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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 건설/혁명조직 특집] 당에 관한 잘못된 이론 2 - 사회민주주의의 유산 : 레닌의 정정과 룩셈부르크의 망설임
  • 당에 관한 잘못된 이론 2  


    사회민주주의의 유산 : 레닌의 정정과 룩셈부르크의 망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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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심한 혼란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산 하나가 여전히 혁명적 운동에 부담을 주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대한 도식적인 사고, 즉 당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혼란은 특히 1902년 레닌의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 속의 테제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레닌은 계급투쟁의 퇴조기에 만들어진 이 저작을 러시아에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사상 학파인 경제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이용했다.

     

    이 조류는 베른슈타인 이론의 작은 소산으로서, 계급투쟁이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남아있을 필요를 극찬했다. 이러한 발상은 맑스주의를 역사적 숙명론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켜버리고,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자생성을 숭배하며 당의 비활동성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닌은 이와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 투쟁을 넘어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매우 강력히 역설했고, 혁명적 이론과 활동의 힘을 옹호했다. 경제투쟁의 궁극적인 목표를 추진한다는 옳은 관심에서 시작하여, 레닌은 그 반대쪽으로 ‘막대를 너무 구부려버렸다’ 비록 그가 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사이에 경제주의자들이 도입한 잘못된 분리에 대항해서 이러한 투쟁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대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지라도, 레닌은 경제적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방어적인 투쟁은 더 이상 계급의식 발전의 비옥한 토양으로 보이지 않았고, 운동의 정치적 차원은 ‘생산 관계 영역의 외부에서’ 발전했다. 경제와 정치는 물론 만나긴 하지만, 무한에서야 비로소 만나는 두 개의 평행선과 같다. 더욱이 당은 이 융합을 조직하고 노동자에게 의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된다.

     

    레닌의 논의가 실상 사회민주주의의 논의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책 속에 카우츠키의 저작들로부터 문구를 그대로 취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점은 1901년 『새로운 시대』(Neue Zeit)에 실린 카우츠키의 글에서 인용된, 이제 유명해진 문구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사회주의는, 일종의 교의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그러하듯이, 근대 경제 관계에 그 뿌리를 갖고 있고, 그리고 그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가난과 비참함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각각 다른 조건 아래 나타난다. 근대 사회주의 의식은 오직 심오한 과학적 지식을 기초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사실 근대 경제학은, 말하자면 근대 기술만큼이나 사회주의 생산에 있어서 한 조건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둘 다 근대 사회 과정에서 일어난다. 학문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인텔리겐챠이다.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의 정신 속에서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에게 전달해서 그들이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의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외부로부터 도입되는 것이지, 그 속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계급의식이 경제투쟁에서부터 기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레닌의 오류는 계급의식이 경제 투쟁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없고 당에 의해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에 있었다. 당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은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이 레닌의 펜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신비주의의 한 형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역할이, 자생적인 운동 너머로 비상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강령으로 만드는 ‘정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적 학문적 지식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의 관점과 매우 멋지게 융합된 지적 전문가 특유의 재산이라는 점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변명이 있는가? 당이 부르주아 국가를 장악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권력 장악에는 권력의 고삐를 쥘 관리자 능력을 갖춘 유능하고 지적인 기술자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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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미 계급의식과 투쟁 사이의 분리,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사이의 분리가 초래한 다른 궤도 이탈을 다루었다. 카우츠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의식을 생산 관계의 외부에 위치시키면서 코뮤니스트 혁명과 그 발전을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으로 축소시켰다. 그러한 견지에서, 사회주의 강령과 혁명의 필요는 더 이상 경제 현실의 결과물이 아니며,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조건의 산물이 아니다. 더는 자본주의의 명백한 내적 모순이나 그 붕괴의 긴박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자체의 속성인 완벽성에만 설득력의 근거를 두는 그러한 일종의 ‘이상’으로 축소해 버린다 . 룩셈부르크는 비판을 계속한다 :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말해서, ‘순수 이성’으로써 사회주의의 강령을 설명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간단한 언어를 사용하자면, 사회주의에 대한 관념주의적 설명을 본다. 사회주의의 객관적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 (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1898년)

     

    1904년 룩셈부르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답변으로 혁명가의 개입이 처한 세계적 틀을 개관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국제적인 운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특수한 과정이다: 문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람은 그들의 의지를 모든 지배 계급에 반대하여 그리고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오직 현존하는 체제의 틀을 넘어서야만 만족할 수 있다. 대중은 이 의지를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에 저항하는 일상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즉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 내에서 획득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대중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그 역사적 목표는 기존 사회 바깥에 위치한다. 한 편으로 우리는 일상적인 투쟁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 혁명을 한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갈 때 통과해 나가게 되는 변증법적 모순의 측면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자신을 지속해서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지그재그로 항해함으로써 가장 잘 나아갈 수 있다. 그 위험의 하나는 그 대중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는 종파의 상태로 되돌아 침몰할 위험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적인 사회 개량 운동이 되어버릴 위험이다.”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 문제(Organisational Question of Social Democracy)’, 1904년 『새시대』(Die Neue Zeit)에서, 우리의 강조)

     

    트로츠키 역시 레닌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과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그 정확하고 변증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적 대리주의를 타도하자(Down with Political Substitutionism)’이란 제목의 구절에서 1904년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적 대리주의의 체계는, ‘경제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단순한 체계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인 이해관계와 그 의식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는 존재의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매우 강력하고 불가피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객관적 이해관계의 실현을 자신의 주관적인 이해관계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요소 - 그 계급 이해관계의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의식 – 사이에, 모든 삶의 부분을 이루는 영역 - 갈등과 대립, 오류와 실망, 변화와 패배의 영역 - 이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전술적 통찰력은 전적으로 이러한 요소 사이에 놓여 있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길을 단축하고 촉진하는 데 있다.(트로츠키, 『우리의 정치적 책무(Our Political Tasks)』, 1904년, 우리의 강조)

     

    혁명에 대한 이러한 생생하고 변증법적인 관점 –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운명을 그 자신의 손에 거머쥔다 - 은 혁명적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준비로 제한했던 경직된 생각에 대한 트로츠키의 응답이다.

     

    그러나 레닌의 대리주의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의 관점과 로자 룩셈부르크와 트로츠키의 전적으로 명확하고 건강한 관점을 단순히 대조한다면 이는 일종의 희화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1920년대에 와서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와 당의 강력한 독재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첫째로, 레닌은 그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를 어느 정도는 ‘정정했다’. 1905년 계급의 구체적인 경험과 소비에트(평의회)의 등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전투적인 활동으로 풍부해진 그의 후기 저작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볼셰비키당은 계급의 방어적인 투쟁에 개입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외부 요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동적이고 필수적인 분파임을 주장했다. 혁명 운동의 전체 경향은 당과 계급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 혁명가들도 러시아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에 묶고 있는 탯줄을 완벽하게 절단하지는 못했다. 룩셈부르크가 카우츠키의 교의로부터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10년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의 수문을 열었다고 비판한 이후, 어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고, 그의 규탄을 ‘과장되었다고’ 생각한 레닌으로부터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의 가장 기회주의인 멘셰비키로부터 조직적인 분리를 가장 명확하게, 가장 빨리 촉구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아니라 레닌이었다.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오히려 이러한 ‘분리’ 정책을 비난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호소한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1919년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을 창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주저했다. 그는 사회민주당(SPD)을 떠날 것인지 망설였고, 처음으로 소수가 될 위험이 있는 분리 조직을 건설하는 데 주저했으며,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레닌의 집요한 욕망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 룩셈부르크가 독일의 사회민주당에 집착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객관적인 부패를 인식할 수 있는 정치적 지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1916년 출간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에서, 제2 인터내셔널이 취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한 점을 맹렬히 비판했다. 아니, 룩셈부르크를 구속하고 망설이게 했던 것은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대한 그의 전반적인 생각과 그것이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귀결이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학교를 통과해 온 이 혁명가는, 혁명 운동의 대중적 성격에 무조건적 애착을 발전시켜서, 그에게 당은 대중적 성격을 가진 어떤 것에도 적응시켜야 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대중 정당에 대한 관점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운동에 앞서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는 노동자 ‘대중’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조직을 떠나기를 망설였다. 1914년 사회민주당과 제2 인터내셔널의 명백하고 결정적인 사망 이후에도, 룩셈부르크는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대중 운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혁명가들은 이 운동을 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되풀이했다.

     

    룩셈부르크에게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에 의해 저질러진 오류는 가장 훌륭한 중앙 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훌륭하고 소중한 성과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의 문제』). 그래서 혁명가는 옛 사회민주주의적 조직을 넘어서는데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노동자 운동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할 때 룩셈부르크의 일반적 관심은 정확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문제다”라는 주장은 정확하지 못한 실천적 결론을 초래했다. 그리고 단순한 관심이 쉽게 이상주의로, 물신주의로 떨어질 수 있다. 대중적 성격을 띠는 모든 것에 대한 물신주의는 혁명가들을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경사로로 이끈다. 이러 저러한 조직이나 정치적 도구의 대중적 성격에 대한 애착은 (‘노동자 대중은 계속해서 투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의회 정치를 지원하도록 오도될 수 있다. 룩셈부르크 사후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뛰어난 대표자였던 폴 레비(Paul Levi)는 그 길을 뒤따랐다. 전적으로 대중의 운동에 종속된 그의 ‘대중 정당’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그는 점차 사회민주주의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독일 코뮤니스트당과 사회민주당 좌파의 융합을 추진했고, 1922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후에는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으며, 결국 사회민주당에 다시 가입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활동의 집단적인 성격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균질화는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광대한 다수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소수로 남아있을 수 있는 조직이다. 그때의 당의 책무는, 대중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스스로 적응해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수준에서, 또한 조직적 수준에서 코뮤니스트 강령 전체를 방어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 당은 계급의식의 균질화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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