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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2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 유럽 코뮤니스트의 형성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판네쿡이 그의 생애 과거 20년을 헌신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와 같이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판네쿡은 혁명과정의 뉴스를 따라 추적하고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그 의미를 분석했다.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년 이전에 판네쿡과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실현하는 기구형식을 모호하고 일반화된 용어로 설명했었다.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토론했지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보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 판네쿡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미래 혁명의 경로에 대한 예후에서 판네쿡은 종전의 태도를 뒤집고 러시아가 “유사-맑스주의 교조주의의 형태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무르익지 않았다.”라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난했다. 룩셈부르크 같은 볼셰비즘에 대해 다른 비판자와 달리,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실제적 견해에 동조했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확신은 그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수행함에 비타협적 헌신을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힘은 조직 구조에 있지 않고, 공격적 전투력과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굶주림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린 그들의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성숙은 투쟁과 권력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숙에 결정된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판네쿡에게 볼셰비키의 투쟁은 유럽 전역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것에 주로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짜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1917년은 전쟁의 피로가 최고조에 오르자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격정의 해였다. 민중적 불만이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고조된 독일만큼 위기에 처한 나라는 없었다. 브레멘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발발이 혁명적 좌파의 상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이 나자, 브레멘 경찰은 보고서에서 ‘행동파 혁명 좌파 소집단은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 혁명의 위험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영향의 가장 최초 직접적인 표현은 1917년 3월 31일 나타났는데, 수천 명의 브레멘 부두 조선 노동자가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와 전쟁 지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고 시 중앙으로 행진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1917년 봄 동안 미래에 채택할 조직형식에 관한 브레멘 좌파들 내부의 토론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독일사회민주당(SPD)으로부터 좌파의 축출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판네쿡의 관점에서 브레멘 좌파의 당과 노조 조직의 옛 형식은 새롭고 직접적인 계급 도구가 기대되는 혁명적 투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린 새로운 조직 형식의 모델은 미국의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2)에 대부분 영감을 얻었다. 새로운 조직 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더욱 강화되었다.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혁명적 기질은 여러 곳에서 보이게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파업투쟁은 주로 현장 활동가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참여로 나아갔다. 노조 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 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 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독일국제사회주의자(ISD)의 창립대회를 한다. 여기서 ‘국제’라는 말은 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발전할 제3 인터내셔널’과 현존하는 찜머발트 좌파의 회원임을 밝히는 의미였다. 내부구조로 보면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혁명 투쟁에 대한 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믿음은 두 번째 자발적 파업이 1918년 1월에 일어나자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9월 초와 10월 초의 주요 패배를 뒤이은 군사 상황의 악화는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국가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1918년 11월 4일 키일(Kiel)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되었고 독일 전역으로 눈사태처럼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혁명의 형식은 거의 그들의 예측과 같았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평의회(소비에트)가 조직 형식으로 평의회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독일 노동자의 경험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 주요세력이 된 독일사회민주당의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과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전략적 입장을 요약하는 두 가지 주요 표어를 채택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가 그것이다.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독일 혁명의 직접적 참여자는 아니지만, 판네쿡은 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하게 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평가는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 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적 행동계획의 추적을 시도하면서 판네쿡은 전쟁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진정한 형식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로 전쟁 전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독일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에 더욱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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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혁명은 점차 두 적대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상반되는 표어, 즉 의회냐 평의회 체계인가라는 상징 표현의 이러한 갈등은 독일 혁명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에 기반을 둔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주도의 임시정부는 옛 정권의 기구와 동맹을 맺고 평의회 권력을 침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으며 혁명을 좌파에게 몰아가길 바랐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러한 세력의 연합은 노동조합주의를 정당화하고 평의회를 격하시키는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Stinnes-Legien 협약으로 제도화되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독일국제사회주의자(ISD)는 그 이름을 독일국제코뮤니스트(IKD)로 바꿨다. 그리고 독일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할 수 있는 일간지 코뮤니스트(Der Kommunist)를 창간했다. 혁명의 혼란스러운 처음 몇 주간 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단결 부족은 좌파를 무겁게 짓눌렀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특히 좌파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통을 겪었다. 사건의 속도가 순간순간 달라지고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했다. 이 시기 동안 칼 라덱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중재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파견자로 모스크바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독일국제코뮤니스트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으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되었다.

     

    공식적으로 독일공산당(KPD)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당시의 토론은 독일 코뮤니스트의 두 흐름 사이의 전망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분화 지점은 새로운 조직의 성격이었다. 스파르타쿠스 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새로운 당이 모든 공산주의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재천명했다. 판네쿡의 관점에 따라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 조직의 진정한 바탕은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 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독일공산당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 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독일독립사회민주당은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독일공산당은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여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

     

    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하는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 배후에는 평의회와 공공모임에서 평의회 권력의 형식을 선언할 필요에 대하여 수 주간의 토론이 있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독일공산당이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평의회공화국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처음 3주간은 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시위와 사회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지만, 지역 조건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 구조는 대체로 문서상의 체제에 불과했다.

     

    1월 25일 독일사회민주당의 내무장관인 노스케(Noske)는 중앙정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브레멘 봉기를 무력으로 분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그는 자유군단(Freikorps) 연대에 브레멘으로 행진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도시 탈환의 전투는 2월 3일 시작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마지막 타격은 좌파의 주요 거점인 Weser 부두가 2월 5일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유혈의 패배 이후 평의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독일사회민주당 지배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패배와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독일공산당과 브레멘 노동계급은 4월 2주간의 총파업을 포함한 저항을 1919년 동안 계속했다.

     

    독일 좌파의 명백한 패배는 제2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판네쿡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다. 1919년 1월 2일 비극적 사건을 놓고 판네쿡은 좌파의 패배가 혁명투쟁의 전 시기에서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으로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 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독일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전면적 검증을 하는 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와 기꺼움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된다.

     

    코민테른과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설에 따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브레멘 좌파는 코민테른의 가장 열성적 옹호자들이었는데,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 승리로 코민테른은 러시아의 주도 아래 결성된다. 새로운 세계혁명운동의 성격에 대한 판네쿡과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네덜란드와 브레멘 좌파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초기 러시아와 서유럽간의 소통을 위해 베를린에 서유럽 서기국(Secretariat)을, 암스테르담에 서유럽 사무국(Bureau)에 두도록 결정한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은 회의를 암스테르담에서 조직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면서 1920년 1월 활동 시작한다. 회의는 많은 사람에 코민테른 대회와 동급으로도 비추어진다. 1920년 2월 개최된 회의는 사무국 활동의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사실상 최초로 서유럽 인터내셔널로 복무하고자 했다. 회의에서는 네덜란드 대표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소한 12개국에서 참가하여 코민테른 창설 시보다 더 많은 대표가 참여한다. 회의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고, 경찰에 일찍 해산되었지만, 그런데도 서유럽 공산주의 개념의 특수성을 최초로 확정했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은 의회주의, 노조주의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조직화 원칙으로 노동자 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그것은 판네쿡이 초안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였으며, 공개적으로 코민테른 정책에 도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판네쿡은 이때 즉각적으로 사무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등장했고, 노조운동에 대한 테제에서도 같은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회주의, 노조운동에 대한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반감, 그리고 (코민테른에 소속된) 각 당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코민테른 지도력과 네덜란드 좌파 간 전망에서의 주된 차이를 보여주었다. 볼셰비키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심각한 차이점은 찜머발트 운동 시기까지 올라가지만, 양 당파의 차이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무마됐다.

     

    네덜란드에서는 처음에 볼셰비키, 코민테른 모두 의회주의 전술을 거부한다고 보고 그것을 당연시했다. 특히 그것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코민테른 초기 문건 등 몇몇 저작에 기인했다. 하지만 볼셰비키 이론과 실천은, 혁명가들이 대중을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을 공격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를 허물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기간 강조해 왔다. 의회주의 전술에 대한 판네쿡의 반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로서의 평의회 체계에 대한 그의 지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판네쿡은 의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외관만 띨 뿐, 자본가 헤게모니의 주요 수단의 하나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와는 달리 노동자 평의회는 통합적인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 체계에 전체 노동계급을 통일시킬 것이며, 혁명전략, 사회주의적 사회 재조직화의 근본문제는 더는 전통적인 ‘지도력 정치’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공격적인 전투성, 독립적 전망은 자체 하위 사무국으로 전미 임시 사무국을 조직화하려고 했을 때,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자신을 코민테른의 도구가 아니라 미래 유럽 혁명을 위한 주 혁명 센터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국의 독립적인 혁명적 전망은 많은 부분 서유럽에 특수한 공산주의 개념화의 반영이었지만, 또한 그것은 암스테르담과 모스코바 간의 소통 부재에 의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사무국-모스크바 간에는 얼마간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없다가 소통수단을 갖추게 된 시점에 사무국의 정책과 활동이 모스크바에 알려지게 되었고, 코민테른 지도부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곤혹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분열점은 사무국이 새롭게 형성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이며, 코민테른 지도부의 반응은 신속했고 단호했다. 4월 30일 모스크바 방송은 사무국을 폐쇄하고 그 기능을 베를린 서기국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한다. 그 결정은 협의나 호소의 기회 없이 내려진 것이었다. 이 조치로 서구 코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코뮤니스트 센터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잃게 된다.

     

    레닌 대 판네쿡-호르터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는 코민테른에 배척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 레닌(주의)의 성격과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판네쿡과 사람들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은 세계혁명, 비타협적 계급투쟁, 전투적 반-의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반대를 예견했다 할지라도) 좌익공산주의가 세계혁명의 옹호자인 레닌과 확고한 제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속 확신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 전술에 영향을 미치려는 희망으로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이라는 제목을 단 문건을 작성했고, 그것은 즉각 좌익공산주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판네쿡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 맞는 혁명개념을 마련하기 위해 광범위한 이론, 경제, 사회, 역사적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판네쿡은 혁명적 실천의 동유럽적 형태와 서유럽적 형태를 구분했다. 서유럽에서는 오랜 부르주아 문명화가 대중들의 사고와 감성에 철저히 침투했는데, 독일 혁명에서 그것은 특히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판네쿡은 서유럽에서 주된 전술적 문제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공리처럼 여겼다. 그는 서유럽의 낮은 수준의 노동계급 의식, 늦은 혁명적 발전에 따라 2가지 갈등하는 전술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대한 강조는 그가 사회민주주의의 대중정당, 러시아 볼셰비즘의 엘리트주의적 전위 양자를 모두 거부하게 한다. 판네쿡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 간의 차이는 깊고 실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분기를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러시아 혁명이 갖는 세계-변형의 중요성을 믿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대중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발화시켰고, 그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유럽 혁명과 서구 자본에 대한 아시아의 대규모 반란을 가져오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평가는 러시아 혁명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덜 강조하면서 민족해방운동으로서 그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판네쿡이 이 같은 주장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레닌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준비하면서 좌익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전략적 분석을 발전시킨다. 즉,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이것은 레닌 저작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묘사되듯, 즉각 코뮤니스트 전략, 전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레닌은 서유럽에서 늦은 혁명 진척에 따라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을 향한 단축 시기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장기적 싸움이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코뮤니스트는 가장 반동적 제도라 할지라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들어가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와 의회 속으로’는 좌익공산주의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레닌의 처방이었다.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지도자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레닌은 대중 조직에 침투하는 예외적인 수단들을 요구한다.

    레닌은 논쟁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하고, 특히 절대적 집중화와 강력한 규율이 부르주아를 이길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레닌은 신랄한 언어를 동원,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의 전술적 책략의 부재를 비난하는데, 특히 판네쿡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견실한, 그리고 특별히 우둔한” 것으로 지적한다. 레닌은 당 조직화의 전위모델을 좌파가 부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해 앞에 프롤레타리아를 완전히 무장 해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독일 입장은 불법이 불필요했던 국가에서 태어난 불행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말한 뒤, 그들은 ‘대중들의 정당이 아닌 동아리, 즉, 지식인주의의 가장 나쁜 측면을 닮은 지식인, 소수 노동자의 그룹’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으로 결론짓는다.


    이에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에 실은 짧은 후기를 통해 레닌의 주장과 비난에 대응한다. 그는 레닌 정식은 독창성,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것이 레닌이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과제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또 다른 주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레닌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통적인 의회주의, 노조운동 전술에 대한 레닌의 방어는 민족국가로서 러시아의 역할,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사명감 사이의 모순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그 모순을 분석하면서 경제 재개발에 대한 러시아의 절박했던 필요성을 지적한다. 판네쿡은 러시아의 정치적 요구가 서유럽에서 코뮤니스트 전술을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되고, 코민테른은 서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러시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러시아가 잠재적으로 혁명에 대한 반동적 방해물이 되고, 반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힘들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판네쿡은 이처럼 러시아 혁명의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첫 번째 코뮤니스트 이론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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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호르터, 1864~1927>


    레닌에 답변하는 주된 과업은 호르터에게 남겨진다. (그의 글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호르터는 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중 레닌과 가장 긴밀한 관계라서 논쟁에 끼어들 것 같지 않았던 인물이다. (호르터는 「국가와 혁명」 등 레닌 저작을 번역, 자신의 저작 「세계혁명」을 레닌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호르터도 서유럽, 동유럽 코뮤니스트의 차이점을 축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당신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뛰어난 것이었고,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서유럽에는 무엇을 입증했는가?”) 그는 두 지역의 농업 부분의 차별성을 추적했는데, 동유럽 농민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반면, 서유럽 농민은 노동자를 계급의 적으로 인식하는 개별화된 소부르주아 기업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노동자들은 참호에 둘러싸인 부르주아에 홀로 맞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했다. 호르터는 서유럽 전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을 특징했던 같은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격하게 주장한다.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하여, 호르터는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호르터의 분석은 판네쿡과 유사하지만, 다른 몇 가지 점도 존재하는데, 판네쿡은 서유럽 혁명의 늦은 진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 때문이라고 보았고, 호르터는 프롤레타이아의 주요 걸림돌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리적 힘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호르터는 (레닌, 코민테른 주장과는 다른 것이지만) 확고한 맑스주의 원칙, 당의 중앙집중화, “철의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로 이어짐>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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