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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3호]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 이형로·정현철
  • 조회 수: 6968, 2013-09-06 13:56:30(2013-09-06)
  •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  정현철

     

     


    1. 노동조합의 한계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을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한편으론 계급의 조직으로 발전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론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조건에 대한 협상자이자, 노동과 자본의 중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계급의 연대와 결합의 중심이 되었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며,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민주의 정당들과 함께 제국주의적 학살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노동조합이 협력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반(反)계급적 역할이 처음 드러났다.1)

     

    또한, 전쟁 이후의 혁명 물결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들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전쟁을 지지했다. 그 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서도 생존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을 위해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의 학교’ ‘사회주의 훈련소’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극소수의 정파활동가나 초보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공급받을 수는 있겠으나,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과 대중이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조직과 노조운동의 잘못된 결합, 즉 정치조직의 노조운동 지도-피지도 관계에서 나타난 대리주의 경향은 계급행동의 수동성과 상층부의 관료주의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조직 전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축소시켜왔다.2)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상대로 공동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의미가 있다. 헌법의 노동 3권과 관련한 하위법들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이 체제 내화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간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 지역일반 노동조합운동, 산업별 노동조합건설 등-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 날개 전략 속에서 진보정당의 몰락과 함께 내셔널센터(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로서의 위상마저 무너져 버렸다. 최근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둘러싼 희대의 촌극은 민주노총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 해고자들이 이끌고 있다. 재능교육,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등 이른바 장기투쟁사업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역할과 권위의 상실은 내부 자정능력도 상실시켰다. 최근 10여 년간 민주노총 내부의 무수한 조직 갈등에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한계는 말하지 않고 ‘개량주의’나 ‘관료주의’의 문제로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것은 대개 노동조합의 ‘급진화’-좌익리더십 선출, 급진적인 요구안, 많은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촉구-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핵심은 기본적인 노동조합의 형태를 방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재편, 강화, 혁신’ 등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전체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의 밖에 존재한다. 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며 계급성을 고양시키는 기구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2.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조합운동의 개조나 발전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으며, 좌익적(전투적) 노동조합이나 평조합원 운동이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투쟁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적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평의회, 즉 노동자 총회에 의해서 통제당하는 대표들의 회의가 그것이었다.

     

    소비에트나 평의회는 준 상설적인 총회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일반화된 계급투쟁에 의존한다. 계급이 모든 공장에서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장소에 노동자들의 총회가 없다면, 노동자평의회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이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을 이어나갈 때에만 상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 자체로 혁명적 시기를 뜻한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특유의 기구이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일상시기이거나 계급의식의 고양기가 아닐 때 어떻게 그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난 50여 년 동안 진행된 수천 번의 비공인(와일드캣) 파업3) 의 경험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노동조합을 넘어선 파업은 특히 매우 단순한 조직 형태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총회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조직적 기초가 평의회의 형태로 이러한 파업 속에서 발견된다. 형식과 내용은 결합되어 있다. 그들의 형식이나 조직은 어떤 태동기에 그 형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혁명 기관의 조직 형태인 노동자평의회이다.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 의해 선임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된 각종 평의회에 의해 협력하고 확장되면서, 이러한 투쟁들은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부르주아 국가와의 정면대치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의 확대와 급진화를 통해서만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국가에 대항한 방어적 투쟁에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공세적 투쟁으로 이행할 수 있다. 대중 파업, 급진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자기 조직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자신을 노동조합의 한계와 영역에서 넘어설 때 노동자 투쟁은 확장되고 막혀있는 모든 곳을 열어놓을 것이다.


     

    3. 평의회의 특징과 직접민주주의

     

    평의회는 아래와 같이 공통의 특성이 있다.
               
    첫째, 평범한 노동자, 농민과 소시민, 군인, 저임금 노동자 포괄적으로 보면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비중을 가지고 평의회의 주체로 활동했다. 이러한 계급 또는 계층은 사회적, 경제적(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오는 임금노동자), 정치적(법에 따른 선거권 제한)으로 권리를 억압받았었고, 박탈당하였으며, 최소한 어떤 특정한 계급에 종속되어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위치에 있었다.

     

    둘째, 평의회운동의 정치적 조직형태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영역이거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법률적 조직과 제도들에 대항하면서,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 조직형태를 지향했다. 이러한 정치적 조직을 통하여 평의회는 지금까지 박해받던 계급이 직접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이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평의회의 첫 번째 조직원칙은 평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자들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항시적으로 고용하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거나 생산수단을 임대한 모든 사람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셋째, 평의회 직접민주주의는 다음의 실천과 제도들이 특징이다.

    1) 모든 지도적 위치는 선거를 통하여 결정된다.
    2) 선거권자는 통일된 선거단위에서 행동하며, 자신들이 속한 기본단위(작업장, 분과, 위원회, 부대)와 대중집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형성한다. 
    3) 선거권자는 필요한 결정을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논의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들이 뽑은 선출자에게 되도록 적은 사안에 대한 결정권한을 위임한다.
    4) 당선된 선출자는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선거권자의 위임에 통제 받는다.
    5) 당선된 선출자들은 선거권자의 지속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해명해야 하며, 과오가 있을 때 언제든지 소환되거나 대표성이 상실된다.
    6)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한 같아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원리가 확산되어 일반화되면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가’ 동일화되는, 즉 ‘대중의 직접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평의회가 지향한 직접 민주주의의 골격을 이룬다.

     

    평의회의 특징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가져야 할 무기는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직접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모임 참가자들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행동에 참가하는 그룹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된 평의회 형태를 보일 때에만 가능하며, 평의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고유의 단결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4)
         

     

    4. 새로운 노동자운동에 대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계급의 기본생활을 방어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적 분리(분업)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5) 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제도권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가의 수단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들은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6)

     

    그것은 비공인파업, 점거운동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직접행동네트워크 등이 투쟁의 내용과 일치되는 조직형식이다. 하지만 최근의 점거운동은 국제적으로 활성화되었지만, 대중총회 형식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내용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 자본주의 개조 주장에 머물렀다. 지나친 정치조직의 지도의지, 느슨한 시민운동과의 결합이 운동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프롤레타리아(프레카리아트) 자발적 행동과 의식적 투쟁이 지역평의회에서 만나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평의회운동은 현실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노동자 대중의 직접행동과 비공인파업 투쟁 형태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투쟁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평의회적 조직인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통해 계급 안으로 확산해나갈 수 있다. 또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생존권 방어에 내몰린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빈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소수자들이 거리투쟁, 광장점거를 통해 투쟁의 주체가 되는 대중총회를 개최하고, 지역에서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지역(투쟁)평의회 건설을 통해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

    피티민주주의.jpg

    이러한 평의회운동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 새로운 계급주체들이 작업장, 업종, 고용 여부, 성별, 조합원, 비조합원 장벽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광장점거와 파업투쟁을 하나로 묶어낼 것7)이며,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선 전 계급적 투쟁전선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조직은 노동조합 역할에 개입하거나 경제투쟁을 배후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에 나서는 것을 조력, 촉진하고, 대중총회, 파업위원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계급의식을 혁명의식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토론문화, 토론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상시기부터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평의회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본에 의하여 분열 통치되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주체적 자각’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을 열망하는 ‘계급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직형태가 ‘평의회’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주체들8)이 평의회운동, 코뮤니스트 정치와 만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중투쟁의 분출과 함께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주체,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모든 조직 형식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5. 평의회 운동의 지평 확대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

     

    앞으로의 평의회운동은 이제 노동자권력을 지향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 계급의식의 발전 기관으로 지평을 확대하여야 한다.

     

    첫째, 새로운 주체형성과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은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지역적 연대투쟁과 이른바 프레카리아트 계급의 직접행동 분출로 현실화될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이 수평적으로 만나 지역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평의회로 발전할 때 계급의식 또한 급속도로 회복,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의 평의회운동은 대공장 사업장의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지역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과 만나 기성 노동조합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적 조직형태를 결합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9)가 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총회와 정치광장이 확장되어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실업자, 학생,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할 때 대리주의 노동자(진보)정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직접정치가 실현될 것이다.

     

    셋째, 광장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직접행동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경험과 확장만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계급의식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대중총회, 지역평의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연대는 대중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여기 흔들리는 민주노조라는 노쇠한 나무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그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는 풍성한 가지들을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악한 세력들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들을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들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 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더 폭넓은 단결 투쟁의 근거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자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평의회)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여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주>

    1)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고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혁명가들의 살해에서도 그랬다. [필자]

     

    2) 이른바 ‘민주집중제’로 표현되는 중앙 집중적 의사결정구조는 대의제 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총회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는 사라졌고, 집행부와 대의원 장악이 모든 것에 우선시 되었다. 노동조합 상층기구와 형식적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과 노동자투쟁의 확산을 가로막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몰락과 회복불능을 가속화 시켰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민주노조재건’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이미 평조합원들이 절감하고 있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3)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파업은 규칙들과 규제들에 따라 노동조합에 의해 선언되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와일드캣 파업(비합법적이거나 비공식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자생적인 파업들은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다른 개별 노동조합들로 분할되는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통들은 노동자들을 종종 경쟁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회사들로 분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작업장에서 다른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서로 간에 반목했다. 파업을 할 때도 그들은 종종 분리된 상태로 참여했다. 때문에 통일이라는 관념들에 접하기 어려웠고 행동의 조화와 타협은 유일하게 위원회와 관료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직접행동에서 이러한 노동조합의 회원 차이는 어느 조합에도 속하지 않는 표시로써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즉 통일이 없이는 어떠한 투쟁도 불가능했다. 와일드 캣 파업들이 거대한 대중들을 결집하고, 전 산업 분야, 도시와 구역에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 한다. 파업위원회들은 관료들의 노동조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노동자 평의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

     

    4) 프롤레타리아계급에 1910~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은 계급의식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보여주었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가 나타났고, 그곳 모두에서 회합과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교류가 발생했다. 이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가 부과한 심각한 무지와 의식의 왜곡 속에서 침체되어 있었지만, 평의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명료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소통하면서 그들은 정치적 토론에 임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을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환경은 열정적인 토론을 창출하고, 다른 프롤레타리아들과의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때 계급의식은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역할에 대하여],이형로, 2012, 붉은글씨 창간호,

     

    5) 비정규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파업의 대부분을 불법으로 몰아가거나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대공장(대기업) 노조들의 생산(자본)에 타격을 가하지 않는 공식적 파업에 대해 묵인하는 현상들은 이러한 자본의 지배방식(분업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

     

    6) 이 글에서 노동자운동 새로운 대안의 핵심 중 하나인 정치운동(혁명조직) 관련된 내용은 담아내지 못했다. 혁명조직의 역할, 혁명조직과 계급과의 관계, 혁명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호로 넘긴다. [필자]

     

    7)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8)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9)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이다. 다수가 이러한 정치의식에 익숙해졌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노동자계급 의식이 된다.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만이 어제든 나타날 수 있는 계급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한 계급의식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이러한 토대에서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창조성과 자발성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 더욱 높고 깊은 계급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고, 토론의 결과가 행동으로 즉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혁명의 승리는 고사하고 내부 분열이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부르주아 대의제도의 허위의식을 타파하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만들어 간다면 무너진 폐허에 새로운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실제로 보일 것이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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