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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2부. 해체의 충격
  • 조회 수: 9171, 2018-07-10 19:19:41(2018-07-10)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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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해체의 충격

     

    11. 폴란드의 투쟁과 그 패배는 세계 계급 균형을 요약하여 보여주었다. 그 파업들은 동유럽 노동자들이 그들의 러시아 대군주를 대신하여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체제 위기 심화에 대한 혁명적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폴란드 노동자들의 물리적 충돌은 그곳의 전 지역의 노동계급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를 일으켰다. 이들 노동계급은 스탈린주의 정권의 해체를 촉발시킨 정치적 격변 때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이후의 러시아,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내재하고 있는 사악한 민족주의 선전 파도에 취약해졌다. 잔혹한 억압 없이는 위기와 계급투쟁에 대처할 수 없었던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은 역사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따라서 1980~81년의 상황은 이미 동쪽 블록의 전반적인 붕괴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쇠퇴라는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해체의 시기로 정의하는 이 단계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간의 교착상태에 그 기원이 있다. 1968년 이후 선진국들에서 터져 나왔던 계급운동은 반혁명의 끝을 고하는 것이었고, 노동 계급의 지속적인 저항은 경제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해결책”, 다시 말해 세계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이 시기는 “대규모 계급 적대를 향한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었고, 또한 저항하는 노동계급과 정면으로 맞붙어 패배시키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서는 계급투쟁의 수준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블록 양쪽 모두의 해체가 세계 전쟁을 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문제가 더는 동일한 용어로 제기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적대자를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야만의 미래밖에 없음을 의미했으며, 이 야만적인 미래의 윤곽은 지역적, 국지적 전쟁, 생태계의 황폐화, 계획적 대량학살, 동족상잔의 사회 폭력이 결합된 지옥과도 같은 광경에서 이미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패배와 직접적인 물리력이 모두 필요한 세계전쟁과는 달리, 야만으로 떨어지는 이 “새로운” 하강은 더욱 느린 속도로, 노동계급을 집어삼키고 계급으로서 스스로 재구성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상황은 더는 계급 간 세력 균형의 진화 정도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이를 측정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12. 1968년 이후 코뮤니스트 운동 부활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 쇠퇴라는 주제가 수많은 지지자를 설득시켰고, 부활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령적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코뮤니즘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이들의 다수는 쇠퇴라는 개념을 부정할만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는 해체라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다소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그룹들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제국주의 사이의 새로운 시기의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시무시한 민족주의와 같은 심각하게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의 귀환, 자연과 사람의 관계 위기 등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주요한 징후를 인정하는 다른 그룹들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급 간 세력 균형의 교착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쇠퇴의 질적 변화의 표현이라거나, 이러한 모든 단계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해체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는 종종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세계종말론적” 성향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우리가 해체의 시기를 자본주의 말기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우리가 해체 배후의 경제적 위기를 핵심 요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요인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상 계급 사회의 마지막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 막다른 길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계급사회가 그 쇠퇴의 시기에 진입했을 때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새롭고 보다 역동적인 생산 양식을 끌어낼 수 없으며, 사회적 삶의 보다 높은 형태로의 유일한 길은 경제적 법칙으로부터 비롯된 어떠한 자동화된 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인류 다수의 의식적인 운동,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힘든 작업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13. 해체는 두 주요 계급의 전쟁 중 교착 상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1989년 이후 계급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유효한 요인임이 드러났다. 지배 계급이 해체의 징후들을 착취 받는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러시아 블록의 몰락을 동반한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매우 잘 편집된 선전은 계급의 자신감과 역사적인 임무를 새로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침식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코뮤니즘, 맑스주의, 심지어 계급투쟁 그 자체는 끝났다고, 죽은 역사일 뿐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 전투성, 그리고 정체성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친 1989년의 사건은 단순히 거대한 규모의 반공산주의 선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선전의 효과성은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1917년 이후 계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독특한 발전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을 적대한 전투적 반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동시에 세계 혁명의 패배와 함께 완전히 예측하지 못했던,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부에서 반혁명이, 소련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는 어떤 보다 높은 역사적 필연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탈의 표현이었다. 반혁명 부르주아 국가 관료제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완전히 자격이 없는 것이었고, 그러한 임무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비록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가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견뎌내는 데 효과적임은 드러났을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 자본을 형성시키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비록 스탈린주의 정권이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나 반동적 형태였을지라도, 봉건적이거나 전제적인 종류의 정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도 결코 아니었다. 비효율적인 회사가 제거됨으로써 처벌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해고되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는 부르주아지의 성공이 될 수 없다. 스탈린주의의 특수성을 반혁명의 예상치 못한 산물로 심각하게 이해한 덕분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1989년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파열에 의해 전복된 것이며, 이러한 동쪽의 붕괴는 유사한 서쪽의 붕괴를 미루는 조짐이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그 붕괴는 지배계급에 마지막으로 큰 서비스를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현실에서 입증된 듯하다. 적절히 기능하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차이는 매우 중대하고 광범위하여 실제로 사람들에게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비쳤다. 스탈린주의가 존재했던 이전에는 그것이 마치 자본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비록 바로 이 대안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 존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고에 잠재적인 상처를 남겼다. 1960년대 계급투쟁의 부활은 이러한 상처로부터 반자본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그리고 국가 관료제나 정당 국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혁명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이들에게 세계 혁명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 “그림의 떡”이었다면, 그 이유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권력, 또는 인류라는 종이 내재한 이기주의와 파괴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은 대중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서 평형추를 찾아낼 수 있고, 종종 실제로 그러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한 1989년 이후 질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부상했다.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과 계급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어적 경제 투쟁을 전개하기도 더 어렵다. 왜냐하면, 대안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라는 논리가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투쟁이 당장 직면한 상황이 상당한 정도로 변화할 수 있는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이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자가 되거나, 코뮤니즘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계급이 자본주의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4. 그러나 전반적인 해체의 진행은 더욱 은밀하게 작동하고, “그 자체로” 노동 계급, 그리고 계급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 일어난 구조적 변화 때문에 “뒤에 남겨진” 장기 실업 계층과 부분적으로 고용된 계층들 사이에서 특히 뚜렷하다. 과거 실업 계층은 노동자 투쟁의 전위였으나, 이 시기 그들은 룸펜화, 조직폭력, 그리고 성전주의자(jihadism) 또는 네오파시즘과 같은 허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매우 취약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 89년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를 예견한 바와 같이, 계급은 장기간 후퇴의 시기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후퇴의 길이와 깊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프랑스의 반 CPE 운동), 그리고 2009년에서 2013년 사이의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나라(튀니지,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미국, 스페인 등)에서의 새로운 노동계급 세대의 중요한 운동,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모두 계급투쟁이 다시 한번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혁명 운동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많은 발전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혁명적 전위가 얼마나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5. 2011년 전후의 투쟁들은 경제적 위기의 심화 영향에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경제적 위기란 보기를 들면 그 지지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고용의 불안정 그리고 심지어 몇 년간의 대학 교육을 이수한 젊은이들조차 기회가 부족한 점 등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의 심화와 계급투쟁의 질적 발전 사이에는 어떤 자동적 연결도 없다. 그것이 이미 패배한 노동계급의 사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오랜 동안의 패배와 방향 상실 이후 2007~8년의 금융 지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굉장히 부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경제적 확장의 심장부에 있었으나 내재적 모순으로 이제 그 붕괴를 예고하고 있는 신용(credit) 시스템의 확장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다. 이 “금융화”의 과정은 이제 거대한 금융 기관들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 수준에서도 작동했다. 이 수준에서 상황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것과 매우 다르다.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제외한 이른바 중산 계급(적은 재산의 소유자, 자유주의적 전문가들 등)의 대부분에게 잃어버릴 저축이 있었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험이 있는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간신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서 그러한 국가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당장의 물질적 상황이 80~90년 전보다 덜 극적이라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국가들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확히 자신을 1930년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여있음을 정확히 알 것이다. 그들은 종종 엄청난 규모의 채무자가 된 것이다. 19세기 동안, 그리고 1945년 이전의 많은 부분 동안, 오직 채권자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술집이나 카페, 그리고 식품 소매점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그들은 오직 계급 연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주택과 건물 융자와 함께 큰 규모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의 신용대출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대규모 소비자 부채의 전개와 함께 폭발했다. 노동 계급의 많은 부분에서의 이러한 신용 경제의 전례 없이 세련되고, 교활하고 불안정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부르주아지의 노동계급 수입의 전유는 감춰져 있으며, 그것이 저축의 평가절하, 은행 또는 보험 상품의 부도, 또는 시장에서의 주택 소유권 몰수의 형태로 나타날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복지 국가”의 보장과 그들의 재정이 점점 불안정해짐으로 인해 이러한 공공 체계에 대해 지급할 수 있는 이들과, 그들만큼 지급할 수 없이 그저 이들 체계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 이들로의 노동자 사이의 구분이 더욱 쉬워진다.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빚의 늪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를 훈육하는 새롭고, 추가적인,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붕괴의 결과가 그 순손익이 많은 이들에게는 궁핍함으로, 그리고 작은 소수에게는 파렴치한 부의 이전이 될지라도, 충돌의 전반적인 결과는 자본주의 체계의 노동에 대한 이해를 날카롭게 하거나 확장시켜주지 않는다. 불평등의 증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부패한 도시 엘리트”를 향했고, 이는 우익 포퓰리즘의 주요한 강조점이 되었다. 위기와 동반하는 부정에 대한 반응이 미국의 점거 운동(Occupy movement)과 같은 보다 프롤레타리아적 형태의 투쟁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이러한 운동조차 탐욕스러운 은행가, 심지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섬세하게 붕괴를 조장한 비밀 그룹에 대한 비판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상당 부분 약해졌다.

     

    16. 1917~23년의 혁명 물결은 1871년, 1905년의 봉기 운동과 같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점화되었고, 혁명가들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어서 매우 호의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실제로는 혁명 물결의 패배가 보여준 것은 전쟁이 계급 내 심각한 분열을 낳는다는 것이었고, ‘승리한’ 나라와 ‘패배한’ 나라의 노동자 간에 특히 그러했다. 더욱이 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지는 1917년 일어난 일로부터 필수적인 교훈을 배웠고,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응 가능성을 제한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적군들과의 우애를 다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도록 만드는 군사 기술 전략과 형태의 발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 이후 서쪽의 지배 계급의 약속과는 반대로, 그것이 열어젖힌 새로운 역사적 단계는 결코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군사적 혼란,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 유럽의 문마저 흔든, 점점 더 지루한 전쟁의 확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야만이 드러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이제는 예멘과 시리아의 사건은 이러한 전쟁과 직접 관련된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포함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넓은 영역들에서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나, 프롤레타리아 형식의 반대는 이러한 해체의 전쟁들 가운데 매우 드물었다. 직접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노동 계급은 스스로 지역의 군사적 갱들과 그들의 제국주의 스폰서들에 반대하여 스스로 조직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이는 시리아에서의 최근 전쟁에서 가장 명백했다. 이 전쟁에서는 공중 폭격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폭격과, 무엇보다도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대학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선의 건설과 정권의 반대자들을 다양한 무장 갱으로 징용함으로써 발생한 최초의 사회적 불만들의 탈선이었다. 자본주의의 가운데에서는 그러한 소름 끼치는 시나리오는 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현재 체제에 대한 어떤 저항 시도도 오직 더 나쁜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봄”의 우울한 운명은 혁명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논거로 쉽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 몇 년간의 유럽 주변부 모든 국가에 대한 야만적인 분할은 체제의 중앙에 있는 노동계급에까지 부메랑이 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한 편에서, 세계적 수준의, 그리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그 범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지구적인, 난민 위기의 진행, 다른 한 편에서, 테러리즘의 발전이다.

     

    17. 유럽 난민 위기를 촉발시킨 순간은 2015년 여름 “발칸 루트”로부터 비롯된 난민에 대한 독일(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이었다. 메르켈 총리의 이러한 결정의 동기는 두 가지였다. 우선 독일의 경제적, 인구통계학적 상황(주요 산업에서 당장 질적으로 보증되고 “동기화된” 노동력의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 두 번째로, 남동 유럽이 수백만의 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법과 질서가 붕괴될 위험.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는 다른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의 결과를 잘못 계산했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난민들과 자본주의 비참함의 다른 희생자들은 유럽으로, 특히 독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셍겐(Schengen)”조약 또는 “더블린 난민 협정”과 같은 조약이 있어 독일의 문제를 EU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첫 번째 결과는, 그러므로, 아마도 지금까지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유럽 연합의 위기였다.

     

    유럽에 수많은 난민이 도착하자 처음에는 전체 사람들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동정의 물결 – 이탈리아 또는 독일과 같이 충동이 여전히 강한 나라들에서 - 이 일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곧 유럽의 외국인 혐오 때문에 파묻혀 버렸다.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포퓰리스트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법과 질서의 비밀 군대와 전문적 수호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이들은 갑작스럽고 통제되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유입을 매우 경계했다. 그들이 사는 국가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숫자의 무슬림 유입이 유럽 내에서 이민자들의 하부 공동체를 발달시키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테러리스트의 유입에 대한 공포를 동반했다. 이러한 공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의 테러 공격의 증가 때문에 강화되었다. 독일 하나만 보아도, 이민자들을 향한 우익 테러 공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전 옛 동독 일부에서는 실체적인 대학살의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경제 위기 이후 우익 포퓰리즘의 불길에 부채질하는 (근본주의자 테러 때문에 증가한) “난민 위기”가 두 번째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2008년 이후 경제 위기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부르주아지 내부의 심각한 분열의 길을 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5년 여름은 이민에 대한 합의의 종말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책의 기반은 지금까지 반쯤 개방된(semi-permeable) 국경의 원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쌓길 원한 멕시코 장벽은 이미 존재하며, (군사적 순찰선 또는 공항 감옥 등의 형태로) 유럽을 둘러싸고도 그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장벽의 목적은 이민의 속도를 늦추고 규제하는 것이지 막는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은 그들을 범죄화하여 그들이 어떤 사회적 보상의 권리도 받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건 아래 적은 임금만을 위해 일하게 강요한다. 더욱이, 승인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국경 지역의 체제는 결국 가장 용감하고, 단호하며, 역동적인 이들만 선별하는 야만적인 선택 메커니즘의 한 종류가 되었다.

     

    2015년 여름은 사실 존재하는 이민 시스템 붕괴의 시작이었다. 이민하려는 이들은 계속 증가해 왔던 반면, 그들이 이민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독일의 경우는 다소 예외이다) 이 불균형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포풀리스트들은 손쉬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반쯤 개방된 국경을, 그 어떤 수준의 폭력이 필요할지라도 폐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들의 제안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전 국가 수준의 “폐쇄된 사유지(gated communities)” 논리의 적용에 불과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상황이 노동계급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당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동쪽 블록의 붕괴는 마치 서쪽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의 증거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위기의 심화가 결국 자본주의가 최고의 현실적인 체제라는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난민들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목숨을 걸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오직 이러한 구역이 (적어도 비교적으로는) 천국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의 지역이라는 인상을 강제로 심어줄 뿐이다.

     

    세계 경제의 붕괴가 미국과 독일에 집중되었던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관리로 인해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일하진 않지만)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포위된 요새와 같은 상황이 등장했다. 이 지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뒤에서 적극적으로 동원되지는 않더라도, 외부로부터의 공동 위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착취자들이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라는데(심리학적 용어를 빌자면, “침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러한 위험은 현실이다.

     

    18. 중동 전쟁에서의 테러 공격에 대한 “반응”은 최근의 난민 위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2001년 알카에다의 쌍둥이 빌딩 공격 뒤로 마드리드와 런던 교통 체계에 대한 더 극악무도한 테러는 이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뿌린 씨앗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타났으며 이를 거두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독일, 프랑스, 벨기에, 터키, 미국 등지에서의 살인의 급증은 IS(Islamic State) 탓이지만, 비록 미숙하고 심지어 변칙적인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은 테러리스트 “군인”과 고립되고 불안한 개인들을 구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 탓이기도 하며, 이것이 난민 위기와 함께 발생함으로써, 전체 주민들 가운데 의심과 편집증적 과대망상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형식이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IS와 그 모방자들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반-게토화된 거대한 서쪽 도시들 속에서 더는 미래가 없음을 인식하는 불만이 가득한 이민지 청년들에게 짧은 영광의 순간을 제공한다. 해체의 시대 테러리즘은 더욱더 국가와 준-국가 사이의 전쟁 수단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주의의 표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19. 그러므로 최근의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이 모든 요인들 – 2008년의 경제적 붕괴, 전쟁의 충격, 테러리즘, 그리고 난민 위기 – 에 의해 성장했고, 체제 해체와, 사회의 두 주요한 계급들 모두 인류에게 미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농축된 표현으로 나타났다.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는 70년대 개방 경제 위기의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심지어 축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신자유주의” 합의가 소진됨을, 그리고 특히 전후 호황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소진됨을 의미했다. 2008년 붕괴는 이미 존재하던 매우 부유한 소수와 대다수 사이의 거대한 부의 격차를 보다 넓혔는데, 탈규제와 지구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에 의해 고안된 틀 내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부르주아지의 점점 더 많은 이들, 신자유주의와 신케인즈주의를 같은 선전 연설 중에 동시에 지지할 수 있는 이들 포퓰리스트 우익과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고 있었다. 포퓰리스트 정책의 본질은 부르주아 사회 불평등의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법적 공식화이다. 2008년 위기가 상황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이러한 공식적인 평등이 전에 없이 명확한 사회적 불평등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해결책 – 계급 없는 사회 - 을 내놓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포퓰리스트의 반동적 대책은 존재하는 위선적인 가짜 평등을 노골적이고 “솔직한” 불법적 차별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고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주창한 “보수적 혁명”의 핵심이다.

     

    “미국 먼저”(America First)와 같은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첫 번째 징후는 국민 전선의 선거 강령, “프랑스 먼저”(France d’abor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고용, 세금, 그리고 사회 복지의 모든 수준에서 유럽 연합의 다른 국적 사람들보다 프랑스 시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결국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영국에서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유럽 연합의 시민들이 영국 원주민과 외국인 중간 지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주요 논지는 유럽 연합의 거래 정책에 대한 반대이거나, 대륙인 유럽을 향한 영국의 보호주의적 충동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민과 국내 노동 시장에 대한 “민족적 주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 주장은 장기적 민족 경제의 성장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다른 모든 이들을 차별함으로써만 원주민의 삶의 조건이 다소간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20. 이른바 금융과 유로 위기는 1989년 이후 계급의식, 계급 정체성과 전투성의 장기간의 심각한 퇴조에 치료약이 되는 대신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일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에서의 연대 상실의 치명적인 효과는 심각하게 증대했다. 특히, 우리는 희생양 현상, 이 사회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세계의 모든 악이 투영된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대량학살로 가는 문을 연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 속에 퍼져 있는 문제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것은 협력을 약화시키고, 원자화, 그리고 상호 의심과 약탈의 발전을 부추긴다.

     

    맑스주의 노동자 운동은 이러한 경향에 평형추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통찰을 오랜 시간 동안 방어해왔다. 두 가지 가장 본질적인 통찰은 1) 자본주의 아래에서 착취는 비인간적 성격이 된다. 왜냐하면, 시장의 “법칙”(가치법칙)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이러한 법칙에 복종한다. 2) 이러한 기계와 유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계급 간 사회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부르주아 국가 의지의 법칙(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창조와 강요)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계급투쟁은 사람과 싸우는 대신, 사회관계를 바꾸기 위해 직접 체제 – 체제를 체화하고 있는 계급 – 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통찰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의식적인 계급의 층위라고 해서 희생양에 대한 면역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회복탄성력을 준다. 이러한 통찰들은 심지어 반혁명의 가운데서도, 그리고 심지어 독일에서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유대주의에 더욱 오랫동안 저항했는지 그 이유를 일부 설명해 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전통은 지속해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노동 계급은 계급 일부가 심각하게 그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독의 확산에 유일하게 진정한 방패로 남아있다.

     

    21.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당장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포퓰리스트가 현재 집권해 있는데, 거리의 대규모 저항은 어쨌든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그 “자유주의적” 규제들을 방어한다. 대중들을 동원하는 또 하나의 이슈는 브라질, 한국, 루마니아 또는 러시아에서와 같은 부패에 대한 투쟁이다. 이탈리아의 오성(Five Star) 운동도 주요하게는 같은 문제로 고무되었다. 부패는 자본주의의 풍토병으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시기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다. 국가 자본의 이해를 방어하는 가운데에는 부패가 생산력과 경쟁력을 방해하는 한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저항에서 국기를 흔드는 대중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부르주아 선거 과정에서의 이해관계의 재편도 있다. 연대의 후퇴 영향 아래에서 노동계급 일부분은 포퓰리스트에 투표하는 희생자가 되거나 기존의 정치 계급에 반대하는 종류의 것에 빠진다. 오늘날 해방의 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지배 계급에게 충격을 주고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큰 위험은, 생산 과정의 핵심에 있는, 가장 현대화되고 지구화된 계급의 부문들이 혐오스러운 포퓰리스트의 배타주의에 분노하고, 이러한 정치적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안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다소 명확한 이해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권의 군림을 방어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에 있다.

     

    22. 포퓰리즘의 등장, 그리고 반 포퓰리즘의 등장은 노동 계급이 악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에 붙잡혀 버렸던 1930년대와 어떤 유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1930년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 시기에는 소련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반대뿐만 아니라 물리적 패배로 고통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은 반혁명의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물리적 패배를 강요하는 모든 시도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30년대와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포퓰리즘 또는 반포퓰리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이 전혀 결정적이지 않다. 포퓰리즘 후보를 찍는 많은 노동자들은 어느 날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반포퓰리즘 시위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노동계급, 무엇보다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사는 이들은, 계급의 특정 부문에서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국가의 이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울 가능성 또한 잃지 않았다. 이러한 잠재력은 68년에서 89년 시기, 그리고 2006년과 2013년 사이의 투쟁보다 훨씬 더 분산되고 단기적인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지속해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동시에 소수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어려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와 성숙의 과정이 계속되며, 이것이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넓은 계층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더욱 숨겨진 과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반생산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착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강점 중 하나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현존하는 환상에 강하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막다른 길의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자본가 계급의 객관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3부로 이어짐>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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