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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 조회 수: 7088, 2019-01-15 18:33:36(2017-06-05)
  •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글이다. 이 전쟁에서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가 학살되었다. 예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 명의 병사가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 명에 달했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 명이 이후 '스페인 독감'이라 알려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SPD) 소속 제국 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롤레타리아 당의 지도부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국제주의자들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침머발트1)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 「사회민주당의 위기」와 그녀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세우려는 국제적 노력의 일부였다. 그녀는 전쟁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릿을 썼다. 전쟁 상황 속에서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을 놓고 볼 때, 그녀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 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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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원을 찾아서

     

    그 팸플릿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 하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너무) 뒤늦게 도착한” 나라들이 어떻게 해서 “먼저 도착한” 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 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 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 (본문 제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녀는 폴란드는 더는 독립국이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는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 방어 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이다.”(본문 제7장)

     

    전쟁 발발 후 몇 달 만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참여국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녀는 전쟁의 발발에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에게 있어서의 귀결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과 파괴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귀결들

     

    독일 사회민주당(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 국제주의자들은, 당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의 부록으로 출판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연맹에 의해 그룹의 지침으로 채택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중요성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팸플릿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노동자 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 것, 가차 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 '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 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는 의제가 아니라는 로자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에 관한 토론은, 억압과 추방 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그녀를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감금의 의도였다면, 갇힌 후 그녀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녀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 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녀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찾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 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와 사기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녀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일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2)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그녀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녀는 감옥 밖에서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저작들은 반복해서 감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갔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녀는 많은 동지와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녀를 침묵시키고 그녀가 개인들에게, 그녀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녀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정치적 인간적인 목소리를 감옥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그녀의 수감 시기는 삶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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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그녀는 폴란드에서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들)을 수학했다. 1897년 그녀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녀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그녀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녀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녀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녀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3)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그녀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갇혀있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견해를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점 증가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녀에게는 분명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그녀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녀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녀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파악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꼭 필요한 그녀의 대작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주>

     

    1. http://en.internationalism.org/wr/290_zimmerwald.html 및 http://en.internationalism.org/node/3154

    2.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보낸 1916년 7월 11일 자 편지

    3. 「자본의 축적 II」( 로자 룩셈부르크; 황선길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에 실린 “비판에 대한 반비판, 자본의 축적, 또는 아류들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974쪽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100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대항해서 쓴 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이 최초로 한국어본으로 나오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한국어본을 위해 작성한 서문을 여기에 공개한다. 지배계급과 그 선동 기구들이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대학살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상황에서 다른 한편의 혁명가들은 전쟁반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맞섰던 국제주의자들의 도덕적, 지적 용기를 자랑스럽게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7월 6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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