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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2호] 자본주의 쇠퇴기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 오세철
  • 조회 수: 8833, 2013-08-17 14:58:18(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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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쇠퇴기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오세철

     

     

     

     

    1. 들어가며

     

     2006년 10월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서 발표한 나의 논문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에서 나는 자본주의 쇠퇴이론이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중심적 이론으로 앞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략의 기초가 되며 공산주의 전망을 여는 열쇠라고 보고 좌익공산주의 내의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물론 이 논쟁은 1990년대 말부터 2005년까지의 논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의 잠정 결론으로 나는 더 공개적인 논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토론 주제를 제기한 바 있다.1)

     

     첫째, 자본주의 쇠퇴 이론과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 사회건설의 핵심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 경제이론의 양적 기준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따라서 유물론에 철저하게 기초하면서 총체성의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경제 메커니즘과 계급투쟁의 변증법적 통합인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넷 째, 부르주아지의 저항능력이나 기술발전의 힘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부적절하다.
     다섯째, 쇠퇴와 자본의 실질적 지배와의 관계가 철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여섯째,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인류학적, 문화적 연구가 쇠퇴와 관련되어 폭넓게 연구되어야 한다.
     일곱째, 자본축적에서 포드주의, 포스트포드주의의 이분법을 넘어 쇠퇴시대의 울트라 포드주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여덟째, 맑스주의 핵심과 그의 이론적 간극과 빈틈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나 대립되는 지점, 보기를 들어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과 시장포화론 사이의 대립을 맑스 안에서 통합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최근 논쟁을 정리하고 최근까지 자본주의 위기의 역사를 쇠퇴의 마지막 단계로 보는 근거와 그에 기초한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을 분석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그와 같은 전망 아래에서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평가와 앞으로의 방향도 간략하게 모색하고자 한다.
     


     2. 자본주의의 위기와 쇠퇴에 관한 논쟁의 역사 개괄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3년 「자본의 축적」을, 헨릭 그로스만이 1929년에 「자본의 축적과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출간했는데, 룩셈부르크는 시장의 부족을, 그로스만은 이윤의 부족을 자본주의 위기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았는데 안톤 판네쿡은 1934년 「자본주의 붕괴론」에서 룩셈부르크와 그로스만의 이론이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는 순수하게 경제적 이유만으로 몰락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의식적 행위를 통해서만 끝장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문학을 전공한 판네쿡은 맑스주의자로서 뿐만 아니라 수학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기반으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강조하여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자본주의, 위기, 궁핍화,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통일체로서 자본주의를 붕괴로 이끈다고 보았으며 자본주의가 몰락하여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점점 노동자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고 투쟁하게 만듦으로써 노동자가 자본주의 자체를 전복하는 의지와 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의 이와 같은 혁명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에 대한 강조는 그 당시 제2인터내셔널과 사회민주주의당을 지배하고 있었던 “엥겔스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발본적 사회비판을 자연과학의 방법과 잘못 등치시킴으로써 맑스의 탐구방법을 전환시킨 엥겔스주의는 자연의 변증법을 정교화 시키는 과정에서 유사신비주의적인 헤겔의 교조로 퇴행시켰다고 비난받았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자본의 욕구로 통합시킨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계급의 정치사에서의 어떠한 연속성도 거부했다. 이 당시 엥겔스는 자본주의 중심부를 싸고 있는 비자본주의국가에 대한 정복이 가속화되면서 자본주의가 스스로 유지되는 경향을 보았다. 다시 말해 엥겔스는 지구의 비자본주의 영역의 정복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한 군사주의와 제국주의의 성장이 자본주의의 중심인 유럽으로 그 발전의 위험을 되돌림으로써 혁명의 성숙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문명을 야만으로 빠지도록 위협하고 있다고 보았다.2)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의 커다란 제국주의의 팽창은 극적인 성장률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시기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이 개선되면서 예기지 못한 번영과 진보의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유리한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으로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 증가의 덕이었고 개량주의의 출현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형태로 수정주의, 개량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자본주의 쇠퇴(몰락)이론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의 레닌, 홀랜드의 호르터와 판네쿡, 미국의 부딘(Louis Boudin, 「The Theoretical system of Karl Marx(1907)」, 로자 룩셈부르크 (「Sociel Reform or Revolution(1900)」의 수정주의 비판이 그것이다. 이 둘은 위기 극복과는 거리가 멀게 카르텔과 신용을 통한 자본의 “조직”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응이며 이는 더 크고 많은 파괴적 수단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증가시킨다고 보았다. 특히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쇠퇴의 위기의 새벽이 어떠한 형태를 취할지라도 자본주의의 파국적 몰락의 전망 없이는 사회주의가 단순한 유토피아라고 주장했다.3)  

     

     2.1. 좌익공산주의 내부의 자본주의 위기 논쟁
     
    이윤의 부족과 시장의 부족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좌익 공산주의 내에서의 자본주의 위기 논쟁(룩셈부르크와 그로스만의 대립으로부터 이어지는)을 「국제공산주의흐름」과 「국제공산주의경향(또는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과의 논쟁(2006년 이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국제공산주의흐름」과 「혁명당국제서기국(IBRP)」과의 논쟁은 1977년 좌익 공산주의의 통합 흐름이 실패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국제공산주의흐름」은 「국제평론」 12호(1978)의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에 대한 ICC의 대답”, 「국제평론」 13호의 “맑스주의와 위기이론”, 「국제평론」 16호의 “경제이론들”, 「국제평론」 19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국제평론」 22호의 “위기이론들”, 「국제평론」 82호의 “IBRP의 쇠퇴개념과 전쟁의 문제”, 「국제평론」 83호의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 IBRP에 대한 답변”, 「국제평론」 84호의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 이론들: IBRP에 답하여”, 「국제평론」 121호(2005)의 “혼돈으로의 전락”에 그 논쟁을 실었다. 자본주의 쇠퇴와 관련된 2005년까지의 논쟁은 이미 나의 글(각주1참조)에서 정리한 바 있다. 그 이후 논쟁의 촉발은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의 「혁명적 전망」 27호(2005년 11월)에 실린 글 “자본주의 쇠퇴기에서의 전쟁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국제공산주의흐름」의 비판 글이 「국제평론」 127호(2006, 4th Quarter, 10-17쪽)에 “CWO에 대한 답변: 자본주의 쇠퇴기의 전쟁(1부)”에 실리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의 목적은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행하기 위한 기초로서 인류사회의 진화에 대한 맑스주의의 분석을 재확인하고 발전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 「혁명적 전망」이 전쟁에 뒤이은 번영은 전쟁의 효과가 이윤율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경제적 합리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국제평론」은 거부하면서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세계전쟁이 자본주의 생존에 필수적이었고, 19세기의 10년 주기의 위기를 대체했다고 보는, 다시 말하여 자본주의 위기분석을 이윤율 저하 경향에만 기초하고 있는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국제평론」 127호(2006년 4th Quarter)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4) 

     
    첫째, IBRP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모순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매우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폴 매틱(1904-81) 5)의 영향을 받은 IBRP의 접근방법은 자본주의의 쇠퇴, 위기,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 파멸의 중요한 표현 중의 하나인 전쟁의 뿌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전쟁이 자본주의 파탄의 마지막 보기이고 자본주의 경제모순의 악화의 표현일지라도 경제위기와 전쟁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번영이 전쟁 중에 일어난 파괴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셋째, 자본주의 생존에 대한 전쟁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이론이 노동자 운동의 전통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CWO의 분석은 평의회주의자 폴 매틱의 「맑스와 케인즈」에서의 경제주의적 분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자본주의 쇠퇴기에서의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생각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반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자본주의 생존에 대한 전쟁의 경제적 필요성의 기초는 사회적 진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계급투쟁을 완전히 제거시키는 조야한 유물론이라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이 노동자 운동에서 중심위치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IBRP가 주장하듯이 자본주의 생존에서의 경제적 역할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었기 때문이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분열의 뿌리였던 세계전쟁이 노동자 운동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었고, 바로 그 참상 때문에 첫 번째 세계적인 혁명 물결(1917-23)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은 스탈린주의를 거부한 모든 공산주의 그룹들에 대한 정치적 시험대였기 때문이며, 제국주의 전쟁은 인류의 생산, 역사, 문화적 자산 등의 모든 유산과, 그리고 그 주요구성요소인 노동계급과 전위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쟁이 노동자 운동의 중요한 문제였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제국주의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 ICC는 맑스와 CWO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쇠퇴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쟁의 뿌리라는 CWO의 주장에 대해 ICC는 맑스를 따라 이 법칙이 자본주의 역학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두 가지 행위 중의 하나로만 개입한다고 본다. 맑스는 항상 축적의 순환을 완결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충분한 이윤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하는 상품은 팔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둘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지만 생산하는 행위는 파는 행위와 “독립적”이라고 주장했으며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반대로 생산이 자동적으로 자신의 시장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생산과 시장이 다르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잉여 노동의 추출(생산의 첫 번째 행위)은 사회의 생산력에 의해 제한되는 반면, 이 잉여노동의 시장에서의 실현(판매되는 두 번째 행위)은 사회의 소비력에 의해 제한받기 때문이다 (Capital Vol.III. Section III, “Exposition of the Internal Contradictions of the Law”). 그런데 CWO/IBRP 는 첫 번째 행위에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환원시키고 있는데, 이는 폴 매틱을 따라 생산 그 자체가 자신의 시장을 생기게 한다는 해석 때문이다.


     사실 CWO/IBRP의 이러한 입장은 리카르도, 세이, 밀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견해로 맑스가 한 세기 전에 비판한 바 있다. 사회의 소비력의 한계는 사회적 소비가 다소 좁은 한계 내에서 감소하는 것으로 분배의 적대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다.6)

     

     이는 착취에 기초한 기존의 모든 생산양식과 같이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의 전유에 대한 적대적 계급 사이의 갈등을 둘러싸고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피착취자의 소비자의 힘을 제한하려는 자본주의의 내재적이고 영구적인 경향은 사회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모순, 즉 점증하는 생산의 사회적 차원과 사적 전유 사이의 모순을 나타내는 또 다른 보기이다. 개별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은 생산의 다른 비용처럼 최소화해야 할 비용으로 보이지만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기능이라는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임금의 총량은 개별자본가가 그의 생산의 출구를 반영하는 시장인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에 노동자를 연결시키는 구체적 관계는 임노동이다. 자본은 임노동을 전제로 하며 임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임노동은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이윤율 저하 경향과 경쟁에 의해 박차를 가하는 체계로서 항상적으로 임노동의 착취를 한계점까지 밀어붙이고, 가치법칙의 적용면을 확장하여 끊임없이 축적하고, 지불 능력이 있는 시장을 확장한다. 이러한 동학 내에서 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은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즉 이윤의 총량을 보상하고 증가시키기 위해 대량생산을 통해 개별 자본가가 매 상품마다 이윤율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 밀어붙인다. 그러나 임노동은 생산이 점점 사회적 성격을 가정하고 전 세계로 확장되지만 잉여생산물은 아직도 사적으로 전유되는 모순적 관계이다.

     

     “과잉생산은 구체적으로 자본생산의 보편적 법칙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즉 생산력에 의해 정해진 한계까지 생산하는 것, 다시 말해 시장의 실제적
     한계나 지불능력이 뒷받침한 필요에 대한 고려 없이 주어진 자본의 양으로
     최대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7)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는 수요의 상대적 제한을 통한 과잉생산위기의 불가피성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한편으로 개별자본가에게는 이윤율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 생산을 증진시킬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맞부딪힌 장애물, 즉 이윤율 저하 경향이 가져다 준 잉여가치의 불충분성 이전에 발생한 생산의 출구에 필요한 시장의 상대적 축소를 통한 위기의 발발을 말하고 있다. 과잉생산의 위기는 자본의 이윤과 위기(이윤율)와 분배(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부족) 모두에서 위기로 나타난다. 이윤율 하락의 동학이 과잉 생산의 위기를 가져오지만 CWO는 맑스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ICC는 비판한다.


    첫째, 임노동의 모순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점.


    둘째, 임노동 관계에 놓인 사회적 모순을 보는 대신 이윤율 저하를 과잉생산위기의 유일한 기제로 보고 자본주의 쇠퇴와 제국주의 전쟁을 포함한 자본주의의 모든 경제적 모순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점.


    셋째,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차원을 이윤율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생산의 확대와 축소에만 의존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반면 ICC는 맑스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에 대한 동일한 분석을 한다고 보고 있다.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제국주의는 확장의 역사적 과정의 마지막 장일뿐이다.’ 라는 두 사람의 입장이 같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로에 대한 살아있는 실재를 구체화했다는 점, 맑스가 보지 못한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특징적 모순에 대한 이해를 했음을 보다 높이 사면서 그녀가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제국주의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고리를 분석했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순간에 쇠퇴기에 들어섰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ICC가 비판의 근거로 삼고 있는 IBRP/CWO의 「혁명적 전망」 37호(2005)는 폴 매틱의 「맑스와 케인즈」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ICC를 비판한 바 있다.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에서 전체로서의 사회적 과정은 경제적 과정에 의해 결정된다. 물질적 삶의 모순들은 이데올로기적 삶을 결정한다. ICC는 가장 인과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 역사의 전(前)시기는 끝났고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요 변화는 자본주의 토대의 기본적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없다. ICC는 생산 영역의 분석으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순수한 추측인지를 인정해야 한다.”(135쪽)


     ICC는 이어지는 비판 글에서 IBRP/CWO의 입장을 맑스의 분석 방법에 기초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8)

     

     IBRP가 잊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가 유물론적 분석 방법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변증법적 분석방법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쇠퇴의 어떤 시기도 경제적 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데 로마제국의 쇠퇴나 봉건제의 쇠퇴에서 보듯이 하부구조에서의 봉쇄의 산물로서 위기는 쇠퇴의 진입 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양적 수준에서 위기가 나타나기 전에, 1차 세계대전으로 이끄는 지배계급 내의 갈등의 격화를 통해, 국가가 전쟁을 위해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의 배신과 자본진영으로 넘어간 노동조합을 통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전복할 능력을 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를 통해, 그리고 노동계급의 사회적 봉쇄를 목표로 한 최초의 조치들의 도입을 통해,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의 질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자본주의의 쇠퇴이다. 쇠퇴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1913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제적 위기의 이윤율에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경제적, 정치적 원인의 총체성에서 발견된다.


     그 당시 혁명가들인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판네쿡은 경제적 요인을 지적했지만, 경제적 위기와 이윤율 저하를 전쟁의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IBRP의 주장은 가치절하와 대량파괴의 결과로 전쟁 중에 일어났고, 이는 전후 경제성장과 이윤율 상승의 기초였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전후시기에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서 최악의 경제성과 뿐만 아니라 세계무역도 정체했다. 산업생산지수는 1913년 100에서 1929년 102로 정체한 반면 국민총생산에서의 국방비의 비율은 0.19%(1929-32)에서 1933이후 3.3%로, 1938년에는 28%로 급증했다.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재앙이었다. 경제적 수준에서는 세계의 부의 3분의 1이 파괴되었고, 사회적 수준에서는 극도의 빈곤으로 몰아넣은 노동력의 착취로, 정치적 수준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투쟁을 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조직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배신이 있었고, 인구의 수준에서는 2천만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고, 전쟁 후 스페인 독감으로 2천만이 죽었다. 이를 IBRP는 ICC가 전쟁을 자본주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기능으로 보지 않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혁명적 전망」, 37호)하지만 전쟁이 전후 경제에 재생효과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볼 때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고 ICC는 비판한다.


     또한 이 글은 이윤율 하락이 위기, 전쟁, 그리고 재건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윤율 수준과 진화가 전쟁을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 ICC는 왜 3차 세계대전이 1930년대 후반에 발발하지 않았는지를 IBRP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윤율이 1965년부터 하락하고 있고, 이는 1914년과 1940년보다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윤율 수준과 진화가 전후 번영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전후 특별한 이윤율 증가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이 이윤성으로 복귀한 것은 군사 분쟁과 전쟁에 의한 파괴에 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율 수준이 1929년 공황과 1930년대 위기를 설명할 수 있는가? IBRP의 주장과는 반대로 1928년은 그 이전 20년 동안의 경제성장보다 높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IBRP는 축적순환이 이윤율이 너무 낮을 때 봉쇄되고 지체되며 고정자본의 가치절하와 재생을 허용하는 전쟁의 파괴 이후에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대립에 의한 이윤율 상승과 새로운 기술혁신에 의한 고정자본의 가치하락으로 이윤율 소생을 말하고 있는 일면적 경제주의적 분석의 명백한 한계와 오류를 ICC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ICC의 반박에 대해 IBRP/CWO는 그들의 기관지 「혁명적 전망」 43호(2007) “자본주의와 그 위기의 동학: ICC에 대한 답변”에서 ICC를 재반박하고 있다.9)


     이 글은 다음과 같이 ICC의 기본입장을 비판한다. ICC는 가치법칙에 대한 맑스주의의 이해에서 자본주의 실질적 운동에 대한 전망을 하지 않고 추측보다 못한 주관적 전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가 있으니 혁명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고 노동계급을 붙들어 매는 유일한 길은 부르주아지의 선전이었다는 구세주적인 견해를 지니게 된다고 본다. 보기를 들어 1930년대 후반 경제위기에서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을 공격하여 계급투쟁이 고조될 때 부르주아지는 선거의 방식으로 “반대하는 좌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다고 ICC는 주장하는데, CWO는 이러한 주장은 넌센스이며 부르주아지는 좌우를 막론하고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정부를 필요로 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세계 인구의 절반이 한 쪽에서는 매일 일 파운드로 사는 상황을 만드는 반면, 극소수가 인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수억 불 가치의 돈을 통제하는 체제인 자본주의는 어떠한 객관적 표준으로 보나 비합리적이라는 ICC의 주장이 법칙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본주의가 가치 법칙의 분석을 통해 이해될 수 없다면 맑스주의 이론에 무엇이 남겠는가라고 반문한다.


     CWO는 ICC의 「국제평론」 127호(2006), 128호(2007)에 실린 글을 평가하면서 적대적 논쟁을 넘어 ICC와의 공통점을 부각시키는 노력도 보이고 있다.


    첫째, ICC가 자본주의 모순이 체제 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맑스의 시장에 대한 입장과 룩셈부르크가 방어하는 입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는데는 실패했다고 본다. CWO는 ICC의 경제이론의 근거는 1920년대 「빌랑」에 실린 국제공산주의 좌파의 가장 출중한 이론가 중 하나는 미첼에서 온 것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시장을 찾을 수 없다는 룩셈부르크의 이론이었다. 그리고 ICC는 항상 맑스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재생산의 유형”으로 위기가 온다는 인용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공산주의 선언」은 맑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 작동방식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하기 전에 쓰여졌다고 CWO는 설명한다. 즉, ICC의 주장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공헌(1859년)」 이전에 나온 저작에서 나타난 시대에서 비합리적 현상으로 보이는 과잉생산의 위기를 인정한 위기의 원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ICC는 「자본」 3권에서 자본의 진정한 족쇄는 자본-임노동 관계라고 하면서 유명한 문단을 인용한다. “모든 실재 위기의 가장 최종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에 대비되는 대중의 빈곤과 제약된 소비이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절대적인 소비력이 그들의 한계가 될 것이다”(Lawrence & Wishart, 1934, 484쪽). 시장에 대한 ICC의 강조에 대해 CWO는 이를 이윤율의 문제로 바라본다.
     
    “자본주의 사회에 너무 적은 노동자가 있거나 너무 많은 생산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윤율 저하를 상쇄할 수 있는데 필요한 이윤을 창조하기에는 너무 적은 생산적인 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상품을 수익성 있게 팔기에는 너무 커다란 생산력이 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다시 말해 불변자본에 대비한 가변자본의 감소는 이런 관계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다.” (「혁명적 전망」 37호, 2005년, 17쪽)

     

     다른 말로 왜 시장이 어느 순간에 확대될 수 있고 다른 순간에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것은 오직 가치관계의 변화 때문이며 시장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확장을 위한 수익성의 문제에 의존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CWO는 ICC가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을 임노동관계에 내재적이라고 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대중의 빈곤과 제한적 소비” 사이의 연결고리를 토론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ICC가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1911)」의 중심 체계와 고리를 끊는 신호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두 번째로 CWO는 룩셈부르크가 맑스주의로부터 벗어났음을 지적하고 있다.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일어날 축적의 전제조건으로서 어떻게 순환되는지를 간단하게 보여준 「자본」 2권 “자본의 순환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했다고 룩셈부르크는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놓인 곳을 보여주자고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본주의 체제를 말하고 있을 뿐인 「자본」 1권의 방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하면서 CWO는 이러한 단순재생산은 교육적인 목적이며 현실에서는 모든 자본축적은 확대재생산 조건 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맑스는 부문1과 부문2 사이의 일시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야기되는 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중심적인 모순, 즉 역사적 모순은 유통과정에서 발견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룩셈부르크는 이런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본의 모순은 생산과정에서 일어난다고 한 맑스의 분석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으로서 이윤율 저하 경향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붕괴이론을 찾으려 했으며 누구를 위하여 확대재생산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질문함으로써 맑스주의에서 일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룩셈부르크는 경쟁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적 요소로 파악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부가되는 요소쯤으로 인식한 것 같다고 CWO는 비판하면서 「자본축적」 25장에서 1부문과 2부문 사이의 관계를 논할 때 경쟁을 배제하는 포괄적인 접근을 선택하고 잉여가치가 동일한 부문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더욱이 그녀는 부문 간 자본의 이동을 부정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맑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한다고 비판한다.


     셋째, CWO는 가치 관계가 자본주의 위기의 열쇠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ICC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대중의 빈곤과 제한적 소비”로 본다고 주장한 것을 자신들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맑스의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지만 로자 룩셈부르크 이론의 틀에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ICC가 맑스의 위기이론의 과잉 생산주의적 해석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룩셈부르크를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CWO는 ICC에 동의할 수 없는데 이는 ICC가 머릿속에 현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ICC가 「자본」 3권과 「잉여가치학설사」를 인용하지만 과잉생산이 자본주의 위기의 선행원인이라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혁명적 전망」 43호(2007년)은 ICC와 동의하는 한 문장이 “이윤율 하락 경향을 매시기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CWO와의 근본적 차이는 ICC가 30년 동안 그들의 정치적 교의에 갇혀 유물론적 방법을 결여했고 이는 「국제평론」 128호와 129호에서 보여주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이러한 논쟁이 어떻게 이윤율 하락 경향 법칙이 자본주의 위기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생성과 쇠퇴의 배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긍정적인 토론의 전망을 내놓았다.

     

    2.2. 최근 40년의 공공연한 자본주의의 위기와 쇠퇴의 징후들
     
    위의 논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이론은 잉여가치의 추출과 그 실현과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고, 잉여가치 추출의 과정에서는 이윤율 저하의 법칙이, 그리고 잉여가치 실현의 과정에서는 시장 포화의 한계 법칙이 위기의 기본이 된다. 이 두 가지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틀이 요구된다. 지금의 위기는 잉여가치 실현의 막다른 골목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쇠퇴와 위기는 독립적이지만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쇠퇴에 대한 인식은 위기의 순간(보기를 들어 1929년 대공황)과 위기를 지금의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1914년 이래 쇠퇴의 상태에 있음과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괄목할 성장률이 사실은 자체 재생산의 조건 창출이 점점 더 불가능해진 체제의 죽음의 고통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위기에 따른 입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하나는 파국론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해 어느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새로운 천년 왕국이 올 것이라는 묵시록이나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의 주장이다. 이러한 파국론이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는 무산자들을 미몽에 빠뜨렸고 그러한 비과학적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있다. 또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내뱉는 낙관론이다. 이 낙관론은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자치를 내장하고 있고 투기를 근절시키면 경제는 잘 운영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입장보다 더욱 세련되고 지배적인 입장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수한 항해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특히 이러한 세 번째 입장이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에까지 파고들어와 계급투쟁을 희석시키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 위기를 과잉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그런데 과잉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체제로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다.

     
     20세기에는 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이러한 상승기의 자본주의가 마감을 하고 전지구가 임노동과 상품의 생산관계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의 자본주의를 1919년 코민테른은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시기로 규정하였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의 쟁탈과 통제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아갔으며, 다른 한편에서 나타난 과잉생산경향은 19세기와 달리 세계경제를 불안정과 파괴의 반영구적인 위기로 종속시키는 만성적인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2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0-30%의 실업자를 만든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인 1차 세계대전과 1929년 세계대공황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한쪽에 경제의 국가화를 통한 (국가)자본주의(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와 다른쪽에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주의가 결합한 자유주의 국가를 형성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함)는 25년 동안 재건과 부채 증가에 힘입어 예외적인 번영을 했으며, 정부 관료, 노조 지도자, 경제학자, 자칭 ‘맑스주의자들’까지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호언장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7년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1969년 인플레이션 위기, 1973년 오일 쇼크, 1974-75년의 경기 후퇴, 1979년 인플레이션 위기, 1982년 부채 위기, 1987년 월스트리트 위기, 1989년 경기후퇴, 1992-93년 새로운 경기후퇴로 인한 유럽통화의 혼란, 1997년 아시아의 ‘호랑이’와 ‘용’의 위기, 2001년 미국의 ‘신경제위기’, 2005년 서브프라임 위기, 2008년 리만브라더스 등 금융위기, 2009년 대공황에 버금가는 총체적 위기로 현재 자본주의는 해체와 파국에 직면해 있다.


     이미 오래전 케인즈주의 해법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연장시키는 사이비 해법일 뿐이고 맑스가 예측한 자본축적의 모순적 경로를 막아내는 해법이 아님을 폴 매틱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10)  

     

    “선진 공업국 내에서의 ‘번영하는’ 조건의 긴 기간에도 불구하고, 자본생산이 경제에의 국가개입을 통하여 내재적 모순을 극복했다는 가정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개입 스스로 자본생산의 위기의 지속성을 가리키고 있고 정부가 결정한 생산의 성장은 사적 기업경제의 계속되는 쇠퇴의 분명한 징표이다.”
     
    그러나 「맑스와 케인즈」에서의 매틱의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분석은 몇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가치법칙을 쇠퇴의 표현으로 왜곡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구 블록의 완전히 국가화된 국가는 더 이상 가치 법칙에 종속되지 않고 위기를 향한 경향에 종속된다고 주장한다.


     후에 「국제공산주의흐름」의 지부가 된 미국의 「국제주의」 그룹은 매틱의 이러한 결점을 인식하고 “국가자본주의와 가치법칙: 「맑스와 케인즈」에 대한 응답”이라는 글을 1970년대 초 「국제주의」 제2호에 실었다. 이 글은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매틱의 분석이 그가 여러 곳에서 방어한 쇠퇴의 개념을 훼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가 사회주의가 위기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매틱이 주장한 대로 그것이 생산력의 자동제어와 발전에 더욱 유리하다면, 또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제국주의적 추동을 따르도록 떠밀리지 않는다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기초는 사라지고 쇠퇴 시대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대안은 불분명해졌을 것이다.” 11)

     

    「국제평론」의 이 글은 소멸하는 체제의 대차대조표를 경제적 수준, 군사적 수준, 생태적 수준, 그리고 사회적 수준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2)

     

    1. 경제적 수준에서

     

     1914년 이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일반적 개관은 어떠한 기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상승하는 생산양식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을 피할 수 없는 체제의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있다.
    - 1914 – 1923: 1차 세계대전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국제적 물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전쟁과 혁명의 시대’의 새벽을 선언하다.
    - 1924 – 1929: 짧은 경기 회복. 호황은 주로 미국에 제한된다.
    - 1929: 미국 자본의 풍부한 확장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공황을 재촉하는 장관의 추락으로 끝난다. 19세기 초의 순환적 위기의 경우 같은 생산의 자생적 부활은 없다.
    - 1945 – 1967: 국가 지출의 주요 발전(본질적으로 부채를 통해 금융조달되고 생산성의 예기치 못한 성과에 기초한 케인즈주의 수단)은 제3세계의 상당부분을 배제한 채, 그 이전의 어떤 것과도 다른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위한 조건으로 만든다.
    - 1967 – 2008: 40년의 공공연한 위기는 특히 70년대의 질주하는 인플레이션과 80년대의 대량실업에 의해 시행되었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의 위기는 지구의 어떤 시기와 부분에서 다른 시기와 부분보다 더욱 ‘공공연’하다: 자본 운동과 금융 투기에 대한 제한의 제거: 노동력이 싼 지역에의 전반적 산업재배치: 신기술 발전과 무엇보다 국가, 기업, 가계를 위한 사실상 무제한적 신용에의 의존은 거대 이윤이 소수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장’거품을 만든다. 광란적인 공업성장은 중국 같은 국가에서 일어나며 신용카드 소비자주의는 중심자본주의국가에서 새로운 정점에 이른다.
    - 2008- :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국가가 지난 40년동안 적용한 ‘해법들’, 무엇보다 신용에의 의존이 그것들을 부지런히 실천해 왔고, 지난 시기 잘못된 신념을 지녀왔던 정치인, 금융인과 관료들의 눈앞에서 촉발한 질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도달한다. 신용을 통한 가공시장의 창조는 화폐가치를 파괴하고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키면서 역사적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2. 군사적 수준에서
     
    제국주의 전쟁은 국지전이건 세계대전 이건 더 이상 공공연한 전쟁의 국면에 제한되지 않는, 자본주의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3. 생태적 수준에서

     

     자연 세계의 오염과 파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해 있었지만 지난 세기 동안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지구의 마지막 구석구석까지 쉬지 않고 점령하면서 더욱 광범위하게 뿌리박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막다른 골목에서 공기, 땅, 바다, 강, 그리고 숲의 약탈은 자연 자원에 값싼 노동 그리고 새로운 시장에 대한 잔인한 국가 경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지구 온난화의 형태로 온 생태적 파국은 자본주의의 묵시록의 새로운 기수가 되었고, 연이은 국제정상회의는 부르주아지가 그를 해결할 가장 기본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4. 사회적 수준에서
     
    40년 위기동안 자본주의는 대량실업 강제라는 직접적인 임금삭감과 복지국가를 분해하는데 비교적 조심스러웠다. 그리스 같은 국가들에 지금 떠맡기는 야만적인 긴축조치는 어디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나 올 수 있는 조짐이다.
    노동계급이 1960년대 말 투쟁을 부활할 때 혁명의식을 발전시키는 능력은 그들이 거쳐 온 반혁명 – 노동자의 세대가 그들 자신의 전통과 조직을 깊이 의심하도록 만든, 스탈린주의가 ‘프롤레타리아’ 의상을 입고 스스로 보여준 반혁명 – 트라우마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스탈린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사기성 짙은 등식은 80년대 말 스탈린체제가 몰락할 때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발전시키는 능력, 즉 노동계급의 자기신뢰를 더욱 침식하면서 극점까지 몰아갔다. 이처럼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 쇠퇴의 산물은 계급의식을 망쳐놓는 부르주아지 모든 분파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단계에 들어섰음은 인류의 파멸이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험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포화로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3.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항상적이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를 참칭하였고, 결국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양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의 노동자 계급을 억압·착취하였다. 더구나 1989년 동구블록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대적할 폭이나 의식, 그리고 능력은 지니지 못했다. 2003년까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1989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다. 노동자의 투쟁은 주로 중심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2005년 보잉과 뉴욕교통), 독일(2004년 다임러와 오펠, 2006년 봄 의사, 2007년 봄 독일 텔레콤), 영국(2005년 3월 런던공항), 프랑스(2006년 CPE 반대 투쟁)가 있고, 주변부 국가로는 두바이(2006년 봄 건설노동자), 방글라데시(2006년 봄 방직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노동자)의 투쟁이 있다. 2006년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계급투쟁은 이집트 두바이, 알제리, 베네쥬엘라, 페루, 터키, 그리스, 핀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태리,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전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국가 부채, 재정악화로 인한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과 국가에 의한 공격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급의 공세적 투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미국 월가의 점령 투쟁, 아프리카의 민주화투쟁, 중국, 인도에서의 노동자 투쟁은 쇠퇴기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40년의 위기와 노동계급의 생활표준에 대한 공격, 특히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날려버렸다.
    둘째, 점점 야만의 형식을 취하는 군사갈등의 영구화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에 대한 가시적 위협은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반자본운동’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은 혁명을 벗어나게 하려는 부르주아지가 숨긴 항체이다.
    셋째, 스탈린주의와 20여 년 전 그 몰락 이후의 부르주아 캠페인이 만든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다. 지금 노동의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세대는 ‘공산주의의 죽음’에 대한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어린이였다.


     그런데 4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왔다. 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다. 그 마약을 소련 같은 (국가)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미국 같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전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 세계 노동자의 가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150여 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야만인가 문명인가’, ‘코뮤니즘의 물질적 필요성’을 말하는 역사적, 문명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자본주의 쇠퇴의 객관적 법칙과 조건이 생산, 권력, 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과 만나 서로 침투하는 계급투쟁을 전개하는데 코뮤니스트의 역사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코뮤니스트는 맑스주의 원칙 중에서도 국제주의의 원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해방투쟁에 왜 참여하지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왜 그것을 지지해야하는가의 문제야말로 “민족해방” 투쟁에 대해 가져야 할 관점이다. 국제주의는 공산주의 초석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1848년 이래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는 노동자 운동 속에 잘 확립되어 왔고 「공산주의 선언」의 마지막 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에 담겨져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민족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었다. 그들의 전반적인 전망은 세계시장의 분석과 미래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지구적 인간 공동체, 세계적인 생산자 연합이라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상승기에 글을 썼고, 그 시기는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지배의 족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진보적이고 혁명적 계급이었다. 그들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상품관계는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의 유일한 기반이었다. 그 당시 혁명가들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한 것은 이러한 관점 때문이다. 이 시기에 민족전쟁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를 구별시킨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시기에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민족자결에 대한 추상적 ‘권리’를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지어 노동자가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의 투쟁을 지지할 때에도 부르주아지로부터 엄격한 정치적 독립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지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맑스와 엥겔스와 같이 레닌도 민족해방투쟁이 부르주아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와 식민지 국가에서 봉건제를 전복하고, 민족독립을 성취하는 부르주아지의 임무는 완수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룩셈부르크의 비판으로부터 민족자결권의 구호를 유지하는 볼셰비키의 입장을 방어했다. 반면 룩셈부르크에게 제국주의는 단순히 후진국가에 대해 선진자본이 저지른 강도적인 형식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관계의 “총체성”의 표현이었다. 그 후 스탈린주의 관료주의는 세계자본에 내재적으로 적대적인 세력이 되는 것과 달리 러시아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착취에 종속되는 세력으로, 그 착취의 도구였다.


    2차 세계대전을 경과하면서 식민지에서 민족운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화했다.


    첫째, 전쟁 후 몇 년 간 비교적 평화적인 탈식민지화의 경향이 있었다.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폭력적인 민족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옛 식민종주국은 재빨리 “민족” 독립에 동의했다. 대영제국의 “평화적” 해체는 가장 적절한 보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식민지 국가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적이며 지구적 자본의 확대재생산의 기반으로 더 이상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한국, 베트남, 중동 등에서의 전쟁은 2차 세계대전 후 세력 균형의 산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인류의 가장 기본적 필요에 부응할 수 없는 무능력과 구식민지 지역의 극단적인 사회적 해체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제국주의는 직접 서로 부딪치지 않았고 지역갈등이 “강대국”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매개 구실을 했다. 이는 지역 부르주아지가 항상 강대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 부르주아지는 그들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있고 제국주의적이다. 자본주의 쇠퇴 시대에 모든 민족국가는 제국주의 권력이다.
     1960년대에는 제3세계주의와 민족해방 신화의 전성기였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는 베트남 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 투쟁으로, 중국을 세계의 피억압민중의 성채로, 체, 카스트로, 벤 벨라 등에 대한 숭배로 나아갔고, 모든 세대의 학생과 심지어 노동계급의 전투파까지도 이러한 신화에서 자양분을 얻고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연대운동을 전개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은 이 신화로부터 제국주의가 준 돈을 받고 면제되었으며, 제3세계 인민의 등 뒤에서 세워진 자본주의 번영의 혜택을 즐겼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주요 혁명세력이 아니었다. 혁명의 주동력은 훈련된 게릴라 군대가 이끌고 도시에서의 새로운 혁명전위(노동자가 아닌 학생, 흑인, 여성)와 연대함으로써 후진국 농민과 빈민대중의 봉기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는 이러한 모든 신화가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라는 빛에 의해 무자비하게 노출되었다. 역사적으로 파산된 세계질서의 위기는 두 개의 주요계급으로부터 두 가지 기본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경쟁하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부르주아지는 세계 전쟁으로 내몰린다. 사회적 부의 생산자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표준을 방어하는 투쟁, 즉 전쟁을 향한 움직임을 막고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두 계급의 분리되는 경향은 70년대에 이른바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허위와 환상을 흔들어 놓았다.


     세계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떠한 새로운 독립적 자본주의도 나타날 수 없다. 또한 민족해방은 불가능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환상은 거의 사라졌지만 두 가지 다른 형태로 국제주의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반세계화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의 복원을 통한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이다. 반세계화운동은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선전과 같은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① 자본주의는 유일한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유일한 대안이다.
     ② Attac과 같은 조직의 운동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잘 규제된 자본주의가 사악한 금융자본을 몰아내면 인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③ 위기는 신자유주의 탈규제화와 산업자본으로부터의 투자수익률 15% 요구하는 금융자본의 독재의 결과이다.
     ④ 내핍, 금융 불안, 불경기는 부르주아지 내의 새로운 힘의 균형의 결과에 불과하다

    .
     모든 반세계화 운동 세력의 중심 기조는 세계자본주의에 근본적 대안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반미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빈곤화되는 농민, 도시 빈민, 노동자의 밑으로부터 혁명적 분출을 기반으로 한 남미의 민중주의적 경향이다. 한 국가 내에서의 미국 자본과 민족 자본의 대립에 근거한 국유화 등의 조치는 세계자본 내에 경쟁하는 자본의 분파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세계자본주의의 운동과 위기, 모순, 쇠퇴를 이해한다면 100년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경험한 오류를 다시 되풀이하는 엄청난 장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열어갈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 비타협적인 자발적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일이다.
     계급의 투쟁을 엇나가게 하고 자본의 분파와 연결시키는 모든 세력 (노동조합이건, 좌파당이건, 민족해방전선이건)으로부터 독립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과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오늘날 노동계급에게 열린 유일한 전선은 자본에 대항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전선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본주의에서 “차악”은 없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국제적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투쟁도 국제적이다.


     둘째, 세계적 내전으로 길을 여는 일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중심 자본주의의 쇠사슬을 끊을 때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리도록 제3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저주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지구적 사회관계로서의 자본을, 그리고 “하나의” 세계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을 이해하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선진국에서 일어나든, 제3세계에서 일어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느 곳에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립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세계적 내전”의 시기를 연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전”은 권력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자마자 프롤레타리아트는 죽을 때까지 자본과의 투쟁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 세계 계급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고려라는 전반적 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군사적” 확장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무장된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게 혁명 투쟁을 촉구하지만 테러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라도 핵과 세균전쟁을 사용할 수 없다.


     셋째, 세계의 인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다.
     옛 노동자운동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어느 정도 민족 선구자 뒤에서 실현될 수 있고 세계 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의 점진적 융합 과정으로 창조될 수 있다는 혼란스런 생각이 가능했다. 그러나 러시아 경험은 일국 사회주의 건설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되어야만 한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내에서” 건설될 수 없다.

     

    4. 결론에 대신하여 – 한국에서의 코뮤니스트 운동
     
    「국제 코뮤니스트 전망」은 2012년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제안하며」에서 1992년부터 2002년 대통령 선거까지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3)

     

     “1992년부터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으로 공개 영역으로 나온 사회주의 서클들은 선거주의와 의회주의로 경도되면서 합법-개량주의로 나아갔다. 특히 1997년은 양날개론으로 표현되는 민주노총의 건설과 그에 기반한 민주노동당의 건설로 혁명적 사회주의의 비공개영역과 적대적으로 분리되었다. 2002년의 대선은 이러한 관계설정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힘」과 「사회당」은 선거 전술에 집착하여 혁명정당건설을 통한 혁명주의의 복원으로부터 이탈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서클과 함께 혁명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무산되었다.”(11쪽)

     

     2002년 9월 13일 오세철은 「전국의 모든 동지들에게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새로운 결집을 제안한다」에서 “좌파 정치조직인 「노동자의 힘」은 노동조합 ‘배후정치’를 활동의 축으로 삼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당은 계급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채 ‘립 서비스 수준의 사회주의’를 선전하고 있다…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 사상적 혼란과 동요, 잡다한 수정주의의 범람 속에서 올바른 사회주의적 실천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하면서 “나는 그 길에 투쟁하는 노동계급 대중과 결합하는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가칭) 사회주의 정치연합」을 모든 사회주의자, 계급적 좌파 진영에 제안하는 바이다. 이 계급투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현존하는 정파적 이해와 관습을 깨고 노동의 대지에 희망의 싹을 키우자!”고 제안했다.


     2003년 「사회주의 정치연합」은 중도주의와 선을 긋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와 단결을 위한 매개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2005년 7월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을 제안하게 된다. 그 제안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4)

     

     첫째, 자본주의의 필연적 사멸이라는 역사유물론에 입각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근본원칙을 재확인하고 생산력주의 편향, 생산관계 모순의 은폐와 같은 비맑스주의의 역사적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


     둘째, 자본주의의 객관적 구조와 혁명적 주체의 변증법적 결합은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기계적 유물론을 극복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계급혁명을 이룩하여야 할 역사적 과제를 인식했다는 점.


     셋째,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축적위기가 자본의 전략(노동계급의 포섭, 과학기술혁명, 복지국가 등)으로 모면될 수 없고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야만에의 회귀로 나아가 결국 인류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인류를 야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를 폐절시키고 혁명적 사회주의를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점.


     넷째, 1920년대 초반의 세계혁명의 실패, 스탈린주의(특히 일국사회주의, 생산력주의, 관료주의)의 등장은 반혁명의 반전을 가져왔으며 그 이후 파시즘, 2차 세계대전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공고화로 나아가게 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퇴행에 도움을 주었던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유지·강화를 보완하는 반혁명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고 혁명 세력의 복원을 가로막았다는 점.


     다섯째, 지금까지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진정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 프롤레타리아 당)의 건설을 목표로 한 각각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 건설의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권력기관인 노동자평의회와 변증법적 결합으로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이 모임의 제안은 세계혁명을 향한 세계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의 국제주의 실현을 위한, 세계 코뮤니스트 연대를 위한 것이며, 그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도 함께하면서 우리의 혁명적 운동을 복원해 내고 고립·분산되어 각개 약진하고 고군분투했던 세력들이 새로운 각오로 힘차게 연대 전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취지였다. 2년간에 걸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기반으로 이 모임은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동의한 주체들을 중심으로 2008년 2월 출범하게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혁명당 건설을 공개적으로 대중적으로 선언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 흐름은 새로운 시도로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국가보안법상의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재판투쟁을 통한 사상투쟁과 줄기찬 혁명주의의 선전선동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노련」은 서클 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인자들이 다시 한 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걸음 전진하자는 「사노위」 결성제안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며,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은 결국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사노위」와 분화된 세력이 「노혁추」와 「노동해방」으로 각개 약진하고 「사노련」의 잔존 그룹은 「노건투」로 각각 실천하게 되는 과정은 혁명 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실천을 하면서 계급으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측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총선 선거 전술 문제로 「노혁추」에서 좌익공산주의 세력이 분화한 것은 ‘종파적 철수’가 아니라 ‘정치적 차이’의 결과였다. 그 차이는 혁명당 건설을 둘러싼 정치활동의 전망과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 공동전선에 대한 입장 차이, 그리고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12년 대선에서의 후보 전술과 당 건설의 경로에 대한 차이가 현실화되면서 2013년은 다시 한 번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향방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 코뮤니스트 전망」의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제안하며”의 두 문단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15쪽)

     

    “우리는 혁명주의 세력의 노선 투쟁을 통한 경쟁과 연대-단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동안 혁명세력이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세력, 각종 기회주의 세력과 대척전선을 공고히 하는데 주력해 온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노선으로 논쟁하고 계급으로부터의 검증을 통해 신뢰를 학습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노선투쟁의 역사가 이미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100년 전부터 있었음을 상기하고 있다. 세계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노동자 국제주의를 실현하려는 현 단계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세력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맑스주의 사상과 실천의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노선투쟁을 해야 하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원칙-강령의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공산주의 좌파」의 원칙과 투쟁을 계승·복원하고, 다른 혁명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하며 다시 연대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가 로두스다.”

     

     2010-11-10-london-student-protest.jpg

     

     주) 

    1.  더 자세한 것은, 오세철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오세철 편저, 빛나는 전망, 2008, 262-278쪽을 볼 것

    2.  엥겔스, Nikolai Danielson에게 쓴 편지, 1892년 9월 22일

    3. 「국제공산주의흐름」, “자본주의 쇠퇴이론과 수정주의에 맞선 투쟁”, 「국제평론」, 2010, 여름호, 13-17쪽

    4. 「국제공산주의흐름」, “CWO에 대한 답변: 자본주의 쇠퇴기의 전쟁(1부)”, 「국제평론」 2006년 4th Quarter, 10-17쪽
    5. 14세부터 스파르타쿠스 청년운동의 투사인 그는 1920년 KPD를 떠나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에 가입했으며, 1926년 미국으로 왔다. IWW에 가입하고 소규모 평의회 공산주의 그룹에 가입했으며 「Living Marxism(1938-40)」과 「New Essays(1942-3)」의 편집자를 지냈다. 

    6.  Karl Marx, 「Grandrisse」, The Pelican Marx Library, 1973, 410쪽

    7.  Karl Marx, 「Theories of Surplus」, vol.2, Lawrence & Wishart, 1969, 534쪽

    8. 「국제공산주의흐름」, “CWO에 대한 답변: 「이윤율 저하 경향과 자본주의 쇠퇴로의 진입(2부)」, 「국제평론」, 2007, 1st Quarter, 128호, 9-16쪽
    9.   IBRP/CWO, “자본주의와 그 위기의 동학: ICC에 대한 답변(1)”, 「혁명적 전망」 43호, 2007.

    10.  폴 매틱, 「맑스와 케인즈: 혼합 경제의 한계」, Merlin Press, 1969, London, 14장 “혼합경제” 152와 163쪽

    11.  ICC, “40년의 공공연한 위기는 자본주의 쇠퇴가 종착역에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평론」, 2012, 1st Quarter, 148호, 22쪽

    12.  윗 글, 23-27쪽

    13.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는 오세철, “맑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정치)운동에 대한 회고”, 「다시, 혁명을 말한다」, 2010년, 빛나는 전망, 192-224쪽을 볼 것

    14. 오세철,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 모임을 제안합니다”, 「다시, 혁명을 말한다」, 2010년, 빛나는 전망, 152-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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