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4호] 여성 해방은 오직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 조회 수: 9672, 2020-03-04 13:43:08(2014-12-30)
  • 여성 해방은 오직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가능하다1)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여성해방 강령'과 '여성주의'에 대한 토론을 위해 여러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경향의 입장을 소개하는 글 중 하나이며,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는 다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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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8일. 


    다른 경향들과 특히 자본의 좌파인 부르주아 그룹들은 국제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 기념이라는 표제로 이 날을 기리기 위해 준비 중이다. 5월 1일인 국제노동절(International Day of Workers)과 마찬가지로, 3월 8일은 그 계급적 내용이 배제되어 있었으며 국가자본에 복무하는 의식적인 잔치이자 민주주의 기관의 도구가 되어 왔다. 이는 계급투쟁과는 상충된다. 이 날이 자본에 너무나 단단히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1977년 도둑들의 소굴인 UN은 국제여성의 날을 승인하였고, 결의안을 통해 UN은 그 회원국들에게 이 날을 "여성의 권리와 국제평화(Women's Rights and International Peace)"의 날로서 기념하도록 요청하였다.


    국제여성의 날은 노동계급의 운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57년 3월 8일, 미국 여성 직물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극심한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했으며,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수년 뒤, 1907년 3월 8일에 미국 여성 직물 노동자들은 1일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으나, 또 다시 부르주아 경찰에게 잔인한 진압을 당했다. 그 이후로 노동자들은 "여성참정권"및 아동노동 금지를 요구하기 위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3월 8일은 향상된 노동조건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노동계급의 사회적 권리를 위한 투쟁의 날이 되었다. 1910년 사회주의자들의 제2인터내셔널 총회에서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2)은 국제여성의 날을 제청하였고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제국주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수백만의 남성들은 총알받이로 전쟁터에 보내졌으며, 이는 특히 여성 노동자들과 더불어 반전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점에 있어서 짜리즘 러시아의 여성 노동자들과 특히 페트로그라드의 직물 노동자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7년 3월 8일,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직물 노동자들은 "빵과 평화"를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했고, 거리를 점거했다. 실제로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불꽃으로 알려져 있다.


    1913년, 여성들은 선거권을 요구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 권리를 위해 투쟁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특히 독일, 영국, 미국 등과 같은 산업화된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이유는 부르주아지의 호의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이 - 자본주의가 쇠퇴기로 진입했고, 1919년에 제3인터내셔널이 선언한 것처럼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사실을 부르주아지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의회는 그 혁명의 내용을 상실했고, 선거쇼와 의회주의 서커스는 오직 민주주의 환상을 강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그 자신의 이익에 따라 코뮤니스트 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민주주의 환상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에서 자본의 좌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이다.


    1970년대 초 이래로, 이른바 페미니즘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자본주의가 아닌 남성을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서 고찰했고 여전히 고찰한다. 이와 같은 페미니즘에 붙은 어떠한 접미사(사회주의자, 혁명 등)도 반동적 이데올로기이고 노동운동 및 그 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러한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마가렛 대처, 힐러리 클린턴, 앙겔라 메르켈 및 다른 부르주아 여성들은 수백만의 여성 노동자, 수백만의 임금 노예와 나란히 있다. 프롤레타리아 여성계는 부르주아 여성계와 맞지 않다. 부르주아 여성계는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이중으로 억압받으며, 굴욕적이고, 열등하며, 분노를 삭히고, 눈물을 억누른다 – 한 마디로 뒤죽박죽인 자본주의가 인류를 위해 제공하는 것은 전 지구적인 진정한 생지옥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착취 조직책으로서 역할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 부르주아 여성들은 실제로 사회적 생산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그들의 남편들이 도둑질한 잉여가치 (노동자들의 피)를 흥청거리면서 그야말로 기생충 같은 삶을 산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항상 여성 노동자들의 착취를 옹호해야 한다. 그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그들은 그들의 남성 동료들이 이미 이용했던 동일한 부르주아 방법을 사용한다. 영국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는 수십 개에 이르는 광산 폐쇄와 해고, 무수한 노동자들의 실업과 노숙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범죄에 대한 "온화한 태도"는 - 그녀가 북아일랜드 군대의 제소자들을 범죄자가 아닌 정치범으로 인식한 것을 포함하여, 그들의 기본적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식투쟁으로 재소자들의 점진적이고 반복되는 죽음을 목격한 점에서 - 북아일랜드 군대 재소자의 요구를 처리하는 그녀에 관하여 평가할 수 있다. 수십만의 이라크 군인들 (실은 군복을 입은 노동자들) 은 대처리즘의 정치로 제1차 걸프전쟁에서 전사했다.


    노동계급의 역사는 노동계급 여성들의 가장 인간적인 계급연대로 채워진다. 노동계급의 여성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가장 열정적인 전투에서의 투쟁으로 기록되는데, 왜냐하면 때로 그들의 조건이 노동계급의 남성의 그것보다 더욱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부르주아 문화 속에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들에 대한 봉사로만 평가된 반면에, 노동계급은 수천 개의 밝게 빛나는 별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3),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4) 및 다른 사람들은 단지 몇몇 사례일 뿐이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0월 혁명 이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되었다. 이 당시, 부르주아지는 여성에게 투표조차 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영감의 원천이다. 노동계급의 이 저명한 이론가의 가르침은 그들의 투쟁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남성들에게도 여전히 본보기이다.
     
    여성 억압의 근원은 남성들이 지닌 억압적인 성향에 있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계급체제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원인이 있다. 오직 자본주의 생산관계 및 임금노예 체제의 모든 물질적 측면의 제거만이 이 억압 또한 사라지게 할 것이다. 노동 여성과 노동 남성은 일체가 된 것처럼 서로 팔을 끼고 계급으로서, 그들의 계급투쟁을 통해, 그들 자신의 삶을 해방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여성의 기생 상태를 폐지하고, 인류의 삶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앞에 놓인 유일한 지평선은 계급투쟁이고 진정한 여성 해방은 코뮤니즘(공산주의)이라는 무계급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Firoz Akbary 2012년 2월 28일


    옮긴이 ❙ JNY



    <주>


    1) 원문 출처 :  http://internationalist.ueuo.com/en/english.htm


    2)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은 국제여성운동의 지도자이며 독일사회민주당의 집행위원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오랜 동지이자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코뮤니스트당 설립을 도와줬으며 준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했다.

     

    3)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이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사회 민주주의 이론가였다.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이 된 혁명그룹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혁명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혁명은 자유군단이라고 불리는 우익 의용군과 잔류 왕당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혁명군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4)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는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통제를 반대하는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사였으며 자유연애의 지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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