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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혁명 100주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1 : 맑스주의를 위한 투쟁
  • 조회 수: 1399, 2018-02-22 18:45:01(2018-02-17)
    •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1


      혁명의 해 : 안톤 판네쿡과 유럽 코뮤니스트의 형성, 1917-19191)


      맑스주의를 위한 투쟁 : 안톤 판네쿡과 러시아 혁명


      1917~1919년 사이 안톤 판네쿡의 활동은 극적인 세계적 사건의 배경과 대비해야 한다. 1914년 전 유럽에서의 혁명은 결단한 소수집단의 헌신적인 교리와 꿈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까지 혁명적 분위기는 전 유럽을 휩쓸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판네쿡이 그의 생애 과거 20년을 헌신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와 같이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판네쿡은 혁명과정의 뉴스를 따라 추적하고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그 의미를 분석했다.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년 이전에 판네쿡과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실현하는 기구형식을 모호하고 일반화된 용어로 설명했었다.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토론했지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보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 판네쿡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미래 혁명의 경로에 대한 예후에서 판네쿡은 종전의 입장을 뒤집고 러시아가 “유사-맑스주의 교조주의의 형태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무르익지 않았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난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볼셰비즘에 대해 다른 비판자와 달리,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실제적 견해에 동조하였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확신은 그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수행함에 비타협적 헌신을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힘은 조직구조에 있지 않고, 공격적 전투력과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굶주림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린 그들의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성숙”은 “투쟁과 권력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숙”에 의해 상당 정도 결정된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판네쿡에게 볼셰비키의 투쟁은 유럽 전역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것에 주로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차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스스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위하여 : 브레멘 좌파와 독일 혁명


      1917년은 전쟁의 피로가 최고조에 오르자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격정의 해였다. 민중적 불만이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고조된 독일만큼 위기에 처한 나라는 없었다. 브레멘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발발이 혁명적 좌파의 상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이 나자, 브레멘 경찰은 보고서에서 “행동파 혁명적 좌파 소집단은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 혁명의 위험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영향의 가장 최초의 직접적인 표현은 1917년 3월 31일 나타났는데, 수천 명의 브레멘 부두 조선 노동자가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와 전쟁 지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고 시 중앙으로 행진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1917년 봄 동안 미래에 채택할 조직형식에 관한 브레멘 좌파들 내부의 토론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SPD(독일사민당)로부터 좌파의 축출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판네쿡의 관점에서 브레멘 좌파의 당과 노조 조직의 옛 형식은 새롭고 직접적인 계급도구가 기대되는 혁명적 투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린 새로운 조직 형식의 모델은 미국의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2)에 대부분 영감을 얻었다.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와 친숙하게 된 것은 첫째, 전쟁 전까지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를 편집한 함부르크 혁명적 좌파 지도자가 Fritz Wolffheim(후리츠 울프하임) 이었고, 두 번째는 함부르크 항에 독일어판 문헌을 배포한 미국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 선원의 활동 때문이었다.


      1917년 3월 Wolffheim(울프하임)은 당과 노조의 기능을 통합하는 새로운 “단일 조직”의 설립을 「Arbeiterpolitik」에 제청했다. 자본주의의 집중화되고 카르텔화되는 경향에 효과적으로 맞서는 방법은 자발적인 공장수준의 조직적 그물망 주위에 구조화된 지역적인 계급 운동밖에 없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견해는 그와 토론하기 위해 함부르크로 여행 온 Knief(크니프)3)에 의해 즉각 채택되었다.


      새로운 조직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그로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혁명적 기질은 여러 곳에서 보이게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파업투쟁은 주로 현장 활동가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참여로 나아갔다. 노조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맹아적 구조가 생겨났다.


      브레멘에서는 이러한 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주로 좌파에 의해 결정되었다. 10여 년 넘는 정치투쟁기간 동안 좌파는 1917~1919년의 투쟁에서 중추적 임무를 수행한 대규모 산업공장에서의 현장 전투파 조직을 발전시켰다.


      4월 파업으로 고무받고 ‘단일’ 조직형식의 기초를 희망하면서, 브레멘 좌파는 1917년 6월, 7월 또 다른 파업과 시위를 일으키는 데 역할을 하였다. 좌파에 대한 정부의 물리력이 동원되자 Knief는 체포를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판네쿡과 협력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베를린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새로운 혁명적 좌파 조직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7월까지 새로운 조직 결성을 제안하기 위하여 전 독일의 수많은 좌파집단으로부터 실행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러한 소집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대한 판네쿡과 브레멘 좌파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지도자당”이 아니고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건설의 필요성이었다.


      이러한 소집요구에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창립대회를 한다. 여기서 “국제”라는 말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발전될 제3인터”와 현존하는 찌머발트 좌파의 회원임을 밝히는 의미였다. 내부구조로 보면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혁명투쟁에 대한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믿음은 두 번째 자주적 파업이 1918년 1월에 일어나자 더욱 강화되었다. 이 사건은 1월 28일 베를린에서 40만 명의 금속노동자가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즉각 공장 대표가 선출되고 400명의 노동자평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는 요구가 ‘평화협상에서의 노동자 참여’였다. 며칠 사이에 파업은 백만이 넘는 노동자를 포괄했으며 그 시기까지 독일에서의 민중적 불만이 표현된 것 중 가장 큰 것이었다. 브레멘에서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수천 조선노동자의 파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파업은 부두에서 2주간의 군대점거로 진압되었다.


      이러한 파업은 분명히 독일노동계급 사이에 급진적 반전경향이 자리 잡고 전쟁 전 정치적 통일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노동계급 행동의 심각한 반발 없이 8개월이 지나갔지만, 경제조건과 군사상황은 꾸준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9월 초와 10월 초의 주요 패배를 뒤이은 군사상황의 악화는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국가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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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1918년 11월 4일 Kiel(키일)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되었고 독일 전역으로 눈사태처럼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혁명의 형식은 거의 그들의 예측과 같았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평의회(소비에트)가 조직 형식으로 평의회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독일노동자의 경험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의 주요세력이 된 SPD(독일사민당)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브레멘에서는 혁명이 수천 명 부두 및 조선노동자들의 파업으로 1918년 11월 4일 시작되었다. 그리고 Kiel(키일)의 혁명적 선원들은 지역 군대의 무장해제를 도착한 이틀 후 완수하였다. 같은 날 도시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선거가 부두와 공장에서 있었다. 평의회는 180명 노동자와 병사로 구성되었는데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회원이었다.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지부장인 Henke(헨케)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평의회의 첫 번째 행동은 기존 시를 해산하고 시청에 붉은 기를 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주요 세력이 된 공장과 부두에 지역 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전략적 입장을 요약하는 두 가지 주요 표어를 채택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가 그것이다.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독일 혁명의 직접적 참여자는 아니지만, 판네쿡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1월, 12월의 중요한 시기 동안 판네쿡의 상황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Arbeiter Politik(노동자 정치)에 정기적으로 실렸으며 사실 Knief를 포함한 다른 기고자들보다 더 많았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평가는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 그 임무의 조그만 부분만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판네쿡은 스스로 자랑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은 전체로서의 계급을 일으키는 평의회 틀 내에서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적극적 소수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판네쿡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기구가 아니라는 근거로 평의회에 비판 없이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다. 주요임무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면적 서곡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명확화와 의식의 도구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행동계획의 추적을 시도하면서 판네쿡은 전쟁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진정한 형식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로 전쟁 전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SPD(독일사민당)는 전쟁기간에 더욱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다. SPD(독일사민당)에 대해서는 덜 적대적이었지만, 판네쿡은 그것도 사회주의 변혁의 도구로서 거부했다. 판네쿡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열망 속에 있는 국가사회주의 유형은 “노예의 가장 최악의 형태”를 표현한다고 경고했다.


      혁명을 급진화하려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시도는 혁명 때문에 자유로운 몸이 된 후 11월 18일 브레멘으로 돌아온(뮤니히에서 1월 활동 때문에 체포된) Knief에 의해 고무되었다. 중앙 노동자평의회 모임에 예기치 않게 극적으로 나타난 그는 브레멘 좌파의 공격적 전투성을 사로잡는 말로 시작했다. “이 순간 중요한 문제는 권력의 전복이다.” 그는 브레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가 혁명적 기관이 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 주도의 시위 파업과 함께 11월 27일 시작되었다. 이틀 후 Knief는 중앙 노동자평의회 모임에서 일련의 요구를 제시하는 2만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다. 그 요구는 ①평의회 체제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확립 ②모든 비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제거 (사회애국주의를 포함한) ③노동자의 즉각적 무장과 부르주아지의 무장해제 ④Bürgerzeitung(시민신문)의 통제를 중앙 평의회로의 이전이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그 이름을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로 11월 23일 바꿨다. 이론사업에 Arbeiter Politik을 보완하기 위하여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폭넓은 전국, 지역 배포망을 갖게 된 그리고 독일 전역에 걸쳐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의 견해를 전파할 수 있는 일간 선동지 Der Kommunist(코뮤니스트)를 창간했다.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의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혁명 후 처음 몇 주는 브레멘에서 급진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앙 노동자평의회도 독일의 다른 시 정부가 당면한 문제에 부딪혔고 혼란스런 정치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시간 벌기에 급급했다. 옛 시 행정구조는 중앙 노동자평의회의 감독하에 기능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병사평의회로부터 축출됐지만, 군대의 저항은 적군의 구성을 방해했다. 평의회는 일상 업무에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이었지만 혁명 초기 몇 주간 독일 곳곳에서 일어난 평의회와 달리 행동보다는 분위기에 의존했다.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브레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데 추동력을 강화함으로써 11월의 질서정연한 혁명과정을 12월에는 평의회 역할의 보다 급진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12월 12일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는 하루 후에 풀어주려고 부르주아 인질을 체포했다. 12월 21일 평의회는 Bürgerzeitung을 접수하고 그를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넘겼다. 12월 24일 평의회는 국회의원 선거를 지지하지 않고 평의회체제 지지를 재확인했다. 5일 후에는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성원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힘겨루기의 첫 번째 시험은 이틀 후 75보병연대가 브레멘에 돌아올 때였다. Freikorps(자유군단)4)가 형성된다는 두려움으로 무장 노동자와 혁명군은 보병연대를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브레멘에서 일어났지만, 독일 혁명은 점차 두 적대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상반되는 표어, 즉 의회냐 평의회체계인가라는 상징 표현의 이러한 갈등은 독일 혁명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에 기반을 둔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SPD(독일사민당) 주도의 임시정부는 옛 정권의 기구와 동맹을 맺고 평의회 권력을 침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으며 혁명을 좌파에게 몰아가길 바랐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러한 세력의 연합은 노동조합주의를 정당화하고 평의회를 격하시키는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Stinnes-Legien(슈틴네스-레기엔) 협약5)(11월 15일)으로 제도화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독일 관료들의 권위를 보장한 Ebert-Groener 협정6)(11월 10일)이었다. 혁명의 미래 진로는 임시정부가 국가의 최종 정치형태를 결정하기 위하여 제헌의회에 개입할 준비를 했을 때 명확해졌다. 이것이 정부의 구조를 비프롤레타리아 사회계급의 수중에 들어가게 한다는 걸 깨달은 좌파는 평의회체제에만 기반을 둔 정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2월 16일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의 전국대회까지, 평의회 권력이 이름뿐 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25만 노동자와 병사가 평의회체제를 찬성하면서 베를린 거리에서 시위했지만, 대회를 주도한 SPD(독일사민당)는 그 결과가 예견된 결론임을 확신했다. 12월 19일 중요한 투표가 있었을 때, 대표들은 평의회 권력은 과도기적이고 따라서 미래 의회에 넘길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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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혼란스런 처음 몇 주간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스파르타쿠스그룹7) 사이의 단결 부족은 좌파를 무겁게 짓눌렀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특히 좌파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통을 겪었다. 사건의 속도가 순간순간 달라지고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2월 5일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그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했다. 이 시기 동안 칼 라덱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중재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파견자로 모스크바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코뮤니스트당(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되었다.


      공식적으로 KPD(독일코뮤니스트당)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벌어진 토론을 보면 독일 코뮤니스트의 두 흐름 사이의 전망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분화지점은 새로운 조직의 성격이었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새로운 당이 모든 코뮤니스트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판네쿡의 관점에 따라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 조직의 진정한 기반이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는 코뮤니스트가 기존 노조연맹에 참여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노동자평의회 틀 내에서 생동하는 “단일조직”에 의해 노조기능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다수의 유능한 스파르타쿠스 지역 지도자의 지지를 받았다. 심각한 논쟁을 피하고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문제와 관련 문제를 특별위원회에서 다룰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대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 지도부를 대신하여 Paul Levi(파울 레비)가 선동의 가능성을 근거로 참여를 정당화했다. 오토 륄레(Otto Ruhle)는 의회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진정한 임무라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때 로자 룩셈부르크나 칼 리프크네히트 모두 성원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으며 결국 참여 반대 안이 65대 23이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통과되었다.


      KPD(독일코뮤니스트당)의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에밀 아이크혼)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는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KPD(독일코뮤니스트당)는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가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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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하는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 배후에는 평의회와 공공모임에서 평의회 권력의 형식을 선언할 필요에 대하여 좌파에 의한 수 주간의 토론이 있었다. 맹장 수술에 이은 합병증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Knief가 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충고를 했지만 처음 결정된 전기는 되돌릴 수는 없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KPD(독일코뮤니스트당)가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는 이제 과거의 역사임을 선언한다. 이 시간부터 평의회가 지배한다.” 새로운 평의회공화국을 이끌기 위해 Henke(헨케)를 의장으로 하는 KPD(독일코뮤니스트당),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그리고 병사평의회 대표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평의회가 창설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사회주의혁명의 모델이라고 믿으면서, 평의회는 독일의 다른 지역에 혁명 활동을 조정하는 대표를 파견했다.


      평의회공화국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처음 3주간은 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시위와 사회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지만, 지역 조건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구조는 대체로 문서 상의 체제에 불과했다. 첫 번째 대결은 1월 14일 SPD(독일사민당)의 강권으로 일부 군부대가 군 무장해제 시도에 항의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들은 도시 주요지점을 장악하고 노동자들도 무장해제 시키려고 Weser(베저) 부두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 거리투쟁 이후 무기를 소지하는 타협안에 군인들이 동의하게 된다. 공화국의 존재가 순간적으로 안전했지만 어려움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KPD(독일코뮤니스트당)가 총파업을 벌였을 때 지방금융기관에 의한 신용보이콧이었다. 며칠 동안 간헐적 거리투쟁이 일어났다. 이 시점에서 공화국은 만족할만한 출구를 찾기 위하여 선거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1월 25일 SPD(독일사민당)의 내무장관인 Noske(노스케)는 중앙정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브레멘 봉기를 무력으로 분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그는 Freikorps(자유군단) 연대에게 브레멘으로 행진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도시 탈환의 전투는 2월 3일 시작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마지막 타격은 좌파의 주요 거점인 Weser 부두가 2월 5일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유혈의 패배 이후 평의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SPD(독일사민당) 지배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패배와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KPD(독일코뮤니스트당)와 브레멘 노동계급은 4월 2주간의 총파업을 포함한 저항을 1919년 동안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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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좌파의 명백한 패배는 제2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판네쿡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다. 1919년 1월 2일 비극적 사건을 놓고 판네쿡은 좌파의 패배가 혁명투쟁의 전 시기에서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에 의해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독일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전면적 검증을 하는 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와 기꺼움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이 독립파에서 분리할 때 노동자들은 상황을 더 잘 이해했지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회애국주의자와 같이 동일한 전제에 근거한 통찰력과 이해”를 독립파가 가졌다는 사실에 의해, 혁명적 실천과 관련이 없는 “혁명적 애국주의”의 죄를 지었다고 비난했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판네쿡의 실용주의적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전술로만 공격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판네쿡이 계속 강조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평의회의 의식고양 능력을 통하여 모든 형태의 군사력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판네쿡은 당이 조정과 선전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보았지만, 미래의 전략과 행동에 대한 중요한 토론은 평의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노동자는 혁명적 변혁에 필요한 “실천적 통찰력의 통일”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평의회의 새로운 요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위한 판네쿡의 공식은 본질에서 변하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코뮤니스트의 성장은 코뮤니스트 사상의 성장, 권력획득의 의지, 그리고 혁명을 위한 준비의 성장이다.”


      목적에서 패배하고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로 강화된 독일 좌파는 새로운 상황에서 그들의 입장을 새롭게 정립할 정치적 과제에 직면했다. KPD(독일코뮤니스트당)와 브레멘 좌파에게 1919년은 무엇보다 자기규정의 해였다. 1월 공격이 노동계급을 급진화 시키고 사회혁명을 이룩하는데 무능력을 드러냈지만, 그들의 패배는 독일에서 시민의 투쟁을 종식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의 나머지는 위기일발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기대상황과 생활조건의 악화에 의한 일반적인 불안과 산발적인 봉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뮈니히에서는 새로운 평의회 공화국이 선언되고 4월 3주간 권력을 장악했다.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군대가 함브르그, 라이프치히, 할레, 브룬스비크와 루르에 파견되었다. 베를린에서는 선원이 이끄는 총파업이 있었지만, 대량 처형으로 진압되었다. 1919년 동안 거의 5천 번의 파업이 독일 안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발전은 판네쿡이 주요 참여자였던 독일 코뮤니스트운동 내에서 전술논쟁의 시급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월, 2월 사건의 공동참여에도 불구하고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융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KPD(독일코뮤니스트당) 창당대회에서 두 집단을 갈라놓은 차이는 베를린에서의 KPD(독일코뮤니스트당) 제1차 전당대회(6월)에서 다시 나타났다. 갈등의 첫 번째 그림자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사망 이후 KPD(독일코뮤니스트당)의 지도자로 내정된 Paul Levi가 브레멘과 함브르그 조직의 규율부족을 공격할 때 드리워졌다. KPD(독일코뮤니스트당)의 패배에 좌파가 책임이 있고 당의 첫 번째 과업은 중앙집권화로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Levi는 보았다. 동시에 Levi는 KPD(독일코뮤니스트당)가 고립을 벗어나는 길은 좌파를 버리고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80만 성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브르그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평의회체제가 확립되면 당은 스스로 해소할 책임이 있다는 가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주제는 Levi 와 그들의 차이를 개관한 판네쿡의 계획에 요약되었고 1919년 8월 KPD(독일코뮤니스트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열띤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 당 대회 이후 레비는 좌익반대파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시작했다. 브레멘, 함브르그, 베를린에 강력한 거점이 있을 뿐 아니라 KPD(독일코뮤니스트당) 지역 지부에 사실상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비는 그 당시 베를린 감옥에 있었지만 Zentrale(제트랄레)의 입장의 이론적 정당화를 해온 칼 라덱의 도움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라덱은 볼셰비키의 결단성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중앙집권적인 당 조직의 지지자였다. 레비와 같이 라덱도 KPD(독일코뮤니스트당)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를 이기므로 그리고 기존하는 노조운동 내에 활동함으로써 고립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까지 10월 24일에 열릴 하이델베르그 당 대회가 힘겨루기의 결정적 검증이 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레비와 Zentrale는 반대파를 생디칼리스트로 비난하고 당 업무에 “가장 엄격한 중앙집권주의”를 요구하는 당 정책의 지침서를 준비했다. 이 지침서는 사실 최후통첩이었다. 왜냐하면, 이를 따르지 않으면 출당된다는 것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당 대회는 처음부터 레비에 의해 통제되었다. 대표 다수는 지명되었고 대회소집이 당규에 따른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절차도 토론이나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는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33대18로 지침서가 통과되자 레비는 반대표를 던진 대표를 출당시키려고 움직였다. 반대파의 주요 인물인 Wolftheim(울프쉐임)은 독일에 두 개의 코뮤니스트당이 있다고 선언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축출과 함께 독일 코뮤니스트 첫 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했다. 독일코뮤니스트의 두 흐름 사이의 차이는 전술에 대한 단순한 차이보다 더 깊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코뮤니즘 개념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노정 시켰다. 이러한 사건 이후 판네쿡은 다음 해 봄에 나타날 새로운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핵심역할을 할 독일 혁명의 실패를 이론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주>


      1. Gerber(거버)의 박사 학위 논문 「Anton Pannekoek and The Socialism of Worker's Self-Emancipation, 1873-1960」의 제9장 “Years of Revolution : Pannekoek and The Formation of European Communism, 1917-1919"를 각주와 인용문을 빼고 번역하였음.


      2. 1905년 조직된 미국 최초의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 전 노동자의 산업별 조직화, 자본주의 제도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확립을 위하여 결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反戰) 활동으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았다. 


      3. Johann Knief(요한 크니프) (1880-1919), teacher, member of the SPD from 1906, editor on the Bremer Bürgerzeitung from 1911 until 1916. He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Linksradikale’, and later of the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 and edited Arbeiterpolitik, where he worked with Radek. Knief, alias Peter Unruh, was imprisoned by the government for revolutionary activity in January 1918.


      4. 자유군단(Freikorps)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제대 군인 및 우익 장교들에 의해 독일에서 조직된 극우 의용병 단체로 주로 좌익 세력과 시가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지휘관은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구스타프 노스케였다. 이들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좌익 혁명 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을 괴멸시켰다. 자유군단은 전쟁 당시 자신들이 입던 군복과 철모,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예비역 및 현역 장교들이 지휘하였다. 나치 돌격대의 초기 지휘관들과 에른스트 룀도 자유군단 출신이었다. 이들 자유군단 구성원들은 자유군단이 해체되면서 기존 우익계 정당의 폭력 조직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 돌격대 역시 그들을 받아들였다.


      5.‘슈틴네스-레기엔 협약’ - 자유노동총연맹의 의장 레기엔(Carl Legien)이 제철 기업가인 슈틴네스(Hugo Stinnes)와 협정을 체결, 하루 8시간 노동일 제도를 도입하고 ‘황색 노조’(어용노조)에 대한 기업가들의 지원을 중단하는 등의 내용.


      6. 에베르트 당시 대통령과 육군 참모총장 빌헬름 그뢰너 장군 간에 맺어진 조약으로 군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지되도록 하되, SPD(독일사민당)정권은 군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협정.


      7.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혁명단체.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결성했다. 이들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고 전쟁 기간 중 계급 투쟁을 중지하려 한 사회민주당의 정책에 반대해 전쟁 반대와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이름은 1916년 1월부터 이들이 발행한 비합법 기관지 <스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스파르타쿠스서신)에서 비롯됐다. 1917년 결성된 독립사회민주당에 참가해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려 했다.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까지 전당 대회를 열어 독일코뮤니스트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단원들은 12월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주동해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소위 스파르타쿠스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경찰과 연계돼 있던 자유군단(Freikorps)에게 체포되어 살해됐다.


      8. 1918년 11/12월,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치”(독립사회민주당)냐 아니면 “의회주의”(독일사회민주당)냐 라는 대안을 놓고 진행된 논쟁이 노동자운동의 분열로 이어진다. 1919년 1월 5일 독립사회민주당은 독일사회민주당과의 공동행동에서 철수한다. 혁명 지도자들, 스파르타쿠스 연맹, 독립사회민주민당은 대중시위를 촉구한다.
      같은 날 베를린에서는 무장 노동자들이 주요 신문사 건물을 점거한다. 이 중 하나가 독일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Vorwärts/전진) 및 독일사회민주당 제국정당 학교가 자리한 “린덴하우스”(Lindenhaus)다. “포어베르츠”는 유난히도 다수파 독일사회민주당이 완고하게 견지하던  “함구와 질서”(Ruhe-und-Ordnung)의 노선을 선전했다.
      1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구스타브 노스케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반격의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위해서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간 황제의 군부를 불러 원조를 구한다. 특히 “포르베르츠” 건물을 둘러싼 전투가 치열했다. 심한 폭격을 받은 점거 노동자들은 결국 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백기를 들게 해서 적군 사령관에게 보낸다. 대표단의 목적은 '안전한 철수'를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명 협상 대표단은 인근 용기병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한 명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와 함께 돌려보내고, 나머지 5명은 학대를 받고 총살된다. 나중에 이 자리(베를린 메링광장)에서 나치즘이 일어난 것은 옛 세력(황제)과 결탁하고 혁명을 죽인 독일사회민주당의 원죄에 있다.



      *글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 연표


      1905년 러시아 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파업'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찜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 혁명 발생, 대대적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 말 독일코뮤니스트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 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코뮤니스트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 독일사민당 진압(로자 룩셈부르크 암살당함)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 이것이 발전해서 국제연맹 산하의 국제노동기구) ->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코뮤니스트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인터내셔널(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코뮤니스트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 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창립(헤르만 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노동자연합(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 노동자총연맹(AAUD) 창립(공장조직의 연대) 오토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공산주의 : 공산주의에서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코뮤니스트당(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로자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Einheitsorganisation) 유명무실화됨

    • 1927년 헤르만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 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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