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3.8 세계 여성의 날] 콜론타이와 세계 여성의 날
  • 조회 수: 5662, 2019-04-22 19:45:03(2019-03-08)
  • 콜론타이와 세계 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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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에서 작업장 화재로 숨진 여성 노동자들을 기리며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10년 제2차 국제 여성 노동자 협의회에서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이 세계 여성의 날을 조직하는 문제를 안건으로 내놓았다. 협의회는 매년 똑같은 날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투표권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우리의 힘을 하나로 모을 것이다’라는 구호 아래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열기로 결정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날을 여성 노동자에게 훌륭한 선동 수단이며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을 강화한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여성의 날은 여성뿐만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기념일이다. 1917년 2월 혁명이 여성의 날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혁명의 포문을 연 것은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는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자로 혁명의 한가운데서 불꽃을 태웠다. 세계 여성의 날에 콜론타이가 언급되는 것은 급진성도 있지만, 코뮤니스트(공산주의) 사회에서 여성해방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 측면이 크다.

     

    콜론타이의 여성해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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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론타이는 성, 사랑 및 여성해방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제는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고 역사에서 사회적 투쟁의 변함없는 특징 중 하나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와 이 관계를 규정하는 도덕률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는 사실도 무시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의 윤리와 배타적 사유재산의 원칙이 역설적이게도 가족의 강화와 약화라는 이중적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족은 성차별의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성해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이해와 부르주아 여성의 이해관계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콜론타이는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자동적으로 여성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족제도가 변혁되지 않고는 ‘성 위기 극복과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가족의 배타적 소유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대신에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소유욕으로 대체시켰다. 그래서 공동체적 동지애적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가족을 제시한다.1) 이런 가족의 전제는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이다. 육아의 사회화는 공공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자식에 대한 배타적 사랑을 넘어 공동체의 모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적 토대인 가족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 전망했다. 이는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콜론타이와 볼셰비키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이 여성 평등과 해방운동의 진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됐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도입, 결혼을 민사혼으로 바꿨고 이혼을 간소화했으며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하였다. 또한 성적 관계에서도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킨 시기이기도 하였고, 젊은 층 사이에서는 성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이나 원칙이 없이 성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원치 않은 임신 성병이 만연했고 이는 사회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현실을 고려하여 콜론타이는 성적 관계에서 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의 성도덕에 어떤 기본원칙을 마련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여성해방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고자 했다. 그래서 동지애적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가족을 “성적인 면에서 유연성을 가진 덜 안정된 결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적합하다”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부부나 가족의 연계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노동자의 연대는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계급과 국가, 종교의 소멸과 더불어 부르주아 가족제도 역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새로운 도덕은 당내에서 격렬한 반대와 비난에 직면하였다.

     

     또한 소비에트 여성 사업 기구인 제노텔2)이 여성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그치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콜론타이는 1920년 제노텔의 대표로 임명되면서 제노텔의 자율성 문제를 거론한다. 그해 10월 제노텔 조직자 회의에서 “제노텔의 임무는 당의 과업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보다 어떤 영역이든 여성 문제가 제기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주도권을 쥐고 활동하는 것”이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는 당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당은 콜론타이를 제노텔에서 해임시키고 골루베바로 교체했다. 그러나 골루베바는 콜론타이와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3년 12차 당 대회에서 골루베바와 콜론타이의 주장을 ‘여성의 일상생활을 개선한다는 기치 아래 남녀의 공통 과제인 계급투쟁으로부터 여성을 멀어지게 하는 여권론적인 일탈’로 규정하고 제노텔에 대한 모든 논의를 종결시키기로 한다. 결국 여성해방을 위한 콜론타이의 프로그램은 내전과 경제적 위기로 실현되지 못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즘 비판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의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사회적인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해방론자들이 “현존하는 계급 사회의 틀 안에서 평등을 구하고”, “이미 존재하는 특권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특권을 위해 싸운다”고 비판했다.3)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내에서 여성의 법적 권리 확대(투표권 쟁취 투쟁)에 주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모든 여성들이 단결해서 투쟁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재산에 따른 제한 선거권을 지지했다, 반면 콜론타이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여성 역시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투표권 쟁취에 한정하지 않고 노동권, 동일임금, 유급 출산 휴가, 무료 보육 시설, 여성 교육 등을 위해 싸워야 하고 나아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지점에서 여성 고유의 문제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문제와 분리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성권과 노동권의 결합을 제기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하려 했다.

     

    1917년 2월 혁명4)과 세계여성의 날


     콜론타이는 여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위원회나 담당 부서를 설치해야 한다고 1906년 이래로 수없이 제안했다. 그럼에도 1917년 10월 초가 되어서야 볼셰비키는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해왔던 당내 여성 사업 전담 기관을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1910년 이래 러시아 여성노동자의 혁명적 잠재력이 보다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잠재력은 1917년 세계여성의 날 시위에서도 드러난다.

     

     1917년 세계여성의 날, 세계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파업이 페트로그라드 여성 섬유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5) 여성들은 남편과 아들이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홀로 가족의 생존을 감당해야 했기에 하루 13시간 이상 노동하며 빵을 구하기 위해 영하의 날씨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이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아이에게 먹일 빵을 달라”, “참호에 있는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바로 이날 러시아 여성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횃불을 들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여성노동자의 날이 가지는 새로운 임무6)

     

     부르주아 의회라는 틀 속에서 여성노동자에게 이런 권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권력이 자본가와 유산자들의 손에 있는 동안,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집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전통적인 노예의 위치에 있는 여성노동자를 구출해주지 않는다.

    ……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세우는 것만이 여성노동자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굴욕과 불평등, 고통의 세계에서 구할 수 있다. “여성노동자의 날”은 투표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날에서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즉 소비에트의 승리와 코뮤니즘을 향한 국제적인 투쟁의 날로 바뀌어야 한다.

     

    나오며

     

     콜론타이는 모든 계급의 여성이 억압을 경험하지만, 계급에 따라 여성의 처지가 다르고 무엇보다 억압을 없애는 데에 모든 계급의 여성이 지닌 이해관계가 같지 않다는 점을 인식했다. 이는 여성 억압의 근원을 이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잠재력에 주목하고자 위한 것이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개인들의 성적 관계와 가족관계에 대한 낡은 관념의 변화가 새로운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여성해방과 성적 자유를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계급투쟁과 긴말하게 연결시켰다. 하지만 혁명의 후퇴와 함께 사회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보수적 관념이 강화되었다. 이혼의 자유와 성적 자유도 후퇴되었고 동성애 처벌 부할, 낙태 금지, 이혼 규제 조처 등도 등장했다. 혁명의 후퇴와 함께 여성해방의 후퇴로 콜론타이 등의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은 곡해되고 잊혀졌다. 여기에 더해 스탈린주의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억압적 체제를 정당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콜론타이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해답은 콜론타이의 말속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에서 모든 적대적 사회 세력의 투쟁과정에서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성도덕도 만들어낸다.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는 도덕의 기본 척도를 찾고 새롭게 발전하는 성 규범이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노동자계급 이론가들이 착수해야 할 과제이다”7)

     

    자본의 권력을 타도하자!

    부르주아 세계의 유산인 여성의 불평등, 무권리, 억압을 타파하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여성남성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을 향하여!


    2019년 3월 8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주>

     

    1) 1.관계에 있어서의 평등(남성이기주의와 여성 개인에 대한 노예적 억압의 종식), 2. 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부르주아문화에 의해 고무되는 소유 관념과 달리), 3. 동지적 감성,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를 요구한다)

     

    2) 1918년 12월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노동자, 농민대회’ 이후 건설되었고 초대 국장은 이네사 아르망(1919-1920)

     

    3)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파업과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며 계급 협조주의를 추구해 노동자 운동을 분열시키고 온건화 압력을 가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시에는 전쟁 지지 입장에 있었다. 현재 일부 부르주아 페미니즘 역시 이라크 침공,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4) 제정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썼는데 서유럽의 그레고리력보다 13일 늦다. 즉 3월 8일은 러시아 달력으로는 2월 23일이다. 그래서 1917년 3월 혁명은 2월 혁명으로 1917년 11월 혁명은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5) 2월 22일 볼셰비키 활동가 카유로프(볼셰비키 비보르그 지구위원회 활동가)는 비보르그 지구 여성 모임에서 세계 여성의 날에 파업에 들어가지 말라는 ‘당의 지시’에 따르라고 호소했다. 카유로프에겐 유감스럽게도 - 그는 후에 볼셰비키 여성 당원들이 당의 지시를 무시한 것에 ‘분노’했다고 적고 있다 - 섬유 공장 다섯 곳이 다음 날 아침 파업에 들어갔다.

     

    6)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920) 「세계 여성의 날」

     

    7)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911) 「성과 계급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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