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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 조회 수: 5377, 2018-07-14 13:01:41(2018-07-14)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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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23.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요 공격 중 하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2월 봉기의 민주주의적 희망과 볼셰비키에 의한 10월 “쿠데타”를 억지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10월 쿠데타가 러시아를 재앙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선을 무너뜨릴 필요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며, 이 제국주의 전선은 “민주주의” 편을 포함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분파 때문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응답이었으며, 이런 수준에서 1917년 10월은 잃어버린 시대의 폐허와는 거리가 먼, 인류의 미래의 이정표였다.

     

    오늘날, 세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은 모든 반격 이후, 노동계급은 그 혁명적 프로젝트의 회복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코뮤니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곤경의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코뮤니즘이 부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허함의 형태로 그것은 세계의 상황은 곧 지배한다.”(세계의 상황에 대한 보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대회). 20세기와 21세기의 수많은 야만,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에서 후쿠시마와 알레포까지, 그것은 수십 년 전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패로 인류가 치러야 했던 매우 값비싼 대가였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 문명 쇠퇴기의 이 늦은 시간에, 혁명적 변환의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진다면, 인간 사회의 생존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진정한 가능성을 띠고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한 편에서 그들은 객관적인 가능성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첨예해지는 충돌에 내포되어 있다. 쇠퇴기 해체의 자본주의는 모든 불황의 시대를 견뎌왔던 이전의 계급 사회들과는 달리 지구적 확장을 멈추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에까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져 왔다. 몇몇 수준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 현대 기술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실제 사용에 잠재적으로 내포된 모순. 정보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고된 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편에서 그것은 일자리를 줄이고 다른 한 편에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적이고 연합된 성격의 자본주의 생산과 그 사적 소유권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한 편에서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 손톱만 한 소수의 오만과 낭비 때문에 그 사회적 부가 전용된다는 모순은 삶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노골적인 빈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 노동의 연결 수준의 객관적인 세계적 성격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종종 스스로 극단적으로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잠재적으로 국제 계급투쟁의 힘에 새로운 원천을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혁명적 대결을 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열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과잉생산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특히 대규모 부채에 의존하는 등을 의미한다.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합리함으로, 풍요의 가능성과 자본주의 아래 그러한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을 동시에 가리킨다. 다시, 기술적 발전의 예시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부각시킨다. 인터넷은 모든 종류의 무료 재화(음악, 책, 영화 등)를 분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이윤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무료 배포도 축소하거나 상품을 광고하는 광장으로만 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대한 관료체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과잉생산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인류 대중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 1980년대 시작된 지구화의 특정 단계는 맑스가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예언한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수 없는 지향으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한 장벽에 직면한다. 이 본질은 발전의 특성 단계에서 스스로 보편성 경향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극복으로 나아갈 것이다.”1) 1차 세계대전 시절의 혁명가들은 물론 이 모순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가 민족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여 자본이 실제로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의 첫 번째 명백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의 이러한 극복이 – 사실 몰락이 – 순수하게 경제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막다른 길에 가까워질수록, 군사적 수단들을 통해 타자를 희생하면서 “생존”을 향한 추동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 푸틴 등등의 노골적인 민족 전쟁은 인류의 통합과는 먼 자본주의 지구화가 우리를 자기-파괴에 더욱 더 가깝게 몰고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연으로의 몰락이 반드시 세계 전쟁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그러하다.

     

    -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시작에서부터 “공짜 선물”로 여겨지는(애덤 스미스) 본질 사이의 모순과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체의 단계에 도달한 것. 이는 기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같은 노골적인 공공 파괴, 그들의 주적인 중국의 성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희생을 감수한 성장을 향한 열띤 사냥으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대기의 도시들을 탄생시켰고, 이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리고 고대의 미신과 현대의 깡패 자본주의의 기묘한 결합은 아프리카의 모든 종의 파괴를 가속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뿔과 가죽의 마법적인 힐링 효과를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열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의 건강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의 영속화가 군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교환 수준에서도 인간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위에 언급한 더는 견딜 수 없이 첨예화된 모순은 어쨌든 하나의 해결방법을 가리킨다.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세계 생산의 연합, 인간 존재 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과의 연합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주로 드러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부분,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비록 역사적 상황의 심각성을 점점 더 깨닫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이전 수십 년간 공유해 왔던 “미래가 없다는” 절망을 더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연합된 생산력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둔다. 이 앎이란 과학적, 기술적 진보로 표현되는 잠재성, 지식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의 “축적”, 그리고 인류와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하고 결정적인 이해의 성장이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부분 – 2011년, “세계 혁명”의 깃발을 한껏 높였던 서유럽 운동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 은 오늘날 노동의 연합이 띠는 국제적 성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투쟁의 국제적 통합의 가능성을 더 잘 움켜쥘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구적 통합은 자본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회피해야 할 해결책이며, 그것이 교환을 위한 생산에 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일지라도 그러하다. 쇠퇴의 시기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주의적 방식으로 사회 통합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다급한 탐색의 일종이며, 자신의 붕괴를 부추기는 체제의 “자연법칙”이 전개되는 시기에 지배계급이 경제적 삶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시도이다.

     

    24. 자본주의가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마법으로 없앨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동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혁명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려움 - 코뮤니즘의 “소유권”을 부활시킬 수 없는 명백한 무능력 -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뮤니즘을 향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 재구성이 여전히 오늘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의 객관적인 필요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주관적인 바람을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고, 연합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낼지 이해하기 위한 탐색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10월의 기억, 실제로는 독일혁명과 세계규모의 혁명적 물결이 10월에 의해 활성화된 것을 포함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억압되었으나, 모든 억압된 기억은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안에는 진짜 이야기와 그로부터의 교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하고 정교화하며, 그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를 회복할 때 계급의 사고를 살찌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가 항상 있다.

     

    계급은 실천적인 투쟁이라는 엄격한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규모로 이러한 수준의 의문에 도달할 수 없다. 자본의 공격이 심화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투쟁은 연합된 노동이라는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확신과 구속되지 않는 연대의 발전을 위한 강고한 기반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하게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한 편에서 이론적인 투쟁, “깊은” 과거와 그 가능성 있는 미래를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 수준에서 보편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계급의 당면한 투쟁은 다소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이러한 다음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한계가 있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세대들의 투쟁, 무엇보다 전체 체제 – 시위자들이 그들의 깃발에 공공연히 써 놓았듯이, “구시대적” 체제 - 에 대한 진정한 분노의 표현이었던 스페인의 분노 운동(Indignados)과 같은 투쟁은 어떻게 이 체제가 작동하고 무엇이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 동시에 현존하는 질서라는 제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조직적 수단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리고 보라, 그러한 수단은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 집회의 일반화, 위임된 대표의 선출은 1917년 소비에트 시절로부터의 명확한 메아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의 깊은 지하에서 활동한 “노련한 두더지(Old Mole: 1968년 9월부터 1970년 9월까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 지하신문 중심의 급진적 신좌파 그룹)”의 작업의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치-도덕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급의 더욱 넓은 부문의 일부로서 현존하는 삶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의 등장이다. 이러한 순간의 진화는 계급 영역에서의 대중 투쟁과 혁명적 관점의 준비와 성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분노 운동이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초기 정치화와 경제적 투쟁, 노동 계급이 여전히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노동 현장에서의 운동이 연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룩셈부르크의 「대대적 파업」에서 볼 수 있고, 주창되듯이, 혁명적 미래는 경제적 투쟁을 현대주의자의 선언인 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진정한 통합에 있다.

     

    25. 운동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연결을 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은 수행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1917년 볼셰비키 당의 역할을 전력으로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광신도와 지식인들의 음모론이라고 내세우며 의심하는지 그 이유이다. 코뮤니스트 소수의 책무는 투쟁을 유발하거나 앞서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 10월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가 붉은 10월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반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무는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경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코뮤니스트좌파와 자본의 좌익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탐색하는 소수들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심각하다. 1989년 이전에는 반대로 혼란스럽지만, 식별가능했던 반자본주의 생각들은, 보기를 들어 평의회주의자 또는 자율주의자(autonomist)와 같은 종류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그룹들 내에서 영향력 있었는데, 그 이후 실물 경제 또는 현존하는 “상품”의 영역의 보존과 확장에 대한, 지역 수준에서 상호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반을 둔 개념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의 진전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더욱 정치화된 계층들조차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미래의 혁명가 세대의 출현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오늘날 현존하는 혁명적 소수들이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왜 오늘날 코뮤니즘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능성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혁명가들과 정치화된 소수들은 이런 상황의 순수하게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혼란은 자신의 분열과 방향 상실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소수의 약점은 계급 전체 약점의 표현이며, 이를 극복할 어떤 조직적 비법이나 활동가주의 슬로건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017년 4월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Notebook IV, the Chapter on Capital.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이전 글> 

    1부. 계급투쟁 100년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17

    2부. 해체의 충격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59


    <다운로드>

    ICC 22차 대회 결의안_최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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