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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1부. 계급투쟁 100년
  • 조회 수: 6576, 2018-07-05 21:02:09(2018-07-05)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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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이 글은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이다.

     

     1. 예상치 못한 영국의 EU 국민투표 결과 직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불안과 공포의 파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세계 질서를 책임지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그런 일 – 자본가 계급의 ‘합리적’ 이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 이 발생하도록 놔두었는가? 어떻게 도박꾼, 자기도취에 빠진 악당이자 사기꾼이 이제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장인 것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전 세계의 향방에 대해 이 사건이 이야기해주는 바가 무엇인가?

     

     

    1부. 계급투쟁 100년

     

     2.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정한 조건을 계급투쟁의 관점, 그리고 사회의 착취 받는 계급, 진실을 숨기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하여 자본주의의 모든 신비화를 간파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에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현재 당장 지엽적인 사건들은 세계-역사적인 틀 속에 위치 지울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법의 본질이다. 2017년, 이 해가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적 상황에서 최근 진전이 있는 역사적인 시대 – 자본주의 생산 양식 쇠퇴 또는 퇴락의 시대 - 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00년 그 이상을 되돌아보기를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은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대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응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이 확인하였듯이, 이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자 자본주의 상승기의 폐막을 나타냈다. 경쟁하는 국가들로 세계를 나누었던 장벽을 허물면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폭발 다시 말해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정치 정당과 함께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은 자본주의 야만을 교체한다는 약속이 역사적으로 가능하며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더욱이, 1917년 혁명 운동의 전위에 있었던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에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의 권력 쟁취가 오직 세계 혁명의 발단으로서 첫 타격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와 똑같이, 독일 혁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10월 봉기가 제기한 도전에 반응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심화하는 야만의 시대, 인간의 문명을 위험에 빠뜨릴 전쟁과 파괴가 휘몰아치는 시대에 돌입할 것임을 이해했다.

     

    세계 혁명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반혁명적인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에 따라 볼셰비키 당은 코민테른의 창설을 주도했고, 1919년 모스크바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은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확장되는 선두에 있었다.

     

     3.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대적 파업과 봉기를 촉발해 실제로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학살을 중단하도록 강제했지만, 예외적으로 헝가리와 독일의 도시들에서의 일시적인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국제 노동계급은 다른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 수 없었다. 잠재적이지만 자신의 무덤을 팔 이들의 위협에 직면한 지배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응하여 숙원의 적과 연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봉쇄, 침략, 그리고 무장된 반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을 고립시켰고,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에 충성을 보여준 사회민주주의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여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권에 순응하도록 우회시켰다. 그러나 패배는 이제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의 지배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노동계급은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갑작스러운 전환에 직면해 있었고, 여전히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중요 산업의 국유화 또는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사회적 이득을 양도해 자본주의 정권을 개선시킬 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심각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노동계급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학살당한 전쟁, ‘승리한’ 노동자와 ‘패배한’ 국가의 깊은 분리를 일으킨 전쟁의 공포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은 고립, 내전, 그리고 경제 붕괴에 직면해 있었고, 더욱이 소비에트 국가기관과의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은 일련의 끔찍한 오류를 저질렀는데, 이러한 오류는 결국 노동계급과 폭력적인 대립을 앞당겼다. 특히 노동자의 반대와 정치조직에 대한 억압을 포함하는 ‘적색 테러’는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는데, 이 봉기는 1917년에는 존재했던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제 수준에서 코민테른 역시 세계 혁명의 필요보다 소비에트 국가의 필요에 점점 더 기울었고 원래의 명료함을 훼손하는, 1922년에 채택한 통일전선전술(United Front Tactics) 같은 기회주의적 정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락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정당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좌익 반대파의 등장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당에서 이탈리아 분파가 결국 패배한 혁명의 교훈을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밝혀낼 수 있었다.

     

     4. 따라서 세계 혁명 물결의 패배는 1917~18년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실패의 결과 – 야만의 시대로의 새로운 추락 - 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 진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독재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일국 사회주의’ 원칙을 내세운 스탈린주의 국가기관의 승리로 (비록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지라도) 확인한 과정이었다. 혁명의 위협을 끝내기 위해 삽입된 ‘평화’는 곧 새로운 제국주의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29년 과잉 생산으로 인한 세계 위기의 발발로 가속화,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과잉 생산은 자본 확장이 그 내재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체계의 심장부, 특히 미국과 독일의 노동계급은 경제적 불황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으나, 이 계급은 비록 미국과 스페인에서 일부 진정한 계급 저항의 표현이 있었음에도 10년 전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근본적으로 패배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계 전쟁으로의 또 다른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5. 반혁명의 갈고리에는 세 개의 주요한 갈퀴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 이들 각각은 노동계급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반혁명은 혁명의 불꽃이 가장 높게 타올랐던 국가들 – 러시아와 독일 - 에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유령을 쫓아내야 할 필요,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위기에 적응할 필요, 그리고 전쟁 준비의 필요에 직면한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삶의 모든 모공에까지 침투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완전한 전쟁 경제, 모든 반대의 격멸, 무시무시한 착취율, 광범위한 강제 수용소 등의 기조를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후의 삶과 죽음에서 스탈린주의의 가장 최악의 유산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자본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인 양, 제국주의 확장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 양 세계에 팔려나갔다. 10월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는 많은 노동자가 이런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신화를 믿었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질이 계속 폭로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모든 사상에 등을 돌렸다.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전망, 노동계급 혁명이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가한 피해는 막대하다. 스탈린주의가 구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 계급 운동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정당을 타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된 1914년 사회민주주의당의 변절 이후, 2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노동계급이 힘차게 만들고 방어한 조직이 노동계급을 다시 한번 배신하고 가장 최악의 적이 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신감, 사회적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 이보다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었을까?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계급에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운동의 변절자들로부터 출발한 운동인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분파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 -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전쟁 동원을 완수하는 것 - 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있는 비합리성의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근대적 기술 사용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나치즘은 독일에서 더욱더 파괴적인 패배의 산물이었는데, 중세적 대학살을 안정화, 산업화시키고, 결국 자기-파괴를 향한 광적인 행진으로 타락한 대중들을 끌고 가는 등 비합리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동계급은 전체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생각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반대로 반파시즘의 유혹 -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뭉치자는 주요한 호소 - 에는 훨씬 취약했다. 그러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전례 없는 공포는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 – 곧 코뮤니즘의 전망 – 에 대한 타격이었다.

     

    선진 산업화 국가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주요한 형태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형태에 대해 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끝장낼 때, 스탈린주의 정권과 전쟁에서 연합하여 히틀러 독일을 상대할 때에는 파시즘 지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 무너져 버린 파시즘이나, (중국과 기괴한 북한 정권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 위기의 압박과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 이를 국가 조례 등으로 회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 경쟁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무너져 버린 파시즘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체계의 위기에 대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관리자들은 시장의 힘을 왜곡시키는 국가와 신용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물질적, 전략적 약점으로 인해 동구 블록이 선택했던 하향식 중앙집중화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택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고, 이제는 서구의 오랜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남은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파시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할 필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정면 뒤에 지배계급의 독재가 있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기각된다.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은 괴벨스가 부러워한 공식적인 선전 유포 모델을 제공했으며, 그동안 미국 자본주의의가 개척한, 여가와 가족의 삶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상품 관계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지배로 더욱 교묘한 경로를 제공했고, 이는 단순히 정보제공자와 노골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6. 30~40년대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혁명적 소수는 매우 감소했는데,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종전(終戰)은 새로운 혁명의 등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반대로 1917년의 교훈을 학습하여 처칠을 전위로 한 부르주아지가 독일 도시들에 융단 폭격을 하는 한편, 1943년 북부 이탈리아의 대대적 파업에 대해 “이탈리아 스튜는 그들의 국물로 만들어라!”라는 정책을 통해 어떤 프롤레타리아 봉기도 가능하지 않도록 그 싹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종전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또다시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전후 경제는 더 심한 경제적 불황에 돌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에 승리한 블록 간의 제국주의 적대가 인류의 목을 조이려 계속 위협하고 있음에도 세계 전쟁으로의 새로운 추동 또한 없었다. 오히려 전후 시기는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본주의의 진정한 확장기였으며, 세계 시장의 일부분(러시아 블록과 중국)이 서방 자본의 침투를 차단하려 했음에도 그러했다. 동구 블록의 긴축 재정과 억압이 계속되자 중요한 노동자들의 봉기(1953년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발생했으나, 서구에서는 1947년 프랑스의 파업과 같이 일부 전후 불만에 대한 표현이 있었으나, 계급투쟁은 점차 사그라들어 사회학자들이 소비주의의 확산과 복지국가 발전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중산계급화’한다는 이론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이러한 측면들은 중요하게 남아, 노동계급 자신을 혁명 세력으로 재조직화할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소비주의는 노동계급을 원자화했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 소유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전파했다. 복지주의는 좌익 정당이 종종 도입했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의 승리로 표현되지만, 사실 자본주의 통제의 훨씬 더 중요한 도구이다. 복지주의는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국가의 자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대규모 이민의 단계에서 민족 국가의 복지 조직은 건강·의료, 주택, 그리고 다른 복리후생에의 접근의 문제에 있어서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노동계급 내의 분리를 발생시키는 잠재 요인이 될 것이었다. 그동안 1950년대와 60년대 노동계급의 명백한 소멸과 더불어 혁명적 정치 운동은 역사상 가장 고립된 상태로 축소되었다.

     

     7. 이러한 암흑기에도 계속 활동한 혁명가 중 일부는 자본주의가 관료제 국가 관리 덕분에 맑스가 분석한 경제적 모순을 통제할 방법을 학습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국제주의 그룹(Internacialismo group)과 같은 더욱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들은 오랜 문제들 – 시장의 한계, 이윤율의 하락 경향 – 이 사라질 수 없으며, 60년대 후반 경험한 재정적 어려움은 노골적인 경제 위기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가 계급투쟁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반응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환호했는데, 이러한 예측은, 수십 년 동안의 반혁명이 끝을 맞이했으며, 세계 전쟁으로의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위기를 막아온 주요한 방해요인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었음을 보여준, 1968년 5월 프랑스의 엄청난 운동과 그 후의 국제적인 투쟁의 물결로 충분히 확인되었다.

     

     8.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폭넓은 계층 사이에서 정치 불안이 고조되었는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분리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현대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 관심을 표명한 독일 학생들 사이의 운동, 프랑스에서의 베트남 전쟁과 대학의 억압적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운동, 현명한 사회학자들이 진부하다고 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다시 주장한 전후 이탈리아 맑스주의 ‘오퍼라이스트(operaist)’ 또는 자율주의적 경향 등이 있었다. 모든 곳에서 전후 경제 번영의 감미로운 과실이라고 광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이 고조되었다. 프랑스와 다른 산업 국가들에서 전투적 투쟁의 증가로 동력을 얻은 소수는 의식적인 국제주의 정치 전위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소수의 일부가 좌익공산주의(코뮤니스트좌파)의 기여를 재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9.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소수와 광범위한 계급 운동의 만남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가끔 발생했다. 이것은 불만을 품은 소부르주아지가 정치화된 소수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부 기인한다. 특히 학생 운동은 자본주의 조직의 변화를 가져올, 다음 수십 년 넘게 존재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핵심이 부족했다. 또한, 전 세계에 걸쳐 강력한 계급 운동 그리고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을 저지하느라 발생한 심각한 대결에도 계급투쟁의 다수는 방어적으로 남아있었다. 오직, 아주 가끔 직접 정치적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동서 간 ‘철의 장막’ 그리고, 자본 중심에 있는 소위 ‘특권적’ 노동자와 이전 식민지 지역 빈곤한 대중들 사이의 분리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중요한 분리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치적 전위의 성숙은 즉각적인 혁명의 전망에 따라 억제되었고, 소부르주아지 성급함의 전형인 활동가(activist) 관행들은 혁명적 작업과 정치화된 소수가 직면한 거대한 규모의 이론적 작업이 가지는 장기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활동가주의(activism)의 우세는 소수의 다수가 좌익주의(leftism)의 부활에, 또는 투쟁이 침체 되었을 때는 타락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좌익주의를 거부한 이들은 종종 조직 건설의 문제 전체를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적 주장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러나 작은 소수는 이러한 방해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성장과 재그룹화 움직임 활동을 개시, 1970년대까지 지속하여 코뮤니스트좌파(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코뮤니스트좌파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s)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초 갑작스럽게 끝났다. 1968년 거리에서 그리고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동구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는 문제에 싹을 틔우고 보다 진전된 정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실패한 이 시기의 투쟁은 결국 뒤이은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프롤레타리아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은 그 열기를 모두 잃지 않았고, 지배 계급은 이 에너지의 시선을 돌리고, 탈선시키고, 억압하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적 수준에서 발생했는데, 여전히 노동계급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자본주의 좌파와 노동조합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다. 좌파 정부를 선출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서든, 1968년 이후 20년 동안의 급진적 노동조합주의 발전과 함께하는 ‘좌익 반대파’ 전략을 통해서든, 노동자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기관(역자 주: 노동조합)의 도구화는 계급투쟁 억압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세계 위기에 따른 모든 구조 변화를 가능한 전부 이용했다: 한 편에서는 항만, 자동차, 그리고 인쇄 같은 산업들에서 숙련, 비숙련 노동을 모두 대체하는 기술적 변화를 도입하였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자본 중심지의 모든 산업 연결망을 파괴하고, 노동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이윤은 엄청나게 큰 주변 지역으로 생산을 옮겨가는 생산 과정의 ‘세계화’를 향한 운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심장부에서의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종종 70년대와 80년대 초반 투쟁 중심지에 있었던 영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제는 계급 원자화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계급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0. 1968년 해방된 투쟁의 역동성은, 몇몇 일시중단에도 70년대에 걸쳐 지속하였다. 자기 조직화와 확장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역량의 성숙도는 1980년 폴란드 대중 파업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절정은 동시에 쇠퇴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 파업이 경제 요구와 정치 요구의 전통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 보여주었음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어떤 지점에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은 자기 조직화가 아직 발달 단계였으나 사회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보다 급진적인 토론이 가능한 맥락을 제공했던 68운동보다 ‘낮은’ 수준에 있었다. 폴란드의 운동은 매우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서유럽’, ‘민주주의 정부’, ‘독립적인 노동조합’ 등을 그들이 원하는 대안적 사회로 보았다. 서유럽에서는 폴란드의 파업에 대한 몇몇 연대 표현이 있었고, 1983년부터 경제적 위기가 급격하게 깊어짐에 따라 그들의 범위에서 점점 더 넓은 세계적인 투쟁의 파도를 관찰했다. 많은 경우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사이의 대립이 증가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투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투쟁에서 의식적인 국제주의의 필요를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노동조합은 당연히 국가 일부인데, 이러한 노동조합과 충돌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전복의 필연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운동의 정치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인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할 만큼 역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70년대보다 더욱, 선진국들에서 80년대의 투쟁은 부문적 요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급진화한 형태의 노동조합 방해 공작에 취약한 채로 남아있었다. 이 시기 두 블록 간의 제국주의 긴장 심화는 전쟁 위협을 주요한 관심사로 등장하도록 했으나, 평화 운동이 이러한 관심을 분산시켰는데, 평화 운동은 사실 경제적 저항과 전쟁 위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적 발전을 효과적으로 방해한 것이었다. 이 시기 조직 활동을 지속했던 혁명가들의 작은 그룹들은, 그들은 노동자들의 특정 제안에 더욱 직접 개입할 수 있었음에도,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노동계급 내의 ‘정치’에 대한 지배적 의혹에 전체적으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의 커다란 격차 심화는 그것 자체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없는 무능력에 기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2부로 이어짐>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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