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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혁명 100주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4 : 레닌 vs 판네쿡 -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4


    레닌 vs 판네쿡 :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코뮤니스트좌파(좌익공산주의)는 코민테른에 배척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 레닌주의 성격 및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판네쿡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은 세계혁명, 비타협적 계급투쟁, 전투적 반(反)의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반대를 예견했다 할지라도) 코뮤니스트좌파가 세계혁명의 옹호자인 레닌과 확고한 제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속 확신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 전술에 영향을 미치려는 희망으로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로 제목을 단 소책자를 작성했다. 그 문건은 즉각 코뮤니스트좌파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판네쿡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 걸맞은 혁명개념을 마련하기 위해 광범위한 이론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디트젠(Dietsgen)적인 출발점에 서서 혁명을 어떠한 논리적 일관성도 거부하는 상호작용들의 복합적 과정으로 인식했다. 판네쿡은 혁명의 발전과정에서 결정적이고 선차적인 것은 혁명적인 자기-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정화(淨化) 행동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적 실천의 동유럽적 형태와 서유럽적 형태를 구분했다. 동유럽에서 전술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집합적 지향의 농촌사회와 문화의 지배이며 서유럽 노동자들과 달리 러시아, 아시아의 대중들은 부르주아 문화, 전통의 (노동계급에 대한) 무력화 효과를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 사회의 내적 성격은 완전히 다르며, 마을 공동체주의의 오랜 전통 때문에 농민들은 원시적이고, 열린 태도로 코뮤니스트와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서구에서는 오랜 부르주아 문명화가 대중들의 사고와 감성에 철저히 침투했다는 것이다. 독일 혁명에서 그것은 특히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본 판네쿡은 서유럽에서 주된 전술적 문제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공리처럼 여겼다. 그는 서유럽의 낮은 수준의 노동계급 의식, 늦은 혁명적 발전에 따라 두 가지 갈등하는 전술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급진적 경향과 기회주의 경향. “코뮤니스트적 기회주의”로 이름 붙인 경향의 주된 구성요소를 살펴보기 위해 판네쿡은 방법론적, 사회학적 요인에 초점을 두었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대한 판네쿡의 강조는 그가 사회민주주의의 대중정당, 러시아 볼셰비즘의 엘리트주의적 전위 양자 모두를 거부하게 했다.

     

    판네쿡은 정당 조직화의 (코민테른이 옹호하는) 전위주의적 모델이 어떤 점에서 혁명적 발전의 주요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통일된 노동계급의 적극적 이해와 개입이 없는 권력획득 시도는 혁명에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 같은 접근은 사회주의의 바로 핵심(대중 자신이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조직화)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판네쿡은 서유럽의 전술적 선택을 개관하면서, 코뮤니스트좌파와 생디칼리즘 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주력 했는데, 양자의 주된 분기점은 사회의 구조, 상부구조에 대한 태도에 있다는 것이었다. 생디칼리즘의 근본적인 목표는 노조 관료와 기존 국가기구의 급진적 분파에 기반을 둔 정부. 코뮤니스트좌파와는 달리 생디칼리스트는 사회의 지적, 문화적 영역을 부르주아에게 남겨주는 것에도 만족하고. 생디칼주의적 정부는 자본주의 질서의 물질적, 정신적 요인들을 분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후 자본가 재그룹화의 가능성을 남긴다고 보았다.

     

    판네쿡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 간의 차이는 깊고 실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분기를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러시아 혁명이 갖는 세계변혁의 중요성을 믿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대중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발화시켰고, 그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유지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판네쿡은 러시아 혁명이 유럽 혁명과 서구 자본에 대한 아시아의 대규모 반란을 가져오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평가는 러시아 혁명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덜 강조하면서, 민족해방운동으로서 그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판네쿡이 이 같은 주장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레닌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준비하면서 좌익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전략적 분석을 발전시켰다. (곧,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레닌 저작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묘사되듯, 그 저작은 거의 즉각적으로 코뮤니스트 전략, 전술의 정초를 이루었다. 레닌은 서유럽에서 늦은 혁명 진척에 따라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을 향한 단축 시기가 필요하다고 가정했다. 장기적 싸움이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코뮤니스트는 가장 반동적 제도라 할지라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들어가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와 의회 속으로”는 좌익주의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레닌의 처방이었다.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지도자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레닌은 대중 조직에 침투하는 예외적인 수단들을 요구한다. 레닌은 논쟁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하고, 특히 절대적 집중화와 강력한 규율이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레닌은 신랄한 언어를 동원하여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의 전술적 책략의 부재를 비난했다. 특히 판네쿡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견실한, 그리고 특별히 우둔한” 것으로 지적했다. 레닌은 당 조직화의 전위모델을 좌파가 부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이해 앞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해제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독일 입장은 불법이 불필요했던 국가에서 태어난 “불행”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말한 뒤, 그들은 “대중들의 정당이 아닌 써클, 즉, 지식인주의의 가장 나쁜 측면을 닮은 지식인, 소수 노동자들의 그룹”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으로 결론 내렸다.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에 실은 짧은 후기를 통해 레닌의 주장과 비난에 대응했다. 그는 레닌 정식은 독창성과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것이 레닌이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과제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또 다른 주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레닌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인 의회주의, 노조운동 전술에 대한 레닌의 방어는 민족국가로서 소련의 역할,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사명 간의 모순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그 모순을 분석하면서 경제 재개발에 대한 소련의 급박한 필요성을 지적했다. 판네쿡은 소련의 정치적 요구가 서유럽에서 코뮤니스트 전술을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되고, 코민테른은 서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소련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소련이 잠재적으로 “혁명에 대한 반동적 방해물”이 되고, 반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힘들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했다. 판네쿡은 이처럼 러시아 혁명의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한 첫 번째 코뮤니스트 이론가로 등장했다.

     

    레닌에 답변하는 주된 과업은 호르터(Gorter)에게 남겨졌다. (그의 글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호르터는 네덜란드 맑스주의자 중 레닌과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논쟁에 끼어들 것 같지 않았던 인물이다. (호르터는 “국가와 혁명” 등 레닌 저작을 번역했으며, 그의 책 “세계혁명”을 레닌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호르터도 서유럽, 동유럽 코뮤니스트의 차이점을 축으로 주장 전개했다. (“당신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뛰어난 것이었고,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서유럽엔 무엇을 입증했는가?”). 그는 두 지역의 농업 부분의 차별성을 추적한다. 동유럽 농민은 공동체적인 지향을 하는 반면, 서유럽 농민은 노동자를 계급의 적으로 인식하는 개별화된 소부르주아 기업인이라는 것이다. 서구 노동자들은 참호에 둘러싸인 부르주아를 홀로 맞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호르터는 서유럽 전술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하면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을 특징 지웠던 같은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격하게 주장했다.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하여, 호르터는 노동자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코뮤니스트좌파 전술을 거듭 주장했다. 호르터의 분석은 판네쿡과 유사하지만, 다른 몇 가지 점도 존재한다. 판네쿡은 서유럽 혁명의 늦은 진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 때문이라고 보았지만, 호르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 걸림돌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리적 힘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호르터는 (레닌, 코민테른 주장과는 다른 것이지만) 확고한 맑스주의 원칙, 당 집권화, “철의 규율”의 중요성 강조했다.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스트에 대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코뮤니스트좌파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코뮤니스트좌파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反)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코뮤니스트좌파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저널) “코뮤니즘(Kommunismus)”으로 이동했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코뮤니즘”은 코뮤니스트좌파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했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코뮤니스트좌파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反)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보르디가의 반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코뮤니스트좌파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했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하였고, 노동자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했다. 코뮤니스트좌파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대두했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사회주의노동자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 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코뮤니스트좌파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결연히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도 나타났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얀 아펠(Jan 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코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넸다. (울프하임, 라우펜버그, 룰레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KAPD와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아펠(Appel)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룰레(Otto Rühle)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코바에 도착했으며, 룰레(Rühle)는 레닌과 코민테른 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코뮤니스트 6호” 116~117쪽 참고)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룰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룰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더욱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를 KPD(독일코뮤니스트당)와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 정당(sympathizing party)"으로 KAPD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아펠(Appel), 슈왑(Schwab), 메이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코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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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 인터내셔널에서의 코뮤니스트좌파(KAPD) 대표자>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판네쿡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기저적인 쟁점들에 관심을 두게 된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즘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다. KAPD내에서 룰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했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소련과 서유럽 상황은 급변했다. 1920년 소련은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유럽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다수 국가들과의 무역과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하였고, 유럽에서 혁명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되었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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