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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3호] 가두시위와 계급권력
  • 조회 수: 18602, 2013-11-08 22:59:21(2013-11-08)
  • 가두시위와 계급권력

                                             D.Valerian 6/7/2013
                                             Tuesday, July 9, 2013

     

     


    5월 말 터키에서 발생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건,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 기간 동안 브라질에서의 대중 시위, 그리고 또 다시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대로 가득한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사(the current events)는 우리가 여전히, '아랍의 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2013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분신자살한 한 청년으로부터 촉발되었던 사건에 의해 좌우되었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5월 말, 쇼핑센터 개발과 이스탄불 중심에 있는 공원의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는 터키의 81개 주(州) 가운데 79개 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운동으로 폭발했다. 그 당시, 세계의 이목이 브라질의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로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파울루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는 (신문의) 일면을 차지하고 축구 대회를 옆면으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모르시(Mohammed Morsi)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는 이집트 전역에서 2년 전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게다가 언론에는 덜 보도되었지만, 인도네시아는 휘발유 가격 44%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하여 뒤흔들렸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랍의 뿌리(Arab roots)와는 거리가 있고 또한, 적어도 피상적인 수준에서, 현재 영향을 받는 국가들이 모두 민주  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독재자'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촉구하는 시위를 넘어서는 것을 '운동'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운동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지역적 세부사항들 보다 더 중요한, 이러한 운동을 특징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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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의 인구통계

     

    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청년들이 운동의 방향을 쥐고 있다. 아카니스트 매체(anarchist media)는 탁심에서 경찰에게 새총을 쏘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그러한 예외는 한낱 규칙의 증명에 불과하다. 물론, 청년들이 어떠한 사회투쟁에서 돌격대를 만든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투쟁은 압도적으로 청년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 인구의 43.3%는 24세이거나 그 미만이다.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상대적 수치는 각각 40.7%, 41.5%, 그리고 44.1% 이다. 이러한 수치를 '서방(West)'국가들의 통계 자료와 비교를 할 때, 차이점은 매우 극명하다.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의 수치는 24.1%, 30.3%, 33.8%, 그리고 23.3%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들은 전(全)세계적으로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인구 내에서 청년들의 더욱 높은 비율에 의해 증폭되기도 한다. 대학 교육의 확산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에서 대학 졸업자의 수는 1995년 이래 매년 5%씩 증가해 왔다. 서구 국가들처럼 대학에서 배출되고 있는 졸업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고 그들의 부모 세대와 비교하여 그들이 일자리를 얻을 자격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최근 2008년 이후 국제적인 경제위기 발생의 영향에 의해 훨씬 악화되어 왔다. 좌파노동조합인 DISK에 따르면 실업률은 17%에 육박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단지 대학생뿐만 아니라 공부, 시험, 그리고 학원(cramming schools)이라는 동일한 역학을 따라가는 모든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동력을 공급하고 있는 사회적 동력인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외에" 청년들에게 미래를 내놓을 수 있냐는 측면에서 어떠한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는 교육제도에 휩쓸린 압도적인 청년 대중이다.

     

     

    계급 구성

     

    시위자들이 전반적으로 청년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이한 분석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이러한 운동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윤곽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터키에서 국가 빈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던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엘리트의 하나로서 운동을 대표하는 에드로안의 지지자들에서 터키 좌파까지 이르며, 이것은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놀랍지 않다. 이 국가들에서 다수의 도시 거주자들은 노동계급이며, 그리고 효과적인 정치운동 - 그것이 공산주의, 파시스트, 종교 혹은 민족주의 정치든지 - 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존재할 수 없다. 분명히 타이이프 에드로안의 AKP(Alengaden Kunjuvareed Poulose : 정의개발당)에 의해 조직된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의 구성 또한 노동계급이었으며, 그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도 있다.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밝혀내려 하기 이전에 물어봐야 할 문제는 무엇이 운동 일반에서 계급의 본질을 결정하는가이다. 운동의 사회학적 구성 하나만으로는 계급의 본질을 판단하기 충분치 않다. 1960년대 영국의 파월(Powell) 파업과 1974년 얼스터(Ulster) 노동자 평의회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이, 노동자들은, 판단을 내리기 충분한 노동계급의 방법이 아닌, 복고운동(reactionary movements)의 배후로 전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운동의 목표, 요구, 그리고 방향이다. 운동에 관해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모든 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동을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할 때, 분명히 노동계급의 일정한 집단은 그들 내에서 두드러진다. 사전에 명시한 것처럼, 이것은 어느 운동에서나 당연하다. 대규모 시위, 총회, 그리고 심지어 일부 파업을 활용하는 방법은 노동계급의 방법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노동계급 운동의 중요한 부분인 작업장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부족하다.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파업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터키에서 조차, 다수의 노동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운동의 요구와 목표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오합지졸이었다. 분명히 브라질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국가 탄압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관련되어 있는 요구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개입과 쿠데타(coup)를 성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요청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시위대와 같은 비(非)계급적 요구가 있었다. 만약 터키 군대가 AKP 정부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역사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시위대의 일부분이 그 곳에서 유사한 요구를 제기한다는 것을 들었다 해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운동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를 작성하려고 할 때에, 생산, 혼합된 요구, 그리고 구성 시점에 활동의 부족은 계급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인구학적 기초를 형성하며, 그 운동은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임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운동이 소규모의 계급교차 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이다. 이 운동 안에는 그들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거의 마치 공장 내 파업의 물결이 그 자신의 이익을 강조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 운동'에 편승하고 있었던, 2011년의 이집트에서 매우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이 운동 안에는 또한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적인 요구를 지지하는 시위에서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이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이라고 해서 공산주의조직이 그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거부하면서 그것을 묵살하고 고압적으로 물러서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공산주의 조직은 항상 계급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역으로, 일종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판단해서 흥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다양한 배후의 부르주아 분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것들은, 마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운동인지, 그리고 그 운동 내부에 어떤 경향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모든 종류의 허튼수작을 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점거'와 총회

     

    상당히 확실한 한 가지는 올 여름의 운동이 '아랍의 봄(ArabSpring)', 그리고 이란에서의 '녹색운동(Greenmovement)'과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거(Occupy)'운동은 이러한 운동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아랍의 봄' 이라는 운동의 매우 옅은 반영이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러한 운동이 사회를 동요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고, 정부를 뒤흔드는 진정으로 거대한 운동인 반면에, 점거 운동은 본질적으로 결코 활동가들의 운동을 넘어서지 못했다. 주류 및 좌파 언론 두 곳에서 상당량의 대중 매체의 주목을 받았던 점거 운동은 그것이 세계 대중 매체의 중심이며, 그리고 노동계급이 매우 미약하고 투쟁의 수준이 극도로 낮은 미국에서 일어난 것과 더욱 관련이 있다. 미국은 분명 중요한 국가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자는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해는 중요하다. 전 세계의 대중 매체를 좌우하는 미국의 이 사건에 대한 보도 분량, 그리고 간신히 다년간의 투쟁 이후 미국 좌파가 느꼈던 흥분은 이 운동의 규모를 판단하기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되지 않는다. 물론 '점거'운동과 더욱이 위스콘신(Wisconsin)에서의 사건은 중요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미국에서의 잠재적인 부활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지금은 만지 않지만, 그리고 그 자신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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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좌파가 자랑스럽게 알렸던 '점거'운동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운동을 작동시키기 위한 총회의 활용이었다. 이러한 총회의 종류는 또한 '아랍의 봄'의 다양한 국가에서, 그리고 터키, 그리고 오늘날의 브라질에서 목격되었다. 많은 좌파는 마치 그들이 소련의 일부분인 것처럼 이 운동을 칭송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개최했던 총회 사이에, 그리고 대중 집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누가 그것들을 대표하는가이다. 작업장에서의 대중 집회는 분명히 그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총회는 작업장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대개, 노동계급 내에 그것의 일부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계급 조직 보다는, 시위대 그들 자신만이 대표하며, 그것은 활동가들의 조직이다. 어떻게 시위대는 NGO와 좌파노동조합과 함께 주류 및 좌파 정당의 상의하달식(a top down) 연합인 '탁심연대(Taksim Solidarity)' 에서 '영적 위원회(spiritual commission)'의 보고서를 논의하는 한 서클에서 수십여 명의 히피족이었던 '점거'의 최악의 경우까지 다양한 것들을 대표하는가.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도래하는 혁명의 조직 형태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시위에서 파업까지

     

    이러한 총회의 본질이 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점거'운동 기간 동안 오클랜드(Oakland),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의 총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시도는 노동대중을 끌어내는데 실패했으며, 그리고 노동자들 (오클랜드의 항만 노동자들, 그리고 교원들) 내에서 지지를 얻었던 곳에서조차 휴가, a personal day, 혹은 아프다는 전화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것으로부터 분명한 점은 활동가 위원회가 마음대로 노동계급에게 파업을 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노동자들 자신만이 이것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서 다수의 활동가들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규모 작업장에서 흔히 불안정한 직업으로 오늘날의 많은 청년들과 같이, 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규모 파업 운동을 지지하는 원동력은 이러한 종류의 작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운동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규모 사업장에서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위대는 성공적인 대중파업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부분으로서 노동계급의 동일한 부분이 아니다. 그에 반해서 30년 이상 전, 이러한 부류의 청년들이 공장 내의 대규모 사업장에 들어가거나, 혹은 정부부문에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그러한 일자 리가 별로 없으며, 청년들은 대학교에 진학 할 가능성이 더욱 많으며, 그리고 그들이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러한 일자리에 취업할 가능성은 적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일자리가 여전히 많은 곳에서조차 그러한 일자리의 다수는 '축소'되고 있으며 신규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고 있다. 2009~10년 겨울 동안 진행되었던 터키의 TEKEL (국가 독점) 투쟁에서, 젊은 노동자들은 지난 12년 동안 새로운 신규 노동자들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던 그들의 부재를 주목했다. 브라질에서 시위대에 관한 통계는 시위대의 거의 3/4이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인구의 19%만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그리고 청년 중에서 대학 등록률(attendance rate)이 최근 몇 년간 거의 두 배인 국가에서, 이 3/4이란 수치는 노동계급은 차치하고서라도 총인구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 분명한 격차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연결하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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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러한 격차를 연결시켰던 시기가 있었다. 이란에서의 '녹색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란의 가장 큰 공장인 코드로(Khodro)에서 노동자들이 국가 탄압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시위대와의 연대를 위해 나섰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아랍의 봄' 기간 동안 특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터키에서 좌파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의 참여했다. 브라질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연맹은 7월 11일에 '항의, 파업, 그리고 행진'의 날을 개최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앞서 봤던 터키의 좌파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된 일일 '총파업'은, 이러한 파업이 노동자들의 참여 인원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광범위 하지도 않았고, 국가에 실질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그것의 한계점(limited duration)의 면에서도 충분히 길지 않았다는 것이 인식되는 듯하다. 유사한 상황이 그리스에서 긴축정책(austerity programmes)의 시행을 반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일일 파업을 조직한 시기 동안에도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파업을 넘어서 이동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 반면에, 일일 파업을 선언하는 방법의 문제는 시위대에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운동에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하여 총파업을 요구해 왔다. 오클랜드에서와 같이 이것은 대체로 실패했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업이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적어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 총파업을 요구한 페이스북(Facebook)은 파업에 대한 지지의 수준이 있음을 보여준 50만 명 이상의 지지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히 보이는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인구학적 격차(demographic gap)는 컴퓨터 사용을 반영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젊은 대학교육을 받은 노동자들보다 컴퓨터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적으며,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에서 조차 그들은 소셜 미디어 사이트 활용을 덜 할 가능성이 있다.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를 을 통한 총파업 요구는 그들이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는 많은 사람들과도 연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활용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분명히 터키 정부는, 불시 단속을 벌여 트위팅(tweeting)이라는 죄로 체포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된,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터키 정부는 분명히 그것의 잠재력을 인식하며, 그리고 좌파가 하는 것처럼  '키보드 혁명가들(keyboard revolutionaries)'을 저자세로 보지 않는다. 터키 정부는 그들을 가두었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시위를 위해 거리로 사람들을 끌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파업으로 동원하는 것은 덜 효과적이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다수의 사람들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작업 중 파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시위로 나타는 것이 더 손쉽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시위에 가는 것은 개별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물론 이러한 시위에 작업장, 학교 혹은 대학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례는 있지만 다수의 경험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고 결정 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력으로 파업에 참여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시위에 나타나는 적보다 돈을 잃고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결정하는 데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는 우리에게 경험의 부족, 자신감, 그리고 작업장 내의 의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지난 10년 정도에 걸쳐 국제적인 규모로 작업장 내 투쟁의 부활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규모이다. 지난 10년이 1990년대처럼 지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10년이 얼마나 좋았는가 보다는 그 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더 많이 반영한다. 오늘날의 작업장 내 투쟁은 70년대는 고사하고 80년대에 있었던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 시기와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작업장 내 투쟁이라는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은 이미 연금을 받고 있거나 기껏해야 퇴직할 때가 되어 가고 있다. 경험은 사라졌고, 신규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인 대중 집회를 열었던 작업장에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향후 예상에 대하여

     

    이러한 종류의 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은 매우 분명하다. 국가는 내놓을 해결책이 없다. 이집트에서 모르시(Morsi) 대통령의 퇴진은 어떠한 새로운 정부도 직면하는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의 배후 원인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세계 자본주의는 대학과 여타의 교육기관으로부터 대량생산되고 있는 청년들에게 제공할 보수가 좋고 안전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이 계속해서 폭발할지라도, 그들에게 작업장에서의 활동이 없이는 전진할 방법이 없다. 그 권력이 없이, 가두시위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시리아에서와 같이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자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는 충돌로 변질됨으로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군사 쿠데타에 따라 초래된 충돌인, 이집트에서 유사한 발전의 가능성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개인으로서 이러한 운동에 관련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로서 그들의 권위를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다.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그들이 향후 운동의 발생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 중동에서, 노동계급이 종파주의(sectarianism), 종교, 그리고 민족주의와 같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집트의 길이 내전을 초래한다면 이집트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은 어떤 길로 나아갈지를 결정하기 위한 제1보(the first step)이다. 이 자발적 활동(self-activity)은 대중 참여(mass participation)를 위한 적절한 조직 형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단지 정부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양산했던 전체 경제 및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필요성을 표현하는, 정치 수단도 생기게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공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체 가능한 사회는 가능하다.


    옮긴이|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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