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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7호]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남궁 원

     

     <편집자 주> 이 글은 독일혁명(1918-1923) 100주년 맞아 교훈을 얻고자 남궁원 동지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발표한 글을 보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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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식 - 세계혁명 분기점, 독일 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혁명으로 발전하느냐는 서유럽, 특히 독일 혁명(1918-1923)에 달려있었다. 특히 레닌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수행하면서,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를 돕지 않는다면, 러시아의‘일국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 패배 이후 스탈린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은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밀어붙였다.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레닌과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심각한 대립을 빚고 있었다. 레닌은 1920년 코뮤니스트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소집에 맞춰,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 팸플릿을 작성하면서 독일 급진 좌파를 비판한 바 있다. 이 문건은 레닌이 각국의 노동운동 및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좌익 편향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레닌이 지칭한 좌익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일 공산당 내의 급진좌파였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 때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리더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레닌의 이 문건은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한 것이며, 즉각적으로 전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략, 전술의 방침이 되었다.

     

    이에 독일 급진 좌파를 대표하는 안톤 판네쿡과 헤르만 호르터는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하면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하고, 노조와 의회 활동’을 권고하는 레닌에 강력히 반대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한다. 이들은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또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한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차르의 후진 러시아와 선진 서유럽 상황에서 혁명의 전략과 전술이 과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또한,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좌익공산주의 정치조직 흐름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 Bund),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대립은 무엇이었고,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어떠한 혁명관과 조직관을 갖고 활동했는가? 독일 혁명 과정에서 코민테른 지도부와 코뮤니스트좌파 사이의 논쟁은 무엇이었나? 이 글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흐름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 오토 룰레, 칼 코르쉬, 폴 매틱 등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의 자세한 이론적 쟁점은 생략한다.

     

     

    평의회를 둘러싼 논쟁과 분화: 독일코뮤니스트당 창당

     

     당시 독일의 주요 정치세력은 사민당과 독립사민당, 스파르타쿠스단, 브레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의 연립정부 구성이란 안정 속에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국민의회 소집을 뜻한다. 여기서 레테(평의회)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혁명 발발 직후 카우츠키가 이끄는 독립사민당 지도부는 레테(평의회)체제냐 국민의회체제냐 사이에서, ‘국민의회와 레테체제’ 입장을 취한다. 국민의회 소집은 곧 부르주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1918년 12월에 열린 노동자병사 레테(평의회) 전국총회는 국민의회 결정을 내린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 내에서 패배하고 당을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을 탈퇴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평의회 활동을 전개한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그룹은 급진좌파의 통합을 요구받고 있었다. IKD그룹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적 노조그룹과 통합 대신에 IKD그룹과 함께 1918년 12월30일 독일코뮤니스트당을 창당한다.

     

    독일코뮤니스트의 강령은 노동계급의 규칙을 확립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밟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실천적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첫째, 경찰과 군 간부의 무장해제,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모든 무기와 화약의 접수, 노동자 군대의 창설.

    둘째, 군대 통솔구조의 해소, 군사평의회의 일반화.

    셋째, 혁명 법정의 창설.

    넷째, 전국의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에 의해 선출된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 중앙의 회 설립, 모든 옛 시의회 및 국회의 해산.

    다섯째, 6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여섯째, 모든 인민의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의 몰수.

    일곱째, 토지, 은행, 광산, 그리고 주요 산업 및 상점 기업의 몰수.

    여덟째, 공장과 기타 작업장의 관리를 과업으로 하는 기업평의회 건설이다.

     

    그러나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창당 직후 내부논쟁에 휩싸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국민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말로만 투쟁하는 것은 아니라, 국민의회에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에 대해 급진좌파 대표로 나온 오토룰레(Otto Rühle)는 국민의회 연단 대신에 거리연단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혁명세력은 14일 이내에 곧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낙관적인 혁명 전략을 피력했다. 국민의회를 둘러싼 당 대회의 격렬한 논란 끝에 62:23으로 선거불참이 결정됐다. 이 결정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판단 차이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의회선거 참여를 주장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한계가 나타난 것이다. 창당대회 당 조직 문제는 중앙집권적 방식이 아니라 연방제적 원칙을 결정했다.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은 베를린 1월 봉기, 루르 광산지역, 중부지역 노동자총파업과 사회화운동 등 혁명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하다 정부군에 의해 무력진압 되었다. 독일 노동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당원은 20만 명이나 되었다. 1920년 초 우익의 카프반란이 시도되었을 때, 코뮤니스트좌파 활동가는 루르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사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월 봉기 기간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되고,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조직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당내 급진좌파를 겨냥한 내부투쟁에 돌입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은 2차 전당대회에 ‘코뮤니즘의 근본원칙과 전술에 관한 기본원칙’을 채택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당을 혁명투쟁의 지도자로 규정하고, 당의 볼셰비키적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결정한다. 이른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화’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활동방침을 지지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과 노동조합은 의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적합한 노동운동의 조직형태로 자리매김 된다.

     


    코민테른 지도부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대립 :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판네쿡뿐만 아니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의 좌파들은 대부분 열렬한 레닌주의자였고,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원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볼셰비키의 강점을 조직구조에서 보지 않고 공격적 전투성과 맑스주의 원칙의 확고한 헌신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5년 찜머발트 좌파에서 드러난 레닌과 판네쿡의 차이는 한 마디로 국제주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코민테른이 결성되고 서유럽의 공격적 맑스주의자들은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만든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브레멘(독일) 좌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열광적 주창자였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승리로 인해 코민테른은 러시아 주도하에 결성되었다고 보았다.

     

    1920년 2월 3-6일 암스테르담 국제대회에서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서유럽 인터내셔널로서의 역할로 규정하고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으로서 노동자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코민테른 지도부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전망 차이의 첫 번째 표시였다. 암스테르담 서기국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을 채택했고, 1920년 4월 30일 모스크바 지도부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폐쇄하고 베를린 서기에게 할당했다고 방송했다.

     

    1919년 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독일코뮤니스트당으로부터 축출된, 판네쿡, 호르터, 오토 룰레 등 독일‘코뮤니스트좌파는 (투쟁 정신과 영향력에서 자신들의 ‘관료적’ 경쟁자를 순식간에 넘어선) 새로운 당,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당시 당원은 4만 명이었다.

     

    KAPD 강령을 검토하면 맑스주의의 명료성을 볼 수 있다.

    첫째,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강령은 세계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환경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혁명과의 연대와 세계적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셋째,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는 도덕주의와 형식에의 집착이 아니라 의회와 노조가 계급의식에 봉사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넷째, 공장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주창은 소수의 혁명가가 꿈꾸는 가공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계급 운동의 구체적 조직적 표현이다.

    다섯째, 반(反)당의 입장과 달리, 코뮤니스트 투쟁의 핵으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여섯째,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방어하고 있다.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야펠(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나왔다.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넨다. (울프하임, 라우펜베르그, 오토 룰레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야펠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룰레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오토룰레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하였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룰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룰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보다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를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자 당”으로 KAPD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야펠(Appel), 슈바브(Schwab), 몌이에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호르터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과 함께 본격적인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전개한다. 호르터는 당의 주요 목표는“평의회 사고”를 선전하고, 평의회가 나타나면 당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르터가 러시아와 서유럽의 정치 경제적 차이를 강조한다면, 판네쿡은 러시아와 달리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사고에 미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영향이 크다고 판단한다. 반면 레닌이 쓴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무질서 (좌익소아병은 잘못된 번역)>에서는 이 부분(러시아와 유럽 차이에 대한 좌익공산주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보편성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 3월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을 좌익공산주의의 교과서로 제출했다. 판네쿡은 여기서“의회의 활동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으로 분할되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개입이 불가능해지며 국제자본에 대항하는 대중 행동에 있어서 민족분할로 나아간다.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은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와 같이 동일한 발전 경향을 갖는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관료 계급이 생기고, 그 관료주의는 자금, 언론, 경영 등 모든 조직의 자원을 통제한다. 혁명당의 기능은 앞장서서 명확한 이해를 선전하고 대중이 올바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계획, 슬로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네쿡은 또한 서유럽의 전술선택이 생디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차별화했다. 즉 생디칼리즘의 목적은 조합관료주의와 옛날 국가기구의 급진 부분에 기반을 둔 정부를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국가를 존속시키게 하며, 자본주의 지배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구별 못 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레닌의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라는 전술의 방어는 국민국가로서의 소련의 역할과 코민테른의 역사적 사명 사이의 모순에 있다고 보고 결국 소련이 서유럽정치에 개입하는 도구로 코민테른을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이념적 몰입, 공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통제를 생산력 증진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도구로만 협소하게 이해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을 국가 행정기구에 통합시킴으로써 혁명 후 혁명 사회의 기초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할 노동자통제는 당과 국가에 의해 억압되어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량생산체제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집착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로 파악했다.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한편, 러시아를 방문한 오토 룰레는 소련 사회가“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소련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이후 “노동자평의회 외에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기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평의회주의자로 흘렀다.

     

    오토 룰레는 당과 독일노동자총연합의 단일조직을 주장하면서 독일노동자총연합-단일조직 (AAUD-E)를 창설한다. 오토 륄레는 일반노조로 재조직된 혁명적인 공장조직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며, 혁명적 평의회와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를 주장1)하였다.

    1920년 이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이후 마침내 볼셰비키와 관계를 끊었다. 유럽 내에서, 1923년 이후 계급 갈등의 상대적 안정화는 코뮤니스트좌파 경향 추종자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고립되면서, 남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천천히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 역할 테제 (축약)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당 역할 테제는 1921년 7월에 작성됐으며, KAPD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안에서도 토론되었다.

     

    1.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지구적 부(富)처분을 노동 대중의 손에 넣게 하는 것이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따라서 독립된 착취, 지배계급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정치 권력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사회 경제의 자유로움을 포함하며,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 제기하는 과제다.

     

    2.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종식하고, 이 생산을 인수해서 노동계급의 수중에 넣고, (부르주아) 정치 제도들을 분쇄하고, 계급 분할을 모두 없애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개별적 순간들을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적 과정에서 정치 폭력의 역할이 취하는 행동은 여전히 어떤 순간에서는 결정적이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동시에 정치 경제적 과정이다. 정치 경제적 과정도 아닌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풀 수도 있으나, 세계 코뮨 건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때까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지역은, 가능한 반(反)혁명의 정치 폭력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여전히 정치폭력을 필요로 한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한 부분을 위해서 정치 폭력의 필요성을 만드는 이러한 근거들은, 혁명의 내부 발달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 정치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확실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경제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앞서 언급한 결정적 순간이 없고, 프롤레타리아트 일부분이 경제 방향을 떠맡고, 이윤 동기를 없애고, 필요의 경제로 대체하는 오랜 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데, 이 기간에 부르주아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을 방어할 목적으로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발전된 민주적 이데올로기 국가들은 - 다시 말해, 발전된 산업 국가들- 민주적 슬로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잘못 이끌기 위한 방안을 찾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강력하고 확고한 정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본질적인데, 이 기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5. 혁명의 정치적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 권력을 유지할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정치적 노동자 평의회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행정부의 모든 형태를 수용하는 역사적 결정이다. 항상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투쟁의 개별적 요소를 통과하면서 완벽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7. 가장 의식적이고 준비된 프롤레타리아 투사로 함께 분류되는 역사적으로 확고한 조직 형태는 당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코뮤니즘이기 때문에, 이 당은 자신의 강령과 이데올로기로서만 코뮤니스트 당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 당은 강령적 기초를 철저하게 해결해야 하며, 통일된 의지로서, 전체적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혁명의 머리와 무기가 되어야 한다.

     

    8. 코뮤니스트 당의 주요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혼란과 변동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당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 모든 상황들에서 대중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권력 장악 이전 정치투쟁의 모든 이슈들에서, 개량과 혁명 사이에 차이들을 명확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적 개량주의 - 어떤 가면을 쓰고 선택하든지 - 는 오늘날 혁명에 큰 장애물이며, 지배계급의 마지막 희망이다.

     

    9. 따라서 코뮤니스트 당은 자신의 강령에서, 언론에서, 전술과 활동에서, 동일한 결정으로 개량주의와 기회주의 모든 현상에 가차 없이 반대해야 한다.

     

    10.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적 순간에서도 혁명은 변증법적 과정이다. 혁명 과정에서 대중들은 불가피하게 동요를 겪는다. 가장 의식 있는 요소들로 구성된 조직인 코뮤니스트 당은 이러한 동요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슬로건을 명확하고 원칙적인 본질을 통해서, 말과 행동의 통일, 투쟁의 책임자라는 위치에서, 예측의 올바름을 통해서, 코뮤니스트 당은 프롤레타리아가 각각의 동요를 빠르고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의 전체 활동을 통해서, 심지어 대중의 반대하는 순간적인 비용을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발달시켜야 한다. 혁명적 투쟁 과정에서, 오직 이러한 의지를 가진 당이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광범위한 사람들의 혁명적 교육을 달성할 수 있다.

     

    11. 코뮤니스트 당은 대중과 접촉을 잃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칠 줄 모르는 선전의 명백한 의무는 제쳐놓더라도, 경제적 필요로 야기되는 노동자 운동의 개입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당이라는 이름하에 개량주의적 요구가 떠오르는 기회주의 정신을 강화해서는 안 된다.

     

    15. 혁명의 정치 승리 이후 당의 역할은 국제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발달에 의존한다.

     1923.JPG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강령2) (*공장조직과 정치조직 부분)

     

    공장조직은 KAPD와 긴밀히 결합하여 그 임무를 수행한다.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KAPD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 권력 장악의 단계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가장 견결한 억압을 요구한다. 그것은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총체를 행사하는 평의회조직을 만듦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공장조직은 공장을 통해 수행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소가 된다. 이는 더 나아가 평의회 경제체제의 기초단위로 변혁되는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은 코뮤니스트 공동체(Gemeinwesen) 건설의 경제적 조건이다. 코뮤니스트 공동체조직의 정치형식은 평의회 체제이다. 공장조직이 개입함으로써 정치 권력은 평의회 지도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 이처럼 KAPD는 최대 혁명 강령의 실천을 위해 투쟁하고 다음에 포함된 구체적 요구를 위해 투쟁한다.


    정리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KAPD가 평의회를 선전하는 것은 내용 없고 선동적인 미사여구였다. 왜냐하면 KAPD는 당이었으며, 당은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의 구호인 “ 정치적 노동자평의회를 선출하라!”는 구호 역시 선동적인 속임수이다.

    이 구호의 이면에는 난파한 당에서 사라지는 관료의 권력을 허구적인 평의회의 구명보트라는 안전지대로 옮겨, 관료제의 축복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한 시도 외에는 다른 것이 숨어 있지 않다.

    평의회는 공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당의 성격을 완전히 극복한 그리고 당에 대한 종속을 벗어던지고, 가능한 평의회 체제를 만들어나가면서 구체화하는 조직에 의해서만 준비될 수 있다.

    오늘 날에 이러한 조직은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장조직, 노동자 총연맹이 그것이다. <평 의 회 - 오토룰레> 중에서

    2) 
    1920년 5월에 채택한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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