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맑스 탄생 200주년] 1875년 코뮤니스트 선언 - 고타 강령 비판
  • 1875년 코뮤니스트 선언 - 고타 강령 비판

     

     

    우리는 여기 한 명의 지지자가 맑스의 1875년 고타강령 비판을 검토한 글을 게재한다. 이 글은 임노동을 자본주의의 근간으로 보는 맑스의 비판을 보면서, 그렇다면 코뮤니즘(공산주의)에서의 노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른바 비인간적인, 자유가 없는, 소외된 노동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에서부터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 “삶에 대한 선언으로서의, 따라서 삶의 향유로서의 노동”에 대한 지적에 이르는 맑스의 방법을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악(惡)이 존재하는 한 계속 남아있을 맑스의 업적의 지속적인 힘의 비밀을 발견한다.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맑스의 업적의 타당성은 러시아 블록 붕괴 이후 그 타당성을 상실했다고 믿었던 자본주의 계급을 초조하게 하고 당황하게 한다.

    marx.gif


    비판

     

    맑스는 그의 작업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데 쓰일 이론적 무기고를 만드는 작업의 일부라고 본 혁명가였다. 고타 강령 비판을 썼을 당시 공개가 금지되었던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타 강령은 1875년 5월, 「독일사회민주당」 창당의 기반으로 승인되었다. 맑스의 비판은 이후로 16년 후, 그가 죽은 지 8년만인 1891년에야 출간되었다. 이것은 그다음 세기 동안 그의 저작과 사상의 일부가 왜곡되고 은폐되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 짧은 글은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널리 유포된 맑스에 대한 해석에 대해 논박한다. 원래의 것과 완전히 대립할 때까지 왜곡된 맑스의 두 가지 주요 개념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의 노동의 본질과 코뮤니스트 사회 그 자체이다. 사회민주주의,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로 알려진 “비판적인 스탈린주의”, 마오주의와 각각의 추종자들은 모두 코뮤니즘에서의 노동을 국가를 위한 임노동으로, 코뮤니즘 자체는 국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맑스가 코뮤니즘의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보았던 삶과 인간성의 성취로서의 노동,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로서의 코뮤니즘과 직접 대립하는 것이다. 맑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 첨부된 편지에서 “…우리의 입장은 모두 강령의 원칙과 별개이며, 전혀 다른 것이다”고 쓰고 있다. “나의 임무는 당을 타락시키는 강령에 대해 외교적인 침묵으로라도 승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반대하는 것이다.” 고타 강령의 저자는 바로 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였다! 리프크네히트와 새로운 당의 지도자들에게는 단결은 강령 자체의 세부항목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창당 대회에서 강령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아우구스트 베벨은 1910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런던의 두 늙은이와 동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재치있는 계획, 숙련된 전술로 보았던 것들을 그들은 나약함과 무책임한 순종으로 여겼다. 궁극적으로, 통합의 사실만이 중요한 지점이었다.”

     

    「비판」은 「코뮤니스트 선언」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썼다. 그것은 맑스의 코뮤니즘에 대한 명쾌하고 직접적인 언급이다. 그의 삶의 막바지에 「고타 강령」의 맹목적인 국가주의적 교의를 파괴하기 위해 썼기 때문에, 「비판」은 다음과 같은 요약된 논의를 담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본질적인 요소,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생산양식의 혁명적인 변형, 그리고 「자본」에서 맑스가 존재하는 사회적 질서를 극복하도록 운명을 지운, 강조체로 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대략적인 묘사1)가 그것이다."


     critique-of-the-gotha-programme-n.jpg


    「고타 강령」은 “노동은 부와 모든 문화의 원천이다.”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맑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 아니다. 자연 또한 사용가치의 원천이다.” 여기서 맑스는 그 자신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통찰 중 하나를 방어한다. 상품의 두 가지 본질, 사용가치(왜 우리가 대상을 원하는가)와 교환가치(그 대상은 시장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생산 체계의 바로 뿌리에서부터 생산의 목적 사이의 충돌이 있음을 밝혀준다.2) 부는 사물의 축적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가치의 덩어리로서도 존재한다.: 발전된 자본주의에서 가치는 화폐나 화폐가치로 실현된다.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인 삶”이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노동은 자연 없이, 감각적인 외부 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그룬트뤼세)

     

    “노동이 사용가치, 즉 물질적 부를 창조하는 한, 부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사용가치는 언제나 자연적인 토대를 갖는다. 노동은 인간의 자연적 조건, 다시 말해 사회적 형태와 독립적인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교환 조건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인간과 자연의 물질적 교환의 조건은, 인간 존재의 영속적인 자연적 조건이며, 따라서 그 모든 사회적 형식에 평등하게 공통적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존재의 모든 형식과 독립적이다.” (「자본」, 1권)

     

    맑스의 관심은 가치(사물의 집합이라기보다 원장에 기재된 숫자의 집합)로서의 부는 부의 독특하고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데 있다. 가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 체제의 창조물이며, 그것은 “공평한 분배”만을 요구할 뿐인 「독일노동당」이 완전히 잃어버린 지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근대 운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다.

     

    맑스는 상품의 두 가지 성격에 대해 폭로하면서 「자본」을 시작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 상품은 두 가지 형식, 유용한 상품과 가치 있는 상품의 형식을 가지는가? 이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주요한 두 개의 질문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발생했는가?’이다. 상품에는 두 가지 형식의 부가 있다는 것이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자연적 질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직면한 이 새로운 사회적 게임은 생산 체계의 뿌리에서 비롯된 몇 가지 종류의 문제 위에 성립한다.

     

    10년 전, 맑스는 “그 자신의 즉각적인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는 생산물을 만들지만, 상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노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노동”이라고 주장한다(임금, 가격, 그리고 이윤). 또한, 마르크스에게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이러한 유형의 노동은 사회적 노동인데, 왜냐하면

     

    1. 이 노동은 노동의 사회적 분업에 종속되어 있다.

    2. 이 노동은 사회적으로 결정된 평균 노동(시간)이다.

    3. 이 노동은 특정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게 되어있다.

     

    생산자들은 상품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의 특별한 성격을 강조한다.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의 조건은 노동의 사회적 결정요인 또는 사회적 노동의 결정요인이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사회적이다. [이 상황에서는] 개개인이 자신을 위해 노동하고 특수 노동이 그 반대인 추상적인 일반 노동[과] 그 형식, 사회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교환의 한계라는 조건 속에서만 드러나는 특수한 사회적 성격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코뮤니스트 사회에서의 노동

     

    자본주의가 끝난 이후의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맑스는 그 사회에서의 노동은 단순한 삶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첫 번째 필요”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노동 분업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폐지되어야만 하는 노동의 분업은 인간을 그 “노예화시키는 복종” 상태로 몰아넣는 분업이다. 1844년 맑스는 두 종류의 노동을 구분했다.

     

    첫 번째 노동은 “인간 존재로서 생산하는” 사회로, 생산수단으로서의 사적 소유가 없는 상황에서의 것이다. 여기서 노동은 “자유로운 삶의 표현이며, 따라서 삶의 향유”이며 여기서 삶은 “자신의 특수성을 지지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노동은 “진실한, 적극적인 재산”이다.

     

    두 번째 노동은 사적 소유 아래에 있는 노동이며 “삶의 소외”이다. “그것은 … 필요의 충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외부에 있는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강제 노동이며 …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자기 소외”이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자는 … 생산물과 생산을 소유하고서, 생산하지 않는 자들에 의한 지배를 만들어낸다.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는 자본가의 노동과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 그러므로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생산물, 결과,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가 정치경제학에서 소외된 삶, 소외된 노동의 개념을 이끌어낸 것은 사적 소유의 운동 결과였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개념의 분석은, 사적 소유가 소외된 노동의 이유, 원인으로 보인다고 해도, 오히려 그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에, 이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소유는 소외된 노동을 만들어낼 수 없다. 노동이 소유의 형태로 전유될 수 있게 되기 전에, 노동은 우선 소외된 노동의 형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소유 관계는 좀 더 근본적인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표현한다. 사적 소유의 법적인 형태는 소외된 노동의 사회적 관계를 전제한다.3)”

     

    사이먼 클라크(Simon Clarke)는 이를 잘 설명한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 필요의 본질적인 사회적 관계는 사물 사이의 관계라는 소외된 형태로 나타나며, 타인에 대한 나의 사회적 의존은 나의 사물에 대한 의존이라는 소외된 형태로 나타난다. 교환의 확장과 노동의 분업과 함께, 노동의 활동은 소외된 활동이 되는데, 이것은 노동자가 생산한 것이 노동자의 필요와 아무런 고유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그/그녀가 특정한 형태의 활동을 할 필요나, 특정한 생산물 또는 타인의 그 생산물에 대한 필요의 인식에 반응해서 특정한 대상을 생산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단순히 다른 생산물에 대한 생산물의 교환을 위해 생산하며, 살기 위해 생산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무차별한 사물로써 노동을 지배한다.4)”

     

    “[여기서] 나의 개성은 내 활동을 내가 증오하고 나에게 고통인 만큼 나에게 소외된다. 활동은 나의 내적 필요가 아니라 외적 필요에 의해서만 부과된 활동의 외형일 뿐이다.” (Paris Notebooks)

     

    1년 후, 맑스는 노동자의 활동이 “그 자신의 인간적 삶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라, “소외된 그의 권력을 자본에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것을 목격한 맑스는 “[이] 노동은 사적 소유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다시 사적 소유를 만드는, 자유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이며, 반사회적인 활동”이라고 쓰고, 그 후 “사적 소유의 폐지는 [소외된] 노동의 철폐로써 인식될 때 현실이 된다.”(신성가족)고 썼다. “개인적 차원에서 자연을 전유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생산은 한정된 사회적 형식에 의해 조정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이제 노동의 사회적 차원을 고려해 보자. 이제 질문은 노동 과정이 “노예 관리자의 무자비한 채찍 아래 작동하는지, 아니면 자본가의 걱정스러운 시선 아래 작동하는지”와 연관되게 된다.5)

     

    이 두 가지 형식의 노동은 계급 사회에서 작동하는 지배적인 노동의 형식이다. 계급 사회에 걸쳐, 노동은, 전(前)자본주의의 “인격적 의존” 아래 직접 강제된 노동이든, 또는 자본주의 상품 사회에서의 “물질적인 의존” 아래 소외된 노동이든, 개인에게 강제된 활동이었다.(그룬트뤼세) 그런 노동은 노동자를 “노동하는 동물”(잉여가치 이론)로 환원시켰다. 노동의 분업은 지금까지 무의식적이었다. “인간 존재 자체의 활동이 인간 존재를 낯선 것, 반대 권력이 되도록 지배한다.”(독일 이데올로기). 이 노동의 형식은 코뮤니즘 사회에 존재하게 될 인간 존재의 “자유로운 개성”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관념에 따르면 노동은 “자유의 희생”이었고, 맑스는 노동은 “노예제, 농노제, 그리고 임금 노동의 역사적인 형식”이며 언제나 “불쾌한,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었다. 노동은 아직 “노동이 매력적이고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을 창조하지 못했다. 노동은 노동이 외부로부터 부과되지 않을 때, “자유의 활동”, 자기-실현, 실제로 “진실한 자유”로 여겨질 수 있다(그룬트뤼세). 맑스가 「고타 강령 비판」 전에 그의 저작들에서 노동의 분업과 노동 자체의 “철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강제된 다른 형식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이 철폐되어야 하는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은 높은 단계의 코뮤니즘에서는 “자기 (긍정) 활동”으로 변형되어, 삶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삶의 “주요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된다.

     

     

    임노동

     

    맑스는 「고타강령」의 임금에 대한 제한적인 개념을 공격하면서 자본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냈다. 맑스는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임금의 철칙”이다. 고타 강령은 임금은 언제나 생존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엥엘스가 주장하기를 “맑스가 [나로부터] 선택하고, 라쌀레가 우리에게 빌려 간”, 1840년대의 맑스의 입장이었다. 맑스는 이 입장을 포기한다. 대신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자의 필요는 상대적이고, “도덕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를 포함한다고 강조한다. 유사하게, 맑스는 미출간된 「Resultate」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예의 최저임금은 일정한 정도, 그의 노동과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자유로운 노동자에게, 그의 노동력의 가치와 상응하는 평균 임금의 가치는 그 자신의 노동과 독립적인 물리적 필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한계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상품의 가치처럼 이 가치는 계급에 다소 일정한 평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당면한 현실에서는 그 최소보다 항상 높거나 항상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개별 노동자는 없다.”

     

    맑스에게는 실질적인 임금이론이 없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들의 “절대적 빈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노동은 노동자의 “절대적 가난”을 의미한다. 「고타 강령 비판」에서 맑스는 “노동력[은] … 가난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부로부터의 총체적인 배제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가난이다.”

     

    맑스가 임금에 대해 이야기한 두 번째 지점은 부르주아 정치 경제학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맑스는 임금은 노동의 가격이나 가치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노동력의 가치나 가격의 감춰진 형식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한 임금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은 한꺼번에 폐기되었다. 그것은 임금노동자가 그 생존을 위해 일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가 자본가를 위해 특정 시간 동안 무상으로 일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모든 자본주의 생산체계는 노동시간의 연장이나 생산력의 발전, 노동강도의 강화를 통한 부불노동의 기간 연장을 중심으로 순환한다. 그리고 임노동 체계는 노예 체계이며, 실제로 이 노예제는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을 받든, 더 낮은 임금을 받든, 사회적 생산력이 발전하는 정도와 같은 정도로 더욱 심각해진다.”

     

    맑스는 여기서 「자본」 1권에 쓴 것(가치의 변형에 대하여: 노동력의 가격이 임금으로)을 다시 이야기한다. 그는 자본 1권에서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 역사가 임금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이는 맑스 자신의 성취라고 덧붙였다. 이것이 그가 「고타 강령」이 그의 결론으로부터 타락한 것에 대해 분노한 이유다. “그리고 우리 당에서 이러한 이해가 더더욱 기반을 획득한 후, 어떤 이들은 라쌀레가 임금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라쌀레의 교의로 돌아갔다.” 임금은 보상과 다르다! 로마 군대의 군인들은 돈을 정기적으로 받고 소금과 같은 추가적인 혜택을 받았고, 따라서 그것은 봉급(salary)이었다. 그들은 자본을 위해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wage)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에 대한 임금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늘날 변호사 회사로부터 봉급(salary)을 받는 동업자도 아니었다.

     

    “임금노동자는 그의 삶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그것은 특정 시간을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일하는 한 그러하다.”

     

    자본과 임금은 거울 개념이다. 물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장은 규범적인 사회적 조직화의 형식이다. 병원과 학교는 공장이 운영되는 것과 같이 운영된다. 공장의 지불 체계인 임금은 규범적인 것이 되어, 임노동의 진정한 본질을 가린다. 무엇보다도, 임노동을 생산하는 상품은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이다.:

     

    “개별 노동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오직 그 소외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6)”

     

    「고타 강령 비판」에서 맑스는 “혁명적 변혁의 시대”의 끝에, 계급들과 더불어 국가 자체를 끝장낼 것을 요구한다. 「프랑스 내전」에서 맑스는 주장한다:

     

    “코뮨은 근대적 국가 권력을 파괴하였는데, 중세 코뮨의 재생산으로 잘못 여겨져 왔다; [그것은] 작은 국가들의 연방으로 쪼개려는 시도로 착각되어 왔다; 국가 권력에 적대하는 코뮨의 반대는 과도한 중앙집권화에 저항하는 고대 투쟁의 과장된 형태로 잘못 여겨져 왔다.

    그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 정부였고, 착취 계급에 반대한 투쟁의 산물이었고 …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루어내는 데서 마침내 발견한 정치형식이었다. 생산자의 정치적인 지배는 그의 사회적 노예제도의 영속화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코뮨은 그러므로 계급들, 따라서 계급 지배의 존재가 기반한 경제적 기초를 제거하는 지렛대로 작동해야 한다. 노동이 해방되면, 모든 인간은 노동자가 되며,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은 계급 특성이 되는 것을 멈출 것이다.

    ... 코뮨은 다수가 소수의 부를 위해 일하게 하는 계급 특성을 철폐하려고 했다. 코뮨은 착취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코뮨은 생산, 토지, 그리고 자본의 수단, 다시 말해 이제 주요하게 노예화와 노동력 착취의 수단을 자유롭고 연합된 노동의 단순한 도구로 변형시킴으로써 개인 소유를 진실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코뮤니즘, “불가능한” 코뮤니즘이다!7)”

     

    이것은 새로운 사회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전진할 가능성이었으며, 부르주아 지배의 실질적인 대안이었다. 그 대안은 직접 선출되고 소환 가능한 대표들로 구성된 평의회 시스템을 통한 노동자 자신의 직접적인 정부였다.

     

    물론, 코뮨은 프랑스 국가의 손에 유혈 낭자하게 패배함에 따라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맑스는 분배의 영역에 “부르주아 권리”가 얼마나 남아있던, 그것을 집행할 국가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았다. 맑스는 구성원에게 노동 교환권뿐만 아니라 생산의 분야들 사이에서 사회적 총 노동시간을 분배하는 사회를 그렸다. 그는 파리 코뮨의 초기에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를 그의 시각이 되었다. 중요한 점은, 자본주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통제로부터의 개인의 분리 위에 건설된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장악함으로써 지배하며, 따라서 노동자 계급을 창조한다. 개별 소유자가 마이크로소프트, 씨티뱅크, Land Securities나 영국 정부로 불리든 간에, 그들은 사회적 잉여(소외된 노동)를 획득하기 위해 존재한다.

     

    맑스의 코뮤니즘은 종종 잘못 이해된다. 코르쉬(Korsch)조차 다음과 같이 썼다.

     

    “맑스는 여기서 현재와 미래의 ‘사회’와 (현재와 미래의) ‘국가’ 사이의 진정한 이론적이고 실질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명확화했다.8)”

     

    앞으로 나아갈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제도의 폐지이다. 그것은 국가(민주적 노동자 조직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임노동과 자본(협력과 사회적으로 관리되는 노동을 위해)

    ―R

     

     

     

    <주>

     

    1) Paresh Chattopadhyay: 해방의 선언: 맑스의 ‘미주’ 125년 이후.

    (https://marxmyths.org/paresh-chattopadhyay/index.php)

     

    2) Scott Meikel: 맑스는 경제학자였는가?

     

    3) Collected Works, Volume 3, p.271-2, 274-5, 278, 279, 270-80.

     

    4) Clarke, S. (1991): 「Marx, Marginalism and Modern Socilogy: From Adam Smith to Max Weber」. London: Palgrave Macmillan.

     

    5) 1962a: 198-99

     

    6) 칼 맑스, 「잉여가치 이론」, 2권, London 1969, 504쪽

     

    7)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71/civil-war-france/index.htm

     

    8) Karl Korsch: Marxism and Philosophy,

    http://http://www.marxists.org/archive/korsch/1923/marxism-philosophy.htm


    <파일 다운로드>

     

     1875년 코뮤니스트 선언.pdf


     

    <출처> 「혁명적 전망」, 2005, 37호, 국제코뮤니스트경향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05-11-01/the-communist-manifesto-of-1875-the-critique-of-the-gotha-programme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notice communistleft 67 2018-11-18
147 communistleft 96 2018-09-24
146 communistleft 75 2018-09-16
145 communistleft 200 2018-09-16
144 communistleft 137 2018-09-07
143 communistleft 139 2018-08-31
communistleft 96 2018-08-28
141 communistleft 188 2018-07-16
140 communistleft 489 2018-07-14
139 communistleft 81 2018-07-14
138 communistleft 228 2018-07-13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