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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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7. 세계의 코뮤니스트 동지들에게!

    - 러시아코뮤니스트당 노동자그룹 선언(강령) -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에 대한 의견 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자계급은 그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파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의 끊임없는 발생은 멈췄다. 러시아의 코뮤니스트좌파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부수는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칭송하며, 좌익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몰살시키려 할 때도, 코뮤니스트좌파는 혁명의 영웅적 시기의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성을 방어했다.

     

    레닌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난 것은 볼셰비키의 공개적 위기를 촉진한 한 요소였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에 의한 “3두 정치”의 형성 과정에서 관료적 분파가 당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 연합의 주요 유대는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트로츠키는 그동안 상당한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공공연히 반대파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정권은 경제와 사회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23년 여름, 신경제정책(NEP)의 도입에 의한 “시장 경제”의 명백한 첫 번째 위기가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위협했다. NEP가 1921년의 위기로 귀결된 전시 코뮤니즘의 과도한 국가 집중을 되돌리기 위해 소개된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는 경제의 자유화가 러시아를 자본주의 생산의 좀 더 고전적인 위기에 노출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임금 삭감, 해고 정책과 같은 정부의 대응은 이미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져 있던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3년 8~9월, 동시적인 파업의 발발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3두 체제는 NEP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왕도로 보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특히 부하린이 이론화시켰는데, 부하린은 당의 극좌에서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스탈린 이전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의한 “달팽이 걸음”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다른 한 편, 트로츠키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더 강화된 국가 집중과 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의 지도적인 그룹 안에서부터 나온 첫 번째 명확한 발언은 「46인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Poliburo(정치국)에 1923년 10월 제출된 것이다. 「46인의 강령」은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피아타코브(Piatakov),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insky)와 같은 인물과 샤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V Smirnov), 그리고 오신스키(Ossinski)와 같은 민주집중그룹의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트로츠키의 서명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파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분파는 1921년 이후 금지되었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앙 위원회에 보낸 공개적인 편지는 1923년 11월 프라우다에, 그리고 그의 팸플릿 「새길」(New Course)에도 실렸고, 이것은 「46인의 강령」과 비슷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그를 반대파의 중요 인물로 명백히 위치 짓게 해 주었다.

     

    「46인의 강령」은 최초에는 정권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강령은 지배적인 계층의 실용주의적 경향과 NEP를 불변의 원칙으로 끌어 올리려는 경향에 대한 반대로서 더욱 강력한 국가 계획을 위한 몽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트로츠키를 둘러싼 좌익 반대파가 견지한 주제였지, 그 힘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의 내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에 대해 제기한 긴급한 경고였다.

     

    동시에, 강령은 “병적인” 반대파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물론 강령은 그 단어를 당내 위기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미아스니코프와 보그다노프의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 주위의 노동자 그룹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곧 트로츠키도 비슷한 관점을 취했다. 그들의 분석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동시에 당의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으로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키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그룹들이 “병적인” 현상들로 해체될 리는 없다. 「노동자의 진실」 그룹이 패배주의, 심지어 멘셰비즘으로 나아가는 특정 경향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 좌파와 네덜란드 좌파 내에서의 대부분의 경향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러시아에서 국가 자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통찰은 10월 혁명을 다소 진보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에 의해 약화되었다.

     

    이것은 미아스니코프(Miasnikov), 쿠즈네쵸프(Kuznetsov), 그리고 모이셰프(Moiseev)와 같은 오랜 볼셰비키들이 지도하는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이 그룹은 13차 볼셰비키 총회 직후 1923년 4~5월에 그 선언(강령)을 배포함으로써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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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스니코프(사진 중앙), 「노동자그룹」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 그룹”으로 불린다.>


    세계의 코뮤니스트 동지들에게!

     

    현재 선진국과 특히 그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생산력은 이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굳은살 가득한 손에 권력을 쥐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코뮤니스트 혁명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는 부르주아 민족 전쟁에 관계되어 야만에 삼켜지고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 사이,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어, 노동과 번영의, 평화의 깃발을 심는, 둘 중 하나의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군비 경쟁,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항공 함대의 신속한 강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혹독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전쟁으로 죽을 것이다. 마을, 공장, 기업, 그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창조한 모든 부가 파괴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다. 각 나라에서 더 빨리 부르주아지를 물리칠수록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빨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할 것이다.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투쟁은 과거에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투쟁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가지각색의 모든 유형의 억압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극히 만족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본질적인 임무인 부르주아지와 그 착취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복종과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사소한 요구만을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특정 순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직면했을 때 부르주아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노동자 대중은 그 억압자들이 직접 이야기하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그들의 이해에 맞는 것처럼, 사회주의 용어로 치장되어 제시된다면, 노동자계급은 그 언어에 현혹되어, 배신자들을 신뢰하고 그 힘을 쓸데없는 싸움에 낭비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나 「사회주의자들」이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별로 다른 놈들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전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급 동지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지독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주아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문제와 노동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와 한 패거리인 이들을 따라왔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고, 파업하기 시작할 때, 외부에 서서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투쟁 속에 있으면서, 이 투쟁이 오직 부르주아지만을 살찌울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직한 혁명의 신발을 더럽히는 의미가 될지라도 때로는 똥 무더기 위에 서야만 할 때(선거에 입후보한다든가)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모든 것은 각 나라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선거에 나가거나 파업에 참여할 것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감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원칙을 양보하고 망각하거나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진짜 해법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대중을 지도할 수 없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 하면서 끝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끌려다니게 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남들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발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미성숙함 탓으로 돌리거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혁명을 시작할 준비되어 있으며 게다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킨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그에 봉사하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배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로부터 멀리 도망쳐 프랑스나 벨기에로 도망칠 것이고,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에 「베르사유」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라인 지방과 루르 지방을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러시아 부르주아지나 그 사회민주주의 동맹들이 했었고, 또 미래에 반복할 행동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푸앵카레는 독일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구원하고,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 세계의 도둑들로부터 구원하는 그런 사업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는 불행히도 군대를 구성한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 사업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해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동맹자를 돕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총구를 주인들, 다시 말해 푸앵카레를 향해 돌릴 것이다. 푸앵카레는 자기 자신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대를 부를 것이고, 불쌍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 동맹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둘 것이다. 이것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베르사유 조약을 깬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푸앵카레는 「라인」과 「루르」로부터 추격을 받아, 인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에 따라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를 공포할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쿠노」와 파시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독일은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지 말고 그것을 써야 한다.

     

    독일 혁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분산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혁명의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노동자계급의 적에 대한 결정적인 단절과 무자비한 전투 없이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군사적으로 억압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승리는 코뮤니스트 혁명의 목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진 모든 세력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왜 우리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 사이에서 진실한 혁명적 코뮤니스트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호소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정당 모두에게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특정 정당에도 전투와 승리를 위해 통일 전선을 구성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제4 코뮤니스트 노동자 인터내셔널(제3 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의 정당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밝혔다.

     

    첫 번째 단계가 가까워졌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직에 기반을 두고 부르주아지와 열심히 그들을 비호해 온 모든 종류의 추종자들과 그 아류들(사회주의혁명가당, 멘셰비키 등)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이 이끌어온 모든 공격, 부르주아지와 지주,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에 의해 고무된 모든 공격을 물리쳤다.

     

    이제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모아 권력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엄청난 결핍과 그 무게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결핍은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세계 노동자운동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한쪽에서는 NEP의 관료주의적 퇴보 경향, 다른 한쪽에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내외부에서 위협하는 경향에 대해 아직 맞서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 그리고 즉각적으로 10월 혁명의 승리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세계 코뮤니스트 혁명의 기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미 승리를 보증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 - 모든 국가의 코뮤니스트들 - 의 전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코뮤니스트 프롤레타리아의 군대(볼셰비키)가 겪은 결핍과 고통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대다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의견을 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코뮤니스트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코뮤니스트에 반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악용할 사회적 배신자와 악당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적이 공개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 하는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와 코뮤니스트에 해악을 끼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 언제나 그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논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뿌리 뽑을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배신자들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버려둔다면,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10월 혁명이 더 이상 승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 배신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코뮤니스트 운동에는 죽음의 일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따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배신자들의 의견에 직면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이,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총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 운동과 러시아 운동의 약점으로 그 실패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그들 나라에서의 혁명이나 적어도 하나둘의 선진국에서의 혁명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10월 혁명의 승리로부터 차지한 위치를,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기하여 그들의 적을 패배시키는 시점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내전과 기근으로 약해져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위협이 되는 위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적확하게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으로 그것을 계승할 것이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노동자그룹」은 러시아 전역에서 경고하고 호소해 왔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함께 모여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분명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앞서 깨달을 것이다. 투쟁은 어렵다. 우리의 활동은 지하활동에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선언」은 러시아에서 출간될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선언을 복사하고 유포한다. 우리 그룹에 속한다고 의심이 되는 동지들은 당과 조합에서 제명되며, 체포되고 추방되며 해체된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 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당과 소비에트 관료의 승인 아래 노동자계급으로부터의 비판을 질식시키는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지도력에 대한 모든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멘셰비키주의다.”(12차 대회에서의 그의 연설을 참고하라) 그것은 만약 지도력이 코뮤니스트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누군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는 당과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GPU(체카)에 넘겨질 것을 의미했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중앙위원회는 그 자신을 로마의 교황처럼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 러시아 노동자들이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것은 반혁명으로 선언된다. 우리,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노동자그룹」은 모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10월 승리가 자본주의 과두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소비에트의 권력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을 막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지도 그룹이 우리의 10월 혁명에 대한 고려가 불법이고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국가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과 제3 인터내셔널에 충실한 동지들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선언」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동지들, 10월 혁명을 위협하는 이 모든 위험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동지를 보고 있다. 동지가 회의에서 우리의 강령에 대해 논쟁하길 바라고 동지의 대표가 제3 인터내셔널의 5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에 대해,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지들, 우리의 선언을 토론하고 혁명을 만들어라. 이해하라 동지들, 이것은 당신이 완전하고 늘 고통받는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것을 돕는 것임을. 우리의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다.

     

    노동자 동지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10월 혁명 승리 만세!

    세계 혁명 만세!

     

     

     

    8.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맑스주의 혁명가들이 이름값대로 가장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쓰라린 종말까지 싸울 투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당이든 인터내셔널이든 기회주의의 장악으로부터 조직을 구하고 퇴행으로 빠지는 것과 더 나쁘게 배반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는 제1 인터내셔널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방도였다. 그것은 또한 제2 인터내셔널에서 “좌파”의 방도였다.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단원이 독일 사민주의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단절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당의 다수를 얻음으로써 기회주의 지도부를 전복하기를 원했다. 최악의 경우 당을 재탈환할 희망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 당 분리 때 그들과 함께 더 많은 혁명가가 함께할 것을 원했다. 그들은 당 안에 조그만 삶의 불꽃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싸웠고 가장 훌륭한 인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맑스주의 혁명가의 유일한 방도였다. 더구나 역사적 경험은 “좌파”가 분리보다는 당이 배제할 때까지 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기를 들어 트로츠키는 축출당하기 전까지 볼셰비키당에서 6년 넘는 투쟁의 세월을 보냈다.

     

    코민테른 안에서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운동의 가장 암흑의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 속에서 가장 길고 가장 끔찍했던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당과 코민테른을 바로 세우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스탈린주의의 철권으로부터 그를 구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 투쟁은 기껏해야 최소화되고, 처음의 의견 불일치로 조직을 떠나거나 “상처뿐인 영광” 때문에 떠난 인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이며, 때로는 생명을 희생한 노동자와 혁명가 세대의 어려운 투쟁에 대한 소부르주아의 경멸을 나타내고 있다.

     

    이탈리아 좌파는 이 방법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론적으로 풍부하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조직의 입장은 그것이 계급을 되돌릴 수 없게 배반했는가를 알게 한다. 조직의 반역이 분명하지 않고, 당이 적 진영에 무기와 짐을 건네주지 않는 한 진정한 혁명가의 역할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싸우고, 필사적으로 당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가 의기양양한 반혁명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코민테른에서 했던 것이다.

     

    코뮤니스트 운동의 위기는 1923년 동안 밝은 대낮에 나타났다. 몇 가지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기회주의 비중이 커지는 코민테른의 3차 대회 이후, 그리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파업이 확대되었지만, 크론슈타트에 대한 억압 이후이다. 동시에 「노동자 반대파」는 소련코뮤니스트당 안에 만들어졌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위기의 근본 이유는 세계혁명의 지연에 있다”(트로츠키 「레닌 이후 코민테른」)고 선언하면서 보편적 감정을 요약했다. 세계혁명의 지연은 전체 노동자운동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0월 혁명의 위기는 NEP(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취한 국가자본주의의 조치에 의해서도 방향을 굴절시켰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유럽 혁명의 확장에 대한 희망을 지연시켰다. 혁명가 중에 레닌은 그 결과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923년 러시아 혁명은 지구를 지배한 자본주의에 의해 경제적으로 목 졸리게 되었다. 이 수준에서 소련의 상황은 파국적이었고 지도부에 제기된 문제는 NEP가 산업에 대한 도움을 통해 전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가, 수정되어야 하는가였다.

     

    트로츠키는 다수가 현상 유지를 원했던 소련코뮤니스트당 정치국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의 경제 상황의 문제와 소련코뮤니스트당의 내부조직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당 통일을 깨뜨리는 것을 피하고자 의견 차이는 정치국 내에 한정되었다. 이는 1923년 가을 그의 책 「새로운 경로」에서만 공개되었다. (1923년 12월에 출간됨)

     

    다른 반대도 나타났다. 코뮤니스트좌파와 반대파 코뮤니스트를 포함한 46명의 인사들이 서명하고 정치국에 제출한 강령 (1923년 10월 15일), 사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Smirnov) 등이 만든 「민주집중주의」 그룹의 창설, 쉴라프니코프(Shliapnikov)와 함께하는 「노동자 반대파」의 재활성화, 미아스니코프(Miasnikov), 쿠즈네초프(Kuznezov) 등의 「노동자그룹」의 창설 등이다.

     

    동시에 감옥에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PCI)의 모든 동지에게 보내는 선언」에서 특히 “통일전선” 문제에 대해 코민테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심각한 비판을 썼다. 그는 의견 불일치에 기반을 두어, 그의 입장을 방어하지 않고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면할 것을 요청했다.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좌파는 다수파였다.)

     

    트로츠키와 같이 보르디가의 태도는 더욱 효과적인 정치투쟁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심스러웠다. 2년 후 그는 코르쉬에게 보낸 편지(1926년 10월 26일)에서 그의 방도의 핵심을 설명했다.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는 실재주의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직 공세적으로 가지 않고 타격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혁명가가 참을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나긴 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미래 투쟁에 대한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견디고, 조심스럽게 전진하면서 일하는지를 알고 있다.

     

    코민테른 5차 대회 이후 시기는 다음으로 특징 지워졌다. 코뮤니스트당의 지속적 “볼셰비키화”와 코민테른 “우선회”, 스탈린과 그 심복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특히 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의 전위대였고 우선회로의 준비가 안 된 트리엥(Trient)과 루스 피셔(Ruth Fisher)였다. 코민테른 지도부에게는 “적응”이 필요했던 자본주의의 “안정화”, 소련코뮤니스트당 14차 당 대회(1925년 12월) 중앙위의 정치 활동 보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짧은 쉼 동안 우리가 한 번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기로 전환되었다.”

     

    당 대회에서의 논쟁 밖에서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레닌이 정치 활동을 포기하게 만든 이래 코민테른과 소련코뮤니스트당을 이끈 3두 체제(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1925년 말 와해된 것이었다.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 3두 체제의 존재는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 투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후 최초의 반대 운동이 침묵으로 줄어들자 스탈린은 더는 러시아 국가와 당 그리고 코민테른을 통제하는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주위의 “옛 볼셰비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안정화”의 상황은 스탈린이 침로를 바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소련 내부 정책에 대해 스탈린에 반대하면서 지노비예프는 세계 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취했다.

     

    “최초의 어려움은 세계혁명의 지연에 있다. 10월 혁명 초기에 우리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가 몇 달, 아니면 몇 년 안에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슬프게도 세계혁명의 지연은 확실한 사실이며 자본주의의 부분적인 안정화가 전시대에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새롭고, 더욱 크고 복잡한 곤란을 제기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의 지도부가 이러한 “안정화”를 인식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5차 대회의 전망과 정책이 올바르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고 정치적 선회를 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침묵했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공개적으로 투쟁을 지속함으로써 더욱 정치적 태도를 채택했다. 보르디가는 “우니타(L'Unita)”에 쓴 글에서 러시아 문제와 “트로츠키 문제”를 제기했다.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좌파는 당의 “볼셰비키화”에 반대하기 위해 “협상위원회”를 만들었다. (1925년 3-4월) 보르디가는 그람시 지도부의 당으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즉각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6월에야 데이먼(Damen), 레포시(Repossi)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진정한 분파가 아니라 조직의 수단에 불과했다. 결국 “좌파”는 당내 다수파를 점하면서도 당으로부터 축출되지 않기 위해 위원회를 해소했다.

     

    러시아에서는 1929년 봄 소련코뮤니스트당 15차 당 대회 준비를 위해, 트로츠키의 최초의 반대파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크룹스카야가 합세한 「통일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새로운 반대파 결성에 스탈린의 억압이 강화되었다. 세레브랴코프(Serebriakov)와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가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노동자그룹」의 미아스니코프(Miasnikov) 같은 사람은 투옥되었고 국가인쇄소 소장은 투옥될 예정이었다. 내전에서의 몇몇 투사는 군대에서 추방되었다. 항공학교장인 그룬스타인(Grunstein)과 우크라이나의 오크토니코프(Okhotnikov) 등 우랄 지역,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포함한 전국에 걸쳐 GPU(국가정치총국, 게페우)는 지도자를 당에서 축출함으로써 「반대파」의 지역조직을 폐쇄했다. 1927년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소련코뮤니스트당 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지노비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항복은 러시아 좌파가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모욕, 위협, 당으로부터의 추방은 노동계급의 진정한 투사를 막을 수 없었다.

     

    “당으로부터의 추방은 당원으로서의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지만, 우리가 코뮤니스트당에 들어올 때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 할 의무로부터 우리를 면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당으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우리는 그 강령과 전통, 그리고 그 기치에 충실할 것이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당과 노동자계급에서의 그 영향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Rokovsky의 이 말은 혁명 정치에서 훌륭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도이고 우리의 방도다. 혁명가는 그들이 배제되지 않는 한 절대로 조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직을 올바르게 바로 잡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 이후 시기 동안 반대파의 성원은 그들이 당에 복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의 배제가 잠정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28년 1월 국외추방이 시작되었다. 추방된 사람들은 지정된 주거지에서 생활할 수단이 보장되지 않아 매우 참혹했다. 모스크바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모욕은 물론 아파트에 살 권리를 잃어버렸다.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로 떠났고 48시간 후 라코프스키는 아스트라한(Astrakhan)으로 떠났다. 반대파 조직이 망명 중에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연속되는 새로운 타격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성원과 그 대표인 라코프스키는 계속되는 투항과 소련에서의 트로츠키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투쟁을 계속했다.

     

    이 시기 동안 GPU(국가정치총국, 게페우)는 스탈린이 마침내 「반대파」의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교활하게 퍼트렸다. 이는 즉각 반대파를 균열시키기 시작했고 라덱은 자극제의 일부의 역할을 했다. 가장 약한 부분이 항복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주의자들은 망설이는 자들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들을 쓰러뜨리거나 포섭할 최선의 순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혀, 1929년 8월 라코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당 중앙위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을 석방하고 유배 중인 트로츠키를 불러 당에 복귀하도록 우리는 도울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분파적 투쟁방법을 포기하고 코뮤니스트적 견해를 방어할 모든 권리를 모든 성원에게 보장하는 당 규약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선언은 수용될 수 없었는데 첫째, 망명으로부터 트로츠키의 복귀를 요청했기 때문이었을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스탈린의 표리부동한 책임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목적을 달성했고 공황의 파장을 잠재웠다. 투항은 멈추었다.

     

    함정, 협박, 암살에도 불구하고 라코프스키와 반대파 중핵은 1934년까지 조직화된 투쟁을 지속했다. 그들 대부분은 진영 내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라코프스키가 투쟁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지노비예프와 그 추종자들이 했던 부끄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빌랑(Bilan)」은 명확히 선언했다.

     

    “트로츠키 동지는 그것이 이념적이고 정치적 투항이 아님을 선언한 후 논평을 발표했다. ‘소련에서 코뮤니스트당이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국제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여러 번 되풀이했다. 라코프스키의 경우는 이를 부정적이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우리는 라코프스키의 경우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연대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행동이 라덱,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의 부끄러운 투항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1929년 소련에서 추방된 이후 투쟁은 국제 좌익반대파 결성과 함께 국제적 수준에서 전개되었다. 코민테른 6차 대회(1929년 2~3월)에서 보르디가는 마지막으로 참석하여 선언한다.

     

    “좌익의 저항은 우익으로부터의 위험에 대항하여 국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하고 유용하며 필요한 반응은 책략, 음모와 복도에서의 소문 같은 형식으로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나서도 안 된다.”

     

    1927년부터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망명지에서 계속되었다.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활동가는 감옥에 있거나 보르디가처럼 섬에 갇혀 있었다. 좌파는 활동가 다수가 축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당과 코민테른 내에서 싸웠다. 그들의 기본목적은 퇴행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경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 조직 내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코뮤니스트당은 우리가 기회주의와 투쟁해야 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당이 완전히 빛을 잃지 않는 한 조직화된 분파로서 재통합할 수 있도록 상황이 지도부를 강제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코뮤니스트로서 우리의 의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1929년 7~8월, 이탈리아 좌파)

     

    이러한 전망은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파 사이에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1928년 4월 이탈리아 좌파는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코민테른에 남을 수 없다고 결정한 코민테른 9차 확대총회(1928년 2월 9-25일)에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 순간부터 이탈리아 좌파는 더 는 코민테른 성원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고 분파를 형성할 의무가 있었다.

     

    분파 형성 결의문에서 「분파」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설정했다. ① 「코뮤니스트 선언」을 지지하고 「제2차 세계대회의 테제」를 받아드리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모든 인자의 결합. ② 레온 트로츠키 의장 아래 6차 세계대회의 재소집. ③ 6차 세계대회 의제로 소련코뮤니스트당의 15차 대회 결의에 연대를 선언한 인자들의 축출을 다룬다.

     

    이처럼 「러시아 반대파」는 당으로의 재통합을 희망했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당과 코민테른 내에서의 분파로 생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쇄신이 분파로서의 활동에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투쟁의 지속성을 보증하고 미래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주역이 되는 간부를 발전시키는 조직으로 <분파>를 이해했다. 우리와 반대로 「반대파」는 사건의 열쇠가 분파의 수준에 있지 않고 중앙파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간부의 형성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코민테른을 재통합하는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정책(이탈리아 좌파는 1928년 이후 포기한)은 올바른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코뮤니스트당과 코민테른의 퇴행을 막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파 없이 반대파는 밖에서 있었고 그 고립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반대파 성원은 코뮤니스트 활동가 다수로부터 단절되었고 더는 그들의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노동자운동과 연결을 맺는 것이 가능한 「분파」의 방도는 그 후 이탈리아 좌파가 이론화한 방도였다.

     

    반대로 코뮤니스트 각성(Réveil Communiste) 같은 그룹의 고립정책은 파국적이었고 생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노동자운동의 고전적 방법과 원칙을 입증했다. 즉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가볍게 분리하지 않는다. 정치적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건강한 요소들을 최대한 입증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성과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노동자운동과 계급을 위한 교훈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조직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원칙 없이 조직으로부터 분리하고 같은 강령적 기준 위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다. 조직의 강령과 실천을 비판에 종속시키지 않는 것은 퇴행을 선언하는 것이다. 코민테른 역사를 보면 혁명가의 진정한 태도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좌파의 이론적이고 정치적 작업이 없었다면 「코뮤니스트좌파」에 속하는 현재의 조직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1930년대 초 「빌랑(Bilan)」이 내세운 생각에 동의한다.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작업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8년부터 오늘날까지 트로츠키 동지는 이러한 분파 건설의 작업을 완전히 소홀히 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의 진정한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Bilan」1933년 11월 “2 4/3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2019년 3월

     

    정리 l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전문 다운로드>   코민테른과 좌파 (최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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