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6호]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선언 (2)
  • 조회 수: 4989, 2017-11-17 13:19:09(2017-11-16)
  • 10월을 방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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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혁명을 모욕하는데 중요한 요인은 10월 봉기가 곧 스탈린주의 정권의 전조가 된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착수한, 배고픈 볼셰비키 당 권력에 의한 쿠데타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의 해석도 1917년 2월, 자발적인 대중 파업에 참여하고 ‘민주적’ 평의회(소비에트)를 만들었던 노동자들에 대한 큰 공감과 이해를 보여줄 수 있다. 이 운동은 차르 독재 정권을 쫓아냈고,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와 같은 저명한 자유주의 역사가의 관점에서도 이 운동은 진실로 민주주의적 의회 국가의 등장을 위한 토대를 준비할 수 있었고, 곧 수십 년간의 고통과 공포에서 러시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볼셰비키가 찬란한 희망을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교의로 파괴했으며, 선동적인 슬로건으로 대중을 속였다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실제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때에는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계층의 완전한 정치적 각성이 있었다. 그 과정은 존 리드가 쓴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다.

     

    “이 시기의 러시아 사람들은 글을 배우려 했다. 그들은 세상을 더 알기 위해 정치, 경제,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러시아를 뒤덮은 것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혁명과 함께 폭발했기 때문이다. 첫 6개월 동안 스몰니 회관 한 곳에서만 몇 톤, 몇 차분, 몇 열차분의 문서들을 전국으로 배포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뜨거운 모래처럼, 러시아는 지칠 줄 모르고 읽을거리를 빨아들였다.… 온갖 연설들도 쏟아졌다. 칼라일이 말한 ‘프랑스에서 한 연설의 홍수’도 당시 러시아에 비하면 냇물에 불과했다. 수많은 강연, 논쟁, 연설 들이 극장, 원형 광장, 학교, 술집, 소비에트 집회장, 조합본부, 병영, 전방의 참호, 마을의 광장, 공장의 모임에서 진행됐다. 특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4만 명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사회민주당,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들과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주장을 경청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모든 길모퉁이는 몇 달 동안 공적 발언을 위한 연단으로 사용됐다. 또 기차와 전동차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즉석 논쟁을 벌였다.… (모든) 회의에서 발언 시간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책갈피, 서찬석 옮김(p.29-31중 발췌))

     

    이것이 계급투쟁의 정치화가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긴급한 경제적 필요에 쫓겨 어떻게 사회가 전체적으로 관리될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몇 년에 한 번씩 전문가와 직업 정치인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통치하도록 ‘권력을 넘겨주는’ 의회 체계라는 거짓 민주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연합, 토론, 그리고 자기-조직화라는 프롤레타리아 방식을 통해서이다. 여기서는 작업장, 지역, 군대, 마을 회의의 전반적 네트워크가 구성되고 이러한 회의에서 위임받고 재소환할 수 있는 대표자들이 더 중심에 있는 평의회, 소비에트로 보내진다. 1917년에는 그러한 네트워크가 러시아 전역에서 분출했으며, 한 해, 아니 그보다 짧은 시간에 전 세계에서 비슷한 조직들이 이에 고무되어 형성되었다. 성숙의 심도 있는 과정이 발생한 것도 이러한 회의와 평의회였고, (여전히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많은 이들을 포함하여) 구체제의 당과 이데올로기에 따르는 사람들과 혁명을 그 논리적 결론 – 부르주아정당들이 지배하는 의회에 권력을 넘길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가 정치적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본질에서 불안정한 ‘이중 권력’ 상황을 해소하는 것까지 인정하는 이들 사이에 대립이 발생한 곳도 이곳이었다. 노동계급과 농민들에게 끔찍한 고난을 안겨준 전쟁을 무엇보다 우선 끝낼 필요가 있다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은 부르주아 정치인과 정당이 ‘국가 방어’ 정책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그만둘 수 없을 것을 점점 더 많은 다수가 의식하고 있음에 부합한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 분파들은 부르주아지의 노골적인 독재를 선호했는데, 이것이 소비에트의 억압을 의미할지라도 그러했다. ‘민주주의자들’의 공모와 1917년 8월의 코르닐로프(Kornilov)의 반란 시도, 그리고 연이어 발생한 임시 정부의 ‘질서 회복’ 시도는 많은 사람의 유일한 선택은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알게 했다.

     

    사실 10월 봉기는 이 모든 정치 과정의 정점이었다.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권력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는 요구 증가는 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와 다른 혁명적 그룹의 영향력 향상과 일치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기 조직화와 중앙 집중화의 진정한 발전을 반영하기도 했다. 봉기가, 특히 페트로그라드에서의 봉기가 최소한의 폭력을 사용한, 계획되고 조정된 행동이라는 사실, 그리고 봉기가 대부분 잘 조직된 노동자와 선원 분대가 수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봉기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 군사 혁명 위원회 – 의 전반적인 지휘 아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러시아소비에트 의회가 스스로 이 땅에서 최고의 권력을 차지했다는 선언을 재빠르게 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봉기가 하나의 쿠데타가 아니라 반대로, 맑스가 “봉기는 예술이다.”라고 표현한 것의 실천적인 진실을 러시아 노동 계급이 학습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데모, 거리 투쟁, 바리케이드 – 봉기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혁명은 이미 해결한 문제를 풀 필요가 없었다. 통치 기구의 장악은 상대적으로 작은 무장대의 도움으로 단일한 중앙의 지도를 받은 계획에 따라 완수될 수 있었다. 10월 거리의 고요함, 군중과 전투의 부재는 영향력 없는 소수의 음모,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볼셰비키의 모험이라는 소문에 대한 핑계거리를 적들에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볼셰비키는 ‘음모’의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을 향한 투쟁을 억제할 수 있었고, 그것은 그들이 작은 소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뒤, 노동자들의 거리와 병영에는 잘 통합되고, 조직되었으며, 훈련된 압도적인 다수가 있었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러시아 부르주아지 정부 전복에서 노동 계급은 다소 약하고, 분리되어 있으나, 경험이 부족한 자본가 계급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훨씬 더 엄청난 적이라는 것을 재빨리 보여주었다. 앞으로 혁명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노동 계급은 더욱더 정교하며, 고도로 조직된 국가와 이데올로기적 기관을 보유한 지배계급과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일이었다. 그런데도 10월 봉기는 이날까지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 성취한 가장 높은 지점 – 대규모로도 잘 조직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자각하며, 사회적 삶의 고삐를 쥘 수 있다는 그러한 능력의 표현이다. 이것은 맑스가 “전(前) 역사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한, 인류가 무의식적이고 사회적 힘의 영향 아래 있는 조건에서, 처음으로 인류가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만들 수 있게 될 조건이 될 것이라는 기대이다.

     

    계급 정당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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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기 직전, 레닌은 소비에트 내에서의 (심지어 당내에서의) 동요에 대해 점차 초조해졌고, 이제는 주요한 소비에트에서 유의미한 다수를 점하고 있는 볼셰비키 당의 이름으로 봉기를 수행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볼셰비키 당내 논쟁에서 제기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봉기는 명백히 소비에트를 책임지고 있는 기관, 이른바 노동 계급 전체 조직의 작업으로 비춰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정치권력의 장악이 당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출발점이었다. 우리는 다시 이 지점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2월에서 10월 사이, 폭풍처럼 성장한 계급의식이 진정으로 증명한 것은, 코뮤니스트당의 단호한 개입과 정치적인 리더십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계급과 계급의식은 절대 동질적일 수 없다. 보다 전투적이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대해 저항적인, 계급의 역사적 투쟁과 그 교훈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전체로서의 계급의 당장 의식 수준이 어떠하든, 계급에서 가장 선명한 인자들을 견고한 강령으로 다시 모이게 하는 것은 코뮤니스트 조직 고유의 과업이다. 이것은 코뮤니스트 조직이 오류가 없는 진실을 담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코뮤니스트 강령은 역사의 진정한 교훈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경험과 토론으로 계속 풍부해진다. 바로 러시아 혁명 시기, 선진 노동자들이 벌써 당의 왼쪽에 있었다고 레닌 자신이 기록했을 때처럼, 당이 계급의식의 새로운 전진에 뒤처질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배 계급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저항하는 싸움이 계급 전체 내부에서 발생하듯이, 코뮤니스트 조직 내부에 발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실제로 코뮤니스트 조직이 계급의식을 정교히 하는 필수적인 실험실의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순간이 2월 혁명의 여파에 잠겨있던 볼셰비키 당내에서도 있었다. 차르가 퇴위하고 뒤따랐던 민주주의의 행복감에 휩쓸려 가버린 러시아 내의 ‘옛 볼셰비키’의 다수는 임시정부와 참전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하는, 노골적인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제는 러시아 편에서는 방어적이고, 더 이상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볼셰비키는 전쟁에 대해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단호한 반대를 외쳐옴으로써 전체 국제주의 사회주의 운동의 전위가 될 수 있었는데, 위와 같은 입장은 이러한 볼셰비키의 지난 3년에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활력은 비록 위협받았을지라도 완전히 소진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닌은 4월에 러시아에 돌아와, 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분들의 급진화에 기대어, 부르주아 임시 정부에 대한 어떤 지원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어떤 참여도 거부하는 ‘4월 테제’를 공표함으로써 당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었고,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혁명 과정에서 필연적인 다음 단계, 세계 제국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세계 혁명의 신호탄이 될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을 준비하라고 호소했다. 레닌은 모험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참을성 있는 설명과 명확화를 위한 정치적인 전투를 통해, 이러한 입장을 위한 논쟁이 당내에 있어야 하고, 당이 소비에트 그리고 전체 계급 내에서 논쟁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우리가 소수인 한, 우리는 계속 비판하고 오류를 폭로하는 동시에, 전체 국가 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이전할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럼으로써 민중이 그들의 경험을 통해 실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4번째 테제)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러시아의 위기가 무르익고 노동자 농민 대중이 임시 정부의 거짓된 약속이 환상임을 깨우쳐 감에 따라, (이제 레닌의 입장으로 태도를 바꾼) 볼셰비키 당은 계급의식을 단호하게 가속할 수 있었다. 당의 인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수의 노동자와 선원들이 부르주아의 도발에 빠져, 러시아의 계급 다수가 준비 되지 못한 시기에 권력 쟁취를 밀어붙임으로써 위기에 처했던 7월에 특히 유의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일은 가장 선진화된 노동자들의 대량학살로 완전히 사기가 꺾이는 사건으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이 사건 후 2년이 채 지나기 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함정을 베를린 노동자들과 스파르타쿠스는 피하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구석에 숨지 않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면서 왜 지금 시기가 권력을 쟁취하기에 무르익지 않았는지 설명했는데, 이 입장은 이 당시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들의 즉각적인 여파로, 당은 독일 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지속적인 중상모략에 시달렸고, 정부의 직접적인 억압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당은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그리고 나라 전역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계급을 뒤로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행동을 지지하며 나설 필요가 있을 때, ‘바로 10월 봉기’를 위한 기반을 다지는 작업으로 이 일시적인 실패로부터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많은 노동자가 애국심이라는 열병에 빠져있던 전쟁 동안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논리적인 분석을 방어하고 계급의 원칙을 고수하는 이러한 역량은, 볼셰비키가 그들 자신만을 위한 권력을 획득하는 것 밖에 신경 쓰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음모론자 일당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만연한 비방이 거짓임을 보여주었다.


    혁명의 변질과 볼셰비키 당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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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패배의 전야, 처음에는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지지했던 혁명적 정치 세력 중 몇몇은 독일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주의 아나키스트들의 일부로, 이른 시기에 혁명 변질의 신호를 보았는데, 10월 혁명이 권력에 굶주린 볼셰비키의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믿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잘해봐야 ‘부르주아 혁명가들’이며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견이 그들 구성원 속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혁명가들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때 직면한 진짜 문제 –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와 그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압력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변질될 수 있고, 심지어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를 제거해버렸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스파르타쿠스 로자 룩셈부르크가 아직 감옥에 있었던 1918년 작성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팸플릿이라고 본다. 그녀는 거기서 지배 계급의 피에 굶주린 선전에 반대하는 볼셰비키와 완전한 연대를 표현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 기회주의자들이 1914년 전쟁에 찬성하고, 이제는 모든 힘을 다해 혁명에 반대하는 등 배신행위를 함으로써 몹시 실추되었던 국제 사회주의의 명예를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단호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회복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배 계급이 이미 이해하고 있듯이, 볼셰비키주의가 세계 혁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미래가 볼셰비키주의에 있다고 썼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라고 해서 볼셰비키가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녀가 발견한 그들의 정책들 중 매우 심각한 오류들– 소비에트와 다른 기관 내부의 정치 조직과 자유로운 토론을 축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경향, 반혁명 음모에 직면하여 ‘적색 테러’에 의존하는 모습, 이전 러시아 제국의 피지배 민중들을 위한 ‘민족적 자기 결정권’ 정책에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양보 – 에 대한 자신의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비판을 삼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오류가 러시아 혁명의 고립이라는 맥락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자본주의자들의 봉쇄와 침략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포위된 요새 형국으로 급격하게 축소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제 노동 계급, 특히 그 자체로 러시아 바깥에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이러한 포위 상태를 완화해 줄 수 있는 서유럽의 노동계급의 손에 달려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시작된 이러한 비판적 연대는 그 이후로 계속 다른 세력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는 룩셈부르크의 가장 신랄한 비판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는 동시에 러시아의 제헌 의회를 방어하는 등의 그녀가 저지른 오류를 거부할 수 있게 했다. 이탈리아 좌파는 패배의 전야에 사는 혁명가들의 책무란 실제, 생동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모든 교훈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임을 주장했다. 나머지 혁명 운동의 동지들처럼 볼셰비키 자신도 현실에서 검증된 적이 없었던 문제들, 이를테면 당과 이행기 국가 관계와 같은 문제들을 그 일이 일어나기에 앞서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 혁명의 실패 경험은 노동 계급의 경험이며, 그 주요한 교훈을 끌어내고 그럼으로 해서 미래 혁명 운동에서 똑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 계급과 그 정치적 조직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들에 대해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지만 (마지막의 읽을거리 목록을 보라.)여기서는 가장 의미 있는 것을 강조하기로 한다.

     

     1. 일국 사회주의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고립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 직면하여 오래 생존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한 국가에서 권력을 쟁취하였을 때, 그 모든 정치적 경제적 정책은 반드시 혁명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긴박한 필요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한 국가 또는 지역에 제한되면, 혁명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타락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2.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역할은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와 다른 대중 조직들의 책무이다. 영구적으로 선출되고 소환 가능한 방식의 평의회는 국민 투표의 다수를 차지한 정당이 몇 년 동안 정부 권력을 장악하는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방식과 양립할 수 없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정치권력을 차지함으로써, 계급의 대중 조직 내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주요 기능을 즉각적으로 희생한다. 볼셰비키가 1917년 이후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권력 쟁취 시도를 한 결과, 당은 소비에트를 대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이 점차 관료적 국가 기관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왔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신의 특권을 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이전 지배계급에 대항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폭력은 지배 계급의 국가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무엇보다도 사회관계를 목표로 해야 하며, 개인을 향해서는 안 된다. 그 폭력은 복수의 정신을 혐오한다. 그 폭력은 항상 노동자 평의회의 전체적인 통제 아래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 폭력은 프롤레타리아 도덕성의 기본 원칙 –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반드시 사람들 간의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창조라는 목적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이는 부르주아지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반대이다 – 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적색 테러 반대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비록 구 지배계급의 반혁명 음모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고, 그들의 억압을 목표로 하는 체카와 같은 특수한 조직의 건설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소비에트의 통제에서 벗어나 구사회 질서의 정신적, 물질적 타락에 오염되어갔다. 무엇보다도, 그 폭력은 곧 지배 계급에 대한 반대만이 아니라 내전 동안의 실제 경제적 비참함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볼셰비키 정책에 비판적인 아나키스트들과 같은 이들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조직들 등 노동계급 내의 다른 의견을 가진 분파들에까지 향해졌다. 이 과정의 절정은 1921년 크론슈타트 노동자 선원 진압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과 소비에트 부활의 깃발을 들었음에도 반혁명 분자들로 비난받았다. 이것은 ‘그 자신의 아이들을 파멸시킨 혁명’의 진정한 표현으로, 소비에트 권력이 내적으로 파괴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폭력이 러시아 노동계급에 주었던 심각한 파괴적 충격은 노동계급 내의 폭력 관계가 반드시, 언제나 거부해야 함을 강조한다.

     

    4. 적군에 대한 반대는 이행기 국가의 문제에 연결된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기관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들, 계층들을 재결합시키는 소비에트의 전체 네트워크, 내전을 수행하기 위한 체카와 적군과 같은 조직들 또한 탄생시켰다. 이 일반 국가 기관은 혁명으로 끔찍하게 어려운 조건에 처하자, 특히 프롤레타리아 조직들, 평의회, 공장 위원회, 노동자 민병대를 희생시킬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당을 흡수하고 무력화시키면서 자신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1922년 레닌이 비통하게 목격하였듯이, 그것은 운전사의 통제를 벗어난 차량과 같았다. 계급들이 존재하는 한 이행기 국가는 불가피하게 필요하지만, 국가 기관은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인 본질을 가질 수밖에 없고, 혁명계급 직속 기관의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러시아 혁명은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이행기 국가에 대한 독재를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5. 코뮤니즘이 국가와 임노동과 상품 생산에 근거한 자본주의 경제 철폐를 위한 운동이라면, 국가가 되었든 노동자 평의회 네트워크가 되었든, 그 속에서 자본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한다면 그것이 단계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오류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국가 자본주의든 ‘노동자 자주관리’(러시아에서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가 지지했던)든 그것들은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단계가 아니며, 오히려 자본의 보전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혁명이 전 지구를 차지하지 않은 시기에 진정한 코뮤니즘으로 하룻밤 만에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관계에 반대하는 의식적이고 조직한 투쟁의 산물이며, 오직 자기-조직화하고 정치적 주류가 된 프롤레타리아만이 이 투쟁을 이끌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취하는 즉각적인 경제적 수단이 코뮤니즘 목적과는 양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의 주류는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필연적인 단계라는 사상을 버릴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이것은, 심지어 스탈린주의 이전에도, 미래의 코뮤니스트 사회를 향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 계급에 대한 착취와 이들의 빈곤의 증가가 정당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여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국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또는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라고 여기게 되는 비극적이고 재앙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혁명의 진정한 패배,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의 승리는 내부에서부터, 10월의 연장선이라는 거짓 탈을 뒤집어쓴 채 일어났고, 우리가 여기서 보았듯이, 전 세계 노동 계급 내에서 가장 파괴적인 혼란을 낳았다. 이것이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과 같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객관적인 밑바탕이었다.


    1968-2011: 혁명의 유령이 여전히 자본주의 체계를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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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혁명의 패배에서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교훈이다. 그러나 새로운 혁명은 가능한가? 또다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경제적 위기, 전쟁과 자기 파괴의 위험, 환경의 파괴, 범죄의 급격한 증가, 그리고 사회관계의 도덕적 부패를 지적할 수 있고, 코뮤니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객관적인 필연이라고 확신을 하고 반복해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노동계급이 더욱 세계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상호의존성 증가, 그리고 의사소통 수단의 아찔한 발전을 지적할 수 있고, 자본주의 착취에 저항하여 공동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합이 객관적으로 가능함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객관적인 필연성과 가능성의 발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착취의 원천을 이해하는 착취당하는 계급의 주관적인 역량도 필요로 하는, 그 자신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모든 착취의 철폐를 위한 책무, 관점, 강령을 개발하는 역사상 최초의 혁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차원은 대부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숨겨져 있던 작은 무리에게서 발전하는데, 프롤레타리아의 대중 운동이 발전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도, 풍부해질 수도, 그리고 확장될 수도 없다.

     

    그러한 운동이 지난 50년 동안 세계적 무대에서 진실로 등장했다. 1917~23년의 거대한 높이의 혁명 물결 후 몇 십 년간의 반혁명이 뒤따랐는데, 혁명이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나라에서 가장 잔인한 얼굴을 드러냈다 – 바로 러시아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승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삼각형은 인민전선의 등장과 민주적 반파시즘으로 완전해졌다. 이러한 세력들의 결합은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마지막 발발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고(1936~7년의 스페인에서처럼), 프롤레타리아트를 2차 제국주의 세계 전쟁의 구렁텅이로 억지로 처넣었다. 그리고 전쟁 후 20년 동안, 계급투쟁은 경제 호황과 복지 국가의 안전망에 의해, 그뿐만 아니라 서구의 ‘민주주의’냐 동구의 ‘사회주의’냐 라는 새롭고 거짓된 선택으로 억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무렵이 되자, 전후 호황이 사라지고,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일상생활이 동과 서를 막론하고 가난과 위선임이 밝혀지고, 두 제국주의 블록 간의 대리전쟁이 베트남에서 아프리카까지 계속됨에 따라, 부모들이 겪었던 패배와 트라우마를 경험해 보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제기는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1968년 5~6월, 프랑스에서 거대한 대중 파업으로 터져 나왔고, 이 운동은 반혁명의 시대가 끝을 고하는, 모든 대륙에서 노동자 투쟁의 국제적 물결을 알리는 신호였다. 68년 5월 프랑스, 그 운동의 정점에서 거리 곳곳, 학교, 대학, 그리고 작업장에서, 존 리드(John Reed)가 1917년 10월 이전 러시아에서 관찰했던 바와 똑같은 깊이 있는 정치적 토론의 신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노동자와 학생들 가운데 중요한 소수파 사이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동요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혁명적 정치 조직의 새로운 세대였다.

     

    프랑스의 운동은 오직 이론적인 수준에서만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그 노골적인 위기의 출발 지점에 있었을 뿐이고, 지배 계급은 이미 그 후 수년 동안 사용할 많은 정치적인 속임수들, 그중 체제에 대한 가짜 ‘반대파’로서 좌익 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짓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 시작된 투쟁의 물결은 20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들의 절정은 아마도 1980년 폴란드의 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은 혁명기 노동자 평의회를 연상시키는 공장 간 파업 위원회와 같은 조직 형태를 탄생시킨 진정한 대중 파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우 앞선 수준의 자기 조직화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 가능성을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이미 코뮤니스트 체제 아래 살고 있으며, 그들의 가장 큰 희망은 의회와 ‘자유로운 노동조합’이 있는 서구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적 형식에 있다는 환상에 빠져 억눌려졌다. 서구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형식이 텅 비었음을 경험했지만, 그들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동구 블록에 있는 노동계급의 형제자매들이 직면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경제적 방어 수준의 투쟁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공격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의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의 노동계급의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진화에 매우 중요한 충격을 주었다. 1930년, 심각한 역사적 패배의 고통에 허우적대던 노동 계급이 노골적인 경제 위기 발발에 부딪혔을 때, 전쟁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의 추동을 막을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70년대와 80년대에는 세계 전쟁으로의 압력이 매우 강했음에도 국가 경제의 이해를 위해 노동계급이 자신을 희생하길 거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전쟁으로 진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전문가 부르주아지는 만약 3차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과거의 전쟁에서 교훈을 학습했기 때문이며, EU 또는 UN과 같은 국가 간 대립을 억제하는 국제 조직을 설립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또는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가장 확실한 세계 전쟁의 ‘억제력’이라고 주장한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진정한 억제력이라는 생각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이념 테두리 바깥에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세운 전쟁 경계는 의식적인 방식으로는 거의 확립되지 못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전쟁에 계급을 동원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 첫째이지만, 노동 계급이 세계 혁명이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적 대안을 개발하지 못하는 똑같은 무능력함에도 있다. 결과적으로 80년대 말 이후 우리는 그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회 진화의 교착 상태에서 살아왔다. 장기간 지속하고 풀리지 않는 경제적 위기의 배경에 대해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가 발끝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고 규탄한다. 두 제국주의 블록의 붕괴로 세계 전쟁의 전망은 더욱 멀어졌음에도, 자본주의 전쟁 추동은 더욱 혼란스럽지만, 그 전만큼이나 위험한 역동 속에서 계속 속도를 더해 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오랜 쇠퇴의 가장 최근 단계, 자본주의 해체의 단계는 노동계급에 새로운 어려움을 부가했다. ‘코뮤니즘의 죽음’의 선전은 지배계급이 자신 체제의 해체를 착취당하는 계급의 의식에 맞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가장 명백한 표현 중 하나이다. 전제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그들의 중심 테마는 ‘민주주의’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리고 지배계급이 열심히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신비화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똑같은 테마가 포퓰리즘과 반포퓰리즘의 싸움을 둘러싼 최근의 선전에서 나타났는데, 이 두 진영은 모두 자신을 ‘인민의 진정한 의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작업장에서 이러한 해체 단계에 있는 실질적 사회적 과정은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계속 작동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수준에서 여러 파벌과 패거리들로 파편화되는 경향, 모든 종류의 비이성적 공포와 광신의 등장, 희생양을 찾아다니는 경향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과정들을 깨닫는 데 필요한 국제적 역사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심각하게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 이후 전반적인 계급투쟁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록 참여자들이 종종 그들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한 등장을 관찰했다. 2006년 프랑스의 학생 운동은 공식적인 노동조합의 통제를 벗어났고, 그 운동이 고용된 노동자들의 영역에까지 퍼질 것이란 위협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고용 불안정이 급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법인 CPE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북아프리카,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에서의 저항의 발발 속에서 스페인의 ‘분노(indignados)’ 운동은 2006년의 프랑스의 학생 운동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과 자본주의 사회는 더는 전망이 없음에 대한 대중 토론을 자극함으로써 68년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 운동은 국제적인 성격을 매우 명확히 한 운동이었으며, 일부 작은 소수 가운데에서 ‘세계 혁명’ 슬로건이 보다 적절해졌던 운동이었다. 그리고 다시 2006년 운동과 같이, 그 운동이 채택한 조직 형태는 부르주아 사회의 공식적 기관들 바깥에 있는, 거리와 이웃에서의 대중 집회였다. 다른 말로, 약하지만 명백한 소비에트 형태 조직의 메아리였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은 짧았고, 수많은 약점과 혼란으로 고통 받았다. 그중에서도 민주주의와 시민권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시리자(Syriza, 급진좌파연합)와 포데모스(Podemos)와 같은 좌익 정당들에 잘 이용되었는데, 그들은 “집회, 좋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민주적인 삶을 재활성화하고, 의회와 선거에의 참여를 증가시키는 데 활용하자…”며 그 운동을 제한했다. 샌더스(Sanders)와 콜빈(Corbyn)은 똑같은 거짓을 팔고 다닌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있고, 때가 오면 과거 자신의 혁명적 전통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비록 지금까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혁명에 대한 훨씬 더 호의적인 전망 또한 숨겨주었다. 불안정한 고용과 만성적인 실업이 결합한 상황에 사는 젊은 프롤레타리아 세대들은 곧, 그들 스스로 코뮤니스트 선언이 이야기하듯 “노예로서의 안정을 보장 받지 못하는 노예의 비참함을 공유하는”, “족쇄 이외에 아무것도 잃을 것 없고, 얻어야 할 세계가 있는” 계급의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와 미래 상황은,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본질의 기초라고 밝힌,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코뮤니즘을 만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을 더욱 드러낸다.

     

    -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부르주아 사회에 소외된 계급

    - 급진적 족쇄와 보편적 고통으로 인해 급진적이고 보편적인 혁명으로 향하는 계급

    - 사회 다른 계층의 모든 고통에 집중되면서 그 계층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계급, 전 인류를 해방함으로써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계급

    - 사회를 연합의 원칙으로 조직할 수 있고, 보편적 상품화라는 자본주의 영역에 반대할 수 있는 연합된 계급

    - 인간의 몸을 상품과 임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자본주의 감옥으로부터 인간의 도덕성을 해방할 수 있는 계급


    10월 만세!

     

     계급투쟁 없는 자본주의는 있어도 10월 혁명의 기억은 진정 절대 지워질 수 없다. 1917년,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기로: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냐 아니면 문명의 파괴, 아마도 인류 자신의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2017년, 우리는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는 개선되거나, 친환경적이 되거나, 또는 인간의 얼굴을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전복은 오랫동안 지연되었으며, 우리 계급이 러시아, 그뿐만 아니라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그리고 100여 년 가량 모든 나머지 세계에서 경험했던, 그 엄청난 경험에서 모든 교훈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미래의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이 교훈들을 가능한 한 깊이, 그리고 폭넓게 공부하고, 정교히 하며, 널리 퍼뜨리는 것이 혁명적 소수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2017년 9월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번역┃국제코뮤니스트전망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201709/14380/manifesto-october-revolution-russia-1917

    icc1919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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