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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 조회 수: 6266, 2013-09-02 18:10:17(2013-09-02)

  • 사랑…

    백영화

     

    w1.jpg  


    17년.
    건이 나이보다 1년 많은 시간,
    내가 살아온 삶의 절반이 안 되는 시간,
    남궁원의 삶 이 조금 안 되는 시간.


    결혼기념일 때면 ‘벌써’라는 수식어가 붙었었던 시간들이 이제는 멈췄어.

    건이랑 잠깐 우리 연애했던 이야기를 나눴어.
    아빠랑은 주로 돼지껍데기에 소주 먹으러 다녔다니 건이가 깔깔 웃더라.
    처음 남궁원을 만났을 때 생각이 난다.

     

    그때가 아마 민정련 깨지고 새 조직 만들자고 모일 때였지?
    낡은 잠바에 면도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던 남궁원은 참 지치고 피곤해 보였어.
    같이 상근하며 꼼꼼하고 철저한 남궁원은 내게 진정한 프로 운동가로 느껴졌는데…

     

    종로3가 사민청 사무실 근처에 있던 비좁은 칼국수 집 기억나?
    같이 상근하던 형이랑 우리 셋이 칼국수 먹으러 간 날, 다른 형은 다 먹고 담배 피려 나가고, 남궁원은 제일 먼저 먹고서도 뜨거운 거 못 먹는 내게 어깨를 토닥여 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
    비좁은 곳에서 큰사람 남궁원은 다리 꼬고 앉아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끝까지 내가 다 먹기를 기다려 줬는데…
    그때 알았어. 울 남편 참 다정한 사람이라는 거.
    일 끝나고 먹던 돼지껍데기에 소주, 점심시간에 먹던 칼국수…

     

    남편이랑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연애하면서 그럴싸한 곳에 갔던 건 두 번 정도였던 거 같아.
    한 번은 큰아가씨 결혼식 즈음, 명동 가서 구두사고 남은 돈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비슷한 곳에 갔었지.
    그때 신나게 웃던 남궁원 얼굴 생각난다.

     

    두 번째는 내 생일날 피자집.
    그날 자기가 내게 반지를 끼워 줬는데…
    자기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크기로 골라온 반지가 내 손가락에 꼭 맞는 것을 보며 활짝 웃던 남궁원.

     

    오늘 다시 그 반지를 껴보니 내 손가락 마디가 굵어져 꽉 끼네.

     

    같이 도서관 다닐 때도 생각난다.
    대학원 가겠다고 사회과학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남편 따라 같이 공부하던 시절.
    아침에 만나 공부하고, 같이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며 수다 떨던 그때가 그립네.

     

    결혼하고 나선 울 남편 참 바빴어.
    갖가지 투쟁에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남편 덕에 많이 외로웠지.
    그것도 모자라 1년 2개월을 떨어져 지내야 했으니...,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변했어.

     

    마트 가면 내 등 뒤에서 지루하게 쳐다만 보던 남편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하더니 나보다 더 쇼핑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이더라.
    뭘 고르나 보면
    항상 자기는 필기도구, 사무용품, 자동차용품 앞에 있었어.
    큰사람이 작은 필기도구를 이것저것 써보며 고민하는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제사, 명절 때면 같이 청소하고 제사용품 사러 다니며
     나보다 더 스트레스 쌓여 했지.
    올해 아버님 기일 기억나?
    관양동 시장에서 장 다 보고 출출해서 홍두깨 칼국수 먹었던 거. 
    싸고 양도 많고 맛도 있어 남편이 흡족해했잖아.
    추석에는 건이도 데리고 와서 우리 세 식구같이 먹자고 했는데...,

     

    옷장 정리하다 남편이 사줬던 옷들 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어.
    수입이 생기면 아웃도어 쇼핑몰을 한참 검색하던 남편이
     나를 부르곤 했지.
    “이거 어떠냐? 당신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게 남편이 내게 선물해준 신발, 옷들…


    친구들이 활동비라도 보내주는 날이면 그동안 보고 싶었던 책들 사느라 바쁘던 남편이, 언제부턴가 수입이 생기면 내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했는데…
    w2.jpg  

    집 안 구석구석 남편과의 추억이 없는 것이 없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다 남편이 보여.
    뭔가를 하다가도 문득 들어오는 자기와의 추억들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가네.

    며칠 전엔 수업 끝나고 집에 가려다 말고
     강의실에 주저앉아 버렸어.
    집에 갈 때쯤이면 오던 문자.
    ‘담배 사와, 마을버스 타면 문자해.’
    문자도 없고, 마중 나올 남편도 없다는 현실이
     바윗덩어리가 되어 나를 짓눌렀어.
    밤이면 마중 나온 남편 팔짱 끼고 수다 떨며 걷던
     그 길, 그 시간,
    과거가 되어 버렸네.
    다시 못 올 그 시간이 아파 한참을 눈물 흘리며 여기저기 서성거렸어.

     

    오늘은 집에 와 보니 물이 담긴 밥그릇에 밥풀 둗은 주걱이 놓여 있네.
    나도 모르게 울컥했어.
    저녁에 집에 와보면 볼 수 있었던,
    깨끗이 설거지 되어 있는 싱크대 한쪽, 밥솥 옆에 놓여 있던 물 담긴 밥그릇과 주걱.
    그리고 남편의 잔소리.
    “지저분하게 주걱, 밥솥 위에 놓지 마.”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건이가 그러네.
    남편의 모습을 건이가 보여주는 매 순간 나는 아파서 눈물이 나.
    자기를 보내면서 자기와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신기하게도 얼굴은 몰라도 이름을 들으면 다 알겠더라.
    그분들이 얘기하는 남궁원과의 추억도 거의 다 아는 얘기였어.
    남편과 맥주 한잔 하며 들었던 이야기, 술 한 잔하고 들어 온 날 들려주던 이야기들...,
    남편은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했구나.
    남궁원은 나한테 그런 남편이었네.
    가정적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 남편 남궁원…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남편,
    밥 먹고 커피 한잔 마시며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로 넘겨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던 남편,
    이제 내 가슴속에만 있네.

    남편이 잡아주던 따스한 손, 그 사랑으로 홀로 오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어떤 아주머니처럼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던 남편.
    병상에 누워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 따스한 손,
     그 사랑 간직하며 살아갈게.

    고마워.


    자기를 그리워하며 기억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남겨줘서.

    미안해.


    자기 맘 몰라주고 힘들게 해서.

    사랑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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