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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5호]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2017년 3월 10일, 우리는 선거로 선출된 최고 권력자를 직접 끌어내리지 못하고,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이라는 절차를 통해 대통령 파면을 얻어냈다. 연인원 1,500만 명이 넘게 참여한 대대적인 촛불 투쟁은 박근혜를 물러나게는 했지만, 권력(주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박근혜 일당이 유린한 헌법에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쓰여 있지만, 그 헌법으로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직접 통제할 수도, 끌어내릴 수도 없다.

    탄핵이 마무리되자 한국 사회는 또다시 유권자가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를 선출하는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개월이나 앞당겨진 대선을 맞이하여 이른바 노동자-진보 정치 세력들은 ‘야권연대-정권교체론’에서 이름만 바꾼 ‘정권교체-대세론’에 무기력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투쟁 없는 ‘대선 투쟁’이라는 허상을 잡고 부르주아 정치(헌법질서)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동안에도 꾸준히 선거를 통해 대중투쟁을 강화한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노동자(민중) 후보를 내세웠지만, 후보를 선출한 노동자에 어떻게 통제할지, 노동자강령(공약이 아닌)을 어떻게 준수할지, 선거기간 대중투쟁/현안투쟁에 어떻게 복무할지 아무런 보장도 강제도 없이 부르주아 정치와 뒤섞여 표를 구하기에 바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박근혜를 당선시킨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주의’와 ‘노동자 후보 전술’을 반대하면서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를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 선거판에 ‘진보정당’ ‘노동자 후보’의 이름으로 끼어들어 노동계급을 배신하고 부르주아의 한 분파로 행세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이보다 왼편에는 노동자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는 세력들이 소수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정치를 노동자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그 속에서 선전선동과 조직화를 꿈꾸며 선거운동을 선거투쟁으로 미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도 선거나 그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없다.

    현 시기 대선 정국을 둘러싼 사민주의와 동거, 의회 선거정치 몰입은 계급적 대중행동을 저해할 뿐이다. 대중에게 선거는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후보) 중 하나를 고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선거 결과가 마치 계급 대중 의지가 실제 실현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든다. 이것이 부르주아 선거제도의 핵심 기제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선거에 개입했던 노동자정당, 진보정당들은 완전한 의회주의 정당으로 자리 잡았고, 이들을 지지했던 민주노총의 정치는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수많은 배신과 운동권 출세주의를 양산했다. 통진당, 진보정의당류와 진보신당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다. 또한, 이들과의 정치적 공동전선이나 입당전술을 사용하는 자칭 사회주의 세력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

    말로는 선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참여하는 선거는 훌륭한 전술로 둔갑한다. 선거에 휩쓸리지 않고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선거 이후를 준비하는 운동의 흐름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선거주의자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건강한 노동자와 혁명세력을 대기주의, 기권주의로 몰아가면서 모든 운동을 대선 블랙홀에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이것이 운동마저 삼키는 부르주아 선거다.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은 지배계급의 위기를 평화롭게 넘기는 것이며, 격화되는 대중 투쟁을 잠재우고 대중의 불만 표출을 잠시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선거에 휩쓸리지 말고 투쟁의 동력을 유지해 선거 이후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지배계급에 맞서야 한다.

    선거는 짧다. 두 개의 노선은 대립하고 있다. 사민주의와 동거, 선거정치 몰입이냐,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냐?

    이제라도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뛰쳐나와 노동자계급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참상의 원인이고, 이를 넘어서는 공산주의 사회만이 대안이라고 대중적으로 공개적으로 말하고 싸워야 한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대중총회를 개최하자. 대중총회, 대중집회를 통해 노동자들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현하자!“

     

    대대적인 촛불 투쟁이 만들어 낸 조기 대선을 앞두고 노동자-진보 정치 세력의 대응방식은 4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는 이번 대선 참여가 내년 지방선거를 위한 포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촛불 투쟁이 노동자들에게 던져준 과제는 선거(대의) 민주주의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 자체였고, 노동 중심 정치가 아니라 ‘국가와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지배(통제) 문제였다.


    우리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을 밝히면서 ‘선거환상’을 넘어서자고 주장했다. 우리의 능력이 그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3년 전 비판의 칼날은 여전히 유효하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그리고 1991년 부활하여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치러진 지방선거 이래 19년에서 27년이라는 기간,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이 바뀌고 노동자 출신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퇴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누구도 보장받을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여전히 생존권 위협과 각종 차별에 직면해 투쟁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으며, 투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이제 지키지 못할 약속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선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른바 진보-노동정당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고 집권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를 ‘서커스’나 ‘환상’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정치인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생각하며, 투표행위로 자신들도 권력 일부로 참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선출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으며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권자와 분리되어 행동한다. 즉,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라는 이벤트에서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차려놓은 서커스 공연에 곡예사로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면서 선거를 통해 투쟁을 확산시킨다거나 후보를 내세워 투쟁의 구심을 세우겠다는 발상 역시 또 다른 ‘환상’에 불과하다.

    유권자의 측면에서도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한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 회사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자본가를 포함한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으니 따르라’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부르주아 야당 세력의 의도이든, 노동자 독자정치의 무능이든, 이번 촛불 투쟁의 열망은 ‘정권교체’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촛불 투쟁의 다양한 요구가 반(反) 박근혜 전선으로 모이고 가장 넓게 형성된 결과이다. 반 박근혜 전선에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시민이 되어 참여했고, 부르주아계급과 중간 계층은 민주주의자가 되어 참여했다. 이러한 현상은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지배계급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나아가지 못한 결과이다. 촛불 투쟁의 광장은 넓었지만, 광장의 요구는 (부르주아) 국가를 넘어서지 못했고,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사회(헌법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 문제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사회 안의 민주주의로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적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욱이 노동자 시민과 자본가 민주주의자가 힘을 합쳐 만들어 낸 정권교체로는 위기에 처한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의 생존과 생활수준은 노동자 자신의 투쟁으로 쟁취해야만 후퇴 없이 유지할 수 있고,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자기조직화를 통해 독자적인 힘을 키워야 거대한 자본가 권력과 맞설 수 있다.


    노동자 운동이 후퇴하고 투쟁의 힘이 지속해서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자본가 계급에 밀려있는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것의 첫걸음은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 계급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선거와 의회주의에 대한 코뮤니스트 정치입장을 제시하며, 열린 토론과 근본적이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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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의회 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에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완전한 정치참여는,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구의 파괴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자본가계급은 국가의 폭력을 통해 전 사회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특권을 갖고 있으므로, 어떤 특권이나 착취도 필요가 없는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국가를 그대로 이용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국가기구나 그것의 장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자신들의 계급영역에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주의 제도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가 이용될 수 있었다. 유럽에서의 19세기 동안, 그리고 1970·80년대에도 독재정권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사회에서의 보통 선거권을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것을 위해 자신을 조직했던 가장 중요한 요구들 중의 하나였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자계급의 강령을 위한 선전 및 선동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개입에 대한 전술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를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개입, 그것과 관련된 각종의 선거 연합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강령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의 해방이 의회의 장악이나 다수파 선출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를 입법화하는 동안 지배계급이 평화적으로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는 의회주의의 환상일 뿐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를 위장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사회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기관은 의회 밖의 군대, 사법기관, 국가관료, 보안세력, 생산수단의 통제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재는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의회제도 포함)를 파괴하는 것이 혁명의 과제이다. 또한, 노동자계급은 의회주의 보통선거권의 잔해 위에 노동자평의회의 계급기구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잔재위에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세워야하는 역사적 장도에 올라있다. 이때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떠한 혁명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단지 죽어 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일 뿐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직접적인 목표를 내걸어야 하는 지금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노동자계급은 이제는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 자기조직화로 나타나야 한다. 의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대리주의는 계급의 자립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의 영역인 의회가 아닌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자본주의와 그 국가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싸워야 하며, 대리주의가 아닌 계급 전체의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대중투쟁만이 승리를 보장해줄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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