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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3
  • 조회 수: 16167, 2018-07-16 18:00:11(2018-07-16)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자)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즘에 대한 좌익공산주의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좌익공산주의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좌익공산주의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좌익공산주의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 「Kommunismus」로 이동한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Kommunismus」는 좌익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한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좌익공산주의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는데,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한다. 보르디가의 반 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좌익공산주의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한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했고, 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한다. 좌익공산주의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나타났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크(Sylvia Pankhust)의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 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좌익공산주의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 당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창립은 좌익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간의 대립 단계를 가져온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해 창립 후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고.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한다.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Wolffheim, Laufenberg, Rühle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공산당(KPD)과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2차대회에 참가할 것)을 담은 공개서한을 전한다. 대표단은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륄레(Otto Rühle)의 2차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륄레는 레닌, 코민테른 타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인 7월 18일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라는 극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그렇게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는 주요 이슈로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해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대회 마지막은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권주의파를 대표하여 보르디가 동지가 작성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 의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정치적 대의제도의 형태이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비판한 결과는, 국가 대의기구 선거에서 모든 사회계급의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부기관이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위원회가 되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투쟁 기관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조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코뮤니스트는 노동자계급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무장투쟁만이 노동자계급을 그 목표에 데려다 줄 것이다. 코뮤니즘(공산주의) 경제 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민주주의 기구들을 폭력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 즉 노동자평의회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착취 계급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대의기구를 가진 정부 체제를 세운다. 의회제도의 폐지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과제가 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 사회 형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소유보다도, 관료적 국가기구보다도 앞서 타도되어야 한다.

    (중략)

     

    5.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이 아직 까마득히 멀어서, 혁명을 직접 준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아직 계급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시기에, 선거와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전과 선동, 비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혁명이 이제 막 시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들이 아직 형성 단계에 있는 대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에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사태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6. 세계혁명의 종결과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조직에 끼친 결과,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실현한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 배신자들에 반대하여 건설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시작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코뮤니스트의 혁명적 대의를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의 선명성을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최종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선거를 보이콧하도록 선전할 필요성이 있다.

    (중략)

     

    10. 다수결에 의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정한 당들에게 선거 캠페인에 계속 참여하게 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인자들을 걸러내는데 필요한 과정을 가로 막는다. 그들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의회와 기타 민주주의 기관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실제 성격은 반대당들이 비판으로부터 의회주의 원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의회주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선거과정의 공식 절차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 발언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제도의 기본 원리라는 공통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 그 규칙의 미묘함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의회제도 내부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과 똑같이 점점 더 투표수와 의석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당들이 의회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보르디가의 테제 낭독>>,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 8차 전체회의 (1920년 8월2일)

     

     

    코민테른과의 단절과 혁명운동의 퇴조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판네쿡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근본적인 쟁점에 관심을 둔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지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내에서는 륄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 비판을 가한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한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러시아와 서유럽 상황은 급변하는데, 1920년 러시아는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구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여러 국가와 무역,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했고,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 재평가 작업에 착수한다. 판네쿡의 분석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는 생각, 그리고 러시아는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크론슈타트 반란처럼)한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므로,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판단하여 서구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축출된 이후 더 많이 표명된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혁명적 파고의 퇴조는 판네쿡에게 깊고 슬픈 환멸을 경험케 하였고, 정치적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내용은 없었지만, 정치적 행동은 대개 개인적 만남에 한정된다. 정치적 혼란도 큰 이유였지만, 그가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천문학에 전업 경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 선전을 이유로 신분이 위태로워진 그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수학, 천문학 강사로 선임된다. 이후 20년간 그 연구원에서 그는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쌓는다. 혁명 운동의 의미에서 판네쿡의 적극적인 정치경력은 1921년 비-레닌주의 혁명적 좌파의 퇴조와 함께 종료된다. 이후 어떠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1921-27년간은 예외적인 휴지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적 이론가로서의 자기 소명을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중단 없는 저작활동을 한다. 좌익공산주의의 선구에서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로서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평의회공산주의는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경향으로 갑작스럽게 대두된 것이 아니었으며, 장기간의 지적 탐구로부터 천천히 발전한 것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이론적 기초들은 아래 몇 가지 문제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사상체계와 직접 맞닿아 있다. 하지만, 초기의 평의회공산주의가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될 수 있었던 측면은 국제코뮤니스트운동과의 동일시 거부, 당이라는 조직 거부, 사회주의적 변형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고, 이후 평의회주의1)라는 극단적 오류를 낳기도 한다. “비록 소규모였고 또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길 어떠한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분석은 훗날 ‘소비에트 레닌주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데올로기적 도전”(McLellan, 1979)으로 평가받게 된다.

    <주>

    1)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이형로 (코뮤니스트 4호, 2014)

     



    독일혁명 연표

     

    1905년 러시아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 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찜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등)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혁명 발생, 대대적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에서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독일사민당 진압 (로자 룩셈부르크 암살)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 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 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 창립, (공장조직의 연대) 오토 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 산당 (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로자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 됨

    1927년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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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노동자평의회

     

    1920년 이후 판네쿡은 천문학의 연구에 집중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에 이론적인 깊이와 이해를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판네쿡의 생각은 ‘노동자평의회’, ‘철학자로서의 레닌’ 그리고 출간되지 않은 ‘자유로의 노동자의 길’ 3권의 저서에서 발전된다.

    판네쿡의 『노동자 평의회』는 현재에도 노동자 자기해방 사상의 고전으로 남아, 수많은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읽고 있으며, 현실 운동의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낡은 표지를 벗고 다시 노동자들의 품에서 해방 사상으로 살아날 때, 노동자혁명의 불길은 다시 계급의 가장 아래로부터 타오를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사상체계

     

    판네쿡은 사회주의 이행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로서 평의회 조직의 사상을 명백하게 하려고 했고, 평의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높은 단계에 있지만, 이전 조직을 단순하게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조직을 규정하던 근본적인 원칙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인 전문적인 지도체제를 제거함으로써 지도자와 추종 간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평의회에서는 지도력의 모든 기능이 사라지고 대중 모두가 적극적으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권력은 언제나 노동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가 혁명조직에 의해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독단적으로 생성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조직은 단지 평의회의 사상과 필수성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평의회는 단지 노동자 계급이 공세를 취하는 혁명적 시기에만 적합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혁명을 완수할 능력이 없는 경우, 평의회는 유용한 사회적 기능을 더는 할 수 없으며,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평의회가 단지 노동계급의 실천적 투쟁에서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생성될 수 있으며, 와일드캣 파업(비공인 파업)과 공장점거와 같은 활동에 태생적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를 노동자 평의회로 변형시키는 주요 요인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파업위원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파업위원회들은 평의회 조직의 기본적인 두 요소, 즉 직접 민주주의와 계급 공동체를 구체화시켰다고 보았다. 일단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가 국가적이고 전체 계급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것들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갈등으로 전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보다 높은 수준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판네쿡은 노동자 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이때이며, 자본주의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는 혁명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판네쿡은 부분적으로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점거 전술이 전통적인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불복종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의 노동조합들은, 그들이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정체성의 흔적들을 잃어버렸고 또한 자본주의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조를 독점적 자본이 독점자본의 조건을 전체 노동계급에 부과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자본 합리성 원칙에 대한 노동조합의 헌신 때문에, 노동조합이 결코 ‘노동자들의 통제'라는 주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통제’는 노동조합 권력의 원천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조합들은 지도자들에 의한 지배 원칙을 기초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충실한 재생산이고 어떤 혁명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굳건한 동맹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판네쿡의 생각에 노동자 운동의 부활은 이 옛날의 조직(노조)에 대항한 대중적 반역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판네쿡의 혁명적 변혁 모델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두 가지의 목적, 즉 투쟁의 직접적인 기구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특정 국면에서 혁명의 물질적, 정신적 기초이며, 새로운 사회의 하부구조와 조직적 채비를 구성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73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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