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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1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판네쿡과 네덜란드 사회주의 운동


     판네쿡(Pannekoek, Antonie - 독일식 표현으로는 Anton)은 1873년 1월 2일 네덜란드의 가난한 농업지역인 바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요한스 판네쿡과 빌헬미아 도로시아 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골에서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당시의 다른 맑스주의 지식인처럼 중하층 계급에서 상층지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힘든 노동과 독학을 통해 농사꾼에서 작은 주물공장의 경영인이 되었고, 자유사상가이자 자유당의 지지자였으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네덜란드 중간계급의 젊은이처럼 판네쿡도 특별히 반항적인 본성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의 청년기는 깊이 기억할만한 중요한 투쟁도 없었다.

     

     판네쿡이 정치의식 성숙에는 그가 자란 네덜란드라는 배경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은 독립적이고, 대중에 기반을 두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중요한 노동계급 운동이 상대적으로 없었던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상황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문화를 형성한 것은 네덜란드 자체의 경제적인 구조였는데, 노동집약적인 농업이 경제적인 주요한 영역으로 남아있었고, 서유럽 나머지 국가보다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으로 네덜란드 노동계급은 수동적이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산업화가 다가오고 있던 시기에, 경제적 법적 시스템의 낙후성은 광범위한 빈곤 계급을 형성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빈곤에 대하여 수동적인 온정주의의 수혜자가 되어가면서 네덜란드 노동계급은 그들의 비참함에 대해 산업자본주의 등장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였고, 혁명적 저항을 고무시킬지도 모르는 물질적 환경에 대해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판네쿡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1902년에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3년에 음악가이며, 문학교사였던 요한나 나사수 누데바이어와 결혼했다. 1906년까지 그는 라이덴(Leiden) 천문대에 근무했고 그 이후에는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강의했다. 당시 그의 유일한 정치활동은 자유당과 학생토론그룹의 대표 활동이었다. 그는 학교 선생으로부터 좌파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대부분 자신의 지적인 모험과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적 확신에 도달한다. 맑스주의와의 첫 번째 만남은 1899년에 자유당 지역 클럽에서였는데, 에드워드 벨라미의 ‘평등’이라는 책을 접하고 그의 사상에 전반적인 전환을 맞는다. 1899년 그는 사회주의적 고전들을 소화해 내는데, 이론적 능력이 뛰어나 맑스주의 경제학 연구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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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수 누데바이어와 판네쿡, 1905년>

    그는 지적인 경로로 사회주의에 다가섰지만, 이론적 활동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1899년부터 1906년 독일로 오기까지 라이덴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몰입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사회민주주의의 일상생활에 개입하고 있는 다른 노동계급 전투파와 다르지 않았다. 천문학에 전념했지만,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SDAP)의 모든 활동에 참여했고 작은 라이덴 지부의 움직이는 힘이었다. 1900년 2월, 라이덴 사회민주노동당(SDAP)은 그가 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지역 노동계급을 정치, 경제, 사회적 세력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을 확대했다. 판네쿡의 강의는 지역 노동계급의 문화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당의 노력중의 하나였다. 그는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지역문화센터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지역 노동계급을 급진하는 데는 실패했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 운동은 낭만주의에서 맑스주의로 발전하는데, 1880년대에 ‘타흐티허르(tachtigers)’ 그룹에서 시작된다. ‘타흐티허르’는 초기 낭만주의, 개인주의에 기초해서 네덜란드 사회를 비판했지만, 1890년 이후 문학동아리에서 맑스주의 운동의 출현 기반을 닦는다. 1889년 맑시즘과 문학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고 논쟁은 사회주의, 개인주의의 장점에 대한 논쟁으로 변형되어 ‘타흐티허르’는 2개의 적대적 진영(개인주의·신비주의 대 맑스주의)으로 양분된다. 1890년대 초 젊은 맑스주의자 가운데 탁월한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와 롤랜드 홀스트(Henriette Roland Holst)가 등장한다. 호르터는 네덜란드 맑스주의의 발전에서 판네쿡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명은 서로 친밀한 보완관계를 형성한다. 홀스트도 호르터와 지적 친분이 있어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1897년 호르터와 홀스트가 먼저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판네쿡도 1899년 가입한다. 이들은 모두 당 이론지 ‘신시대(De Nieuwe Tijd. : 네덜란드판 신시대)’ 참가하여 활동한다. 초기 신시대 그룹은 독일 맑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고, 특히 카우츠키 저작에 의존했다. 그러나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독자적인 전망을 갖게 되는데, 판네쿡은 철학과 과학을 맡았다. 신시대는 곧 독일 카우츠키의 신시대(Die neue zeit)와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고, 그 영향도 네덜란드 이외 지역으로 확장된다.


     1908년 네덜란드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중파업이 일어난다. 1903년 이전의 사회민주노동당 내 분파투쟁은 특정한 정책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었으나 1903년 대중파업 물결에 따라 혁명전략에 대한 논쟁으로 진입한다. 이는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가 정치적 사고를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며, 이때부터 판네쿡은 좌파 저항의 주 대변인이 된다. 이때 당내 분파투쟁의 전선은 당의 성격, 지도력, 전략, 혁명적 원칙에의 헌신 등으로 명확해진다. 1903년 대중파업의 실패 직후 그는 패배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이 작동한 증거였다고 확신한다. 판네쿡은 맑스주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문제는 특히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이념투쟁의 중요성에 있다고 느꼈다.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을 위한 이론적 작업과 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독일로 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가 독일에 들어간 데에는 카우츠키와의 교류와 정치적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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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판네쿡 1908년>


    독일에서의 활동과 좌익반대파

     

     독일에 오래 머무는 동안(1906∼14년) 판네쿡은 ‘좌익반대파’의 이론가로서 빛나는 역할을 계속했고, 이 그룹의 경험은 판네쿡 사상의 본질적인 준거점이 된다. 그는 독일에 있는 동안에도 네덜란드 좌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함에 따라 1907년 10월 19일 트리뷴지(Tribune)를 창간한다. 1909년 2월 21일 드벤터(Deventer) 당 대회 일주일 후, 트리뷴지의 지지자 200명은 암스테르담에 모여 만장일치로 새로운 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한다. 1909년 2월 21일 창당대회를 연 것은 맑스가 사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고,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하여 혁명적 맑스주의 활동가 당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네덜란드 좌파가 서유럽의 다른 사회주의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계기이다.

     

     1910년까지 판네쿡의 정치적 입장은 카우츠키, 베벨, 플레하노프 같은 사상가들이 정의한 제2 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와 비교적 일치했다. 하지만, 1903, 1905, 1908년의 역사적 사건들과 국제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적 분화과정에 관한 지적 탐구와 이론적 성찰은 1910년 이후 그를 새로운 혁명 전술의 틀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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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카우츠키 포함), 1907년>


    1910~1914년은 판네쿡에게 독일 사회민주주의 밑바닥에서 강력한 실천 활동을 한 특별한 시기이다. 즉, 1903년 이래 그의 사상에서 성숙해 왔던 새로운 통찰력을 확신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판네쿡은 당의 지도부나 관료에 한정되어 만났기에 점점 운동의 적극적 삶으로부터 고립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 사민주의의 지도력이 당의 핵심적인 부분과 완전히 동떨어진 ‘그들 자신의 이해 집단’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10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판네쿡은 이 논쟁의 주요 논객으로 참여했다. 카우츠키는 의회 전술로의 회귀를 방어했는데, 대중의 분노는 대중파업 같은 ‘극단적 경로’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대신 ‘지구전 전략’을 주창했다. 그는 당의 진정한 과업은 2년 남은 의회선거에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의 승리는 최종적인 ‘전복의 전략’의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승리를 위해 당은 미숙한 대중파업의 모든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조직을 활용하는‘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요청으로 1910년 4월, 논쟁에 참여하면서 판네쿡은 그녀의 입장을 방어하는 일련의 글을 썼다. 그는 운동이 직면한 현실 쟁점은 대중투쟁의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지도부의 무능력 사이의 모순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카우츠키의  ‘지구전 전략’에 반대하는 판네쿡은 대중운동의 강화를 통한 자본가 국가의 기초를 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공격적 전략의 필요성을 재강조했다.

     

     1910년 대중파업 논쟁이 마무리되면서 사회민주당(SPD)은 세 가지 경향으로 분화된다. 수정주의, 수정주의로 움직이는 이른바 맑스주의 중앙파, 그리고 판네쿡,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새로운 ‘혁명 좌파’가 그것이다. 그 이전에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 분화가 추상적 이론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새로운 분화는 혁명 전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1910년 10월 대중행동에 대한 연설을 위해 슈투트가르트에 갔을 때 판네쿡의 새로운 주장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국가권력의 소유를 위한 자본가 계급과의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 자체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신시대에 실린 연재 글 ‘대중에 의한 행동’에서 급진 좌파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격을 시작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판네쿡이 쓴 글 ‘대중행동과 혁명’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1912년 7월 다시 시작됐다. 판네쿡은 의회 활동을 넘어서는 대중행동은 거리의 군중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실 그것은 ‘조직화한 노동자에 의한 구체적 개입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했다. 대중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솟아나는 힘의 지표이며 제국주의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전략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공격적 성격이 전제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자본주의의 권력 도구에 대한 직접적 공격으로만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레닌이「국가와 혁명」의 주요부분에 판네쿡과 카우츠키의 논쟁을 언급하면서 그를 고무시켰다. 레닌은 <카우츠키와 판네쿡의 논쟁> 끝부분에 "우리는 기회주의자들과 단호히 결별할 것이며, 모든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 관계의 변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파괴를 위해, 코뮨형의 민주공화제나 노동자병사대의원 소비에트 공화제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투쟁해나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의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와의 결별은 1910년 봄 독일사회민주당 지방 학교에서의 조직과 교육을 위해 브레멘으로 옮기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베를린 시절과 대조적으로 판네쿡은 당에 삶을 몰입했다. 브레멘 사회민주주의 조직 내에서의 4년은 그의 사상을 갈고 닦는데 풍부한 기초를 제공했으며, 그의 경력에서 가장 성과를 남긴 시기였다. 브레멘 좌파가 ‘사회민주당 극좌파의 가장 훌륭하게 닻을 내린 집단’으로 떠오른 것은 판네쿡의 조직적, 이념적 작업의 결과였다. 1910년 봄 대중동원과 그들이 독일사회민주주의에서 불러일으킨 논쟁은 판네쿡의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후 판네쿡은 이전의 저술에서 묵시적이었던 기본개념에 대해 명확한 형식을 부여했다. 대중의 창조적 혁명 에너지에 대한 믿음은 1910년 이후 그의 전략적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의회에서 의회 밖 행동으로 투쟁 영역을 옮긴 판네쿡은 ‘대중행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모호한 표현을 전면적 표어와 통합된 혁명 전략으로 전환했다. 대중행동을 ‘대표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조직화한 노동계급의 의회 밖 정치행위’로 정의하면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투쟁 형식을 하나의 전술이나 일련의 전술로 보기보다는 계급, 권력 도구 그리고 정치 행동 사이의 새로운 상호작용에 기초 한 혁명 활동을 향한 총체적 지향성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요소들의 통일은 결정적인 권력투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축적된 반란의 욕구, 권력 의지, 그리고 경제적 불만을 가진 대중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개념의 주요가정은 ‘대중행동’으로 부르는 전투적 행위 복합체는 유럽자본주의 내의 새로운 발전의 산물이자 증상이라는 것이다. 판네쿡에 있어서 대중행동은 제국주의라는 지배계급 공격에 대응하는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방어적이며, 그것이 직접적 혁명투쟁의 기제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자신감의 표시하는 점에서 공세적이다. 생활수준의 저하,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 그리고 국가 내에서의 권력투쟁에 위협받는 노동계급은 의회투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중간 매개체의 개입 없는 직접 경로로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찜머발트 좌파에서의 레닌과 판네쿡

     

     1914년 8월 이후 판네쿡의 정치활동은 국제사회주의운동 내의 좌파의 재조직화의 폭넓은 과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재조직화의 과정은 레닌과 볼셰비키로부터 주로 자극을 받았고 ‘찜머발트 운동’으로 알려진 조직적 기반을 갖게 된다. 좌파 재조직화에 대한 레닌의 첫 번째 시도는 1914년 9월 27일 스위스 루가노에서 열린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회주의자 회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 간의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간의 내전으로 돌리자는 9월 5일 테제를 제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영향을 미친 최초의 중요한 회의는 1915년 3월 26~28에 베른에서 열린 ‘전쟁반대 사회주의 여성대회’였고 2주일 후 사회주의 청년 대회가 뒤따랐다. 이 두 대회에서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촉매로써 전쟁을 이용하자는 혁명가의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종식하자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다.

     

     1915년 9월 5-8일에 스위스 찜머발트에서 열린 국제회의는 다수파와 소수파 사회주의자로 분리되었고, 반전 소수파 내에서도 독특한 좌파조류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레닌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직접 혁명투쟁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결성을 주장했다. 레닌의 안건이 3분의 1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지만, 이것은 좌파에 의한 작은 승리로 간주하였다. 이를 계기로 향후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베른에 <국제 사회주의자 위원회>를 설립했는데, 레닌은 이를 새로운 인터내셔널 사무국으로 보았다. 1915년 봄, 이 사무국은 라덱의 주도 아래 좌파의 국제 출판물을 내는 일을 하는데 판네쿡은 카우츠키의 「새시대」에 대항하는 이론지로서의 출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닌과 협의한 후 라덱은 독일어판을 네덜란드에서 출간하자고 판네쿡과 홀스트에게 10월에 제안했고 두 사람을 공동 편집인으로 추천했다. 최초 편집위원은 라덱, 판네쿡, 홀스트, 레닌, 트로츠키, 메링, 보카르트, 그림, 제트킨, 프라니아이였다. 레닌에게 판네쿡의 도움은 매우 중요했다. 판네쿡과 라덱이 생각하기에 그 출판물의 주요 초점은 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전략ㆍ전술 문제, 제2 인터내셔널 몰락의 원인, 제국주의의 본질이었다.

     

     새로운 출판물을 편집하는데 판네쿡이 기꺼이 나선 것은 그 스스로 혁명적 재조직화의 개념을 펼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찜머발트 좌파모임에서 레닌과 밀접하게 동맹을 맺었지만, 그의 전략적 분석은 몇 가지 주요 지점에서 레닌과 달랐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그는 기존하는 사회주의운동의 분열과 전통적 전술보다는 정치의식과 대중행동에 근거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적인 관심사라고 명확히 했다. 사회주의 좌파의 재조직화는 모든 국가의 지배계급에 대한 끊임없는 반대에 기초한 ‘행동의 국제주의’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국제운동의 시도는 ‘지도자의 인터내셔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1920년 레닌과의 논쟁의 핵심이 된다.

     

     국제이론지는 1916년 1월 「Vorbote」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판네쿡은 출간의 주요 목표를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사회민주주의의 전면적 분리의 전제로서 ‘낡은 수정주의와 급진사회주의의 부적절성에 대한 냉혹한 분석’이 우선 포함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판네쿡의 서문이 나가자 레닌은 판네쿡이 이론지의 성격을 바꾸고 찜머발트 좌파 대표의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난하고 「Vorbote」지가 판네쿡과 홀스트의 개인적 기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는 레닌과 라덱 사이의 더 깊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면한 쟁점은 레닌이 수용하고 라덱이 거부한 민족자결권이었다. 레닌은 판네쿡과 라덱이 카우츠키에 대한 투쟁의 접근방식이 부정확하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비판은 트로츠키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러시아와 네덜란드의 극단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또한 노동자를 조직하고 좌파의 폭넓은 운동을 세우기 위하여 출판물을 이용하는 것은 ‘순수한 레닌주의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트로츠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찜머발트 선언을 썼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를 요구하는 레닌의 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지하는 좌파에 함께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Vorbote」는 2호로 종간되었다. 하지만 「Vorbote」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찜머발트 좌파는 깨질 수 없는 계기를 마련했다. 1916년 4월 스위스 키엔탈에서 두 번째 회의가 열렸고 좌파가 무정형의 경향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찜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 인터내셔널과 찜머발트의 좌파와 제3 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찜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찜머발트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찜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찜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찜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찜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2부로 이어짐>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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