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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6호]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 로자 룩셈부르크
  • 조회 수: 4575, 2018-01-31 18:35:07(2018-01-31)
  •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

     

     

    <편집자 주> 노동조합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참고할만한 글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주었던 <독일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계급투쟁 방해 활동>울 소개한다. 이 글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작인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에 실려 있다.

     

    사회민주당이 보여준 태도의 또 다른 한 측면은 당쟁중지, 즉 전쟁 기간 계급투쟁의 중지를 받아들인 점이다. 8월 4일 제국의회에 제시된 원내분파의 선언 그 자체는 이미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최초의 행위였다. 그 선언의 내부적인 표현 수위는 제국 정부와 부르주아 정당 대표자들과 사전에 합의되어 있었다. 8월 4일의 엄숙한 행위는 이미 비밀리에 준비된, 국민들과 외국에 내보인 애국주의적 연극이었다. 그 안에서 사회민주당은 이미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른 참가자들 곁에서 연기했다.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전쟁차관을 승인함으로써 노동자운동의 모든 주요 요구들에 구호를 제공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당장 모든 임금투쟁을 중지하였고 이를 당쟁중지라는 애국적 의무와 분명하게 관련지으며 기업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했다.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항한 투쟁을 전쟁 기간 스스로 포기했다. 바로 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도시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보내 이들이 방해받지 않고 추수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사회민주당 여성운동 지도부는 공동의 ‘국민여성봉사’를 위해 부르주아 여성들과 동맹을 선언하여, 동원령 이래 국내에 남겨진 당 작업 역량이 사회민주당의 선동 대신 수프 배급과 상담 등의 국민구호 임무를 하도록 지휘했다. 사회주의자법i)이 있던 그 당시에 우리 당은 의회선거를 최대로 활용해서 사회민주당 언론에 대한 그 모든 탄압과 계엄 상태에도 자신의 견해를 널리 알리며 계몽하고 주장했었다. 지금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 보궐선거, 주의회와 지방의회선거에서 공식적으로 모든 선거운동, 말하자면 의회주의 계급투쟁의 의미에서 모든 선동과 계몽을 포기하고 선거를 단순한 부르주아적 내용, 즉 의석의 확보로 축소했고, 이 점에서 부르주아 정당들과 평화롭게 협력했다. 프로이센과 알자스-로렌 주의회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와 지방의회들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당쟁중지를 엄숙히 환기하며 예산안에 동의한 점은 전쟁 발발 이전 관행과 엄격한 단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껏 몇몇 예외를 제하면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국민단결원칙을 거창하게 독일민족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로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곧 그 당 언론은 은행에서 저금을 되찾는 것에 대해 경고했고, 그럼으로써 온 힘을 다해 국내 경제생활의 불안정화를 막고 저축금을 전쟁차관으로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당 언론은 프롤레타리아 부녀자들과 자녀들의 곤궁에 대해 그리고 국가의 불충분한 배급에 대해 전쟁터의 남편들에게 전하지 말도록 경고했고, 전사들에게 사랑스러운 가족의 행복을 서술하고 ‘지금까지 보장된 원조를 우호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안정적이고 고무적인 영향을 끼치도록’ 권했다.1) 그 당 언론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예에서 현대 노동자운동의 교육 사업을 전쟁 수행의 탁월한 보조수단이라 칭송했다.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는 곤란에 처했을 때 알아볼 수 있다. 이 오랜 격언은 이 순간 진실이 된다. 억눌리고 학대받고 난폭하게 취급당했던 사회민주당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향토방위에 나섰고, 프로이센-독일에서 종종 괴롭힘 당하던 독일 노동조합 중앙은 그들의 가장 좋은 재목들이 나라를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한목소리로 보고하고 있다. 일반 신문부류의 기업가 신문들도 이 사실을 보도하며 덧붙여,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완수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그리고 아마도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서 이들이 싸우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련된 노동조합원들이 ‘내려치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현대의 군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장군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3천 미터까지, 정확히는 2천 미터까지 ‘적중’시킬 수 있는 현대의 포탄 사격 때문에, 군대 병력을 가지런히 늘어선 행진 대열로 전진시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이전에 ‘분산’시켜야 하고, 이러한 분산은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의 정찰병과 대단한 규율과 시야의 명료함을 부대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이 전쟁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훈육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냉철하고 침착하게 숙고해 보면,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인들이 기적적인 용맹을 떨칠지언정 독일 노동조합원들이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직된 사람들은 국경 지역을 마치 자기 바지 주머니 속처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노조 간부는 외국어 능력도 갖추고 있다. 1866년 프로이센 군대의 전진이 선생들의 승리였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승리라 말할 수 있다.”(1914년 8월 18일 자 프랑크푸르트의『민중의 소리』)

     

    당의 이론지『새 시대』(1914년 9월 25일 자, 제32호)의 설명에 따르면,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가 중요한 이상, 모든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된다. 심지어 전쟁의 목적조차도. 그러니 군대 내에서 그리고 국민 내에서 모든 정당들, 계급들, 민족들의 차이도 당연히 부차적으로 된다.”ii) [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바로 그 이론지는 1914년 11월 27일 자 제8호의『인터내셔널의 한계』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대전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으로, 특히 서로 다른 민족진영으로 분열된다. 인터내셔널은 이것을 막을 수 없다. [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즉, 그것은 전쟁에서 효과적인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평화기구이다.”iii) 그 ‘위대한 역사적 임무’는 ‘평화를 위한 투쟁, 평화 시의 계급투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은 그렇게 사회민주당에 의해 1914년 8월 4일에, 그리고 미래에 있을 평화체결까지는 없다고 선언되었다. 크룹사의 대포가 벨기에에 첫 번째 천둥을 내리침과 더불어 독일은 계급연대와 사회조화의 기적의 나라로 둔갑해버렸다.

     

    어떻게 이 기적을 상상해야 할까? 알려져 있듯이, 계급투쟁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시기에 마음대로 그냥 특정 시기 동안에 중지시킬 수 있도록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사회민주당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계급사회의 기본적 산물로서 그것은 유럽에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부상했다. 사회민주당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투쟁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 자체가 계급투쟁의 여러 서로 다른 공간적 시간적 파편들 속에서 목적의식과 단결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쟁 발발과 함께 그 점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설마 사유재산, 자본주의적 착취, 계급지배가 없어졌단 말인가? 설마 가진 자들이 애국주의의 도취 속에서, 이제 전쟁을 앞에 놓고 그 기간 생산수단, 토지, 공장, 작업장을 공공의 소유로 내주고 상품의 단독 사용과 이익을 포기하며 모든 정치적 특권을 폐지하고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는 동안은 그 모든 것을 조국의 제단 앞에 희생하겠노라고 선언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러한 가정은 극히 씁쓸한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을 중지한다고 뒤이어 선언할 수 있을 논리적으로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 어떤 일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모든 사적 소유 관계, 착취, 계급지배, 그리고 다양한 프로이센-독일식의 정치적 권리 박탈도 그대로 유지된 채 있다.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구조에서 벨기에와 동프로이센에서의 대포의 천둥이 변화시킨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계급투쟁의 폐지는 그래서 완전히 일방적 조처였다. 노동계급의 ‘내부의 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애국적인 아량으로 노동계급을 이러한 적에게 전쟁 기간 투쟁 없이 내어주었다. 지배계급이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권으로 완전무장한 채 있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명령받았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모든 계급의 형제 결의의 기적, 계급조화의 기적은 이미 한번 경험되었다. 그것은 1848년 프랑스에서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재정 귀족과 부르주아지를 도대체 혼동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생각 속에는, 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기껏해야 입헌군주제의 결과 정도로 생각하는 공화주의적인 우직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그리고 지금까지 지배자들 편을 들었던 부르주아 분파들의 위선적인 문구들 속에서는 부르주아의 지배는 공화국의 도입과 더불어 폐지되었다. 모든 왕당파는 그때 공화파로 둔갑했고, 파리의 모든 백만장자는 노동자로 둔갑했다. 이렇게 상상된 계급 관계의 폐지에 해당하는 문구는 박애iv), 즉 일반적인 형제결연과 의형제였다. 계급적대를 이렇게 기분 좋게 추상해서 없애버리는 것, 서로 모순되는 계급 이해관계들을 감상적으로 상쇄해버리는 것, 계급투쟁 위로 꿈꾸듯이 날아올라 버리는 것, 박애, 이것이 2월 혁명의 원래 구호였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관대한 박애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공화국을 자신의 창조물로 여긴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이 부르주아사회 안에서 더 손쉽게 제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주는 임시정부의 모든 행위에 당연히 갈채를 보냈다. 파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코시디에르는 경찰 임무에 그들을 기꺼이 활용할 수 있었고, 루이 블랑은 일반 노동자와 장인 사이의 임금 격차도 없앨 수 있었다. 유럽의 눈앞에 공화국의 부르주아적 명예를 고이 유지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명예의 문제로 여겨졌다.”v)

     

    1848년 2월 그렇게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순진한 환상 속에서 계급투쟁을 중단했지만, 자신들의 혁명 행동을 통해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강제한 뒤 그랬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1914년 8월은 거꾸로 된 2월 혁명이었다. 즉, 공화국이 아니라 군사 왕정 아래에서, 반동에 대한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반동의 승리 후에,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아니라 계엄령과 언론자유의 질식 그리고 헌법철폐를 공포하면서 계급대립이 폐지된 것이다! 정부는 당쟁중지를 엄숙하게 선언했고 모든 정당으로부터 이를 성실히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 약속을 그대로 믿지 않고 명백한 군사독재의 수단을 통해서 이 ‘당쟁중지’를 확고히 했다.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이것마저도 아무런 항의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8월 4일 그리고 12월 2일에 있었던 원내분파의 제국의회 선언은 계엄령이라는 따귀에 반대하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와 전쟁차관과 더불어 계엄령도 잠자코 승인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조국 방어를 위해서 계엄령이, 민중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 군사독재가 필요함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쪽에서만 저항, 곤란 및 전쟁에 대항한 항의 행동이 기대될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계엄령은 바로 그 사회민주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의 동의하에 당쟁중지, 계급 적대의 폐지가 선언됨과 동시에 그 자체, 즉 사회민주당이 계엄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투쟁이 그 가장 첨예한 형태, 즉 군사독재의 형태로 선언되었다. 결연히 저항하다 패배한 최악의 상황에 맞았을 것, 즉 계엄령을 사회민주당은 스스로 항복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엄숙한 선언은 차관승인의 근거로 민족자결권vi)이라는 사회주의 원칙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독일민족의 “자결”의 첫 단계가 사회민주당에게 입힌 계엄령이라는 결박 조끼였다! 한 당에 이보다 더 큰 자기기만은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었다.


    당쟁중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 계급투쟁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사회민주당은 그 자체의 존재 기반을, 그 자체의 정치 기반을 부정했다. 이 당을 숨 쉬게 하는 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자기 삶의 원칙인 계급투쟁을 희생한 뒤 이제 전쟁 동안 그 당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계급투쟁을 부인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 스스로 활동적인 정치 당으로서, 노동자 정치의 대리인으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가장 중요한 무기, 즉 특히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이 전쟁을 비판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조국 방어”를 지배계급에 내맡기고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휘하에 제공하며 계엄령 아래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즉 노동계급에 대한 경찰 역할을 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또한 그의 태도를 통해, 원내분파의 선언에 따르면 지금 크룹의 대포가 그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독일의 자유 문제를 지금 이 전쟁의 지속기간보다 훨씬 더 장기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위험 속에 빠뜨렸다.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전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자유가 의미 있게 확대될 것이고, 전쟁 중에 노동계급이 보인 조국 사랑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부르주아적인 평등권이 제공되리라 전망했고, 많은 주장의 바탕에는 이러한 전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역사상 지금까지 정치적 권리들이 피지배계급에, 지배계급의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결코 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쟁발발 전에 엄숙하게 했던 약속마저도 지배계급이 그 뒤에 거만하게 깨어버린 예들이 역사에는 널려 있다. 사실, 사회민주당은 그것이 취한 태도를 통해 독일에서 장래의 정치 권리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에 가졌던 권리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공공 생활의 폐지가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몇 달 동안 그 어떤 투쟁도 없이,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사회민주당의 갈채2)를 받으며 용인된 방식은 현대사회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 영국에서는 전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지배하고, 프랑스에서도 언론은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완전히 재갈 물리지 않았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에서와 같이 여론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단순히 ‘거의 공식적이나 다름없는 견해’에 의해, 정부의 명령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도 반대파의 의견을 지워버리는 혐오스러운 검열의 붉은 펜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반대파 언론들이 정부가 제공한 완결된 기사들을 찍어내야 하고 어떤 기사들에서는 정부 당국이 ‘언론과 비밀리에 상의하여’ 불러주고 지시하는 특정한 견해들을 대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제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 자체에서도 1870년의 전쟁 동안에 언론이 지금 상태와 비슷한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 당시 언론은 아무 제한 없이 자유를 즐겼었다. 비스마르크가 왕성한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로 언론은 그 전쟁 사안을 주시하면서 부분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며 특히 전쟁목적과 합병문제 그리고 헌법 문제 등등에 대해서도 활기차게 의견투쟁을 했었다. 그리고 요한 야코비가 체포되자, 분노의 폭풍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고, 비스마르크 자신도 반동 세력의 그 뻔뻔스러운 범행을 하나의 중대한 실책으로 여기며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자신 옹호했다. 이것이 바로,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이 독일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지배적인 맹목적 애국자들과의 그 어떤 연합도 일절 거부한 뒤 독일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4백 2십 5만 명의 유권자를 거느린 애국적인 사회민주당, 당쟁중지라는 화합의 축제, 그리고 사회민주당 원내분파의 전쟁차관 동의, 이 모든 것이 있고 난 뒤, 성년의 그 어떤 한 민족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극심한 군사독재가 시행되었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독일에서 가능하게 된 것은, 즉 부르주아 언론뿐만 아니라 꽤 발전하고 영향력이 큰 사회민주당 언론의 아무런 투쟁도 없이 그럴듯한 저항의 시도조차 없이 감수된다는 이 사실은 독일의 자유 운명에 불운한 의미가 있다. 이는 그렇게 쉽게 아무런 저항 없이 정치적 자유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독일 사회가 자체 내부에 정치적 자유를 위한 어떤 기반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쟁 전 독일제국 내에 존재했던 하찮을 정도의 정치 권리들은, 거대하고 반복된 혁명투쟁의 결과로서 그런 권리들이 그러한 투쟁 전통을 통해 민족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프랑스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2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반혁명 이후 비스마르크 정책의 선물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일 헌법은 혁명의 펜대 안에서 성숙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 군사 왕정의 외교적인 게임 안에서, 이 왕정이 오늘날의 독일제국으로 증축되는 데 도움을 준 시멘트로서 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자유가 발전’하는 데 있어 위험은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자체에 있다. 특히 그런 위험은 독일 헌법의 반혁명적인 기원에 있다. 제국창립 이래 그 보잘것없는 ‘독일의 자유’에 대항해 끊임없이 조용한 전쟁을 치러 온 독일 사회의 반동적 권력 분파들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엘베강 동쪽의 융커체제, 대산업적 모함자들, 철저히 반동적인 중앙파, 독일 자유주의의 타락, 사적인 통치 그리고 이 모든 요소로부터 유래한 군사지배, 전쟁 직전에 독일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적 강경노선 등이다. 이것들이 바로 독일의 문화와 ‘자유의 발전’에 대한 진정한 위험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의 각각을 지금 전쟁이 강화하고 있다. 계엄령,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태도가 가장 극심하게 강화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교회의 묘지처럼 조용한 점에 대해 진짜 자유주의적인 핑계가 있긴 하다. 즉, 이는 단지 전쟁 진행 기간만 ‘잠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숙한 국민은 살아있는 사람이 숨쉬기를 포기할 수 없듯이 정치 권리와 공공의 삶을 ‘잠정적으로’라도 포기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전쟁 기간은 계엄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그런 국민은 그럼으로써, 정치 권리가 전혀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사회민주당이 오늘날 계엄 상태를 감내하며 동의한 것은, 무조건 전쟁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받아들인 것과 함께, 지배계급 반동들, 즉 헌법의 적들에게 강력하게 고무적 영향을 미친 그만큼 독일 헌법의 유일한 지주인 민중들의 기상을 약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당은 그와 동시에 전쟁 지속과 관련하여 그리고 평화체결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중단했다. 여기에서 그 자체의 공식적 해명을 내팽개친 셈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그 전쟁이 유리하게 진행되는 한 불가피한 논리적 귀결이기 마련인 모든 합병에 엄숙히 반대한 바로 그 당이 동시에 당쟁중지를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당 자체의 의지에 따라 민중과 여론을 동원할,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그래서 전쟁을 통제하고 평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모든 수단과 무기를 내어주었다. 당쟁중지를 통해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군국주의의 배후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그 군국주의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이외의 어떤 다른 이해관계에도 구애됨이 없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허용했다, 바로 합병을 모색하고 또 합병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억제되지 않은 내부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해방시켰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를 수용하고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결국 모든 합병에 대한 그것의 엄숙한 반대가 무력한 문구로 남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다른 하나, 즉 전쟁의 연장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익숙히 잘 알려진 도그마 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 있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놓여 있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준다. 즉, 전쟁에 반대한 우리의 저항은 우선 전쟁의 위험이 존재하는 동안만 요구되는 것이지,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역할은 끝나고, 이때는 오직 승리냐 패배냐만 문제라는, 즉 계급투쟁은 전쟁 기간 중지된다는 그 도그마 안에. 하지만 사실은 사회민주당의 정치에서 가장 큰 과업은 전쟁발발 뒤에 시작된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대회vii)에서 독일당 대표자들과 노조 대표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1912년 바젤회의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된 결정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신속한 종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 총력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책무이다.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민중을 일깨우는데 활용하고 이로써 자본주의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가속하는 것이 책무이다.”viii[강조 –R.L.]

     

    이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사회민주당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와 바젤회의의 계명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즉, 당은 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준수함으로써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막는, 그 전쟁으로 인해 대중이 동요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전쟁이 가져온 무질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전쟁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지속하도록, 전쟁의 희생자 수가 더 늘어나도록 했다. 제국의회 의원들이 종종 하는 말에 따르자면, 사회민주당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하든 그렇지 않든 전장에서 병사가 한 명이라도 덜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아니, 그런데 우리 당의 신문들이 전반적으로 대변한 견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 전쟁의 처참한 희생자들의 수를 줄일 수 있는 한 줄이기 위해 우리는 바로 이 ‘조국 방어’에 동참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행된 정책이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애국적’ 태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배후에서의 당쟁중지 덕분에야 비로소 이 제국주의 전쟁은 거리낌 없이 광포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내부적인 동요에 대한 두려움 궁핍 속의 민중 분노에 대한 두려움이 항시적인 악몽이었고 그렇게 해서 지배계급의 전쟁야욕을 묶어놓는 효과적인 고삐였다. 지금은 사회민주당이 두려워서 그 어떤 전쟁이라도 되도록 미루려 애쓴다고 한 뷜로프의 말은 유명하다. 로어바흐가 그의『전쟁과 독일정치』의 7쪽에서 쓴 것에 따르면, “근본적인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독일에 평화를 강요할 유일한 것은 가난한 자들의 굶주림이다.” 그는 분명히, 징후를 보이고 점점 더 뚜렷해져서 마침내 지배계급이 이를 참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굶주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전쟁의 탁월한 군인이자 이론가인 폰 베른하아디 장군이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지금의 전쟁에 대하여』라는 그의 대작 속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렇게 현대의 대규모 군대는 여러모로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밖에도 그 자체도 과소평가돼서는 안 될 위험 동인이다.

     

    그러한 종류의 군대의 메커니즘은 매우 위력적이고 복잡해서, 톱니바퀴들 전체가 대체로 충실하게 움직이고 강한 내적 동요가 더 넓은 범위에서 방지될 때만 작동하고 조정할 수 있게 유지된다. 그런데 변화가 많은 전쟁에서 그러한 종류의 현상들이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투가 명백하게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들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영향력을 갖는다면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하게 결집한 대중이 일단 지휘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곳에서는, 그들이 공포 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더 큰 범위에서 보급이 실패하고 부대 내에 불복종 정신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러한 대중은 적에 저항하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군율의 끈을 끊어버리고 작전 진행을 제 맘대로 교란함으로써 그리고 지도부에게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부과함으로써 그들 자체가 스스로 그리고 군 지도부에게 위험이 되어버린다.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그 국가의 인력과 재력을 극도로 요구하는 위험한 게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일단 발발하면, 그 전쟁을 신속히 종결지을 수 있고 전체 국민의 동원으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 엄청난 긴장을 재빨리 해소할 수 있을 지시들이 곳곳에서 내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강조 – 로자 룩셈부르크]

     

    이렇게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군 권위자들은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을 일종의 ‘위험한 게임’으로 보았고, 이 점이 오늘날의 권력자들이 전쟁을 책모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재빠른 종결을 생각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동인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모로 보아도 “엄청난 긴장”을 억누르는 작용을 한 사회민주당의 행태는 그러한 걱정거리를 없애버렸고 군사주의의 억제되지 않은 폭풍에 대항해 서 있던 유일한 댐을 부숴버렸다. 그래, 베른하아디나 그 어떤 부르주아 정치가도 꿈속에서도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어떤 것이 등장해야만 했다. 즉, 사회민주당 진영으로부터 인류학살 “감내하기”, 즉 계속하기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전 이래 전장을 뒤덮는 수천의 희생자들이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주>

     

    1) 1914년 10월 6일『함부르크의 메아리』에 재수록 된 뉘넨베르크 당 기관지의 기사를 참조

     

    2) 캠니츠의『민중의 목소리』는 1914년 10월 21일 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어쨌든 독일의 군사검열은 전반적으로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점잖은 편이다. 종종 그 배후에 전쟁에 대한 확고한 입장의 부족을 숨기고 있는, 검열에 반대한 아우성은 독일의 적들이 하는 거짓말, 즉 독일이 제2의 러시아라는 거짓말이 유포되는 것을 도울 뿐이다. 지금의 군사검열 아래에서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진정으로 믿는 자는 펜대를 놓고 침묵하라.”

    --------------------------------------

    i) Sozialistengesetz, 독일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입안되어 1878년부터 1890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법에 따라 노동조합, 노동자단체 및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등이 불법화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제국의회나 주의회 등에 선출될 수는 있었다.

     

    ii) K. Kautsky, “Wirkungen des Krieges”, in: Die Neue Zeit, 32. Jg.1913/14, Zweiter Band, S.975

     

    iii) K. Kautsky, “Die Internationalität und der Krieg,” in : Die Neue Zeit, 33.Jg.1914/15, Erster Band, S.248

     

    iv) fraternité

     

    v) Karl Marx,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s. Bd. 7, S.21/22.

     

    vi) Das Selbstbestimmungsrecht der Nationen

     

    vii) 1907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대회(Der Internationale Sozialistenkongress)가 열렸다.

     

    viii) Erste Beilage zum Periodischen Bulletin des Internationalen Sozialistischen Bureaus, Brüssel 1912, S.7

     

    번역 ┃ 국제코뮤니스트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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