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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혁명 100주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3 : 새로운 유형의 노동계급 조직 -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독일노동자총연맹(AAUD)
  • 조회 수: 12812, 2018-02-22 15:01:59(2018-02-22)
    •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3


      좌익 공산주의의 대안(1920-1927)

       

      공세기의 서유럽 맑시즘 : 암스테르담 사무국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설에 따라 유럽 맑시즘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브레멘 좌파는 코민테른의 가장 열성적 옹호자들이었지만,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 승리로 코민테른은 러시아의 주도 아래 결성되었다. 새로운 세계혁명운동의 성격에 대한 판네쿡과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1917 레닌 저작 중) 네덜란드와 브레멘 좌파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코민테른의 초기 몇 달 동안, 러시아와 서유럽 간 의사소통의 혼란으로 서유럽의 의미 있는 참가는 배제되었다. 서유럽을 참가시키는 문제는 처음 실제적인 수단을 통해 접근했는데, 즉 베를린에 서유럽 서기국(Secretariat)을, 암스테르담에 서유럽 사무국(Bureau)에 두도록 결정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을 조직하기 위해 레닌은 네덜란드 맑스주의자 럿거스(S. J. Rutgers)를 선택했다. 엔지니어였던 그는 1915년 미국으로 건너가 판네쿡의 사상을 미국 사회주의 운동에 전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는 전후 모스크바로 와서, 코민테른 창설 시 홀란트코뮤니스트당(CHP)을 대표했다. 럿거스(Rutgers)는 레닌으로부터 세 가지를 위임받았는데. 즉, ① 서유럽/미국의 다양한 코뮤니스트 그룹과의 관계를 구축할 것, ② 코뮤니스트 선전센터를 세울 것, ③ 국제대회를 조직할 것이었다. 그리고 코민테른 집행부는 럿거스(Rutgers)로 하여금 사무국을 판네쿡, 호르터, 홀스트(Roland Holst), 윈쿱(Wijnkoop), 라베스테즌(van Ravesteijn)으로 충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럿거스(Rutgers)의 임무는 CHP의 내부 분할 때문에 복잡해졌다. 판네쿡, 호르터, 홀스트는 사무국에 참여하는 데 동의했으나 윈쿱(Wijnkoop), 라베스테즌(van Ravesteijn)은 호르터와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최종 타협은 양 그룹이 럿거스(Rutgers)와 별개로 회합/상의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은 국제대회를 암스테르담에서 조직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면서 1920년 1월 활동 시작했다. 국제대회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코민테른 대회와 동급으로도 비추어졌다. 1920년 2월 개최된 국제대회는 사무국 활동의 중대 사건이었으며, 사실상 최초로 서유럽 인터내셔널로 복무하고자 했다. 국제대회에서는 네덜란드 대표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소한 12개국에서 참가하여 코민테른 창설 시보다 더 많은 대표가 참여했다.

     

    국제대회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고, 경찰에 일찍 해산되었지만, 그런데도 서유럽 코뮤니즘 개념의 특수성을 최초로 확정하였던 의미가 있었다. 국제대회에서 채택된 선언은 의회주의, 조합주의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조직화 원칙으로 노동자 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특히 중요했던 것은 판네쿡이 초안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였으며, 그것은 공개적으로 코민테른 정책에 도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판네쿡은 - 이때, 그는 거의 즉각적으로 사무국의 “정신적 리더”로 등장 - 노조운동에 대한 테제에서도 동일하게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구에서 노조는 단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에게 반하여 배치된, 자본주의적 권력 시스템의 기구”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노동자 운동은 “가능한 모든 힘”을 가지고 노조 관료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이는 기존 노조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실제적 과제는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독일의 “노동자연합(workers' unions)”과 같이 “새로운 정신에 추동된 새로운 조직들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의회주의, 노조운동에 대한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반감, 그리고 (코민테른에 소속된) 각 당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코민테른 지도력과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전망에서 주된 차이를 보여주었던 첫 공개적인 징후였다. 볼셰비키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심각한 차이점은 짐머발트 운동 시기까지 올라가지만, 양 당파의 차이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 얼버무려져 왔었다. 따라서 럿거스(Rutgers)가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CPH와 생디칼리스트와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 모든 혁명적 단위의 새로운 조직으로의 결집이라는 희망과 일관되게 - CHP의 긍정적 면모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몇 달 동안 판네쿡, 호르터, 홀스트 등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지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글들을 집필했다. 럿거스(Rutgers)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날 때, 레닌은 판네쿡으로 하여금 모스코바에서 코민테른을 위한 상근 이론가, 선전가로 일하게 할 것을 럿거스(Rutgers)에게 주문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처음에 볼셰비키와 코민테른 모두 의회주의 전술을 거부한다고 보고 그것을 당연시했다. 이 같은 가정은 번역된 레닌의 몇몇 저작에 기인한 것이었다. (특히, 판네쿡에 대한 찬사를 담은「국가와 혁명」, 코민테른 초기 문건 등). 그렇지만 볼셰비키 이론과 실천은, 혁명가들이 대중을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을 공격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를 허물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기간 강조해 왔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그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CHP 내 분파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무국의 모든 구성원은 사무국을 서유럽의 주 혁명센터로 만들려는 희망 아래 단결했다. 사무국의 일상적 권력을 쥐고 있었던 윈쿱(Wijnkoop), 라베스테즌(van Ravesteijn) 등은 “서구 코민테른”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 따라, 그 같은 단결 분위기에 동참했다. 사무국은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유럽 전역에서 혁명적인 좌파 경향을 강고히 하려는 시도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네덜란드 좌파 활동가들은 프랑스, 잉글랜드, 스위스, 벨기에 등지의 좌파세력과 긴밀한 연대를 구축했지만 가장 긴밀한 관계는 판네쿡과 유대를 맺고 있던 ‘독일 좌익 반대파’(German left opposition)와의 형성이었다. 독일 좌익 반대파에 대한 지원은 의회주의, 노조운동에 대한 사무국 테제에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판네쿡은 사무국 공식 출판물에서 반대파의 사례를 다루었다. 이 같은 일들로 사무국은 서유럽 서기국으로부터 지속적인 적대감을 사게 되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공격적인 전투성, 독립적 전망은 - 자체 하위 사무국으로 - 전미(全美) 임시 사무국을 조직화하려고 했을 때,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전미 사무국 지부는 미국 코뮤니스트 운동 내 분파적 대립으로 혼란을 거듭하여,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조직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더욱 대담한 행보는 사무국이 베를린 서기국을 격하시켰던 것인데 즉, 암스테르담 사무국은 베를린 서기국을 사무국의 한 부문으로 만들고 그 의무를 재할당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사무국은 모스크바에서 창설, 조직한 지부를 대담하게도 일격에 복속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바는,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스스로를 - 중앙권위(코민테른)의 도구가 아니라 - 미래 유럽 혁명을 위한 주() 혁명 센터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국의 독립적인 혁명적 전망은 많은 부분 서유럽에 특수한 코뮤니즘 개념화의 반영이었지만, 또한 그것은 암스테르담과 모스크바 사이의 소통 부재에 의해 크게 조장된 것이기도 했다. 사무국이 1920년 1월 활동을 시작한 이래 럿거스(Rutgers)가 정기적 소통 수단을 갖추게 되는 4월 말까지, 사무국-모스크바 간에는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없었다. 그렇지만, 소통수단을 갖추게 된 시점에 사무국의 정책과 활동은 모스크바에 잘 알려지게 되었고, 코민테른 지도부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곤혹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분열점은 사무국이 새롭게 형성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코민테른 지도부의 반응은 신속했고 단호했다. 4월 30일 모스크바 방송은 사무국을 폐쇄하고 그 기능을 베를린 서기국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한다. 그 결정은 협의와 호소의 기회 없이 내려진 것이었다. 이 조치로 서구 코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코뮤니스트 센터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새로운 유형의 노동계급 조직 :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독일노동자총연맹(A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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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서유럽에 특수한 혁명의 개념화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면, 독일 좌파 활동가들은 실천을 통해 직접 그것을 역설했다. 1918-20년 시기 동안 독일 노동자평의회의 자발적 창출은 전통적인 형태의 당과 노조 조직에 대한 반(反)관료주의적 대안을 개발하고자 했던 다양한 시도들로 특징되는 노동계급 동원화와 급진화라는 큰 과정의 단지 한 측면이었다.

     

    독일 노동운동 내에서 새로운 혁명적 산별노조운동은 공식적인 사회주의 이론 또는 실천에 거의 빚진 것 없이 발생하였다. 노동자평의회와 마찬가지로 그 운동은 전시에 출현하고 1918년 11월 이후 급속히 퍼졌던 공장위원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거의 전적으로 지역 공장 또는 작업장 조직에 기반을 두었던 산별노조운동은 상세한 이데올로기적 정의 없이 거의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지역 조직화는 대개 기존 노조에 대한 불만, 반(反)관료주의 추구 때문에 정의된다.

     

    이후 이데올로기적 분화과정에서 지역조직의 많은 부분은 점차 생디칼리즘을 그 모델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에 따라 1919년 후반 독일자유노동자연맹(FAUD : Free Workers' Union of Germany)를 형성하게 된다. 형성기 몇 달 동안 독일자유노동자연맹(FAUD)은 거의 20만 노동자를 규합했다. 그렇지만 다른 그룹들은 새로운 형태의 혁명적 공장조직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돌렸고, 그것을 전통적인 노동조합과 구별하여 “노동자연합(workers' union)”이라고 불렀다. “노동자연합”의 이론적 기초는 1917년부터 브레멘과 함부르크 좌파에 의해 형성된 “단일 조직” 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1919년 넓게 회람되었던 프리츠 울프하임(Fritz Wolffheim)의 “공장조직인가, 아니면 노조운동인가?”라는 소책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교화되고, 통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조운동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노동자연합”은 1918년에 출현했지만, 1919년 루르 탄광 노동자들의 거대한 비공식 파업 물결을 통해 대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부분적으로 IWW를 모델로 한 것이었지만, “노동자연합”은 코뮤니스트 운동과 협력할 의지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평의회 체계에 기초해 조직된 미래 국가상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생디칼주의적 공장조직과는 달랐다.

     

    “노동자연합(workers' union)”을 전국연맹으로 결집하는데 브레멘 좌파가 조직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국조직을 결성하는 첫 번째 단계는 1919년 브레멘 좌파가 그것을 노동자총연맹(General Worker's Union = Allgemeine Arbeiter Union = AAU)라는 이름으로 잠정적인 지위를 부여한 때인데, 기존 노조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구성요소, 반(反)혁명적 세력이 되었다는 판네쿡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브레멘 좌파는 연맹을 독일코뮤니스트당(KPD)1), 제3 인터내셔널과 동맹하는 “경제적 투쟁조직”으로 정의했다. 그 목적은 자본주의 파괴와 평의회 공화국 건설을 지향하는 공장 내 혁명적 선동을 조장하는 것: “노동자총연맹(AAU)은 평의회 체계의 도입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파괴를 위한 최선, 최고의 매개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연맹은 기업의 경계선을 따라 조직되었고, 기본단위는 공장 또는 작업장. 그리고 그것이 지방, 지역, 전국 네트워크로 묶이고, “하나의 대규모 노조”로 합쳐지는 것이다. 제안된 연맹은 전 계급적 투쟁수단으로 인식되었지만, 각 소속 단위는 최대한의 독립성과 전술선택에서의 자율성을 갖는다. 새로운 연맹을 결성하기 위해 2개의 노조 간부 전국대회를 1919년 가을 브레멘에서 개최. 그리고 그 대회에서 브레멘 그룹이 새로운 연맹의 결성을 조정하게 하고, 전국신문을 발행하게 했다.

     

    그 기간 동안 브레멘 산별노조운동의 활력은 지역 노동자총연맹(AAU)의 놀라운 성장에 의해 대변되었다. 브레멘 노동자총연맹(AAU)은 1919년 10월 공식 결성되었지만, 1919년 여름부터 비공식으로 존재하면서, 지속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판네쿡은 1920년 1월 혁명적 산별노조운동에 대해 지지를 보낸다. 판네쿡은 전통적 노조가 “대중에 반(反)한 지도자들의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자연합(workers' union)”은 강력한 혁명적 대안을 보여준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동시에 판네쿡은 새로운 조직이 오직 직접적인 혁명투쟁 시기에만 관료화 논리를 벗어날 수 있고 사실상 노조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공식적으로 독일노동자총연맹(General Worker's Union of Germany = Allgemeine Arbeiter Union Deutschlands = AAUD)을 결성하기 위한 창립대회는 1920년 2월 14~16일 개최되었다. 대회에 제출된 문건들은 운동의 기본 사명과 구조에 대해 주요한 대립을 드러냈다. ①운동의 한쪽은 함부르크 좌파인 울프하임(Wolffheim), 라우펜버그(Laufenberg) 등이 이끄는 이른바 ‘연맹주의자들(federalists)’로 생디칼리스트와 유사한 태도를 보이면서 독일노동자총연맹(AAUD)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장래 국가 조직”으로 제시하고, 각 단위의 완전한 자율성과 각 개인의 자기 결정 권한을 중시한다. ②운동의 또 다른 쪽은 브레멘과 베를린 그룹이 주도하는 “집중주의자들(centralists)”로 AAUD는 새로운 사회의 조직 형태가 아니며 그 역할은 선동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집중주의자들”은 AAUD가 “지역화된 생디칼주의자”들의 네트워크가 되어서는 안 되며, 평의회에 기초한 혁명의 촉매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적인 의견대립에도 불구하고 AAUD는 1920년 급성장했는데. 특히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인 독일자유노동자연맹(FAUD)으로부터의 대규모 구성원 유입은 가장 큰 성공의 원인이었다. AAUD는 창설 시 8만, 1921년 20만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자연합(workers' union)”은 독일 노동운동 내에 그 기원을 갖는 것이지만, 반관료주의적 대안을 개발하고자 하는 같은 시도가 독일 코뮤니스트운동 내에서도 이루어졌다.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 좌익 반대파를 레비(Levi)가 제명한 것은 독일코뮤니스트당(KPD)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와 당원 수가 급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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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6월 6일 독일 의회 선거를 위한 KPD의 포스터>


    축출된 좌익 반대파는 그 조직적 실천의 재정의라는 정치적 과제에 직면. 가장 긴박한 문제는 새로운 혁명당의 건설 여부, 그리고 건설한다면 새로운 정당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의 문제라고 보았다. 반대파 전국 대회에서 의견 대립이 있었다. 3가지 의견 그룹에는 ① 함부르크 그룹(울프하임, 라우펜버그 등 축출 전 주도세력) : 즉각적 새로운 정당 건설, ② 오토룰레(Otto Rühle) 주도 그룹 : 정당 없이, AAUD내에서 활동, ③ 다수 그룹(브레멘, 베를린 조직에 의해 주도) : 레비(Levi) 지도력에 대한 결연한 반대 투쟁으로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은 소생할 것으로 판단했는데 이 입장은 - 판네쿡도 공유하였던 것으로 - 레닌과 제3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울프하임, 라우펜버그는 “내셔널 볼셰비즘(national bolshevism)”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지만, 그 때문에 반대파 내에서 고립되었고, 중심세력은 브레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브레멘 좌파의 핵심역할은 1919년 11월 지역 회의에서 공식화되었고, 그것은 운동을 위한 소통 센터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후 브레멘 좌파는 공식적인 반대파 “정보국(information bureau)”을 창설했다.

     

    이 같은 사건들은 반대파의 근본적 지향에 대한「코뮤니스트(Der Kommunist)」지에 실린 장기간의 토론과 연속선상에 있었다. 판네쿡도 주요 논문을 발표했다. 판네쿡의 분석은 전후 유지하였던 입장과 완전히 일치했다. 좌파의 반의회주의를 이론적 전망에 첨가하면서, 판네쿡은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전략적 요구에 기반을 둔 실천적 필연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새로운 시대의 특징은 전후 객관적으로 혁명적 성격의 상황이며 대중의 수동성사이의 모순. 운동의 근본적 임무는 행동을 통해 노동계급을 동원화함으로써 그 수동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계급 양극화의 시기에 의회주의 전술에 복귀하는 것은 운동을 탈동원화하고, 그 궁극적 패배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주의 전술에 대한 판네쿡의 반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로서의 평의회 체계에 대한 그의 지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판네쿡은 의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외관만 띨 뿐, 자본가 주도권(헤게모니)의 주요 수단의 하나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와는 달리 노동자평의회는 통합적인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 체계에 전체 노동계급을 통일시키리라는 것이며, 혁명 전략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사회 재조직화의 근본문제는 더는 전통적인 “지도자 정치”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의회주의는 단지 “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정신적 권력”일 뿐이라고 보았다. 당 정책에 대한 의회주의의 결과는 자명한데 즉 대중의 자기-해방을 위한 투쟁은 오직 의회주의를 포기함으로써만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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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및 노동자총연맹(AAU)의 1920 선거 보이콧 운동 포스터 : 노동계급의 무기는 직접 행동! 대대적 투쟁!>


    레비(Levi)는 곧 판네쿡에 대응했다. 자본가의 공세라는 조건에서 의회주의 전술은 “가장 중요한 혁명 행동의 형태”라고 본 레비(Levi)는 반대파를 ‘모험주의’, ‘반란주의자’, ‘블랑키주의자’, ‘바쿠닌주의자’로 지칭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제1 인터내셔널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축출하려 했던 맑스와 대비시켰다.

     

    판네쿡은 또 다른 논문 “새로운 블랑키주의”를 통해 레비(Levi)의 비난을 반박했다. 역사적으로 혁명적 조건의 성숙, 대중의 수동성이라는 상황에서 혁명보다 손쉬운 길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 곧, 프루동주의, 블랑키주의. 전후 독일에서 노스케(Noske), 에베르트(Ebert)는 혁명적 투쟁 없이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함으로써 평화적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네오-프루동주의이며, 라덱(Radek), 레비(Levi)는 집권화되고 규율이 선 혁명적 소수에 의해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네오-블랑키주의라는 것이다.

     

    판네쿡의 이 같은 평가는 레비(Levi), 라덱(Radek)의 정책이 코뮤니스트당 독재를 창출하려는 조야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과 연결되었다. 노동계급을 혁명적 소수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재앙의 형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전체 논쟁과정에서 판네쿡은 레비(Levi), 라덱(Radek)의 전술은 특정 상황의 결과이며, 독일 반대파의 정책은 레닌과 제3 인터내셔널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1919년 10월 점차 정치적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 갑작스러운 산업 소요가 다시 발생했다. 경제적 요구가 중요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밑에 깔린 쟁점은 에베르트(Ebert) 정부가 노동자평의회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평의회 역할과 노동자 참가를 크게 제약하는 법안을 도입했는데 노동계급은 1920년 1월 크게 반발했으며, 42명의 참가자가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 같은 사건들은 반대파 내 새로운 분기를 가져왔다. 혁명적 격변의 가능성에 직면하여 반대파 브레멘 분파는 독일코뮤니스트당(KPD)과의 재통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낙(Jannack), 베커(Becker) 등이 주도하는 새로운 분파는 본부(Zentrale)와 반대파의 차이를 강조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 2월 동안 자낙(Jannack), 베커(Becker)는 브레멘 좌파의 반의회주의를 수정하는 데 주력했다. 2월 29일 지역대회는 반의회주의를 완전히 기각했다.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브레멘 구성원 회합에서 독일코뮤니스트당(KPD)에 재가입한다는 결의를 한다. 이 같은 과정에서 반대파는 가장 훌륭한, 정치적으로 훈련된 활동가들을 빼앗긴다. 브레멘 멤버십의 소수는 반대파에 남아있었지만, 정보국(information bureau)은 해체되고, 운동의 주 센터는 칼 슈뢰더(Karl Schröder)를 중심으로 한 베를린 그룹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브레멘 반대파가 독일코뮤니스트당(KPD)에 복귀하기로 한 지 이틀 뒤 "카프-뤼트비쯔 반란"으로 알려진 군사반란2)이 발생한다. 카프 반란의 특정 상황은 노동자와 그들의 가장 증오했던 적인 군대와 대결구조를 만들었다. 베를린에서 노조 지도자 칼 레기엔(Karl Legien)에 의한 총파업은 반혁명 정부의 기능이 정지될 정도로 전면적이었다. 위기가 종식되기 전, 특정 지역에서는 무장된 프롤레타리아 행동도 발견되었고 루르(Ruhr) 지방에서는 반란에 대한 저항이 공장기반 노동자 전투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루르 적군(Red Ruhr Army)으로 결집했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해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지도력은 불확실성에 의해 마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노동계급의 전투적 행동,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의 지원 실패 등은 당이 더는 적극적 혁명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게 했다. 슈뢰더(Schröder)는 그때 새로운 정당을 만들 적기로 판단하면서, 1920년 4월 반대파 전국회의를 소집,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 Kommunistische Arbeiter Partei Deutschlands)을 결성했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최초 선언은 “전통적 의미의 정당”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에 의한 모든 형태의 지배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전술이라는 점을 확언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전망은 한 달 후 대개 판네쿡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광범위한 강령으로 만들어졌다. 강령 초안에서 KAPD는 혁명전략, 사회주의 사회의 정의를 시도했다. KAPD 전략의 기초는 객관적인 혁명적 조건이 “과잉 성숙”되었으며, 진정한 문제는 주관적인 발전이라는 것. 즉, “독일 혁명의 주된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의식 발전”이라고 보았다. KAPD는 그 새로운 의식이 “평의회 사고”(혁명투쟁의 수단, 새로운 사회의 제도적 형태로서의 평의회의 역사적 중요성 인식) 범주를 중심으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평의회 원칙의 인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주도권의 모든 제도에 대항하여 투쟁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적인 노조, 선거행위에 돌아가는 것은 “평의회 사고에 대한 태업(사보타지)”일 뿐 레닌주의자와는 다르게, KAPD는 당이 혁명 행동의 직접적 수단이 아니라, 사고의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혁명적 조직화와 행동의 과업은 AAUD에게 맡겨졌다.

     

    KAPD의 형성과 함께 좌익 공산주의 대안의 기본적인 윤곽이 확고히 마련되었다. KAPD에서 노동계급 조직화의 새로운 개념화와 활동은 전쟁 전, 전시 동안 발전된 판네쿡과 좌익 급진주의와 높은 수준의 지속성을 가졌다. 노조, 의회 중심 사회주의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오직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새로운 구조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조직된 전투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계급들에 의해 국가와 자본과 직접 맞섬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20년 봄, 이 같은 입장의 논리는 비가역적으로 코민테른과 대립하게 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주>


    1. <참고> 독일코뮤니스트당(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 1916년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퇴한 칼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가 조직한 스파르타쿠스단은 1918년 12월 30일에 브레멘 좌파와 합동하여 독일코뮤니스트당을 결성. 독일코뮤니스트당은 1919년에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그 해 1월에는 베를린에서 무장봉기를 했지만 진압 당한다. 1920년 12월에는 독일사회민주당의 좌파와 합동하여 당세를 확장, 1921년 봄 다시 무장봉기를 하려다가 실패, 당내 우파가 탈퇴한다. 


    2. <참고> 카프반란 [KaPP Putsch]: 1920년 3월 13∼17일 베를린에서 우익정치가 W.카프를 우두머리로 해서 제정파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후 얼마되지 않은 당시의 독일에서는 패전에 따른 경제상태가 악화되어 정정(政情)이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제정(帝政)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었던 장교단은 연합국에 의한 비(非)정규군의 해산조치에 반대해서 E.F.W.루덴도르프, W.F.v.뤼트비츠 등과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3월 13일 베를린 교외의 2개 여단이 베를린시에 진입하여 카프를 수반으로 신정부의 성립을 선언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반대, 제정의 부활 등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베를린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함으로써 카프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7일에 베를린을 탈출,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의 우익동향과 총파업의 효과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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