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8호]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 조회 수: 8484, 2019-02-14 15:59:10(2019-02-14)
  •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노동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소재와 대립한다. 그는 자연소재를 자신의 생활에 유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타고난 신체의 힘인 팔, 다리, 머리, 손 등을 움직인다. 그는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 자기 외부의 자연에 작용을 가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또한 이를 통해서 자신의 본성까지도 변화시킨다.” (자본론 I-1, 강신준 역, p.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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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즘(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만든 오랜 주장은 결국 코뮤니즘은 내재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대체로 거만한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고 완전히 근거가 없으나, 또한 매우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아마도 세상의 일반 상식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 따위를 지지하고자 할 때 항상 쓰이는, 종종 들어보았을 “그게 상식이잖아”라는 말과 같이, ‘인간 본성’에 대해 주장한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 외의 어떤 다른 주장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라디오 토크쇼의 진행자 수준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들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그게 상식이잖아’ 와는 달리, ‘인간 본성’ 주장은 경제학자, 정치가, 그리고 심지어 사회과학자들이 사용할 정도로 충분한 권위를 갖고 있다. 보기를 들어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은 그가 보수당 런던 시장으로 있을 때, 불평등이 “질투의 정신”을 조장하고, 이에 덧붙여 탐욕이 “경제 활동의 가치 있는 박차”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의 인문학 교수 마크 헌터(Mark Hunter)가 쓴 에세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공격과 같다.


    그런데도 ‘인간 본성’ 주장은 그럴듯한데, 그 이유의 일부는 그것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있는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기독교는 인간이 모두 ‘사악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며, 이것이 사후 세계에 구원을 가져다줄 교회의 권력과 이번 생애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국가의 권력을 모두 정당화했다. 또한, 그것은 역사적 경험,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이루고자 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는 단순한 사실과 더욱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마지막 이유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우리를 험하게 대하거나, 우리가 친구에게 실망할 때,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그저 냉담하게 보일 때 느끼는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을 상당 부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그 주장이 적절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확실히 가장 마지막 근거,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점에서 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가장 명백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일상적인 삶은 수많은 이기심, 냉담함, 그리고 공감의 부족 등등의 사례를 제공한다. 그러나 삶은 또한 친절함, 자기희생, 그리고 연대 - 작업장에서 서로를 돕고 지켜주는 사람들, 어려움에 부닥친 낯선 이를 도와주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 스스로 선한 대의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들과 같은 수많은 반대의 사례들 또한 제공한다. 만약 이기적인 것이 정말 인간의 본성이라면, 만약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면, 그러한 이타적 행동은 존재하지 않거나 잘해봐야 극단적인 경우에 불과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 주장은 다양한 다른 형태가 있지만, 기본적인 주장은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다. “코뮤니즘은 인간의 본성 때문에 작동할 리가 없다. 그리고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다!” 연설자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당신의 주장에 반대된다고 이야기하거나, 당신의 생각에 공감하는 척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인간이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결함이 너무 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주장은 사회주의/코뮤니즘에 반대하거나 종종 자본주의가 인간의 사회적 발전의 정점이 아닐 수도 있으며 보다 우월한 생산 양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데 이용된다. 많은 코뮤니스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함정에 빠진다.


    바로 그 출발점에서 인간의 본성 주장이 제기되면, 그 누구도 영원하고, 지속적이며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을 지적해야 한다. 생존 본능, 또는 종족 보존의 욕구와 같은 진실로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우리의 특질은 동물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인간 본성' 주장의 가장 크고 명백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그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그럴 가치가 없는 당신의 적에게 쓸데없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함정’은 인간 본질은 이기적이라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추동되므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는 사회로부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는 사회’에 기초한 코뮤니스트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가장 흔한 형식의 '인간 본성' 주장에 코뮤니즘의 지지자들이 반대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이다.


    '인간 본성' 주장에 반대하는 데 경험이 부족한 코뮤니스트는 인간의 협력과 이타주의적 행위의 갖가지 예시를 인용하며 그 주장의 가장 명백하게 약한 측면을 공격하곤 한다. 이러한 종류의 역공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핵심에 다가가야 한다. 인간 본성 주장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 또는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로 부의 ‘낙수 효과’가 있다는 이론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과학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것은 반박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뿌리 뽑을 가치가 있다.


    그 주장이,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한다는 주장임을 가정한다면, 우리는 '인간 본성'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때까지 점진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짓눌러버릴 수 있다. 인간 본성 주장을 어떻게 반박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러한 주장의 현실적인 발표문부터 시작해 보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항상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코뮤니즘은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왜 항상 자본주의가 존재해 왔고, 자본주의보다 뛰어난 체제가 존재할 수 없는지의 이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은 개인에게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도록 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회 전체의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은 인용이 아니지만, 코뮤니즘의 지지자들이 자주 대응해야 하는 전형적인 유형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자본주의를 자기 이해 추구 행위를 사회적으로 긍정적 결과로 바꿀 수 있는 체제로 방어하면서 코뮤니즘을 불가능하다고 공격한다. 명백하게도 이 주장의 공식은 다양해질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 허수아비 인형 같은 주장이라는 비난을 하기 전, 우리는 이것이 코뮤니즘에 반대하기 위해 사용된 인간 본성에 기반한 주장에 대한 것임을 기억하자. 반대가 반드시 주어진 반대 견해의 실제 주장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반박해야 할 것은 코뮤니즘이 '인간 본성'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그러므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 바로 자본주의에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제 반대주장,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반대주장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우선, 그 주장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 주장은 본질에 대해 호소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과 비슷하다. 만약 당신이 아프다면, 당신은 현대적인 약을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본성이 원래 가야 할 방향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인간 본성'의 존재를 지지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 이는 연금술사들이 수 세기 동안 찾아왔던 철학자의 돌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학자들의 용어로 ‘사회적 상수’ - 모든 사회에서 똑같은 인간의 행동 특성 – 에 대한 모든 유의미한 연구들은 인간의 심리와 태도가 변수이며, 개인이 발전시킨 사회적인 틀에 연결되어있는 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성격,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그러한 특징들까지 지적하길 원했다면, 우리는 ‘선천적인’ 것에 반대되는 ‘후천적인’ 것의 엄청난 중요성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 교육과, 인간 존재가 성장한 사회적 환경의 결정적인 역할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 본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소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썼듯이, “모든 역사는 인간 본성의 지속적인 변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조상들이 자기의 이해와 탐욕이 주요한 동기였다면, 우리 종은 절대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20세기 동안, 인류학자들은 세계의 다양한 외진 지역, 현대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못한, 십수 개의 수렵-채취 사회를 발견하고 연구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또는 다른 지역의 사막이든, 정글이든, 그 어떤 곳에서도 사회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를 포함하여 약 20명에서 50명 정도의 작은 무리를 짓고 살았으며, 이용 가능한 사냥감과 먹을 수 있는 식물을 따라 상대적으로 구획된 지역 내에서 캠프에서 캠프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이웃한 무리에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었으며, 이웃한 무리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대부분의 이러한 사회들은 전쟁을 몰랐고, 전쟁을 아는 곳은 수렵-채취자들이 아닌 호전적인 그룹과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각각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적 기풍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육아에 있어서 비지시적이며, 비폭력적이고, 공유, 협력, 그리고 합의적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가치, 나머지 모든 것의 기저에 있는 것은 바로 개인의 평등이었다.

     

    수렵-채취 사회의 고도로 발달한 평등 의식은 각각의 사람이 그 또는 그녀가 음식을 찾거나 획득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음식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음식은 공유된다. 그것은 아무도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적인 재화는 공유된다. 그것은 아무도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각의 사람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고유한 결정을 한다. 그것은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들의 자녀들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지시적인 육아가 있다. 그것은 그룹의 결정이 합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사도 없고, “중요 인물”이나 두목도 없다.


    만약 단지 한 명의 인류학자가 이 모든 것을 보고했더라면,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로맨틱한 몽상가이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색깔의 많은 인류학자는 많은 다양한 수렵-채취 문화에 대해 똑같은 보편적 이야기를 전한다. 물론 문화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며 모든 문화가 평화롭고 매우 평등한 것만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같다. 인류학자들은 그들이 연구한 수렵-채취 문화의 평등, 개인의 자율성, 아이에 대한 관대한 대우, 협력, 그리고 공유하는 정도에 잇달아 놀라워했다. 혹시 당신이 ‘호전적인 원시 부족’ 또는 노예를 부리는 원주민의 이야기, 또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천박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부족 문화에 대해 읽어보았다면, 당신은 수렵-채취 사회의 무리에 대해 읽은 것이 아니다. 이 평등주의적 수렵-채취 사회의 유형은 약 1만 년 전 농업과 유목이 등장하고 첫 국가가 나타나기 이전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지배적인 존재 양식인 원시적 코뮤니즘을 설명한다. 이제 '인간 본성'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기본값이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모두 명확해졌음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리나 부족에게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것이 낯선 사회에서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탐욕과 이기심이 우리 본성의 일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 반대로 협력과 상호 협조가 대부분의 우리 역사에서, 많은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특징이었다는 점이 명확히 한다면, 이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인간 본성'에 관심을 기울일 때이다. 자본주의 체계는 착취에 기반한다. 잉여가치는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뽑아내며 모든 이윤의 원천이다. 그것은 말 못 할 정도로 인간의 비참함과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현재에도 그렇다. 자본주의는 확실히 승자독식의 체제이다.(1) 탐욕과 이기심은 덕목으로서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그러나 과연 자본주의에 사는 모든 사람이 탐욕스러움과 이기적인 것이 사실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이타적인 행위의 수많은 예시가 있다. 사실, 그것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체계로서 유지될 수 없다. 그저 하나의 보기만 들어보자. ‘2015년 간병인 가치 보고서’는 영국 경제를 지탱하는 간병인의 가치를 살펴보았는데, 2001년 이후 간병인의 가치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해, 6천8백만 파운드에서 거의 두 배인 1억3천2백만 파운드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증가의 원인을 친척과 식구를 돌보는 데 사용하는 시간과 그에 동반하는 대체 돌봄(replacement care)의 증가로 보았다. 만약 사람 중 정말 극소수라도 그들의 사랑하는 이들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에 미치는 경제적인 충격은 재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엘리트와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이들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동기가 부여되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들은 ‘자연적으로’ 이기적이지 않다. 비록 우리 중 일부가 이기적일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며, 이기적으로 되도록 교육받지만 말이다.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소수의 엘리트는, 그들 중 일부, 빌 게이츠와 같은 인물이 그의 ‘재단’으로 자신을 자애로운 것처럼 연기하려 할지라도 탐욕, 자기애, 그리고 이기심에 경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단’은 클린턴 재단이 잘 보여주듯이 종종 자기선전, 부패, 그리고 돈세탁을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엘리트 자본주의자들은 세계의 경제와 정부의 영광스러운 주인이다. 그들은 지속해서 찬양되고, 존경받으며, ‘지상의 법 위에’ 존재로 여겨지며, 인류의 하찮은 민중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방해받지 않는 부(anabashed opulence)의 세계에 살도록 허락된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에서 세계에 대한 탐욕은 이상적인 정당한 변명을 찾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악한 이기심을 인류가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바꾸는 착취 체계를 선전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사고(思考) 실험을 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구상에 사는 75억의 사람에게 지금 당장 그들에게 아래의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싶은지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경제 체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소득 불평등을 일으키며, 동시에 평등한 기회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모든 사람이 영구적인 경제적 결핍 하에서 살아가는 데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를 거부하며, 수십의 나라들에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키고, 수억의 사람들이 기근, 질병, 기아에 허덕이고, 지구와 인류의 건강을 황폐화하는 동시에 그러한 파괴의 대가를 극소수의 특권을 가진 이들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이들에게 외부화시키는 사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체제에서 살기를 실제로 선택할까? 솔직하게 대답해보자.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체제 아래에서 행복한 유일한 사람은 현재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특권적인 경제적 지위가 보호되고 강화되는, 몇 안 되는 자본주의자 그룹일 것이다. 사실은 자본주의의 논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소수의 권력, 지위, 그리고 특권을 보호하고 영속화하면서 그 외의 모든 이들을 빈곤에 빠뜨린다.


    이상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을 잘 나타내는 이기심, 질투, 그리고 탐욕은 그저 자본주의 경제적 실체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일 뿐이며,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원시 코뮤니즘 사회 이후, 또는 심지어 촌락 공동체가 있는 중세 이후 '인간 본성'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개인주의는 작은 독립 소유자들이 마을과 시골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세계의 관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종종 경쟁자들을 파산시킴으로써 성공해 온 이러한 신출내기 부르주아지, 작은 소유자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광신도 같은 지지자였고, 개인주의를 일종의 자연의 법칙으로 여겼다. 심지어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 “생존을 위한 투쟁”,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가져다 쓰면서도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본의 약탈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연대와 단결, 상호 지원을 학습한, 따라서 개인주의의 지배적인 이념에 반격을 날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등장시켰다. 노동계급에 연대란 그들의 물질적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 존재가 “자연적으로 이기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만약 노동계급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필연의 산물이다. 자기방어를 위해 사회적 조건이 허락되는 한 노동자들은 연합하고 연대할 수밖에 없다. 파업한 이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편, 아내, 그리고 가족들 등 일자리뿐만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 사이의 연대와 지원의 수많은 사례를 과거 파업은 보여준다.  


    이것은 연대와 이타주의가 하나 이상의 다양한 방식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연대를 필요로 하지만, 다른 이에 대한 연대를 보여줄 필요도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조차 발견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사회에 유용하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는 일견 진부한 생각으로 표현된다. 어떤 이들은 이타주의는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 어쨌든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기심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코뮤니스트들이 방어하는 아이디어, 개인의 이해와 집단의 이해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인 대립은 없으며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은 착취와 사적 소유에 기반한 사회의 표현이다.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사람과 이러한 억압과 착취를 보장하고 영속화하는 당사자 기관 사이에 조화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는 점에서 완전히 논리적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이타주의는 오직 자선 또는 희생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타인에 대한 부정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 공유, 그리고 서로가 보완하며 꽃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우리에게 믿기를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코뮤니즘은 개인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그/그녀가 만들어 낸 것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고, 개인을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에 대한 부정은 후기 자본주의의 독특한 형식, 제국주의 단계에서 극한에 달했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어떤 착취의 형식도 없어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도 없고, 계급도 없으며, 모든 것은 이윤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필요로 생산되고, 사회의 구성원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인류는 오직 사회적인 방식으로만 그 측정할 수 없는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어서, 그리고 개인의 이해와 집단의 이해 사이의 대립은 사라질 것이므로, 각 개인이 번영하기 위한 새롭고 굉장한 전망이 열릴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규범이었던 지루한 획일성을 지속시키는 것과는 달리, 코뮤니즘은 무엇보다 다양성의 사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은 대부분 사람을 전 생애에 걸쳐 제한하고 제약하는 규칙인 노동의 분리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에서는 모든 새로운 기술적 돌파구로, 더 심화한 수준의 전문화가 아니라, 대신 각각의 개인이 개발할 수 있는 활동 범위의 확장이 있을 것이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어떤 사람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그가 원하는 부문에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이며,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규제하므로 한 사람이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소를 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는, 사냥꾼, 낚시꾼, 소몰이꾼, 목동, 그리고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인간 본성에 근본적인 것,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서 두드러진 무절제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사실은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경향임을 알 수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대다수는 어느 정도는 코뮤니스트이다. 코뮤니즘이 맑스가 정의한 것처럼, “그의 능력에 비례하는 (무언가)에서 그의 필요에 따른 (무언가로)”를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공유하고, 돕고, 그리고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한 이들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그저 조언, 어떤 일에 대한 보조, 공감, 또는 감정적 지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친구, 함께 일하는 동료, 친척, 연인, 심지어 완전히 모르는 사람조차도 종종 그렇게 행동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모든 인간 사회성의 기반이다.” 그것은 “사회성의 원재료이며 사회적 평화의 궁극적인 내용인 궁극적인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정”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모든 회의론자, 반대만 할 뿐인 사람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간에, 코뮤니즘은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다. 인간 존재는 단언컨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살 수 있고, 그러한 사회가 살아 숨 쉴 수 있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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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gosum

    2018년 6월 15일

     

    역주


    (1) 약자는 악마에게 잡혀 죽는다는 의미로,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판치는 경쟁’을 강조하는 문구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6-15/human-nature-and-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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