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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5호]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4
  • 조회 수: 3768, 2017-11-23 11:55:36(2017-11-23)
  •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4


    I. 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II.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III.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집중화와 규율

    IV. 볼셰비즘의 역사적 궤적

    V. 반-볼셰비즘의 두 운동: 개량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투쟁

    VI. 레닌이 한 것으로 주장되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의 핵심

    VII. 이탈리아의 문제에 대한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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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집중화와 규율 2

     

    당의 주요한 기반으로서의 이론

     

     우리가 인용한 레닌의 모든 글은 1948년 모스크바에서 편집한 ‘선집’의 이탈리아 번역판(2권, 550-612쪽)임을 돌이켜 볼 가치가 있다. 과거 40년 동안의 역사적 사건으로 그 당시 여러 언어로 번역된 원판 중 하나를 구하는 것은 어렵다. 독자들 또한 그것들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인용된 번역은 러시아 볼셰비키 당이 지켰던 조건에 관해 이야기한 후, 우리가 폭넓게 상술했던 진정한 규율과 중앙집중화 확립의 성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다른 한 편, 이 조건들은 즉시 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부수적인 테제에서 잠시 멈추고,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생각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의 제안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렇다면 만나서, 규율되고 중앙집중화된 완벽한 당을 건설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당조차도 역사의 결과물이며, 바로 그것이 당의 책무와 전략에 대한 모스크바에서의 모든 논쟁에서 좌익이 주요하게 관찰한 바이다) ‘그 조건들은 오직 지속적인 노력과 고된 경험을 통해 만들어 진다’ (심지어 악당들이 했던 짓들로부터도) ‘올바른 혁명 이론이 이러한 조건의 형성을 촉진한다. 이때 올바른 혁명 이론이란 교조가 아니라 진정한 대중의 실천적인 활동과 혁명적인 운동의 밀접한 연결에 의해서만 최종 형태를 갖춤을 가정하는 이론이다.’ (앞의 책, 515쪽)

    레닌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척하는 기회주의자들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잘 알려져 있다. “이론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론은 계속해서 변화를 겪으며, 일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완성된 후에야 반자본주의 혁명의 학설을 과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레닌이 그의 유명한 ‘좌익 공산주의’를 쓰기 시작했을 때 다뤄야 했던 문제들에 비춰보면, 그러한 해석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결과와 목적을 정반대로 이해하는데 기여한다. 사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확립하고자 했다. 러시아에서, 그리고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 안에서, 무언가 특수한(보편적이지 않은) 것이 일어났다. 그러나 앞으로 ‘민족적’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소비에트 권력과 공산당에 의한 폭력 봉기, 독재, 테러리즘, 그리고 민주적이고 헌법적인 의회의 해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역사는 보여줄 것이다. 레닌은 반대로,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사회민주주의적 방법을 영원히 파괴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특수성이 모든 나라에서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우익’ 배신자들은 -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 완전히 전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레닌은 무장된, 유혈 낭자한 투쟁을 회피하고, 적어도 당이 전제적으로 이견들을 침묵시키고, 모든 것을 집중시키고, 그리고 자유선거의 바닥에 내팽개쳐 밟는 일 없이 과거의 정권을 전복시키는(과거에 그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근대의 악당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주장하는 좌익의 유아적 행위자들을 우려했다.

    레닌은 혁명으로 가는 볼셰비키의 방법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을 두 가지 중요한 사실로 시작했다. 규율과 중앙집중화가 그것이다. 그는 그 후 그러한 성취를 위한 뚜렷한 특징들을 이해하려 하고, 그 특징들로 대중과의 유대, 역사적으로 구성된 혁명 운동을 향한 추진력, 당 전위의 열정적인 헌신, 올바른 전략과 전술을 지적했다. 그는 이 모든 것 없이는 진정한 규율과 중앙집중화는 없으며, 권력을 획득하였더라도 곧 잃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제 호의적인 환경을 위한 조건들을 선언하는데, 오랜 경험을 장시간에 걸쳐 발전시키고 정교히 하는 것이다. 이는 올바른 혁명 이론에 의해 쉽게 획득(이 표현은 약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오직 올바른 혁명 이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될 수 있다.

    레닌은 여기서 서술하기보다 보여주며, 철학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 사실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그리고 왜 볼셰비키 당이 유일하게 러시아에서 올바른 혁명 이론을 가질 수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규율과 중앙집중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30년 전 이론을 공표했다. 이에 기초하여 내가 많은 다른 사람들, 종국에는 기다리는 대중들의 믿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혁명을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은 교조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식을 받아들이고, 다른 것과 바꿀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당 이론은 교조다. 그러나 만약 공식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면, 그리고 대체한 당 이론이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래에는 알려질 사실로부터의 교훈 때문에 쉽게 바뀔 수 있는 무언가라면, 우리는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것이지 레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기회주의적 공식을 받아들이기보다 우리는 당 이론이 교조라는 것을 받아들이길 선호한다.

    교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적절한 의미에서 교조는 영적인 실체, 신이 선택한 사람, 예언자에 의해 진실로 규명된 것이다. 다른 이들은 진실로 규명된 말을 반복하고 존중할 뿐 진실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교조주의와도 다른 극단이다. 그리고 정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혁명적이었던, 교회가 봉건적 정권을 지지하던 역사적 단계에서, 어떤 교조주의도 극복했음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반교조주의는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르주아 철학은 종교적인 교조를 개인의 판단의 자유의 원칙으로 반박했다. 그러한 원칙에 따르면, 주체, 즉 전형적으로 소부르주아지인 개인은 아름답고, 이미 준비된, 그리고 서술된 교회의 작은 경전을 신부로부터 허락받기보다, 그 자신 스스로, 고전적인 ‘자유로운 사색가’의 뇌로 살아갈 수 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반대로 우리는, 진실의 성스러운 계시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계급 진실을 통해 계급에 반대하며, 계급 진실을 교조주의의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계급투쟁의 무기로 본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한 쪽 편에는 계급 진실과 함께하는 계급 정당이 있다. 이것은 정확히 우리가 ‘교조’에 대해 영원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한 것인 양 하는 부르주아 과학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의 계급 진실만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사회 과학을 성취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그 당만이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사상들을 끊어버림으로써 사회 과학을 성취하는 것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자본가들의 ‘문명’과 ‘문화’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학을 성취할 수 없다는 무능력이 전반적인 과학, 자연과 우주, 심지어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우리의 테제(그러나 우리는 맑스와 레닌의 저작들에서 보여줄 것이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과 부르주아지 세계의 결론이 판단될 수 있는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많은 자본과 기술의 경쟁을 하는 모방의 화신, 진정한 흐루쵸프주의자가 겁쟁이처럼 내전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누가 믿는가?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사회적 정치적 문제가 관계되는 한, 비난받는 교조에 기대고, 특히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자인 양 하며, 신의 재료, 그리고 ‘선험적인’ 도덕으로 교조를 되돌리려 하는 지이다.

     

    혁명이론의 고양

     

    우리가 살펴볼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볼셰비키 당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기보다 서유럽에 받아들여진 것으로서,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이며, 그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을 비롯한 모든 혁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이는 이중혁명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진실이다. 러시아 혁명이 유일한 승리의 예시 – 비록 그것이 유일한 싸움은 아니었을지라도 - 인 현시대의 혁명을 자세히 들여도 보았을 때 그러하다. 러시아의 이전 싸움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도 승리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1905년,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주역으로 나섰던 거대한 투쟁에서 그러했다.

    일반적으로는 러시아의 후진성은 부정적인 조건이었겠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는 유리한 조건으로 바뀐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레닌을 읽어봤자 소용없다. 아마도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얻을 것이다. 만약 전문적 위조자처럼 읽을 것이라면, 지옥에나 떨어져라. ‘1917년에서 1920년까지, 전례 없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볼셰비즘이 엄격한 중앙집중화를 이루고, 철의 규율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변증법적 연쇄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러시아의 몇몇 역사적 특수성들 때문이다’(앞의 책, 515쪽)

    그러나 러시아의 특수성들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로 구성된다. 짜리즘의 존재로 인해, 추방된 혁명가들이 서유럽에서 형성된, 책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투쟁하는 대중들 속에서 맑스주의를 접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19세기의 혁명이 이러한 진정한 사회 투쟁의 역사적 단계에 도달하게 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그렇다면 레닌이 글을 쓰고 있었을 때인 1920년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1871년, 또는 맑스가 그 윤곽을 잡았을 때인 1850년에 이미 맑스주의 혁명 ‘이론’은 완벽했다고 말이다.

    ‘다른 한 편, 1903년, 맑스주의 이론의 견고한 토대 위에 볼셰비즘이 나타났다. 19세기 전반의 세계 경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의 혁명적인 생각들에 대한 탐색, 동요, 오류, 그리고 실망의 경험에 의해 이 혁명 이론이 옳고, 유일하게 그러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약 반세기 - 거의 40년에서 90년에 이르는 동안, 가장 야만적이고 반동적인 짜리즘에 의해 억압됐던 러시아의 진보적인 생각들은 올바른 혁명 이론을 열망하고, 극도의 근면함과 철저함으로 유럽과 미국의 이 영역에서의 모든 ‘글’을 뒤졌다. 러시아는 반세기 동안 겪은 비할 데 없는 고통과 희생, 혁명적 무용, 놀랄 만한 에너지로 탐색, 연구, 실질적인 실험, 실망, 입증, 유럽의 경험과의 비교에 헌신하였고, 이러한 격렬한 몸부림을 통해 유일하게 옳은 혁명 이론인 맑스주의를 성취했다. 짜리즘으로 인한 정치적인 이주 덕에 혁명 러시아는 19세기 후 반세기 동안 국제적으로 풍부한 네트워크를 가질 수 있었고,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세계 혁명 운동 이론과 형식에 대한 탁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앞의 책, 515쪽)

    우리는 이 구절의 근본적인 어구에 의존하려는 유혹에 저항했다. 독자들은 혁명 이론을 영원히 공고히 하는데 충분한 경험은 대중의 거대한 투쟁을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이미 19세기의 혁명을 통해 주어졌으며, 19세기의 후반에 와서는 이미 결정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심지어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조차 수백만의 민중의 결합이었으며, 그 경험은 1848년 이후 변하지 않은 교의를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레닌과 맑스의 10개의 문구를 인용할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의 유리한 특수성이란, 처음부터 반봉건적 반전제적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대중들이 어쩔 수 없이 행동해야 했다는 데 있었다. 그 후 비(非)맑스주의 당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실망(이탈리아 좌파는 특히 1918년에 레닌이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즘, 그리고 공장 평의회주의자를 다룬 ‘다른 학파에 대한 비판’을 읽기 전에 몇 번이고 개입하였다)과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패배를 안겨주었다. 셋째로, 그것은 우리의 가증스러운 적들이 실없는 말로 지껄이듯 아시아적인, 몽골적인, 코사크적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국제적인 환경의 문제였다. 학파, 교육 배경, 무엇보다 혁명의 유혈 낭자한 전투, 이 모든 것은 민족적인 것도 아니었고 러시아적이거나, 독일적이거나, 영국적이거나, 프랑스적이거나, 이탈리아적인 것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레닌의 말을 빌리면 세계적인 것이었다.

    모든 글은 ‘사회주의 국가’의 형성이라는 비참한 공식으로서의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전형적이지만 비할 데 없는 데모, 공산주의 혁명의 보편적인 역동성의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의 위대함을 보여주려 한다.

     

    이론과 실천

     

    여기서 레닌의 글은 볼셰비키 당 설립의 기초가 된 문서가 러시아 또는 특정 지방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유럽, 그리고 세계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세계적 차원에서 유일하게 옳은 이론인 맑스주의와 같은 이론의 확산이 짜리즘의 박해로 인한 혁명가들의 ‘탈주’의 덕을 보았음을 보여주었다. 1900년대 전후, 다른 대륙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러시아의 망명자들, 정치적인 입장으로 인해 추방되거나 이주한 이들의 진정한 그룹들이 있었다. 그들은 해외 당의 선진 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 당의 활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쿨리쇼프(Kuliscioff), 발라바노프(Balabanoff)를 비롯한 이들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의 충돌은 이 그룹들에게는 끊임없이, 그리고 매우 생생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국가들 내의 정치투쟁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 후 레닌은, (이론을 서유럽과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에서 러시아에서 서유럽과 세계로 확산시킨다는 의미에서:역자 주) 지금까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을 이전의 것에 보완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 이론을 뽑아내었지만, 그 유명한 ‘전술’에서 자신의 선생을 뛰어넘어 그 자신만의 전술적인 경험을 획득하였고 이는 여전히 부르주아지의 지배 아래 있던 국가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었다.

    과도한 단순화나 도식화에 빠지지 않고, 역사적으로는 서로를 살찌우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혁명이 세계적인 승리를 하는데 실패하게 했던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을 좀 더 추적해보자.

    러시아 운동의 독특한 특징은 전제정치의 생존, 내부적 공격에 대한 그들의 저항, 그리고 러시아 외부로부터의 혁명적 전위의 유입을 통해 서유럽의 혁명적 생각들을 재빠르게, 그리고 대량으로 깊이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었다.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경험을 만만치 않게 빠른 속도로 축적할 수 있었던 이 특수성의 실질적인 원인은 유럽의 마지막 농촌으로서 더욱 명백하게 반봉건적, 반절대주의적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자유대혁명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던 원인과 동일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럽에서 생각했을 때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것은 터키뿐이었지만, 비록 그 수도가 유럽이었다고는 해도 러시아는 아시아적 국가였다.

    그러므로 보통은 정치적인 '민주' 혁명이 러시아에서 곧 터져 나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통적 왕조의 양보라는 불완전한 틀로, 의회 유형의 헌법을 갖추는 데에서 끝날 수는 없으리라고 기대되었다.

    오랜 시간 모든 사회주의자는 그런 혁명은, 그리고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두 혁명이 연속적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것은, 비교하자면 그 19세기 혁명 당시의 유럽의 존재했었던 국가들보다 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발달했을 때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사실 그들은 러시아의 짜르 권력이 프롤레타리아를 적대하는 진정한 유럽 경찰이라고 보았고, 러시아의 자유 혁명은 러시아에서 국한되지 않고 전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발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맑스주의자들이 두 계급 혁명이 하나가 되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은 1848년 독일에서 완전히 이론화되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레닌은 여기서 역사적인 전략의 그러한 '계획'이 성공적이었을 때뿐만 아니라(그는 오직 호의적인 역사적 예시만을 설명한다), 그 결과가 패배였다 할지라도 교훈이 가득하다는 것을 지적하려 했다. 그는 1905년 러시아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을 1848년의 대부분의 중서부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패배뿐만 아니라 1871년 파리 꼬뮨의 패배를 포함한 모든 프롤레타리아 패배에 적용할 수 있음은 명백하다. 맑스와 레닌 모두 노동자 혁명의 원칙과 전략, 전술의 원칙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1871년 파리 꼬뮨으로부터 끌어내었다. 심지어 1871년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1830년, 그리고 1841년에 시도되었던 것들을 성취하고자 했다. 민주주의 혁명 세력이 전제 권력을 무너뜨리고 그 독자적 계급 승리를 쟁취한 것이 그것이다.

    종종 반복되고 보편적으로 알려졌지만 언제나 유용한 위의 문헌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우리는 볼셰비키의 성공 조건에 대한 레닌의 문구를 읽을 수 있다.

     

    레닌 사상의 구축

     

    '다른 한 편, 볼셰비즘은 이론의 견고한 바탕 위에 있었고' (그가 맑스주의를 언급할 때, '견고하다' 함은 변하지 않는 형태, 어떤 식으로든 변형할 수 있거나 탄력성 있는 것이 아니게 된 것으로 정의한다. 이때 탄력성은 기회주의자들의 세련된 표현이자 레닌을 비방하는 표현이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을 정도의 풍부한 경험으로 가득한 15년(1903-17)의 실천적 역사의 시간을 경험했다. 이 15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는 혁명 비슷한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합법적, 비합법적, 평화적, 폭풍처럼 몰아치는, 비공개적, 공개적, 지역 써클, 대중 운동, 의회주의, 테러 형태 등 다른 형태들의 운동이 빠르고 다양하게 연속해서 일어났다. 어떤 나라에서도 짧은 시간 동안에라도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의, 그렇게 집중되고 다양한 형태와 방법의 투쟁과 그 그림자를 경험한 적 없었다. 그 투쟁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짜르라는 멍에의 심각함으로 인해, 예외적인 빠르기로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인 경험들의 '최근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었던 투쟁이었다. (앞의 책, 515-6쪽)

    레닌 사상의 구축은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기반에는 다음 두 가지 공헌점을 꼽는다. 서유럽인들은 러시아에 이론을 제공하였고, 러시아는 '실험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이론이 옳고, 견고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15년간 모든 계급의 거대한 대중들이 참여했던 사회적 격변기의 15년간의 경험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독재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공헌은 우리 맑스주의 이론이 옳은 것임을 증명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그 이론을 시험했다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당, 전략과 전술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해 준, 패배로부터의 변증법적 교훈과 처음으로 승리한 사회적이고 계급적인 전쟁이었다는 점에도 있다.

    이론은 승리한 후에야 설립된다고 이야기할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다. 그러한 모든 이전의 이론들은 불확실하고,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레닌에게서 벗어난 이들에게 왜 그들은 의회와 민주주의 기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장 봉기, 독재, 그리고 테러가 특유의 전술적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나라에서 원칙과 강령의 유효하고, 필수적인 시금석이라는 이론을 버렸는지 물어야만 한다.

    레닌이 그 유명한 문장, 이론이 교조가 아니라는 것을 썼을 때, 그는 이론이 1917년 10월 이전에는 없었고, 이후에 스탈린과 흐루쵸프의 멋대로 이론이라고 하는 그것이 이론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레닌은 오직 이론은 (예외적으로 신성이 있는 이들이나 선택된 이들에 의해 증명된 문장에 기초한 교조처럼) 저자, 또는 명석한 지도자의 발견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거대한 대중들의 커다란 역사적 운동들로부터의 교훈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그리고 그 후에서야 비로소 만들어지며, 이러한 교훈은 오직 오랜 계급과 학파의 편견 밖에서 학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류 역사상 처음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부르주아지에 의한 혁명은 수동적이라기보다 능동적인 운동의 형태였고, 거대한 대중들의 추동력이었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아마도 일부 은행가들과 산업가들을 제외하면, 그 당시의 모든 '경제 활동가들'이 참여해 싸웠다. 농노들, 마을 사람들, 학생들, 지식인들, 시인들, 초기 공장 노동자들 등 모두가 혁명적 전쟁의 구성원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과 농업에서 이미 탄생하고 있었으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새로 나타난 지배 계급에 대한 첫 번째 공격도 테스트했고, 극단적인 전위 그룹이었음에도 바베프와 뷰오나로티의 공산주의를 따랐다.

    맑스의 발견은 혁명은 그것이 스스로 이론화된 방식으로 이론화되지 않고, 부르주아 혁명 내에서 수많은 대중의 투쟁의 역사적 경험과 역사적 행위들의 물결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론화된다는 명제에 기반을 둔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원칙은 부르주아 혁명의 원칙의 건설과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세워지는데, 그에 반대하여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의도가 있었든 1789년 혁명의 계몽주의자 선구자들은 그들의 원칙을 소개했을 때 전 인류의 해방의 원칙으로 소개했었고, 그들은 그들의 계급의 본질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의 중요한 열쇠를 가진 첫 번째 계급이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 거대하고 세계적인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 태생 때문에, 그리고 이른 투쟁 단계에서 첫 번째 테스트에서 수행하였으나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자신의 계급 때문이 아니라 착취자의 계급을 위해 공성추처럼 수행한 투쟁들 때문에 그 빛나는 길을 닦지 않았다면, 우리의 몇 세기나 오래된 역사의 건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수히 반복할 것처럼, 맑스와 레닌을 없애고 그들의 뛰어난 저작들을 어리석은 음모의 미신에 종속시키길 누가 원할 것인가? 그러나 레닌 안에서, 그리고 레닌에게 이론은 견고한 덩어리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제1 인터내셔널이 19세기 첫 반세기에 일어난 인류의 투쟁 파도로부터 획득한 교훈 위에 이론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순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단지 도적들이었을 뿐이며, 계급에 속해있지도 않았다. 그러한 교훈들 덕분에 레닌과 그의 당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인류의 가장 영광스러운 사회적 드라마, 10월 러시아 혁명을 묘사할 수 있었다.

     

    전술과 역사

     

    당의 원칙, 강령은 우리 투쟁의 목표를 설립할 뿐만 아니라 그 발전 과정에서 경험해야만 할 근본적인 단계들을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국가에 대한 무장봉기, 권력과 행정 기관에 대한 파괴, 민주주의적 의회의 처리, 프롤레타리아 독재, 결과적인 사회에서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노동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 각 단계에서 정당의 주요 기능 등에 대한 원칙과 강령은 주춧돌이다. 이것들은 공산주의 구조의 근본적인 사회적 성격이라는 측면들의 일부이다. 부르주아 구조의 기능들은 혁명으로 완전히 뿌리뽑히고 계급이 없고 국가 없는 사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계들을 거치기 위해서는 당과 프롤레타리아트는 올바른 수단을 취해야 한다. 혁명적 단계 이전에는 평화로운 선전과 여전히 비무장 호소(그리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부르주아 사회의 기관들 이를테면 의회 등에 참가)는 용인되며 대규모 고용의 수단과 방법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수단의 사용은 강령의 단계와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당, 정세, 경향에 대한 논쟁과 같이 절대 끝나지 않는 논쟁은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심지어 종종 같은 당 안에서도 발생했는데, 달성해야 할 목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언제나 신중하게 수단을 선택하는 데 의존하는 잘못에 빠졌다. 모든 개량주의와 기회주의가 그러했다.

    베른슈타인은 여기,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 몸 바친 레닌에 반대하여,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모든 것이라는 공식을 세웠다. 일견 그러한 공식은 그냥 냉소적이고 마키아벨리주의 같이 보인다. 모든 수단은 옳지만, 최종적 목표에 관여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것은 미래가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회주의는 곧 그 정체가 밝혀지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다. 언제나 목적과 최종적 목표에 대해 불가지론적임에도 여러 가지 수단의 목록을 만들고 그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 :어떤 것은 좋은 것, 어떤 것은 나쁜 것. 원칙에 대한 질문은 강령이 관계되어 있는 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전술적 선택으로 소개된다. 레닌은 누군가 기뻐할 만한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레닌은 도적들을 완전히 밝히고 어떻게 배신자들이 반혁명에 어울리는 원칙들에 봉사하는 수단을 선택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레닌 이전의 개량주의자들은 언제나 더 천천히 진행하길 원하는 이들이었다. 레닌에 의해, 그리고 우리에 의해 그의 마지막 추종자들은 반동분자, 부르주아 권력을 회복하려 하는 보수로 불리게 되었다.

    전술들 사이의 구분은 오늘날 모스크바의 흔적을 따르는 모든 국가의 정당들에 의해서도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평화적인 선전은 되고, 무장 투쟁은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하지 않아야할 것. 민주주의는 되고 독재는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하지 않아야할 것. 선거와 헌법은 되고, 의회 해산은 (언제나) 오늘날도, 내일도, 앞으로도 하지 않아야할 것.

    레닌은 여기서 그의 긴 목록의 안티테제를 이야기하는데, 15년은 – 네 번째 장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듯이 10개의 당과 더 많은 그 보조 당들과 함께 - 모든 '수단들'이 사용되었고, 검증되었다. 페이비안 경건주의자들부터 역동적 공격에까지. 그는 확실하게 더 이야기한다. 대부분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볼셰비키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고. 당은 15년 동안 180년의 역사를 경험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한 달이 1년으로 여겨진다'고 까지 이야기할 것이다)

    국제 공산주의의 전술의 병기창에 관한 연구에 대한 레닌 저작의 핵심은 원칙적으로 폐기될 역사적 단계는 있으나, 전술적인 수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좌파만이 40년이 지나 그러한 안티테제를 축적하고 평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서유럽의 '최신의 사상‘

     

    연속하는 두 문장에서, 레닌은 두 번, 러시아에서 이미 언급한 밀물과 썰물과 같은 흐름에서 미국과 유럽의 '최신의 사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표현을 했다.

    우리는 레닌이 일등급 논객이자 풍자에 능한 작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기로 그에게 닥친 논쟁의 파도는 몇 년 동안 기각되거나 영원히 노출되었는데 주요한 주장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가 후진적(근대적 표현으로 불황인 지역)이라는 주장. 당신들은 침묵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 당신들은 기껏해야 우리의 과거 위대한 민주주의와 자유 혁명을 시작하고 재생산할 자유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운동에 관해서는 활동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는 주장. 우리는 우선 진보적이고 발전한 선진국의 경험을 기다려야만 하고(이들은 모두 우리가 그때나 오늘날이나 경제, 사회, 기술, 그리고 과학에서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반세기 전에 다 해 버린 자본주의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멍청이들이라고 경멸해 마지않는 저능한 표현들이다. 그리고 나머지에 대해 오직 억압과 굴욕만을 퍼뜨릴 뿐이다) 그러고 나서야 성숙한 나라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로 가는지 그 길을 배울 수 있을 것(우리에게는 이미 그들의 타락에 역겨워할 뿐이다)이며 당신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이에 고개를 숙이고 모방하라는 주장.

    우리 적들의 맨얼굴은 그들이 맑스주의를 이러한 혁명의 위계와 순차성이라는 거짓된 주장을 보여주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서 그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수십 년 동안 없애고 싶었던 평범한 즉자주의자이며, 원칙을 거래하는 군중들에 속한 이들이다.

    이는 훌륭한 관념론자인 젊은 그람시의 창의성과 관련 있는데, 그는 레닌이 맑스주의의 규칙을 위반했다는 것에 매우 기뻐하였다. (경솔하게도 그조차 볼셰비키의 성공을 그런 식으로 보았다)

    레닌은 서유럽의 ‘최신의 사조'는 이미 러시아에 전해져 활용되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더 수업을 받을 필요가 있는 '문화주의자'는 더는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러시아가 전위가 되기 위해서 올바른 유물론자들이 있고, 모델에 대한 변증법적 입장이 있으며, 그의 지도로 우리는 이 글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레닌은 여기서 근대와 최근의 사건들에 따라 이론을 바꾸는 어리석은 즉자주의자 소부르주아의 아이디어처럼, 생각을 바꾸는 것에 양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볼셰비키는 이미 알고 있으며, 그들은 이미 성숙하며, 모든 나라의 그들의 추종자들, 좌익 맑스주의자들, 그리고 규범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용기 있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었다.

    소부르주아의 즉자주의적 생각의 오염은 (레닌에게는 유치증과 같은 것이었는데) 바로 가장 최근의 유행, 최근의 사조에 경도된 것이었다.

    우리가 다뤘던 그 이전의 몇 년은 라틴 유럽(이탈리아에서는 아르투로 라브리올라(Arturo Labriola), 오라노(Orano), 올리베티(Olivetti), 레온(Leone), 드암브리스(de Ambris) 등)으로 폭넓게 대표되는 소렐 학파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와, 그리고 개량주의와 부르주아의 노동총연맹에 반대하는 북아메리카의 I.W.W.의 노동조합 운동은 스스로 가장 최근 유행의 담지자를 자처했다. 그 당시에 그것은 최신의 사조로 여겨졌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그 학파의 슬로건이 개량주의자들의 것에 비해 아무리 매력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일의 좌익 사회민주주의(맑스와 엥겔스의 제안에 따라 그 이름은 혁명적 계급 정당 때문에 폐기된 것인데)의 모델을 따랐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소렐주의자들이 대부분 붕괴하고 있을 즈음) 그들은 그 세기의 초반, 뛰어난 맑스주의자였던 카우츠키에 가까웠다.

    Last word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즉자주의자들에 따르면 유치한 외견을 하는데, 이는 그들의 전술적 수단을 강령적 토대의 위치에 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든 급진적 부르주아지처럼 그들은 그 가슴에서부터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이며 진화론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속에서는 역사에서 이미 발생한 ‘새로운 과정’들의 목록을 늘어놓는다. 그 행태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혁명으로 정치적인 소모임이 발생했고, 이는 당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음모론자들의 작은 모임에서, 자랑스럽게도 독일에서 거대한 선거 의회 정당이 되었고(그들은 매우 일관적이고 혁명적인 엥겔스의 탓으로 비난한다!) 평화롭게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정당의 형태가 필수불가결하게도 타락하여 우경화했고, 조직의 경제적인 형태일 뿐인 노동조합으로 이동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선거를 총파업과 직접 행동 - 당의 중재 없이 모든 계급의 당으로 구성된(맑스의 뛰어난 공식에 따르면) 투쟁 - 으로 교체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후의 정당은 프롤레타리아트에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는 그러한 역사적이고 거짓으로 혁명적인 거대한 잘못을 두 가지 이유로 회피했다. (첫째로) 그들은 소렐주의자들이 그 근본적인 교리에서 공격하려고 했었던 원래의 전통적 맑스주의와 연결점이 있었으며, (둘째로) 러시아는 소부르주아지의 태도의 비일관성을 허무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주의자들, 그리고 대중추수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이 여기서 상기하는 것처럼 선행하는 이데올로기의 투쟁과정(레닌의 개념에서 실천하는 대중들이 미래에 개입하기 이전의, 대조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단계)에서 볼셰비키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경제주의자’, ‘합법적 맑스주의자’와 ‘청산주의자’들과 싸웠었다. 이러한 이들은 독일의 라쌀레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오류에 의견을 수렴했는데, 정치 투쟁과 당이 모두 거대한 짜르 국가 구조에 직면하여 청산되어야 하고, 반-짜르 혁명에 관심이 없는 산업 노동자들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경제 투쟁이 폭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문장에서처럼, 원칙과 역사는 볼셰비키에 올바른 혁명적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은 모든 형태, 작은 그룹이든 거대한 군중이든, 노동조합이든 의회의 업무든, 심지어 반혁명적 두마 안에서도, 비밀스러운 음모와 폭동과 같은 총파업의 형태를 취하고 내용을 채웠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원칙적 태도를 고수하였다. 국가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국가가 얼마나 봉건적인지, 또는 이미 부르주아적인지에 대해 외면하지 않았고, 당의 형태에 대해 부차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총파업이 혁명적인 만큼 총파업에 있어서 경제적 파업에서 정치적 파업으로 가는 과정은 더는 없으며, 총파업은 노동조합 독자적으로 대표되기보다 노동조합과 혁명정당으로 대표되었다. 또한, 만약 대중들과 산업 노동자 계급이 주인으로서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당을 가질 수 없었다면 대중들의 사회적 투쟁 스스로 권력에 대한 역사적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좌파

     

    역사적인 상황의 영향으로 인해 이탈리아 사회당 좌파는 러시아인들의 상황과 넓은 의미에서 유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레닌이 걱정한 즉자주의-유치주의의 영향에 저항하여 방어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를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었다거나 능률적인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찾는다.

    1905년 즈음 이탈리아는 노동조합 그룹과 어떤 주목할 만한 발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투쟁에서 사라져 간 경향들을 제외하면 사회주의 운동 경향은 명확하게 두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개량주의 그룹과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다. 후자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일관적이게도 결국 당에서 떨어져 나와 이탈리아 노동조합(Unione Sindicale Italiana)에서의 그들의 활동에 집중했고, 민족을 넘어선 네트워크 없이, 비-선거주의, 비-의회주의뿐만 아니라 비-당 기관이 되겠다는 그들의 주장처럼 그들의 정치적인 본질을 잡다하게 숨긴 '생디칼리스트 그룹' 안에 조직되었다. 그들이 이러한 불가지론을 펼친다고 해서 특정 영역에서 선거 경험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행정 선거에서 특정 집단과 연대를 맺기까지 했다.

    다른 한 편, 당은 더욱더 우경화되었고 공개적인 개량주의자들은 이전의 프랑스의 예처럼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하는 당시 '현실적 개혁주의자'로 불렸던 이들에게까지 기대었다. 이탈리아의 개량주의자들은 거기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 지도자들은 당의 의회 그룹과 경제적 기관들의 다수로 구성된 총노동연맹(Confederazione Generale del Lavoro)을 압도했고, 최소주의 전략을 선택하고 공개적 투쟁과 파업을 경멸하였다.

    명백하게 결정적인 투쟁, 중상모략적이고 난폭한 논쟁에 개입한 위에서 언급한 두 경향이, 반대로 많은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음이 이탈리아의 당내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는 그제야 명백하게 드러났다. 산업과 농업 모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측면이 사악한 민족 부르주아지에 의해 이용되어 온 것이다.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처럼 이탈리아 맑스주의자들은 당과 계급의 협력과 노동조합과 계급투쟁을 대립시키는 것과 같은 잘못된 안티테제를 피했다. 노동조합의 조직적 형식은 할 수 있는 어떤 다른 행위들보다도 계급투쟁과 혁명적 행동으로부터 더한 이탈이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의회주의 개량주의자들이 노동조합 네트워크의 기반 위에 생존하고, 노동조합은 대신 부르주아 내각의 관료제적 네트워크 내에서 정치 변호사들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주의는 계급간의 타협이라는 병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해결방법은 조직적 네트워크에서 어떤 것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량주의에 대한 승리는 소렐주의자, 생리칼리스트 노동조합(Unions Sindacale)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의 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 전의 이탈리아 사람으로 확실히 지성과 문화적 역량이 부족하지 않은 (그리고 이후에도 독재 공식에 대해 공포에 질리지 않았던) 안토니오 그라지아데이(Antonio Graziadei)는 그 당시에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순을 하나의 용어로 이론화하였다. 개량주의 생디칼리즘.

    다른 한 편, 공식은 영국에서 노동조합으로 주로 구성된 노동당의 운동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의회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정부의 행동을 망설임 없이 하는 것이 그들의 업무였다.

    조직적 형태라는 점에서 모든 순수한 노동 운동 조직은 계급의 합작으로 타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가장 훌륭한 맑스 경향을 예외로 했을 때 또 다른 한 가지 지점은 구원은 다른 즉자주의적 형태 - 공장 평의회 - 를 고안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스로 레닌주의와 10월 혁명의 꽃인 채 하는 신질서주의(ordinovism)의 관점은 원래 모든 이탈리아의 평의회의 체계를 자본주의 제조업 회사들의 구조에 ‘즉자적으로’ 상응하도록 짜고, 또한 그것을 개량주의 총노동연맹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사회당이 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은 옳았지만 이들은 혁명적 정당을 건설하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으레 새로운 과정에 대한 새로운 요리법인 것처럼 평의회 운동은 당의 또 다른 하나의 대용물이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그러나 불사의 환상이여!

    10월 혁명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맑스주의에 대해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고 레닌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평의회(소비에트)를 똑같은 ‘특유의 발명품’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레닌의 글을 읽어보면, 또는 아무것도 아닌 단어나 페이지를 읽기보다 10월 혁명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탈리아 좌파가 반세기 동안 그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왔던 테제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권력을 쟁취하는 무장봉기 투쟁이 정치적인 만큼, 계급 혁명의 근본적인 형태는 정당이다. 정당의 형태를 거부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극단적인’ 생디칼리스트의 실패라는 ‘서유럽의 경험’이 잘 보여주듯이, 개량주의자들이 이끄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보이콧은 실수이다. 새로운 형태로써 공장 평의회를 위해 노동조합의 형태를 폐기하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한 실수이다. 레닌은 소비에트(공개적인 정치 기관으로써, 즉자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생산에 연관된 시스템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형태로 이해한다면)를 정당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실수라고까지 레닌은 설명한다. 나아가,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 라는 문구를 매우 조심스럽게 내세웠는데, 소비에트가 멘셰비키와 대충추수주의자들 다수로 구성될 때에는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레닌은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조직적, 헌법적 방식도 그 자체로 혁명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소비에트는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가 그들의 손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고,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들의 선전 선동의 내용이 모든 언어적 관용어와 별개로 실제로 모든 권력을 공산당에게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표리부동한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에서 독특한 명확성으로 인식되는 이전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917년 7월, 소비에트는 대부분 기회주의자이었고, 레닌은 혁명을 억제했다. 10월이 되자, 상황이 무르익었고, 소비에트는 좌경화했다. 이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기반으로 해서 모든 선출된 제헌 의회를 싹 쓸어버리는 것이 가능했고, 레닌은 당의 중앙 위원회 자체에 반대(모든 형식주의자이자 속물인 이들은 당과 그 합법적 위계에 반대한 것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하여 행동의 시작을 호소하고, 조금이라도 이를 늦추려는 사람은 누구든 거칠게도 배신자라고 불렀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우리는 전쟁 이전 맑스주의 좌파가 개량주의자와 생디칼리스트라는 두 가지 방법이 이론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감지했고, 혁명 정당을 위한 옳은 태도를 보였음을 상기할 것이다. 전쟁 이전에는 그러한 공식은 부족하지만, 오직 당선된 비타협 자들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는데, 전쟁 직전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1914-18) 이탈리아 당을 서유럽의 거대한 정당들의 비열한 종말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전쟁 전 이탈리아 의회의 좌파는 스스로 의회주의 정치에서 계급적 타협을 거부하도록 제한하지 않았고, 또한 국가의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개량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주주의적 국가의 평화로운 정복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나키스트-소렐주의자들은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주아 국가 조직의 파괴를 원한다는 점에서 옳음에도 그들은 봉기 후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가 필연성이나 전술 때문에 요구되지 않았음에도 1903년 볼셰비키에게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코뮤니즘)로 전환하는 올바른 기대에 경제적 결정주의를 어떻게 올바르게 적용시킬 것인지, 직접적이고 군사적인 의미에서 ‘즉각적인’ 정치적 측면, 러시아에서 매우 후진적이고 이탈리아에서는 반근대적이며,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근대적인, 모든 과정의 기능으로서의, 경제적 변형에 관련된 복잡한 사회적 발전.

    이것이 ‘좌익 공산주의’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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