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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글씨 2호]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대한 테제
  • 조회 수: 5027, 2015-06-09 14:34:03(2015-06-09)
  •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에 대한 테제





    1) 국가는 역사 속에서 인간 사회를 나눈 적대적인 이해관계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적대적인 경제적 관계의 산물이자 결과이다. 국가는 역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발전의 과정에 의해 직접 결정된 것이다.


    국가는 계급 위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지배적인 경제 시스템의 사법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상부구조이며, 계급의 경제적 법칙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인간 사이의 경제적인 관계, 계급의 형성,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당시의 생산력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이미 존재하는 경제적 사태들을 정리하고 승인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법적 강제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평형상태, 계급들 간 관계의 안정, 경제적 과정 그 자체로부터 흐르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동시에, 국가는 억압받는 계급들이 선동과 동요에 개입해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시도를 막으려 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 역할은 생산을 유지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질서와 보안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통해서 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 과정에서 국가는 최상위 질서의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요소, 생산력의 진화와 발전이 지속해서 맞서야 하는 족쇄로 등장한다.



    2) 안보의 대리인으로서, 그리고 반동의 대리인으로서의 이중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는 물질적인 힘, 다시 말해 폭력에 그 토대를 둔다. 국가의 권위는 강제적 역량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는 존재하는 모든 폭력의 힘을 배타적으로 독점한다. 경찰, 군대, 그리고 감옥.


    계급 사이의 투쟁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대표이면서, 특정한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부르주아지가 거대한 집중된 경제적, 정치적 단위인 민족 구성체를 발전시킨 것처럼, 계급 사이의 적대가 더욱더 높은 수준에 이를수록,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이 강화될수록,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제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켜야만 한다. 내부적으로, 국가는 공식적으로 사법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근로계급들이 자본주의 착취를 참도록 강요한다. 외부적으로 국가는 다른 자본주의 그룹들의 탐욕에 맞서 경제적인 착취의 영역의 한계를 보증하며, 다른 국가들의 희생으로 경계를 확대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사회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구분과 그 구분으로 발생한 투쟁이 인간 역사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국가는 강제와 폭력의 유기체로서 그 발전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폭력의 역사적 필요성에 기원을 두기 때문에 (그 성장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강제력의 사용), 국가는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독립적으로 폭력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폭력은 수단에서부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국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양성된다. 그러므로 국가는 바로 자신의 본질에 의해,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제하는 방법으로의 폭력을 넘어서는 사회의 어떤 형식도 부인한다.



    3)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 함께 피고 자라는 복잡한 모순 속에서 국가는 지속해서 경제, 사회, 문화, 정치를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사적인 삶 속에서, 그 삶이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세계적 수준과 갖는 관계 속에서 그렇다.


    이 거대한 사회적 구속에 적응하기 위해, 국가는 계속 커지는 대중들의 봉사를 요구해야만 한다. 이들은 모든 생산적 활동으로부터 제외되어, 동떨어진 사회적 계층을 구성하며, 자기 자신만의 이해관계를 가지는데, 이들의 특성과 책임은 정부와 국가 기구의 유지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10% 그리고 아마도 조금 더) 독립적인 사회 계층을 구성하는데 (정치인, 법조인, 경찰과 군인) 이들은 자기 자신만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사회의 기생충으로 살아가는데, 그들의 배타적인 이해의 영역은 국가 기관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계층은, 지배계급의 손에서 사회의 공직자로 시작하여, 그 규모와 무엇보다도 국가 기구의 머리에 있다는 위치 때문에, 그 자신을 점점 더 자유롭게 하여 결국, 사회의 주인이 되려는 경향이 있으며, 지배 계급을 이 경향에 동화시킨다. 이 계층은 공공 재정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고, 법을 명령하고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리고 이 법을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게 적용할 물리적 폭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물질적 존재를 국가의 존재로부터 이끌어 낸, 새로운 특권 계층의 등장을 알게된다. 이들은 기생충적이고 본질에서 반동적인 계층으로 국가의 영속화에 관심이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지만 언제나 계급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 계급은 경제적 체계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며, 인간 착취의 영속화와 경제적. 사회적 특권의 보호를 주요한 원칙으로 하는 계급이다.



    4) 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은 더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부르주아의 원칙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자본주의 생산은 사적 소유의 신성불가침 원칙을 포기하고, 경제의 특정 부문, 이를테면 철도, 우편,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의 항공, 상선, 야금, 광산을 국유화하도록 강요한다. 국가는 경제 곳곳에서 점점 더 개입하고 있음을 느끼며, 이것은 명백히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뤄진다. 더욱이, 사회의 대립하는 세력 사이의, 계급들과 경제적 그룹들 사이의 계급투쟁 속에서, 국가는 물질적, 경제적, 독립적이고 견실한 기반 위에서, 그 자신을 지원함으로써, 대표적인, 매개하는 세력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진화 속에서, 국가는 새로운 성격, 새로운 역할을 떠맡는다. 국가의 두목의 역할이 그것이다. 국가의 정치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심지어 강조하는 동안, 자본주의 국가는 국가 자본주의를 향한 경제적 영역에서 진화해 왔다. 국가는 다른 자본(은행이나 재무)과 꼭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여전히 존재하는 영역에서 생산된 잉여가치 일부분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또는 하나의 집합적인 고용자로서 잉여 가치를 만들기 위해 국가 소유의 영역들을 직접 착취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에 재투자됨으로써 자본화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그들이 획득한 등급과 특권에 따라 국가의 공무원들 사이에서 분배된다.


    국가 자본주의를 향하는 경제적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완전한 사회화와 집산화에 이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엄격한 도구적 역할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하고, 국가에 집단적인, 잉여가치를 집단으로 뽑아내는 익명의 고용주로서의 경제적 성격을 부여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기반이고, 오늘날까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원칙들은 위협하지 않으면서, 심각한 변형을 겪을 수도 있다. 생산 수단의 다소 거대한 규모의 국가화는 체제의 끝을 알리기는커녕 체제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심지어 체제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 되고,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원칙들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은 강력하고 특권적인 소수를 위해 노동계급으로부터 더욱 더 거대한 잉여 가치를 추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와 양립할 수 없지만, 사적 소유의 부재(사회주의 경제의 창조를 위한 필요 불가결한 전제조건임에도 불구하고)는 그것 자체로 사회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현실은 자본주의가 국가 자본주의를 향함으로써 어떻게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적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 사이의 근본적은 대립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a) 생산의 동기와 목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생산의 동기와 목적은 더욱 더 거대한 잉여가치의 창출이다. 반대로, 사회주의의 목표는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필요 충족이다.


    b)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창조된 가치와 생산에 대한 즉각적인 재분배 속에서, 창조된 가치가 더욱더 작은 부분이 소비에 대해 주어지고,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가장 거대한 부분이 재투자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아래에서, 창조된 가치는 점점 더 많은 비율이 즉각적으로 생산자들에 의해 소비된다. 생산된 가치 중 직접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부분은, 재생산 과정에 쓰기 위해 생산에 투자되는 부분에 비해 증가하는 경향이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국가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점점 독립적이 되는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약화를 표현하기는커녕, 오직 국가를 자본주의의 진정한 권력의 자리에 앉힐 때까지 들어 올림으로써, 자본주의의 경제적 힘이 국가로 이전되는 데에 봉사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라는 그 역사적인 사명에 대해, 자본주의 국가는 골리앗의 출현으로 대응한다. 바로 자신의 본질에 의해, 국가는 인간의 과거 역사에서 모든 지배 계급과 반동적인 세력들을 대표한다. 우리가 보여 준 바로 그 성격, 보수주의, 폭력, 관료제, 특권과 경제적인 착취의 방어로 인해, 국가는 억압의 화신이며,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의 화신인 해방의 원칙에 양립할 수 없는 적대자이다.



    5) 지금까지 새로운 계급들은 다른 계급의 지배와 특권을 자신들의 것으로 단순히 대체해 왔을 뿐이다. 새로운 계급의 경제적 발전은 그들의 정치적인 헤게모니의 건설 이전에 천천히, 오랜 기간에 걸쳐 이뤄진다. 그들의 경제적 이해는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동시에 일어나는) 소수, 하나의 계급의 이해이고, 그들의 권력은 옛 사회에서 발전했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수준에 기초해 있다. 정치적인 권력, 다시 말해 국가와 사법 체계가 새로운 정권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은 경제적 발전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을 때, 지배계급을 경제적으로 대체하거나 부분적으로 흡수한 이후이다. 부르주아지는 오랫동안 자신의 경제적 지배를 발전시켰고, 상업 자본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옛 봉건 사회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달성했을 때에야 정치적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제의 저항과 그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부숴야만 했는데, 중세의 법은 생산력의 발전에 족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를 파괴하지는 않았다. 국가의 근원적인 원칙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방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국가 기구의 권력을 쥐고 그들 자신의 계급의 이해를 위해 이용하길 계속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전 사회에서의 혁명적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a) 옛 사회에서의 새로운 계급의 경제적 상승과 강화


    b) 그 경제적 지배, 평화로운 경제적 혁명


    c) 국가의 경제적 상태를 정당화시키는 폭력적인 정치적 혁명


    d) 새로운 계급의 이해에 따라 사용하기 위한 국가기관의 유지


    e) 새로운 지배계급 안에서 살고 있는 옛 지배계급의 점진적 흡수



    6) 그러나 역사의 다른 계급들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재산도, 어떤 노동 수단도, 어떤 물질적 부(富)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제적 체계도 건설할 수 없다. 혁명적 계급이라는 입장은 사회의 객관적인 진화 속에 있고, 그것은 사적 소유를 생산력의 발전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며, 잉여 가치의 생산이 계속될 수 없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이 생산한 잉여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충분한 시장이라는 상황에 직면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객관적인 필수성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체계의 내적 모순에 대한 변증법적 해결인 한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역사적 진화의 필요와 함께하는 유일한 계급으로 발견한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할 어떤 특권도 갖지 않는, 역사의 마지막 계급은 모든 특권을 억압할 역사적 필요성에 따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특권, 모든 사적 소유를 억압하고, 자본주의적 족쇄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인류의 이해를 위해 발전시킬 혁명적 업무를 수행할 유일한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어떤 경제 정책도 갖지 않고, 가질 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이전이나 이후에 세울 어떤 계급 경제도 없다. 다른 계급들과는 대조적으로, 역사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회-경제적 변형의 조건에 선행하고 그것을 만드는 정치적 혁명부터 시작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해방은 모든 계급적 이해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다. 즉, 모든 계급의 소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인류를 해방시킴으로써, 자신도 인류 속으로 해소됨으로써, 그 자신을 해방시킨다.


    국가는 계급 지배와 경제적 억압의 화신으로서,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향한 첫걸음은 국가의 혁명적인 파괴이다. 어떤 경제적 권력도, 어떤 경제적인 부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과정의 객관적인 역사적 법칙으로부터 획득한 의식으로부터 그 힘을 끌어낸다. 그 힘은 배타적으로 그 자신의 의식과 조직의 역량에 있다. 계급 정당은 계급의 의식을 구체화하는 존재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사명의 실현을 위한 떼어놓을 수 없는 전제조건을 대표한다. 투쟁의 단일 기관이 행동을 위한 실질적인 물질적 역량을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의 다른 계급들은 사회에서 경제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 없이도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행동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거의 알지 못했고, 그들은 스스로를 특권과 억압의 화신인 국가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계급으로서 모든 활동의 순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와 대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의 역사적인 반정립(antithesis)이다.


    착취하는 계급의 국가를 극복하는 것은 역사적 과정의 마지막을 표현했고, 계급의 마지막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국가의 파괴는 단순히 계급의 최초의 혁명적 행동이었으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당이 전체 혁명적 과정, 최초로 세계혁명으로, 그리고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7) 자본주의 체제와 대립하기 시작하고, 그를 넘어서야만 하는 생산력에 의해 성취된 수준과, 사회의 모든 이의 필요를 전부 만족시키는, 사회주의 사회 도래의 필요를 위한 발전의 수준 사이에는 커다란 역사적 틈이 있다. 이 틈은 아나키스트들이 믿는 것처럼 단순히 강령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영역에서 경제적 정책,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정책에 의해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이론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이행기를 두는 이유이다. 이행기 동안 정치적인 권력은 — 경제적 권력이 아니라 — 혁명적 계급의 손안에 있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의 발전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당의 정치적인 책무이고, 각각의 국가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오직 세계적 수준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이다. 자본의 세계 지배는 세계 경제의 다른 부문들과 산업의 다른 분야들의 경제적 발전이 오직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부여된 한계 속에서만 일어나도록 한다.


    다른 말로, 세계 경제의 다른 부문과 다른 분야의 발전은 심각하게 불구화되어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다른 한 편, 세계 경제의 모든 부문의 매우 높은 수준의 경제적 발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자본주의적 족쇄로부터 생산력이 해방된다는 것은, 사회주의로 향하는 사회의 경제적 진화를 위한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정책은 혁명이 세계적 수준으로 일반화되는 것에 기초해 발전한다. 그 내용은 생산력 발전의 일방적인 확인에 있지 않고, 본질적으로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자들의 생활수준의 비례적인 향상 사이의 조화로운 리듬의 확립에 있다.


    이행기는 그것이 사회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킬 수 없고, 축적을 계속 해야 할 필연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前) 사회주의 시대와 경제적 연속임을 표현한다. 그러나 어떤 정책도 생산을 확장하기 위한 최대의 축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그 정책은 전혀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고, 단순히 자본주의 경제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정책이란 노동자의 삶의 수준의 향상과 상대적이고 진보적인 가변자본의 증가와 조화되고, 그것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필수적인 축적에 기초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승리 이후, 한 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이 된다. 그것은 그 계급 정당이 이행기 동안 계급독재를 하여 사회주의를 향한 사회로 이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 편, 프롤레타리아트는 보호해야 할 특정한 즉각적인 경제적 이해를 갖는 생산 속의 한 계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경제적 조직 - 노동조합 - 과 그 자신의 투쟁 수단 - 파업 - 을 통해 이행기 동안 이러한 이해를 계속해서 널리 보급해야만 한다.



    8) 계급 지배의 도구인 자본주의 국가의 혁명적 파괴는 대적계급의 경제적 권력이 파괴된다거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의 주요한 부문들의 몰수와 사회화는 프롤레타리아 경제 정책의 첫 번째 필수 불가결한 수단일 뿐이다. 농업과 같은 경제의 뒤처진 부문들의 존재는 사회주의 사회로의 즉각적인 이행이나 사적 소유의 완전한 폐지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포고에 의해 세워지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영역에서 사회주의의 방식들이 자본주의의 수단들과 싸우고 패배시켜야만 했던 오랜 경제적 과정의 산물이다.


    이러한 뒤처진 경제적 부문의 존재, 사적 소유의 부득이한 생존은, 진정한 위협을 표현한다. 이들은 경제적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의 길을 막고 서 있는 사회적 세력들의 합병과 재생의 토양이 된다.


    이행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쓰라린 투쟁의 기간이다. 이 투쟁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권력을 갖고 있다는 이점을 누릴 것이지만, 이것이 최종적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의 결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 승리의 보장은 오로지 계급의식의 힘과 이러한 의식을 실질적인 정책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에만 달려있다.


    어떤 정치적인 실수도, 어떤 전술적인 오류도 노동계급의 적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다. 대적 계급의 정치적인 형성, 그 조직과 언론의 제거는 그들의 저항을 부수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계급 조직의 독립을 보호해야 하고, 이 조직을 그들의 진정한 본질과 관계없는 책무나 기능들을 떠안음으로써 변질되는 것으로부터 예방해야 한다. 당은, 마지막 목표와 계급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독재를 한다. 노동조합(혁명 이후)은, 계급의 단일한 기관으로, 경제적 입장을 표현하며, 계급의 즉각적인 이해를 보호하는 역할로서, 국가와 동일시하거나 국가에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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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국가는, 그것이 혁명 이후에 재건되는 한, 사회주의 사회를 위한 조건의 미숙함을 표현한다. 그것은 아직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경제적 토대의 정치적인 상부구조이다. 그 본질에서부터 국가는 사회주의에 적대적이다. 이행기가 역사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단계인 것처럼, 국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있어 그들이 타도한 계급에 맞서 사용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폭력의 도구이지만, 그것으로 그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국가는 계급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물려받은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엥겔스, 「프랑스내전」, 서문)


    사회 기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봉기의 승리 이후에 세워진 국가는 사회주의에 대해 여전히 조화롭지 못하고 적대적이다.


    몰수와 국유화, 경제를 관리하는 문제 등 노동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를 지도하는 것에 대한 역사적인 준비부족, 기술적인 전문가들, 착취 계급과 그들의 공복들에게 의지해야 할 필요, 그리고 내전에 뒤따르는 재앙적인 국가 경제, 이 모든 역사적인 요소들은 국가 기관을 강화하고 국가의 보수주의와 강제라는 근본적인 성격을 강화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를 이용해야 할 역사적인 필요는 이 기관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치명적 오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감옥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사회주의의 상징이 아니며, 사회주의를 창조할 사명을 지닌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징도 아니다.


    또한, 적의 저항을 분쇄하고 사회주의 사회로 향하게 하는 운동을 보장하는 혁명적 계급의 의지의 표현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의 사상과 기구에 근본적인 반대를 표현한다. 특히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 국가,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이라는 생각의 이론적 오류를 보여주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 강제의 기구인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국가의 활용을 동일화하는 오류도 증명했다.



    10)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적대하는 혁명의 승리를 통해 사회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아직 무르익지는 않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 아래에서 이러한 성숙함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인 사회적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모든 분야들, 경제, 정치, 문화,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와 모든 종류의 후진적 상부구조, 제도, 이데올로기의 잔여물들을 이어받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순한 의지의 실행으로 폐지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것들은 생각하고, 맞서 싸우고,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효과들을 희석시켜야만 한다. 폭력은 이 일을 하는 본질적인 수단이 아니다. 폭력은 그들을 분쇄하기 위해, 계급 적들이 사용하는 폭력에 비례하여 엄격하게 사용된다. 폭력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근로 계급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적 관계에서는 절대적으로, 명확히 거부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향한 수단은 사회주의를 추구해 왔던 목표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사회주의 그 자체이다.


    이행기의 초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의 과거 역사 전체, 즉 폭력과 계급 지배의 역사가 물려준 도구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국가는 그런 도구이다. 국가는 바로 폭력, 약탈, 그리고 억압의 상징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도구를 이어받아 오직 다음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1. 국가의 반(反)사회주의적 본질을 인정하고 선언하며, 결코 그 자신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국가가 모든 계급의 영속적인 감시와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면서 국가와 그 자신의 계급 기관인 당과 노동조합과 끊임없이 대립시킨다.


    2. 파리 꼬뮨에서처럼, 국가의 해악적인 효과를 가능한 한 약화시킨다. (엥겔스, 「프랑스내전」, 서문)


    러시아의 경험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의 위험과 이 위험에 대항할 수단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경고를 충분히 입증했다.


    이 수단들은 다음을 포함 한다 : 언제나 재소환할 수 있는 노동 대중들의 대표자 선출, 인민과 분리된 무장 세력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 계급의 일반적인 무장으로의 대체, 노동계급과 그 조직을 위한 가장 넓은 범위의 가능한 민주주의, 전체 계급의 국가 기능에 대한 경계와 영속적인 통제, 노동하는 이들의 임금 이상 받지 않는 국가 공무원. 그런 수단들은 단지 원리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실행되어야만 하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보완적 수단들에 의해 강화되어야만 한다.


    특히 역사와 러시아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같은 것은 없고,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안에 있는 국가, 여전히 반사회주의적인 본질이 남아있는 국가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인 경계가 약해진다면, 국가는 요새, 새로 태어난 자본주의 국가에서 쫓겨난 지배계급의 재집결지이자 표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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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이후의 노동조합


    11)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인 이해의 유일한 방어 기관으로서 그들의 기원은 생산의 메커니즘 속에 있다. 그들은 경제적 착취, 계속하여 성장하는 잉여 가치의 추출, 다시 말해 부불노동(unpaid labour-time) 시간의 증가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필요에서부터 나온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기술의 발전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감소시킨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거대한 생산력은 노동시간을 줄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기준을 높여주는 경향도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가 더 거대한 생산력을 추구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히, 잉여 가치의 생산을 증가시키려는 데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사이,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다툼은 경제적인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다. 생산에서의 두 세력의 역할은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적대에 기초해 있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이러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착취 받는 이들의 연합을 통해 자신의 즉각적인 이해의 방어를 조직한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부르주아지의 요원들, 다시 말해 개량주의 관료들과 노동조합의 역할을 파괴하고 그들의 왜곡하는 정책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는 한에서 계급의 기관으로 남아있다.



    12)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즉각적으로 계급을 철폐하고, 계급들 간의 생산관계를 폐지하진 않을 것이다. 승리한 혁명이란 단지 “지배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일 뿐이다. 이러한 조직은 당을 통해 역사적 길을 열고 계급과 착취의 존재로부터 시작하여 무계급 사회로 귀결되는 경제적 경향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서의 이 이행기는 경제적 영역에서 계급 착취를 줄이고, 지속해서 국가 수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몫을 늘이며,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의 관계에서 가변 자본에 이익이 되도록 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력적인 정책으로써 그 자신을 표현한다. 이 정책은 단순히 당의 강령적인 선언에 기초할 수 없다. 여기서 당은 국가보다는 특권을 덜 가진, 강제와 관리의 기관이다. 이 정책은 노동 계급 자신 속에서, 계급이 사회에 대해 행하는 압력을 통해, 그리고 모든 다른 계급들을 향한 반대와 투쟁을 통해 그 정책을 보장받고 노동계급 자신의 진정한 표현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노동조합 조직은 착취에 반대하는 계급의 재결합을 향한 경향을 대표한다. 이러한 경향은 지배 부르주아지의 억압과 영향에 의해 지속해서 제지되고 막혀왔다. 노동조합 조직이 진정으로 계급의 유일한 조직이 되고, 예외 없이 모든 노동자를 재결합하는 것은 오직 혁명이 일어난 이후이다. 오직 그때가 되어서야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인 경제적 이해를 방어라는 역할을 진정으로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


    13) 혁명 이후의 노동조합 조직의 역할은 단순히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인 이해의 방어를 떠맡을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노동조합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위한, 그리고 어떤 종속이나 국가로의 통합을 거부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노동조합 조직은 사회의 주요한 흐름이 사회주의를 향하고 있는지(가변 자본의 비례적인 증가를 통해) 아니면 자본주의를 향하고 있는가(불변자본의 더욱 거대한 성장을 통해)를 가리키는 극단적으로 민감한 살아있는 잣대다. 자본주의 정책들을 향한 경제적 관리에 어떤 동요가 있었을 때는(미성숙한 조건과 생존한 비프롤레타리아 계급들로부터 비롯된 경제적 압력의 결과로서), 독립적인 노동조합 조직과 특수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응하고 개입하여, 경제정책을 사회주의의 길로 되돌리도록 추진하는 사회적인 평형추를 제공한다.


    노동조합에 경제를 관리하라는 역할을 주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근본적인 문제를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경제의 성숙도의 진정한 부족에 의해 발생한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역할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조직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인 이해의 방어와 경제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보증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한 그들의 압력을 행사할 역량을 파괴할 것이다.



    14)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조합은 바로 계급의식의 불완전한 반영을 제공한다. 이 의식은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와 그 요원들,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에 의해 부과된 모든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획득될 수 있다.


    혁명 이후, 노동조합은 더욱더 명백하게 모든 계급이 도달한 의식의 수준을 반영할 것이며, 대중의 정치적 교육을 위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의 방어와 사회주의의 건설이 소수 엘리트의 의지에 의해 성취될 수 없고, 오직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정치적인 성숙도에서만 그 힘을 찾을 수 있다는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폭력의 행사는 그것이 사회주의의 진보를 보장하는 목적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보장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파괴가 될 수 없고, 그 의지에 반해 창조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오직 노동계급의 의지와 의식에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의 모든 폭력의 수단들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단들은 사회주의를 향하는 어떤 움직임도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들은 계급이 역사적인 사명을 이해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표현과 정치적 비판의 완전한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노동조합에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싸우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는 이들을 위해서이며,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 그리고 계급의 특정 퇴행적 계층 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의 존속을 반영하는 모든 경향에 반대해서이다. 분파의 자유와 노동조합 내에서의 경향들, 노동조합 내의 모든 경향을 위한 발언과 언론의 자유. 이러한 것들은 계급 정당이 대중 속에서의 의식 수준을 깨닫고 평가하도록 할 수 있게 해 주는 조건이며, 대중의 정치적인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를 향한 움직임을 보증하고, 그 자신만의 정책을 입증하며 필요할 때 교정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당과 계급의 관계는 단순히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이다.



    15) 혁명 이후 노동조합의 역할을 줄이려는 경향들, ‘노동자 국가’의 존재가 노동조합 활동이나 파업에의 참여의 자유의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주장, 노동조합에 경제적인 관리를 넘겨준다는 이론을 통한 노동조합과 국가의 융합 주장은 매우 혁명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노동조합을 국가 기관으로 통합하려는 길로 이끈다. 그 의도가 얼마나 혁명적이었던 간에, 그러한 입장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조직 내부에서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넓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의 길과 정치적인 투쟁과 노동조합 내에서의 분파의 어떤 자유로운 활동들을 가로 막으려는 그러한 정책들은 반(反)노동자 계급적이다. 그것들은 당과 계급의 관계를 왜곡시키고 이행기 동안의 프롤레타리아트 입장을 약화시킨다. 공산주의자들의 의무는 이러한 모든 경향에 저항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싸우며, 노동조합 운동의 독립과 완전한 발전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경제의 관리


    16) 내전 이후 경제의 관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당이 마주쳐야 하는 문제로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모든 실질적인 측면에 우선적 해결방안을 제공하려 하는 것은 미숙한 시도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다른 나라와 경제의 다른 영역들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구체적이고 환경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상황에서 유효하고 적용 가능한, 엄격한 지침의 체계와 같은 것으로 바꿔버린다.


    우리가 떠오르는 문제에 대해 필요한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질적인 배움만을 통해서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우리는 오늘날 광범위한 윤곽, 이행기 시대 동안의 경제 관리의 일반적인 원칙들의 윤곽밖에 그릴 수 없는데, 이들은 주로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17) 사회주의의 성취에는 매우 선진적인 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이 필요하다. 혁명의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완전히 발전된 기술을 자신의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이것은 혁명이 미성숙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생산력의 발전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혁명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정당화시켜 준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에 족쇄가 되고 있으며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력의 완전한 발전을 가능하도록 하여 마침내 사회주의가 경제적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책들을 수행하는 데 달려 있다.


    기술과 생산력의 발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인 정책의 기반이다. 이것은 확대 재생산을 증가, 강화와 확장시키기 위해 생산된 가치 일부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단순히 생산력이 발전하는 속도의 결과가 아니다. 사회주의를 향한 리듬은 실질적인 경제와 정치적인 상황이 준 구체적인 가능성에 종속되고, 제한된다.



    18) 경제의 관리는 계급의 정치적인 투쟁의 발전과 분리될 수 있는데, 이것은 국제적인 규모에서 그러하다. 한 국가에서의 승리한 혁명은 그 자신의 경제 발전을 다른 나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추구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의 경우, 다른 나라에서 혁명의 상승하는 운동과 관계없이 러시아의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러시아를 세계 자본주의와 타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외국과  조약 및 경제적 협정과 국내의 양보로 이끌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를 남겨주었다. 이러한 타협들은 노골적인 위기에서 자본주의를 경제적으로 지지하고 붕괴로부터 보호하는 수많은 방법들로 밝혀졌다. 그러나 동시에, 이 타협은 혁명적 투쟁의 고통 속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효과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 군국주의 사이의 1920년 라팔로 조약)


    혁명 국가를 단순히 부분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경제적 협정은 사실 자본주의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강화로 이어졌다.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계급의 균형이 뒤집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승리한 혁명의 국가는 고립을 강조하고, 그 자신의 유일한 동맹, 그 궁극적인 발전의 유일한 보증인 국제적인 혁명을 잃었다. 그 역사적인 적의 증가하는 압력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힘의 방향을 변화시키며 끝났고,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다.


    한 국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정책은 그 나라 경제가 처한 어려움이나 한 나라의 좁은 틀 속에서 저발전을 해결하려는 목표를 가질 수 없다. 그 경제의 미래는 국제 혁명의 발전에 분리불가분하게 연결되고 직접 종속된다. 어떤 내부적 경제 정책도 국제적인 혁명을 돕는 것을 위한 일시적인 정책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목표로 해야 한다.



    19) 또한 러시아의 경험은 소비의 비례적인 발전을 넘어서는 생산의 리듬을 가속하려는 시도가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상품의 생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전쟁 경제를 준비하면서 지속적인 생산을 보증할 뿐인 쇠퇴기의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가능한 한 산업 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전쟁경제의 건설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인 이해를 희생시키는 정책에 저항하면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경제 정책은 생산자의 소비 요구에 비례하는 성장에 기초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소비재의 생산을 목표로 한다.


    축적은 가능한 한 빨리, 산업의 발전의 기준에 근거하지 않지만, 즉각적인 필요에 대한 점증하는 만족과 양립할 수 있는 비율로 고정될 것이다. 경제 관리의 근본적인 원칙은 기본적 필수품의 생산, 생산의 다양한 부문들의 점진적인 조화, 특히 도시와 농촌, 산업과 농업 사이의 조화가 될 것이다.



    20) 생산력의 수준이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소규모의 생산을 없앨 정도의 발전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한, 중간 계급, 장인, 그리고 소농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소멸은 있을 수 없다.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 — 주요한 산업들, 운송, 은행, 대규모 부동산 — 의 발전되고 집중된 부문을 집산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대자본을 몰수할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 사적 재산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오랜 경제적 과정을 통해 폐지될 뿐이다. 경제의 사회주의적 부문을 따라, 소생산자들의 사적인 부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 부문과의 경제적 관계는 아마도 매우 다양한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즉, 사회주의적 관계에서부터 협동주의적 관계로, 국가와 소규모 소유자 사이의 상품의 자유로운 교환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개인적인 독립된 생산자들 사이의 교환도 있을 수 있다. 생산, 교환, 가격, 시장, 그리고 화폐의 문제 또한 다양한 형식을 취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정책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하고, 경제적인 삶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관료주의적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을 통한 사적 생산을 흡수하는 진정한 가능성 위에 유일하게 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경제 정책은 사적 소유의 폐지와 사회적 계층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대한 가족의 품 안에 통합함으로써 독립된 생산자를 없앨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21) 사회적, 경제적 삶의 관리는 중앙집중화된 기관이 필요하다. 생산의 각 그룹에 그들 자신의 기업을 경영할 업무를 준다는 이론은 반혁명적 소부르주아 유토피아다. 기술의 발전은 거대한 노동자 대중의 참여와 그들의 생산적인 과정에서의 협력을 요구한다.


    경제의 각 부문에서의 생산은 전체 국가적, 국제적 생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의 움직임과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고, 오직 중앙집중된 운영만이 이것을 보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각각은 구성원과 사회의 구성원들을 엄청나게 많은 소소유자들로 나눠야만 하고, 각각은 각자 서로 적대적인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산업의 발전과 함께 역사상 오랫동안 사라졌던, 단순 상품 생산의 시대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그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관리 기관을 낳을 것이다. 이행기에는, 혁명으로부터 부상한, 전체 노동인구의 통제 아래에서 경제를 관리하고 지도할 정치권력이 경제적인 관리의 기능을 맡을 것이다.


    모든 수준의 권력에서 모든 노동자의 가장 광범위하고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참여는 경제가 노동자들 자신의 관리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파리 꼬뮨은 국가의 새로운 종류에 대한 첫 번째 사례였다. 러시아 혁명 동안 이러한 첫 시도는 재확인되었고, 그들의 위치에서, 그리고 노동 현장에서 모든 노동자의 대표 기관이라는 결정적인 형식을 주었다. 평의회(the councils or soviets)가 바로 그것이다.



    22) 노동하는 모든 이들은 지도와 관리의 기관인 평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이다. 오직 일하지 않는 자나 타인의 노동으로 사는 자들만이 배제될 것이다. 모든 노동 대중의 이해는 평의회에서 표현되고, 이것은 비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의식, 정치적 힘, 경제의 산업 중심에 차지하고 있는 위치 때문에, 그리고 규율과 조직의 감각으로 그들이 획득한 공장과 마을에서의 집중 때문에 평의회의 전체 삶과 활동에서 우월적인 역할을 할 것이고, 근로대중의 다른 계층들에 대해 지도력과 지휘력을 가질 것이다.


    평의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처음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사회를 관리하는 기술을 배울 것이다. 당은 단지 법령을 선포하거나 신성한 권리를 주장함을 통해 평의회에 경제정책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당은 정책을 제안하고, 방어하고, 그리고 평의회에 의해 조직된 대중의 승인에 따름으로써, 그 계급의 정책을 성공적인 결론으로 이끌기 위한 계급 정책들을 가져올 노동자 평의회와 노동자 대표자들에게 의지하여, 그들의 개념과 정책을 퍼뜨릴 것이다.



    23) 당과 계급의 관계가 노동조합을 통해 표현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당이 다른 노동 계급들과 가지는 관계 또한 평의회를 통해 표현된다. 계급 내의 폭력이 당과의 관계를 왜곡시킬 뿐인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노동하는 계급이나 계층의 관계에서의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 이 관계는 노동자와 농민 대표들의 평의회 안에서 완전한 표현과 비판의 자유에 기초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있는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자본주의와 그 국가를 파괴하기 위한, 그리고 내전 동안의 반혁명적 계급들의 저항과 폭력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보증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폭력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어떤 건설적인 과업 일부도 담당할 수 없다. 반대로, 폭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동들을 일탈시키고, 다른 근로 계층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 이는  대중의 정치적인 성숙도에 기초할 수밖에 없는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역량을 왜곡하는 것을 포함한다.



    프랑스 좌익 공산주의, M.C.|국제주의 9권(1946년 4월)  :  Bulletin d’Etudes et de discussion of Reveolution Internationale, no.1에서 재인쇄


    옮긴이|국제코뮤니스트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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