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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2호]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 남궁원
  • 조회 수: 11010, 2017-06-22 22:23:19(2013-07-18)
  •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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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코르쉬는 그람시, 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 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 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공산당 안에서 「공산당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 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공산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자리에서 코르쉬를 울트라 좌파 (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 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 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공산주의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공산주의자, 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 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 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 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즉 실제 혁명운동에서 주어 진다. 예를 들어, 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 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 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 정립되며, 부르주아 사회 제도, 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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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뮌과 러시아 소비에트, 독일 노동자 평의회에서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코르쉬는 파리코뮌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한다. 파리코뮌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인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행동(Die Aktion」에 실렸다.

     

     *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옮긴이|남궁 원

     

     

     
    자본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 의제를 제기하는 역사적인 현 시기에, 계급의식적인 모든 노동자는 혁명적 코뮌에 관하여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더구나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따라서 자기 의식적인(self-conscious) 프롤레타리아트 부분은 혁명적 코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propaganda)이 이루어진지 반세기만에, 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 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schools)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안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 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뮌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 때, 다시 한 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깜짝 놀란 속물들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20년도 더 지난 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 주요부에서 파리코뮌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월, 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 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 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뮌”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혁명적인 모든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 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 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와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이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 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 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 또는 1920년 카프(Kapp)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 또는 1923년 루르(Ruhr)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Cunow) 파업 과정에서, 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의 패배의 결과로 현재, 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낡은 신념, 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샤이데만과 뮐러, 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기구의 최고 정점에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 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 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 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 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 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의 발전형식에서, 발전하는 의식이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 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뮌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뮌의 가담자들(communards)이다. 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 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 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뮌을 달성해냈으며, 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러나 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뮌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코뮌”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 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 동시에 그는 “코뮌”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뮌”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뮌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코뮌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 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뮌”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 코뮌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즉,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이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서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뮌”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 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발전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 바, ―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뮌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 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 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시스트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뮌을 비교함으로써, 부르주아 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봉건제와 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 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 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 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 단계 역시 봉건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 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 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로 막 전환했던 1840년대 초기 맑스의 이 이론적 설명은, 몇 년 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 및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되었고, 또 20년 후에는 저 유명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대회 제네바 회의의 결의에서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주장되었다. 즉 노동조합은 지금까지의 지배적 발전 과정에서 이미 “마치 중세의 자치체나 마을이 부르주아지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고 논증한 것이다. 이는 비록 노동조합 스스로는 자본의 과도한 요구에 맞서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방어하는 하루하루의 당면과제에 파묻힌 나머지 이를 넘어서는 자신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앞으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전체를 조직하는 그러한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 코뮌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 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했다. 맑스가 이 새로운 코뮌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은, ―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뮌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 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뮌 및 코뮌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뮌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 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코뮌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 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뮌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 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 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 적어도 파리코뮌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년~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도, 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 이제 파리코뮌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 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 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왜 하필 특히 “코뮌”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 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 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 번 매우 상세하게 코뮌의 특징을 서술했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화된 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 정확히 “코뮌”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 사실상 파리코뮌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 있어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뮌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 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Michael Bakunin)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 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뮌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뮌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 즉, 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뮌 및 코뮌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Cf. Brupbacher: Marx and Bakunin, pp.114-115.)

    1871년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 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에서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 파리코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 즉 파리코뮌과 프랑스 모든 코뮌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 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 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 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 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모두, 바로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 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 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제1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 그는 혁명적 파리코뮌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적인 한 순간 ― 승리한 반동세력에 맞선 코뮌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내려 간, <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파리코뮌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 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뮌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 그 이유는 더 이상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뮌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뮌을 추가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와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 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1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뮌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뮌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 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 파리코뮌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 만일 맑스가 파리코뮌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뮌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뮌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코뮌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코뮌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 코뮌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뮌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며,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 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 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뮌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뮌의 연방적이고 반(反)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 파리코뮌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코뮌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뮌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 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 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뮌”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뮌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들이 만약 어떤 “코뮌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완전히 틀렸다. 최종적으로 “코뮌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 시킨다”는 이론, 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 이상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 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을,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 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뮌” 국가도,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 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이며, 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공산당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장치를 “장악”해내든, 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 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 혁명적 코뮌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 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 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옮긴이|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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