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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故 남궁원 동지의 공산주의 출판 활동
  • 조회 수: 10217, 2013-09-02 17:51:33(2013-09-02)
  • 故 남궁원 동지의 공산주의 출판 활동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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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故 남궁원 동지가 2002년부터 활동한 사회주의정치연합(준) 에서 발행한 정치 팸플릿이자, 빛나는 전망 출판사 첫 출판물이다.


    지은이(사회주의정치연합/준)는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의 발행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21세기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연관되는 세계혁명의 주객관적 조건을 검토하는 작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혁명적 맑스주의자의 필수적인 연구과제인 동시에 실천적 과제다.”

    “세계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러시아혁명과 유럽(특히 독일)혁명을 비교하는 것은 러시아혁명, 레닌, 소련 맑스주의와 공산주의,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독일혁명을 중심으로 한 유럽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 좌익공산주의, 평의회운동, 유럽의 맑스주의 철학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특히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한 일방적 수용과 좌익공산주의에 대한 일방적 헐뜯는 역사적 관점에서 교정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당, 평의회, 노동조합에 대한 레닌과 유럽 좌익공산주의자의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이 논쟁에서의 중요한 입장 차이는 계급투쟁의 기성세대에게는 혁명 전통의 문제이며,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는 세대에게는 맑스주의의 연속성과 혁명적 코뮤니스트 운동의 길을 열어주는 기준선이기도 하다.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는 동지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故 남궁원 동지가 직접 작성한 (한국 : 8·15 해방 이후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 투쟁과 조선공산당, 전평) 부분을 소개한다.
    우리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더욱 확장하여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계급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을 평가하고 당, 평의회, 노동조합에 대한 원칙과 정치입장을 정립해 나갈 것이다.


    한국 : 8·15 해방 이후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 투쟁과 조선공산당, 전평 [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저자 사회주의정치연합/준), p115~125 전문]

     

    1945년 해방 이후 일제하 식민지 권력기구가 무너지면서, 밑으로부터 스스로 조직한 조선 노동계급의 자발적 행동과 투쟁은 친일자본가들의 기업과 공장에 대한 접수와 관리를 쟁취하려는 노동자 공장자주관리운동 및 공장폐쇄나 조업단축에 대항하는 해고반대투쟁과 퇴직금 요구투쟁 등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중 가장 중심적인 운동은 노동자 스스로 생산을 통제하는 “공장자주관리” 투쟁이었으며, 이러한 투쟁은 반제 반자본주의적 투쟁의 성격을 지니면서 동시에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맹아로 볼 수 있다.

     

    8·15 해방 직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투쟁은 광범위한 대중투쟁이 폭발하는 ‘혁명적 상황’과 결합되어 있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은 단순히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해방 후 조선경제의 전반적인 재편방향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수립과 결합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주요하게 8·15 해방 직후 아래로부터 스스로 조직한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투쟁과 조선공산당 (이하 조공)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는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조선 노동계급의 공장자주관리 투쟁

     

    일제 통치하 조선의 식민지자본주의적 발전과정 및 공업 확장은 타 식민지들과 달리 대조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1943년 한국의 노동자 총수는 1백3십만 명이었다. 다른 식민지 중국, 타이완보다 2배 내지 3배 빠른 비율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제의 패망은 공업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제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해방은 조선의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 자본의 철수와 기술의 부족을 가져왔고 공업생산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다. 해방 후 공업 생산의 감소는 당연히 노동자 수의 감소와 대량실업, 임금하락으로 나타났다. 1946년 11월 남한 전체의 실업자 수는 110만 2천 명으로 파악되었다. 해방 후 실업 노동자 수는 일본자본의 철수에 따른 폐업, 조업 단축 외에도 전재(戰災)민, 나아가 해외동포, 북한 동포의 월남과 더불어 더욱 늘어나고 있었다.

    일제식민지 권력의 붕괴와 일제자본의 철수에 따른 정치 경제적 조건은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이 등장하는 주요한 객관적 배경이었다. 이러한 점에 볼 때 해방 후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은 노동자계급투쟁의 발전 속에서 직접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해방이라는 조건과 상황에 규정된 자연발생적 성격이 강하였다.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의 주체적 측면에서 보자면, 감옥에 갇혔던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일제히 출소했다는 점, 식민지시대 명맥을 지켰던 비합법조직이 해방 뒤에 대중조직으로 바뀌어 모습을 드러낸 측면이다. 아울러 해방 이후 등장한 공장자주관리위원회 투쟁은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영향과 무관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 경제투쟁에 노동자들의 각종 기념일 투쟁과 정치투쟁을 배합시켜 민족해방투쟁의 선구에 나선 바 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자본가계급 및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고, 특히 민족개량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투쟁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전시체제로의 전환에 따라 약화되지만, 8·15 해방공간에서 폭발적인 투쟁으로 노동자공장자주관리투쟁, 전평을 낳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11월4일 기준으로 16개의 산업별 노조에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와 관련된 노동자 수는 8만 8천여 명을 헤아렸다 (『해방전선』 제8호)고 한다. 이것은 당시 1,194개의 분회 중에 약 61%의 분회에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어 있고, 조합원 수 217,073명 중에 약 41%의 조합원들이 공장관리위원회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된 728개의 사업체는 당시 15,180개의 전체 산업별 사업체 수의 약 4.8%, 공장관리위원회와 관련된 8만 8천여 명은 전체 산업별 노동자 수 931,442명 중에 약 9.4%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공장관리위원회는 일제와 자본가, 임금인상, 퇴직금, 해고 해산 수당 요구투쟁 등을 거쳐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신념, 종교의 차이, 노조의 가입 여부에 관계없이 공장관리와 생활터전 확보를 목표로 지역 부문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었다. 공장관리위원회는 광산, 토건, 금속, 화학 등 부문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이는 일제독점자본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조선에 진출, 식민지 공업체제로 구축했던 당시의 경제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첫째,일제자본가로부터 공장․회사를 강제적으로 접수 또는 인수/둘째, 공장 회사를 확보하고 관리하는 것 / 셋째, 공장관리에서 실제적 운영단계 / 넷째, 노동조건 개선과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 / 다섯째 일본인과 조선인 중역 자본가를 상대로 한 퇴진․배척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장관리위원회가 계급구성에서 노동자 중심이라 하더라도 앞으로의 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 미군정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장관리위원회가 사회주의세력과 연결되는 것은 운동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조건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해방 이후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노자관계를 부활, 강화’하기 위해 1945년 12월6일 ‘조선 내 소재 일본인 재산 취득에 관한 건’이라는 이름의 군정 법령 제33호를 공포했다. 미군정은 일제의 국공유 재산만을 접수하려 한 초기의 방침을 변경시켜 일제의 국공유재산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접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에 의해 노동자 공장접수- 관리운동은 전면 불법화되었다. 미군정의 점령정책으로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강화 확대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이제 공장․회사 안에서 공장관리위원 조직 자체의 존립을 위한 투쟁도 전개해야 했다.
    노동자 공장자주관리위원회 활동은, 미군정의 자본주의적 노자관계의 극복을 전망하는 투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반자본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

     

    2 조선공산당과 전평

     

    8.15 해방정국 이후에 박헌영의 경성 콤그룹파가 중심이 되어 재건한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은 당시 노동자 농민운동 등을 지도하는 정치적인 조직적 구심체로서 노동자민중운동 전체에 강력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공의 혁명전략은 전체적으로 노동자 공장관리를 자본주의 노자관계를 극복하는 국유화와 사회주의 전망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조공은 인민정권 수립과 중앙집중적인 정치와 계획경제 차원에서 노동자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을 지도 감독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혁명전략은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노동자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의 발전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즉 조공이 노동자 공장관리투쟁을 국유화 정책에 결합시키는 방침은 공장관리운동을 국유화라는 ‘공식적인 틀’과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틀 안에 묶어두고, 이를 벗어나거나 뛰어넘을 경우 극좌적 경향이라고 비판하였다. 실제로 조공은 볼세비키전위당과 노동조합 (구체적 조직표현으로 공산당과 전평) 노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공장관리위원회는 보조적인 대중조직의 위상을 지닌 것이었다.
    조공은 실제로 노동자공장관리투쟁 현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노동자 공장관리위원회 운동은 이후 노동조합 차원으로 흡수되었다.

    전평은 전반적으로 조공의 정치노선을 수용하면서, 공장관리운동을 노동자 공장관리는 인민정권 수립 뒤에 가능하다고 보고, 공장관리운동을 산업건설과 경제부흥, 인민정권 수립에 종속시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초기에 노동자공장관리 운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경제부흥, 산업건설에 미군정과 협력을 해야 한다는 입장 아래 노동자들의 파업을 자제해야 하는 유연한(?) 계급정치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다.

    조공과 전평의 이러한 방침은 해방 직후의 혁명, 곧 ‘미소 협조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었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민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군정과의 협조정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특히 미군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공장관리는 적당한 수준에서 자제하여야 했다. 따라서 실천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인민정권 수립 때까지 전투적인 공장관리운동을 자제할 것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공장자주관리운동은 1946년 8월 뒤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미군정이 임명한 관리인을 배척하는 운동은 46년 9월까지 이어지지만 1946년 9월 총파업이 탄압을 받은 뒤에 이것마저 사라진다.

    해방 직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은 노동자들이 공장 내에서의 생산경영과 분배과정에서 직접 모든 것을 결정하거나, 자신들이 스스로 지배할 수 있다고 느끼는 기구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노동자 공장자주 관리' 운동은 생산수단과 직접 생산자가 분리되지 않으며, 생산 과정상의 결정이 직접 생산자의 참여 하에서 이루어지고 노동규율이 직접 생산자의 자율적인 의사에 의해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노동자 공장자주관리 운동은 해방 이후 중요한 실천적 이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은 노동자 스스로 조직과 투쟁 속에서 만들면서 노자관계를 부정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아가는 가능성 및 노동자평의회 ‘맹아’적 시도였다. 노동자민주주의 투쟁의 일환으로서 직접생산자 지배와 통제 강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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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젊은 맑스주의 연구자들과 만든 「사회이론연구소: 빛나는 전망」에서의 공동학습과 토론, 「사회주의 정치연합」의 세미나에서의 좌익공산주의에 대한 집중적 학습과 토론, 2005년 오세철과 로렌 골드너와의 “좌익공산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공개강연, 그리고 2006년 서울과 울산에서 열린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서의 좌익공산주의 주요 주제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이 책을 가능하게 했다.

     

    이 책은 좌익공산주의 역사와 입장을 소개할 목적으로 출간했지만, 우리 사회에 잘못 알려져 있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좌익공산주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앞으로 건설할 공산주의 사회의 이론과 실천의 기초를 제공하자는 뜻이 있었다.

     

    2013년 가을에 러시아와 영국의 좌익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와 쇠퇴에 관련한 최신 글들을 보완하여 증보판을 낼 계획이었다. 영국의 좌익 공산주의에 대한 번역을 남궁원 동지가 초역을 완료한 상태였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노동자평의회와 공산주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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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남궁원 동지는 이일재 선생과 2000년대 초반 사회주의정치연합(준) 활동을 함께하면서, 가장 가까운 동지의 한사람으로서 격의 없는 정치토론과 공산주의 운동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일재 선생의 말년에는 이일재동지 후원회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일재선생 책 '노동자평의회와 공산주의 길'을 출판기획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혁명전사 이일재동지 추모사업회를 설립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선배 공산주의자의 삶을 평가계승하려 노력했다. 아래는 남궁원 동지가 이일재선생을 직접 인터뷰한 글이다. 남궁원 동지의 따뜻한 코뮤니스트 정서와 동지애가 담겨 있는 글이다.

     

    -이일재 선생 인터뷰-

     

    "공산주의자 당을 만들어야 해,

    이런 당은, 당을 만드는 과정이 곧 운동이야"

    -남궁 원

     

     나는 이일재 (86세) 선생 인터뷰를 쉽게 생각했다. 평소 이일재 선생과는 현장 토론회, 집회에서 자주 만나 얘기를 했고, 더구 나 구 사회주의정치연합(준비모임)에서도 같이 활동했기 때문에, 선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막상 인터뷰를 준비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선생의 삶과 연관된 ‘공장자주관리운동’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대구 10월 항쟁’ ‘조선공산당’ ‘남로당’ ‘남조선해방전략당’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현재 시점에서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목적이 단순히 선생의 연보(年譜)를 적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려움으로, 노환으로 선생이 기억을 제대로 못하거나 짧게 단답식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선생이 기록한 글과 논문·구술 자료를 구해서 읽고, 인터뷰를 보완했다.

    나는 2009년 4월 10일, 6월 11일 두 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위해 성주 효병원에 내려가기 전날, 나는 선생께 인터뷰 취지와 함께 인터뷰 항목을 사전에 말씀드렸다. 선생은 장협착 수술 이후 성주 효병원에서 가족과 간병인의 도움으로 요양과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당시 화물연대 파업 중이라 나는 선생에게 노동자 투쟁 소식을 전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선생님은 6년제 사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6살에 노동현장에 투신했습니다.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나는 조부의 영향을 받았어, 우리 조부 이름은 이기양인데, 의열단원 이종암 선생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주어서, 3년간 옥고를 당했지. 이후 조부는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 아버님과 삼촌은 집안 사정이 좋을 때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 대학까지 나왔어. 아버님은 운동에 뛰어든 적은 없는데, 내가 1950년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다 산에서 총상으로 체포되어 죽을 경각에 있었을 때에도 전향만은 권유하지 않으셨고, 이후 내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간섭하지 않고, 떳떳하게 죽을 수 있느냐를 먼저 물을 정도였어.

    삼촌 이강복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당시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이었던 나카노 밑에서 서생노릇을 하면서 좌익 연극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었어. 삼촌은 해방 직후 조선예술극장, 혁명극장 등에서 활동을 했고, 조선연극동맹 서기장을 했어. 삼촌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서 1년 반의 형을 살고, 6·25 직전에 출옥했어. 이후 삼촌은 1968년 나와 같은 사건(남조선해방전략당)으로 형을 살다가 옥사했어. 강복 삼촌은 내가 어려서 그런지, 운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준 적이 없어. 해방 이후에는 서로 활동 공간과 장소가 틀려 잘 만나지도 못했지.

    성장기 나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외삼촌이야. 외삼촌의 이름은 최세기였는데, 트로츠키주의에 가까웠지만 아나키스트였지. 외삼촌은 아나키스트 기관지인 '나아가자'라는 잡지를 반입해 배포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일제하 아나키스트 운동인 <아기(飢)동맹>사건에 연루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어. 나는 외삼촌의 책들을 탐독하면서 의식이 싹텄다고 할까, 외삼촌의 책은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 나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책들은 트로츠키의 '배신당한 혁명', 사카이의 '계급투쟁의 필연성', 고바야시의 '게공선' 등인데, 특히 사카이는 일본 일차 공산당 사건인 대역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한 사람인데, 일본에서 처음으로 계급운동한 사람이야. 당시 나는 외삼촌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어.

    일제하라서 내가 한글 배운 마지막 학년인데. 그때 국어독본은 일본어 책이고 우리말은 조선어독본이라 불렀어. 일본어를 배웠으니까 러시아 고리끼, 톨스토이 소설도 많이 읽었어. 이러한 책들을 탐독하면서 나름대로 의식이 생겨나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것이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어.
    16살 되던 1939년부터 통조림 공장, 양화점, 제과회사, 방직공장 등을 다녔고, 그러다 일본 놈 완구공장, 신발공장에서도 일했고, 또 소를 공출이라는 미명으로 빼앗아가는 군용통조림 만드는 공장에도 다녔지. 하지만 명확한 활동 목표를 설정해 놓고 공장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은 아니야. 그런데 한 가지 목표는 분명히 했는데, 노동계급 속에서 항일을 한다는 것이었지.

    해방 직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 군수산업을 평화산업으로
    해방 직후 전평 결성 때 대의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질문을 받았던 의제는 ‘노동자공장관리에 대하여’였다. 일제가 빠져나간 상태에서 ‘노동자공장관리’ 운동은 8·15 직후에 조선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운동이었다. 노동자공장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자연발생적 운동이자, 동시에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망을 포함한 운동이었다. 선생의 활동이 궁금했다.

     

    - 선생님이 경험하신 공장자주관리운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는 10여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삼륜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공장 ‘자치관리’에 나섰는데, 노무과에서 일하던 자가 주인으로 나서는 것을 물리쳤지. 우리들은 먼저 군수산업을 평화산업으로 전환시켜서, 치약을 만들기로 했어. 공장을 가동시키는 것과 아울러 우리들은 사무실과 관사도 접수했었는데, 1층은 전농(농민조합총연맹)사무실로 쓰고, 2층에는 노동자들이 집을 팔고 들어와 살았어.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일제에 의해 농촌에서 징발되어 온 사람들이라서, 시골로 가버린 경우가 많았어. 당시 물자부족에다 일할 사람도 없어 자연히 자치관리는 유야무야되고 공장의 가동은 중단되어 버렸어. 나는 그때 전평 일과 조선공산당의 사업에 나서게 되어 더 이상 삼륜회사에는 관계할 수 없었어.

     

    - 그러면, 조선공산당은 어떻게 가입하셨나요?

     

    공장을 접수한 지 몇 달이 지나서, 8월말 경에 공장으로 몇 사람이 찾아와 공장 책임자를 찾았어. 그들은 내게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에 같이 하자는 거야. 나는 이때 쾌히 승낙했는데, 이때 찾아온 사람이 이승진, 고용준, 박일환, 이병기 네 사람이었어. 9월 달에 가서 박일환 하고 고용준 하고 두 사람이 신원을 보장해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는데, 나는 노동자 출신이라 석 달 만에 후보당원에서 정당원이 됐어. 이승진, 박일환, 고용준, 나 이렇게 네 명이 일주일마다 당 세포회의를 했지. 우리 세포는 대구시당의 서부지구당에 소속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당 활동을 시작했지.

    이승진은 10월 항쟁 직전에 연락이 끊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도 4·3 항쟁의 영웅이 된 김달삼이야.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 김달삼, 이현상을 말하는데,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경성트로이카 이재유 선배야. 그 외에도 이병기, 최소복, 안기남 등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어. 우리 위의 선배로서는 황태성, 윤장혁, 이석 같은 이들과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하는 최충식, 김관제, 최문식, 이재복, 이상운, 김일식, 이수길 어르신 등이고, 나는 화학노동조합을 결성(준비위원회)할 때부터 같이 일을 시작했어. 직책은 화학노동조합 대구시지부 서기, 뒤에 도 평의회 간사도 했어.

     
    - 당 세포 활동 시 현장 활동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현장 안에서 사회주의 용어는 못쓰고, 노조 안에서 사회주의자 모임과 프락션 활동을 했지. 현장에 아나키스트들이 많이 있었어. 사회주의자 모임을 만들어서 당시 조공이 내는 기관지와 박헌영의 '8월 테제' 등을 읽고 토론을 했지. 그리고 공장 점심시간이 1시간인데, 경성트로이카 하던 이병기, 김달삼 하고 박일환, 나 이렇게 해서 전평의 행동강령, 동일임금 동일노동제, 8시간 노동제, 노동법 제정 뭐 이런 것들 교육했지.
    (중략)
     
    - 선생님은 대구 10월 인민항쟁 이후 구속되고 출소한 이후에 대구 팔공산 빨치산 유격 투쟁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정세는 단독정부를 기정사실화한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이 모든 자주적인 활동과 좌익조직 폭력적 박멸에 나선 때였습니다. 당시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1948년 2월 초순 감옥에서 나와 나는 바로 당과 선을 댔는데, 영천군 조직책으로 임무를 부여받았어. 당시 단선·단정반대를 위한 ‘2·7 구국투쟁’ 때 고경면 지서를 습격한 다음 보현산에 들어가 칩거해 있던 영천군 선전책, 부조직책 등 7명을 제명하는 것이었지. 그런데 내려가자마자 체포됐어. 당의 도움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빠져나와 문경군의 노동부책으로 명령을 받았어. 나의 임무는 문경탄광과 은성탄광에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도를 하는 것이었어. 파업을 하자 체포가 됐어. 그래서 김천 감옥에서 10개월 징역을 살았지.

    김천 감옥에서 나와 다시 팔공산으로 올라갔는데,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킨 6연대 사람들도 있었지. 팔공산에서 6연대 군인들하고, 지방민들하고, 당 간부들이 규합되어 빨치산 운동을 했어. 빨치산이 되어 산에 있을 때는 어느 한 거점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지. 내가 활동하던 청도·경산 일대는 민주부락이라고 해서 마을 세포 책이 대부분 남로당 당원이었어. 그런 곳에는 오래 있어도 경찰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지. 준 해방구인 셈인데 그런 곳의 생활은 얼마 못됐어.

    49년 9월 이후부터 군경은 낙엽기를 맞아 초토화 포위작전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어. 그 일로 우리는 거의 궤멸상태에 직면하게 돼. 그러다가 1950년 4월 12일 나는 비슬산에서 군경 토벌대의 소탕 망에 걸려 왼쪽 옆구리와 다리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어. 총상으로 인해 길지 않은 입산 생활은 끝나게 되었지. 내가 입산했던 기간은 1년 반가량, 문경까지 합치면 2년 정도 될까. 총을 맞아 과도한 출혈로 기절한 나는 청도 어느 지서로 들것에 실려 호송돼서 사나흘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지. 그러다가 경찰 고위직에 있던 친지의 주선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어. 연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그렇게 무사히 넘기게 됐어.

    내가 빨치산으로 있다 체포되었다고 하자 내 바로 밑 남동생이 염산을 먹고 자살했어. 뒤에 집에 오니 화장해서 뼈만 있었어. 그 시대에 운동 안 한 청년이 없었듯이 동생은 당시 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어. 내 옆구리는 아직도 총알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히 남아 있어. 이 땅에 휴전선이 가로질러 있듯이 그렇게….

    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8년도에 처음으로 유격대에 의한 무장투쟁노선이 제기되었는데, “남한은 유격활동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유격대가 활동하고 휴식할 수 있는 넓은 산지가 없다”라는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박헌영이 “우리에게는 인민의 산이 있다”라는 반박으로 이를 물리쳤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박헌영과 중앙당의 무장투쟁결정은 경북도당과 당원들도 동의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1949년에 가면 ‘거점 확보’, ‘해방지구 설정’의 지시까지 내려오는 상황으로 발전해버렸다고 한다.
    (중략)

     

    - 선생님 한 평생 살아오시면서, 고생이 많으셨는데, 혹시 후회하신 적은 있나요?

     

    나는 내 살아온 이 길을 절대 후회 안 해. 죽을 때 “아! (힘을 주어) 잘 살았다. 내 나름대로 잘 살다가 죽는구나”라고 마지막 임종을 할 거예요. 기쁨이 영원하니, 가는 거요. 그게 극락이고 천국이지. 정주영이나 김대중의 한 평생하고 내 생활의 한 시간하고도 안 바꿔. 나는 그 정도의 자긍심, 이런 게 있어. 하나도 후회 안 해. 잘 못 한 거, 무수히 잘 못하고, 운동도 잘 못한 게 많지만 전체적으로 살아온 인생길 자체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은 안 해.

     

    - 선생님은 최근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 토론회에도 참가하셨습니다. 사회주의 후배 활동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오세철 선생하고 사노련이 탄압을 받았는데, 탄압은 타협해서 피하면 안 돼. 요새 감옥가면 밥도 잘 주잖아. 이론과 행동을 통일해야 해. 당 무용론은 틀렸어. 공산주의자 당을 만들어야 해. 이런 당은, 당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운동이야.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노동자해방을 위한 한 노혁명가의 삶과 활동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줄곧 ‘스스로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역사에서 ‘무엇이 이기고 지는가를 벗어나서’, 분명 역사는 그 시대에 필요한 혁명적 주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다시, 혁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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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008년 8월 26일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 사건으로 긴급체포되고 1년 동안 오세철이 최근 쓴 글들과 67년 동안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마지막 회고록을 준비하는 초록, 그리고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 사건에 관련한 자료를 함께 엮었다.


    아직까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지 않았지만,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혁명적 사회주의와 코뮤니스트 운동은 탄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남궁원 동지는 함께 코뮤니스트 사상의 자유와 실천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왔고, 이 책을 꾸미는데 정성을 다했다. 「다시, 혁명을 말한다」 라는 책 제목은 그의 작품이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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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철의 고희 출판기념회를 위해 특별히 기획하고 만든, 남궁원 동지가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책이다. 특히 이 책 속에는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 사진들을 설명하는 제목을 붙이고 적절한 곳에 실은 노력과 세밀함은 모두 남궁원 동지의 몫이다.


    특히 이 책은 학문, 예술, 그리고 혁명의 원칙이 똑같다는 오세철 나름대로의 주장과 해석이 들어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다. 술은 목적이 아니라 이 세 가지를 엮어주고 가능하게 하는 매개임을 강조하고 있다. 남궁원 동지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진심으로 명복을 빌고 그의 코뮤니스트로서의 사상과 실천이 이루어지기를 우리 모두 약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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