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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4호] 혁명조직의 구조와 기능 2 - 이형로
  • 조회 수: 45333, 2023-06-06 20:02:16(201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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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조직의 구조와 기능 2


    당과 계급, 당의 중앙화에 대한 이탈리아 좌파의 논쟁을 중심으로



    지난 「코뮤니스트」 3호에서는 국제 코뮤니스트좌파 조직인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이하 ICC)의 조직 구조와 기능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ICT(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이하 ICT)의 노선을 ‘당 조직’ 논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1. 혁명당(조직)이란 무엇인가?


    ICT는 1943년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이하 PCInt으로부터, 1983년의 혁명당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이하 IBRP을 거쳐, 현재의 ICT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의 역사적 경험이 있는데, 그러한 경험을 통해 혁명당(조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은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바로 그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하다.
    혁명당(또는 그에 선행하는 정치조직)은 전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강령을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가장 의식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혁명당은 늘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수일 것이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코뮤니스트 강령은 전체 노동계급에 의해서만 이행될 수 있다. 코뮤니즘을 확립하는 임무는 전체 노동계급에 달려 있다. 그것은 의식적인 계급의 전위일지라도 위임될 수 없는 임무이다.
    계급당은 맑스주의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 강령을 정교화하고 그와 일치하는 전략·전술을 정의하기 위해 계급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정치적 교훈을 끌어낸다.
    혁명이 진행될 때, 당은 노동계급의 대중기관 속에 자신의 강령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 지도를 하려고 목표할 것이다.”1)


    ICT에서 규정한 혁명당은 일반적인 노동자 대중을 기반으로 한 대중정당이 아니라, 소수의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를 기반으로 한 혁명조직이다. 그런데 혁명조직에서 추구하는 코뮤니즘은 전체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혁명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소수의 혁명당이 대신해줄 수 없다. 따라서 혁명당은 자신들이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진행될 때 코뮤니스트 강령을 계급 전체의 권력기관인 평의회(소비에트)에 제시하여, 평의회가 코뮤니스트 강령으로 향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ICT는 러시아혁명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에서 당과 소비에트의 유기적 결합과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당 없는 혁명의식을 생각할 수 없듯이, 러시아의 경험은 가장 계급 의식적인 당일지라도 소비에트(또는 비슷한 노동계급 대중기관)에서 분리된 채 혁명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교훈을 준다. 소비에트는 노동계급 정치권력(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표현이며, 러시아에서 정치적 삶으로부터 그것이 퇴조하고 주변화한 것은 어린 소비에트 국가가 자본주의 반()혁명에 의해 목 졸렸음을 상징한다. 지치고 죽은 노동계급으로부터 고립되었을 때 볼셰비키 지도부의 손에 남은 권력은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이었다.

    미래의 세계혁명에서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은 오로지 대중의 계급기관을 통하여 계급운동을 이끌려고 목표해야 하며, 그 출현을 고무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으며, 혁명당은 패배의 두려움에 기초한 기계적 장벽을 세움으로써 미리 자신의 손을 묶어서는 안 된다. 당도 소비에트도 그 자체로는 반(反)혁명에 맞서는 보증이 아니다. 승리의 유일한 보증은 노동자 대중 자신의 계급의식이다.”2)


    이처럼 러시아혁명의 교훈은 미래의 세계혁명에서는 소비에트(평의회)와 당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의 승리가 오직 노동계급 자신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혁명당은 혁명시기에 대중의 계급기관(평의회)을 통해 계급운동을 이끌어야 하며, 일상시기에는 평의회의 출현을 고무하기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고 ICT는 주장한다.


    ICT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격과 세계 혁명당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 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혁명 강령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려고 서로 조직한 가장 계급 의식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정치표현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너무 가련하고 너무 늦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따라서 IBRP는 세계 코뮤니스트당을 그 정치 강령과 국제세력이 존재하게 되자마자 창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서기국은 당을 위한 것이지만, 유일하게 이미 존재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미래 당은 단일 조직의 단순한 확장은 아닐 것이다.

    세계혁명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혁명 강령의 명확한 세부 내용이 잠재적인 구성 부분 사이의 토론과 논쟁을 통하여 관련된 모든 면에서 명료화되어야 한다. "


    “세계 당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조직은 이미 그들이 나오는 지역에서 노동계급 내에 의미 있는 존재여야 한다. 선전집단에 지나지 않는 기반 위에서 국제 당(또는 초기의 핵심)을 선언하는 것은 혁명운동의 진전을 가져올 수 없다. 혁명조직은 선전망을 넘어서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제한된 기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노동계급 속에서 혁명세력으로 확립하는 작업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임무이다. 이는 미래의 혁명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할 선구자로서 오늘의 계급투쟁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지위에 있기 위해서이다.”3)


    ICT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격을 일국사회주의가 아닌 세계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혁명당은 반드시 혁명시기 이전에 만들어져야 한다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창립시기를 코뮤니스트 강령과 그것을 방어할 국제적인 세력이 존재하는 시점이라 보고 있다.


    또한, ICT는 세계혁명당 건설은 ICT나 ICC와 같은 국제조직의 확장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사전에 토론과 논쟁을 통해 혁명 강령을 명료화시키고, 각 지역(국가)에서 세계혁명당을 구성할 조직이 실제 노동계급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세계혁명당을 추구하는 혁명조직들은 선전집단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미래의 혁명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나갈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당과 계급에 대한 이탈리아 좌파의 논쟁


    앞서 밝혔다시피 이탈리아 좌파에 뿌리를 둔 ICT는 70여 년의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조직노선에 대한 수많은 논쟁과 분리와 재정립이 있었다. 현재 ICT가 정립한 혁명당(조직)에 대한 규정은 이러한 논쟁과 검증의 산물이며, 초기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한 축이었던 ‘보르디가(주의)’와의 논쟁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이번에는 당의 역할과 계급과의 관계에 대한 코뮤니스트좌파와 보르디가의 논쟁을 소개한다.


    보르디가와 데이먼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좌파의 상징적 인물로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 PCd‘I) 설립을 위한 투쟁과 항상 관련되어 있다. 데이먼 역시 이탈리아사회당(PSI) 좌파의 일원이었으나, 전후 코뮤니스트당 설립을 위한 투쟁에서 그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이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에서, 그가 ‘혁명적 패전주의 활동’으로 투옥된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명 모두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이 창설된 1921년의 리보르노 대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서 이탈리아사회당을 탈퇴하여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에 참여한다.


    이후 데이먼은 파시스트와 정부에 의해 수차례 체포되고 공격당했다. 1923년 그는 한동안 코민테른에 의해 프랑스로 떠났는데,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이탈리아어로 제작된 간행물 발행을 위해서였다. 1924년 귀국길에 오른 데이먼은 코민테른이 보르디가 (1923년 체포됨) 를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 지도부에서 제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자리에 그람시가 "볼셰비키 화" 과정 일부로 임명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볼셰비키 화는 모든 코뮤니스트당을 모스크바에 굴종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코민테른과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사회당과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이 통합하여 대중정당을 만들기를 원했지만, 보르디가는 무솔리니와 “평화협정”을 맺는 “중립주의” 정책을 채택한 이탈리아사회당과는 결코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강령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투쟁 노선을 갖고 있지 않거나 사실상 폐기해버린 정치세력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결국, 통일전선 문제는 보르디가 지도부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을 가져온다. 당시의 코민테른 3차 대회는 모든 나라에 통일전선 전술의 적용을 명령했다.”4)


    당시 데이먼은 당이 이처럼 무너지는 것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보르디가가 이러한 결정을 거의 수동적으로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보르디가는 공식적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록 좌익이 이탈리아에서는 다수일지라도, 이탈리아 좌파는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의 일부이며, 코민테른 본부 안에서 좌익은 소수였다”라고.


    1925년 데이먼은 Francesca Grossi, Bruno Fortichiari, Luigi Repossi 등과 함께 코민테른이 당에 가하고 있던 압력과 투쟁하기 위해 조정 위원회를 조직한다. 하지만 그람시는 이조차도 “조직화한 분파”라고 위원회를 비난하면서 격렬하게 공격했고, 코민테른은 조직의 해산을 요구했다. 1926년 파시스트 정부는 데이먼을 체포하여 유스티카(Ustica )섬에 유배시켰다. 그해 11월 그람시는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고, 보르디가 또한, 1926년 말 파시스트에 의해 체포되어 3년간 추방되었다.


    결국, 보르디가는 1930년, 데이먼은 1929년에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다. 이때 보르디가는 직업을 엔지니어로 전향하여 네팔에서 더는 어떠한 정치적인 연락도 거부하며 지냈다. 반면 데이먼은 스탈린주의와 파시스트 모두에게 지속해서 저항했으며, 1943년 무솔리니의 몰락과 최후 사면이 있을 때까지 수차례 수감되었다. 그해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거대한 폭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스탈린은 코민테른의 종말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미국과의 동맹을 굳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수하게 형식적인 행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이 세계 혁명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기에, 데이먼은 이 사건을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을 출범시켜야 한다는 그의 호소에 이용했다. 보르디가는 연락을 받았으나, 이 신당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는데, 데이먼에 따르면


    “사실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5)에 가입시키려고 호출했다. (덧붙이자면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 자체가 더는 국제주의의 무기가 아니었다. 톨리아티 당에서는 전후 민주주의의 재정립을 위해, 소수의 모든 보르디가주의자들까지도 동맹을 결성하여 이미 일국 코뮤니스트당이 되어 있었다)”


    데이먼은 암살을 준비했던 스탈린주의자들과 지속해서 투쟁하였다. 그리고 실제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의 국제주의자 두 명 Mario Acquaviva와 Fausto Atti가 살해당했다. 이때 보르디가는 마음을 바꿔, 그의 지지들이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을 지지하도록 촉구했으나, 1951년 실제로 자신이 당을 분열시킬 때까지 가입하지 않았다. 당시 데이먼은 보르디가가 혼동했던 파시즘의 위협과 러시아의 본질에 대한 몇 가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내용의 핵심은 당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었다.


    보르디가(주의) 비판


    1926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 이탈리아 좌파는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반대하여 싸웠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의회주의 개념에 대한 반대, 통일전선 즉 중도주의를 포함한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코뮤니스트당을 형성하려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대한 거부, 러시아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하는 것과 코민테른이 국제주의 입장을 점진적으로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의 역할과 노동계급과의 관계’에 대해서 보르디가는 러시아혁명의 퇴행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민테른이 1920년 채택했던 테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921년, 1922년의 출판물에서 보르디가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라는 오류를 다시 채택했다.


    이에 대해 코뮤니스트좌파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보르디가는 노동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당)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르디가는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당은 그 정치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카우츠키가 개혁과 혁명 사이의 분리를 만들었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보르디가는 코뮤니스트혁명의 필요를 물질적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이상의 완벽함 속에 두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6)


     “당 활동을 떠나서는 계급의식과 계급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의 존재가 노동계급의 존재에 선행하게 함으로써, 이탈리아 좌파는 노동계급과 분리되어 허공을 걷게 된 것이다. 만약 계급의식과 행동 의지가 혁명당 안에서만 응축되고 구체화할 수 있다면, 혁명조직들을 배출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러한 의식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아니라면 과연 당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보르디가에게 당은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의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에 있는 인자들의 것이다. 다시 말해 혁명가들은 ‘비결’를 알고 이해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완성된 채로 가져다주는 지식인들이다.”7)


    이러한 오류는 이들의 강령에 잘 나타난다. 오늘날 이들이 이탈리아 좌파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데, 이들은 현재의 코뮤니스트좌파와는 관련이 없다. 이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총사령관격인 당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는 당면주의를 넘어설 능력이 없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 당이 있는데,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진정으로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이자, 변하지 않는 코뮤니스트 강령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한다.


    “혁명이 무엇보다 의식적인 혁명인 한, 이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의식적인 기관, 즉 그 자신들의 당이 이끌고, 지휘하고,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을 형성하도록 보증하는 것은 당이기에, 그 당이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하는 것은 논리적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그러므로 코뮤니스트당의 독재가 될 것이며, 정부의 당이 될 것이다.” 8)


    이에 대해 코뮤니스트좌파 데이먼은 당은 계급이 아니라 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계급 전체의 기관인 평의회나 소비에트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당은 그것을 지배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은 코뮤니즘의 필요성을 깨달은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라서 노동계급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기 때문에, 당이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의회 안에서 코뮤니스트 강령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다. 반면 보르디가는 당이 곧 계급이기 때문에, 당과 계급 사이에 구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한 계급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계급의식의 조건과 관계없이 코뮤니즘 사상을 외부로부터 계급 내부로 들여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의 ‘지도력’에 대해서도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약 당이 효과적인 지도 기관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소비에트를 강제해서 권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줄 결정적인 영향력을 당이 쟁취해 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면, 이는 당이 「코뮤니스트선언」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대중보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과 일반적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그리고 미래 발전에 앞서서, 이 투쟁을 가능한 효과적으로 만들고 그 최종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만들게 될 목표들, 방법들, 그리고 조직화를 당이 가르쳐 줄 수 있고 또 가르쳐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9)


    이들의 주장으로는,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에 따른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노동자들은 당의 말을 따를 것인데, 왜냐하면 당이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길을 체화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르디가주의자들의 인식에 대해 코뮤니스트좌파는 매우 경직되고 빈약하다면서 비판한다.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당이 제안하는 그 방향을 수용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문제는 단순한 강령의 옳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일상적인 경험 속으로 소화하지도, 그들의 세계적 역사적 이해관계가 표현된다고 보지도 않으면서 당의 명령을 그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따르는데 만족한다면,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손발을 부르주아지의 영역에 묶인 채 내버려 두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코뮤니스트혁명은 이것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자들 일부의 빈약한 정치적 신념이 계급의 적들에게 유리하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보증은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에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복종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힘에 있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활동의 목적과 수단을 이해하는 전반적인 역량에, 그리고 집단적 계급의식에 있다.
    계급의식은 현실을 엄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실천적으로 변혁하는 것, 정확히 바로 그 사실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학문적인 이해도 그렇게 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위력은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계급의식과 조직화에 있다. 계급에게서 이러한 위력을 빼앗는 것, 즉 그 이론과 계급투쟁 사이에 수많은 매개를 위치시키는 것은, 코뮤니스트혁명을 달성할 역량을 빼앗는 것이다.”10)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최근 ICT는 당과 계급의식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시켰다. 물론 ‘당과 계급과의 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 코뮤니스트좌파 사이에서는 현재에도 논쟁 중이며, 국제적인 토론의 심화는 코뮤니스트 강령과 혁명이론을 더욱 명료화시켜 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요구의 부분적 측면과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에 대한 지구적 전망의 결여가 당의 존재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당은 지구적 계급의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전위로서 당 내부부터 그 의식을 만들 수 없다면 계급의 적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은 계급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계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급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당이 항상 존재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정치적 준거가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을 향한 계급투쟁의 정치적 진화가 당 없이 일어날 수 있다거나 당이 단순히 조직자이며 전 계급이 독립적으로 정치 강령과 그를 실행할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투쟁을 일반화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또한 당을 기껏 대부분의 반(反)혁명 시기에 연구센터로 여기면서 오직 혁명 시기에만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지를 위험하다고 본다. 이는 객관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강제한 후 주요 경제위기가 당을 만드는 시점과 두 실체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기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 또는 너무 늦게 만들어진 당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린당하였고, 유혈 적으로 억압되었는지를, 그리고 하루에 날조될 수 없는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심각하게 지체됨으로써 계급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11)


    3. 유기적 중심주의냐 민주적 중심주의(중앙화)냐


    이탈리아 좌파에게 당과 계급,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논쟁과 함께 가장 큰 쟁점은 당 조직(구조) 문제였다. 당의 ‘중앙화’를 둘러싼 보르디가와 데이먼의 논쟁은 ‘이탈리아 좌파의 역사적 경험에서 강점과 약점’을 모두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1943년에 설립된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의 건설 원칙과 1951년에 당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 내부적으로 발생한 분열문제는 현재의 코뮤니스트들에게도 많은 과제를 남겨주었다. 여기서는 보르디가의 ‘유기적 중심주의’를 비판한 데이먼의 “당의 중앙화 Yes - 당의 (유기적) 중심주의 No!”12)내용을 바탕으로 당 조직의 구조 논쟁을 소개한다.


    당 조직에 대해 데이먼은 혁명가 조직의 기본원리는 민주적 중심주의를 주장했고, 보르디가는 이 민주적 중심주의를 "민주주의 제도"일 뿐이라고 비난하면서, 오직 코뮤니스트 강령에 대한 충성만이 혁명가 조직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유기적 중심주의’를 주장했다. 그것은 불변의 코뮤니스트 강령이 1848년 이후 여전히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했고, 노동계급이 러시아혁명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강령에 포함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이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을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 떠난 1951년까지 이 논쟁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 후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몇 차례 분리되었고,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당이라고 주장하는 4개의 서로 다른 보르디가주의 그룹들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대중정당의 상을 거부했다. 코민테른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자유로운 투표를 통해 혁명노선을 배제하는‘민주적 중심주의’의 개념을 거부했다. 선거 메커니즘(투표방식)이 아닌 당 강령으로부터 도출되는‘유기적 중심주의’를 주장했다. 이것은 강령에 대한 견해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분리를 목적으로 하는 분파를 인정하지 않으며, 혁명정치(강령)의 올바름으로 당이 유기적인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 조직 원칙에 대한 ‘유기적 중심주의’는 리옹 대회(그람시와 톨리야티가 승리한 당 대회)에 이탈리아 좌파가 제출한 테제의 핵심이었다.


    "코뮤니스트 정당은 유기적 중심주의를 확보해야만 한다. 유기적 중심주의는 기초단위와의 논의를 최대한 보장하는 한편, 자신을 분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어떠한 모임(분파)도 자발적으로 제거할 것을 명확히 한다. 이것은 레닌이 했던 것처럼 위계질서에 대한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처방으로 이룰 수 없으며, 올바른 혁명 정치를 통해 가능하다."


    보르디가는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 분열에 대한 논쟁에서 이 공식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데이먼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보르디가가 정의한 ‘유기적 중심주의’는 당 내부의 독재를 위한 수단이었다.” 사실 보르디가는 리옹 테제(필요에 따라 투표 혹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보다 한 단계 앞서 그 개념을 수용했다. 현재(당시) 보르디가는 당이란 다음과 같다고 주장했다.


    "당이 추구하는 것은 착취당하는 대중과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접촉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의 구조에서 코민테른(모스크바)의 초기 잘못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적 중심주의를 제거하는 것과 어떤 투표제도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동시에 모든 동지는 민주주의, 파시스트, 자치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당에서 제거해야 한다."


    리옹 대회 이후 당을 장악한 그람시의 스탈린주의 대중정당 노선 아래 당은 12.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당시의 신규 당원들은 사상적으로 무장되지 않은 젊은 노동자와 농민이 다수였고, 낮은 수준의 강령으로 정치의식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치적 미숙함과 무능력은 당을 급속도로 변질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보르디가의 유기적 중심주의(강령에 입각한 당 조직)를 정당하게 보이게 했지만, 필요에 따라 투표를 허용했던 리용 테제에서 더 나가 투표제도를 제거시키는 것으로까지 발전한 ‘강령주의자’들의 개념은 오히려 스탈린주의에 맞닿아 있었다.


    데이먼은 중심주의에 대한 유기적 측면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록 세계 프롤레타리아 당의 동지와 그 안에서 선출된 지도자 사이의 관계에서, 즉 "자유와 권위"사이의 관계에서‘민주적 중심주의’는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유일하게 건강한 방식이며, 더욱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유지될 수 있다고 했다. 달리 말해, 결정이 필요한 쟁점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단계에 이르면 필수적으로 동지들의 투표로 정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러한 구조는 당에 필수적이며, 당의 동지들에게도 혁명적 투쟁을 위해 적절히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민주적 중심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스탈린주의와 어떠한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보르디가에 대해서는 “보르디가가 당의 민주주의를 경멸한 것은 스탈린주의와 밀접할 뿐 아니라, 이미 그의 지지자들에게 최초 분열 이후 심각한 결과를 끼쳤다.”고 했다. (데이먼의 주장과 같이 유기적 중심주의를 유지하려다 보니) 현재 보르디가의 당은 수차례 분열을 겪었으며, 각각의 분열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당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보르디가의 전 지지자 중 한 명이었던 자크 카마트(Jacques Camatte)는 1966년 Invariance를 만들기 위해 보르디가와 갈라섰다. 그리고 민주적 중심주의를 거부했다 (그것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보르디가와 같이 잘못된 주장을 하면서).


    그러나 "유기적 중심주의"의 결과는 이런 분열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969년 한 문건은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당의 중앙 위원회 또는 모든 중앙조직은 국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민주적 중심주의는 지배 방식에서 의회의 특정 형식을 모방했다. 그리고 유기적 중심주는 단순히 민주주의와 그 형식(다수결 원칙, 투표, 총회 등)에 대한 거부를 명확히 하였으나, 실제로는 더욱 현대적인 형식의 덫에 갇히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파시즘과 같이 조직에 대한 신비주의를 초래했다. 이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ICP)이 갱단으로 변질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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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노라토 데이먼>


    「당의 중앙화 Yes - 당의 (유기적) 중심주의 No!」에서 데이먼은 말한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에서 혁명당의 조직은, 상상처럼 존재할 수 없으며, 고도로 중심화 된 구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비록 세계 프롤레타리아 당의 동지와 그 안에서 선출된 지도자 사이의 관계에서, 즉 ‘자유와 권위’사이의 관계에서‘민주적 중심주의’는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유일하게 건강한 방식이며, 더욱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유지될 수 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의) 이 분열 모두는 이른바 ‘유기적 중심주의’라는 형태로 내부 논쟁을 억압하기 위해 시도한 결과물이다.”


    현재의 이른바 ‘민주 집중제’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형식적인 ‘다수결 원칙’, ‘대의제’와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형식으로 변질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상설로 위임된 ‘중앙기구’에 의해 관료화되어 버렸다. 더욱이 최근까지도 일부 정파들은 ‘민주적 중심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 산물인 ‘분파금지’ 제도마저 정당화시키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사회의 다양한 기능에 더 많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국제적으로 소통하고, 국제적인 공동체를 조직하는 것의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추구하는 당의 구조는 너무 낡지 않았는가?


    데이먼이 말한 ‘더욱 민주적인’ 것은 더욱 창조적인 소통과 직접 민주주의의 확장이 아닐까? 적들이 탄압이 정교해진만큼 더욱 정교하고 창조적인 소통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인류의 미래가 담길 코뮤니스트 강령이야말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변화 발전해야하며,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 가장 소통이 잘되는 구조이며 가장 집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이형로


    <주>


    1) 혁명당국제서기국(IBRP) 강령, 1997.


    2) 같은 글


    3) 같은 글


    4)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 운동의 교훈, 2013, 「코뮤니스트」 창간호, 이형로


    5) 이탈리아 국제코뮤니스트당(The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은 전쟁 이후 완전한  스탈린주의 당으로서 톨리야티의 주도 하에 창당되었다. 창당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the Communist Party of Italy)을 과거 명칭으로 격하시켰다. 이것은 더는 국제주의자의 주장이 아니었다.


    6)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 1979,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7) 위의 글


    8)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의 「기권주의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의 테제, 1920


    9) ‘당의 지도력 없이는 혁명적 행동도 없다’, 1978년 6월, Le Proletaire, 269권


    10)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 1979,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11)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2005,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12) 당의 중앙화 Yes - 당의 (유기적) 중심주의 No!, 1951,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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