혁명세력에 맞서 투쟁해 온 코뮤니스트들의 공헌, 그리고 오늘날의 혁명적 맑스주의의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세계혁명당의 형성에 이바지할 혁명적 코뮤니스트, 국제주의 운동에 기반을 둔다.

     

    2) 이글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정치원칙의 핵심과 토론과정을 소개하는 글이며, 여전히 토론의 대상이자 정립과정에 있다. 따라서 내용상 축약할 수 없어 게재하지 못한 ‘자본주의 쇠퇴의 근거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 실현과정’, ‘당과 평의회, 계급의 관계’, ‘소련에서의 가치법칙 작동과 자본주의로의 강제적 이행문제’, ‘노동조합과 의회전술에 대한 구체적 원칙들’, ‘여성, 환경, 장애인, 소수자 강령에 대한 방법론 제시’ 등은 생략되어 있으며, 추후 별도의 문건으로 제출할 예정이다.

     

    3) 권력 장악 후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기관들과 갈등하였고, 자신을 스스로 통치의 당으로 변화해 나갔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소비에트의 권력을 대체한 것은, 20년대 초의 트로츠키에 의해서도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매우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전망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들의 의회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트로츠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인된 대표자가 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노동자계급 다수의 저항에 직면해서도, 어떠한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과 함께, 코민테른도 혁명적 물결의 퇴보에 저항하여 투쟁하기보다, 코뮤니스트 원칙을 지키려 노력하기보다, ‘대중정당을 통한 최소강령 방어’, ‘통일전선’, ‘노동조합과 의회주의 활동에 대한 강조’를 기회주의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더욱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면서 실천적으로도 적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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