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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문화] 신경숙 표절사태를 통해서 본 문학과 권력
  • 조회 수: 4744, 2019-05-28 17:11:41(2019-05-28)
  • 신경숙 표절사태를 통해서 본 문학과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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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범죄자

     

      신경숙 소설가는 한국 문단에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갖춘 몇 안 되는 대표작가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국내에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이 작품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는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가족관계를 강렬하면서도 애절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맨 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신경숙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그만큼의 위안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지난 616, 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라는 이응준 씨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올린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을 올리면서 신경숙의 표절 의혹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해당 작품이 담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창비는 처음엔 표절 의혹을 부인했다가 나중에 사과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특정사회단체가 신경숙 씨를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한 작가의 표절 시비가 왜 문학인 단체와 하등의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발로 이어졌는지는 무척이나 의아하다.

      어쨌든 이름마저 생소한 이응준 씨의 글은 한국 문단은 물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동안 수면 아래 잠겨 있던 표절 논란이 일반화된 타자로서 문학 전체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다. 급기야 신경숙의 표절 시비는 2000년대 초부터 표절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신경숙 소설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학 권력과 출판 권력의 거시적 담론으로 일시에 비화되었다. 진보 문학단체인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신경숙 표절과 관련한 문학계의 자성과 반성을 위한 신경숙 표절사태에 대한 긴급 토론회를 갖기도 해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논란을 잠재우기에는 미약한 수준이었고 더구나 이 문제를 치열한 쟁점으로 공론화하지도 못했다. 신경숙 소설가가 회원으로 속한 작가단체로서 형식적이고 일회적인 토론에 그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불씨를 더욱 지핀 것은 신경숙 소설가의 해명 때문이었다. 신경숙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결국, 나는 우국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혹시 읽었는지도 모를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대하게 이해해 달라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참으로 이상한 변명을 했다. 덧붙여 신경숙 소설가는 절필하지 않고 글을 계속 쓰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그의 사과문 내용 전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표절은 하지 않았으나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고, 읽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내 기억을 믿을 수가 없고, 문학인들과 독자들에게 사과하고, 모든 게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다. 절필 선언은 임기응변식이라 하지 않을 것이고, 집필은 계속할 것이며, 다른 작품의 표절 시비에 대해서는 창작은 독서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공통점을 가지며내 문장으로 쓴 글이지만 평단이나 독자들의 지적에 대해 깊이 성찰해보겠다.'는 요지였다.

      여기에서 주목해 볼 부분은 사과문 마지막에 창작은 독서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공통점을 가지며라는 대목이다.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창작이 독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표현에 있어 공통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응준 씨나 독자들이 문제 삼은 부분은 단지 예술 일반의 표현 양식에서 비슷한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모방, 또는 모티브의 차용과 남의 작품을 그대로 도용한 표절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이것은 창작자로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명백한 절도행위라는 것이었다. 순전히 다른 소설가의 육체를 자신의 작품에다 슬쩍 오려 붙인 다음에 무늬만 다르게 위장한 것이야말로 예술의 범죄가 아닌가 묻고 있다.

      문제가 된 전설뿐만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딸기밭도 작고한 안승준의 유고집 서문과 비교해 보면 완전 동일하거나 거의 동일한 문장이 여섯 군데나 있고, 장편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단편소설 작별 인사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과 모티프, 분위기들을 표절했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했다. 이 같은 의혹들은 신경숙 소설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을 표절한 것과 비슷하며, 표절을 상습으로 일삼던 와중에 나타난 증거라고 보았다. 이상의 고발에서 이응준 씨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에 나오는 "똥에는 사상이 없다."라는 명언을 들어 신경숙 소설가를 한국 문단의 우상이라고 힐난했다. 그것은 표절이라는 야만성에 무감각하고 너그러운 한국문학의 타락이 만들어낸 어둠이라고 규정지었다. 똥에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듯 표절에는 사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신경숙의 표절이 그저 치워버리면 끝이 나는 똥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치명적인 상처가 돼버렸다고 개탄했다.

     

    표절과 모방의 차이

     

      신경숙 표절사태 이후, 독자들과 시민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정말 표절이 맞느냐는 의구심이었다. 일부 평론가와 혹자는 오히려 여론재판을 비판하면서 마녀사냥식의 과잉비난을 경계하고, 나아가 신경숙의 전설은 표절이 아닌 재창조라는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은 누가 봐도 표절임이 분명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표절문제를 칼로 무 베듯이 딱 잡아서 일도양단으로 가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설에서의 표절은 단지 우국을 작품의 텍스트로만 삼은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었다. 근본적인 물음으로 우국이 없었으면 과연 신경숙은 전설을 쓸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 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큰 고민 없이도 금방 이를 눈치 챌 수 있다.

      설령 신경숙의 해명을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분명히 변명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마저도 그녀가 문장 연습을 할 때나 그동안 메모해 왔던 글을 자기도 모르게 작품 속에 넣었을 수도 있다는 심정적인 이해를 하자는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이것은 표절에 관한 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색하지만 조금은 일리 있는 변명이 아니라면 신경숙에 대한 조심스러운 옹호일 뿐이다. 우국이 있고 전설이 있다는 것이지, 우국과 또 다른 전설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우국의 텍스트와 모티브가 전설에 차용되었다면 모를까,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사건의 전개방식이 유사하고 결정적으로 번역된 문장을 훔쳐왔다는 의혹에서 신경숙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음악이나 춤에서 선율과 몸짓을 모방해 새롭게 해석하고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술의 모방행위이며 표현의 자유로운 영역이다. 하지만 신경숙의 전설에서는 새로운 분위기의 창조와는 전혀 다른 사건, 또 다른 인물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지게 했다.

      작품의 종합적인 분석이 아니어도 세부적으로 표절 의혹이 있는 문장을 살펴보면 그것은 보다 확실해진다. 특히 번역자의 표현이 아니고선 절대 가져올 수 없는 문장의 한 표현이 대표적인 예다. 이 부분은 문장의 유사성을 뛰어넘는다. 의식적으로 도용하지 않는 한 우연히 나올 수 없는 결과물이다. 우국을 번역한 역자의 표현 중에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표현은 김후란의 번역본에만 있는데, 바로 이 점을 이응준 씨는 표절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다. 이 문구는 다른 번역본 두 종에서는 레이코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이문열 세계명작산책2)기쁨을 알고(신우문화사 한창 꽃 핀 숲)로 각각 옮겨졌다. 우국을 읽은 신경숙이 의도하지 않게 그와 같은 표현을 쓴 게 아니라 김후란 번역본을 표절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문제의 표현이 나오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라는 문단을 놓고 보면 표절이 더욱 두드러진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키오 저, 김후란 역)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여기서 신경숙이 베껴 쓰기를 했음을 알 수 있는 문장과 문구가 한두 군데가 아니고 거의 문단 전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단은 언론과 대중들이 제기한 가장 주요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대목에서도 이 같은 의혹은 더 발견된다. JTBC는 논문 표절 감별 프로그램으로 두 소설을 비교한 결과 무려 5곳에서 구성이나 표현이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문장에서 보자면 아래와 같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가슴에 기쁨이 넘쳐나는 바람에 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미시마 유키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내부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기쁨이 넘쳐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신경숙) 자신의 내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머나먼 깊은 곳에서 땅이 갈라지고 용암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격렬한 아픔이 솟구쳐 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부라고 생각되지 않는 가슴 속 깊은 데서 격렬한 아픔 같은 것이 솟구쳐 오르더니 흰 배구공이 튀어 올라와 통통거렸다.” (신경숙)

     

      단순한 문구나 문장 몇 구절이 아닌, 문학예술의 표절과 모방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소설의 모티브와 글의 전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모티브나 구성은 소설의 핵심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 부분이 같다는 것은 다소 의심스러운 표절 혐의가 매우 강하고 분명한 표절 작품이 되게 만든다. 이미 이에 대한 비판은 정문순 평론가가 2000, 문예중앙에서 지적한 바 있다.

     

      “(신경숙의 전설) 남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남은 아내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에서 주요 모티브부터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유사하다.” (정문순 문학평론가 문예중앙2000, 가을호)우국에서는 일제 파시즘 시기에 동료들의 친위 쿠데타 모의에서 제외된 한 장교가 대의를 위해 자결한다. 전설에서는 한국전쟁 때 한 남자가 군대에 자원입대한 뒤 실종된다. 우국의 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전설의 여자는 남편의 실종 통보를 받고 평생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보낸다. 문학평론가 정문순 씨는 우국전설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 역순적 사건 구성, 서두에 역사적 배경을 먼저 언급하는 전개 방식이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같은 관점에서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도 "표절 혐의가 아주 강하죠. 특히 작품의 모티브나 구성, 핵심적인 부분이 같으면 사실상 같다고 볼 수 있죠. 미시마 유키오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 쓴 건 분명해요"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표절이 맞다라는 평론가들의 판단이 또 다른 창작논리의 반박에 부딪혀 묻히는 건, 우상의 어둠에 짓눌린 한국 문단에서 표절의 심각성을 도외시한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작가 스스로가 이미 문학권력이라는 권위의 한 축이 되어버렸고, 이른바 출판 권력이라고 까지 부르는 상업주의의 괴물이 문학의 타락에 기여한 측면이 문학 외적인 유혹의 입김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절에서 표적으로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한국문학의 자산이라고 일컬어지던 신경숙 소설가에 대한 표절 의혹이 갑작스레 불거진 배경은 무엇일까? 신경숙이라는 소설가 한 사람이 어떻게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느냐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그의 문학사상이 과연 한국문학의 토양이 될 수 있을 만한 것인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소설문학의 불모지에서 그동안 신경숙이 성취한 문학적 가치가 소중하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냉정한 평가가 결여된 일방적인 매도는 지나치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신경숙의 작품이 표절 혐의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작가는 이를 시인하고 문단에서는 한국문학이 더 이상 함몰하지 않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비등했다.

      이러한 공방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은 문학 권력의 문제였다. 또한, 문학 권력과 더불어 부도덕한 상업주의라는 죄목으로 출판 권력을 단죄하고자 했다. 실상은 그 실체가 불분명한 상부의 대상을 문학 권력이라 칭하고 이들이 마치 권위적인 힘으로 문학의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출판 권력에 있어서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댔다. 군소 출판사들이 허덕이고 있는 출판시장에서 그나마 대형 기업으로 올라선 몇 군데 출판사의 독과점 구조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열악한 출판 환경 속에서 한국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특정 출판사들을 가리켜 뜬금없이 문학 권력과 결탁한 출판 권력이라 규정하고 이들 출판사에게 무한상업주의의 딱지를 붙였다. 표절의 공정성 시비를 모른 체한 책임을 출판기업에게 물었다. 몇몇 보수 일간지와 언론보도를 보면, 한국 출판시장에서 유일하게 문학이념의 지향과 실천의식을 나름대로 견지해온 창비는 일순간에 돈만 밝히는 상업주의의 대표 출판사로 부도덕성을 뒤집어썼다. 신경숙 소설가에게 향하던 화살을 어느 순간, 한국사회의 예술문화 영역에서 나름대로 문학적 영향력이 있는 출판사와 대중성 있는 작가 집단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돌리고,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마치 파렴치한 절도범인 양 몰아갔다.

      표절 문제에 있어 문학 내부에서 작동하는 검토와 진단을 벗어난 언론의 행태는 다분히 작가 개인의 표절보다는 문학의 오작동 체계를 구조적인 병폐로 등치 시켜 여론재판을 가하는 데 열을 올렸고, 이것은 사뭇 의도적인 것으로 보였다. 한국 사회에서 최소한 상식적이고 정직한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부정적인 언론이 부정적인 분위기를 앞장서서 주도했다. 이 같은 배경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사실 신경숙 소설가 개인의 표절이야 영혼 없는 작가의 도덕적 문제로 끝나면 그만이다. 신경숙 문학의 장점으로 자랑해왔던 유려한 미문들이 일본의 극단적 우익민족주의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고, 그러므로 신경숙은 일본 극우 작가의 이데올로기조차 읽어낼 역량이 없었던 사람으로 재평가하면 된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비단 신경숙 말고도 한국 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문학세계와 작품 스타일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개발독재, 산업화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근대화의 급격한 산물이었다고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지울 수 없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문학의 자기장 안에서 유치한 표절의 주인공도 등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자 문학의 동맹화된 기득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까지도 일부 언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분노를 표출하고 나섰다. ‘표절표적으로 바뀐 셈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표절 문제의 심층이 드러나고 지식인과 대중들이 서로 다른 대립각을 세웠다. 즉 대중은 표절이라는데, 일부 지식인들은 점차 표절이 아니라는 쪽으로 합당한 논리의 타당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지식인들의 그런 방어적 분위기를 받아들일 리 없고 결국은 대중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아예 묵언하고 있는 작가들도 대중들을 따라간다. 이것은 지식과 문학이 상품으로 바뀐 자본의 시장 속에서 지식인(작가)과 대중(독자)들의 관계가 이미 그렇게 길든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대중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자본에 길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들은 자본에 길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권력에도 길든다.

      유신 망령의 부활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권력의 문화예술계 길들이기는 2015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심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정권 차원의 개입이 일어난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특정 작가와 작품을 사전에 검열하고, 심사가 끝난 사안에 대해 심사 결과를 바꿀 것을 종용했다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단체 당 1억씩 지원되는 창작산실-우수공연작품제작지원(연극)’ 사업에서 특정 작가와 특정 작품을 거론하며 심사 결과를 승인하지 않고 심사 결과를 바꾸지 않을 경우, 해당 사업 자체에 대한 지원이 어렵다고 밝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의원실 측은 심사위원에 따르면 4월에 끝난 심사를 위원회가 두 달 넘게 발표를 미뤘고 극단 골목길의 박근형 연출가 작품 개구리에서 대통령의 아버지를 직접 거론, 수첩 공주 대사를 넣은 것 등이 문제가 됐다. 심사위원들의 거센 반발에 위원회는 이사회에서 한 작품을 빼고 심사 결과를 수정해서 발표할 경우 정치적인 이유로 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려하는 것이고,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심사 결과를 바꿔 달라 했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위원회 측은 박근형 작가가 스스로 포기하도록 회유했고, 결국 박근형 작가는 8월 초, 지원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 각 장르별 우수 작품 100편에 1000만 원씩 지원되는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대해서도 특정 작가 등을 거론하며 선정리스트를 90명으로 줄여 달라, 심사 결과를 조정해 달라고 한 것으로 심사위원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존중되고 독립적이어야 할 심사위원의 고유한 권한에 정권이 개입했다는 것, 그것도 대통령과 관련된 풍자를 했다는 이유로 지원을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참담함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정치적인 풍자나 비판은 정부의 지원에서 배제시키는 것이 문화융성을 내세우는 권력의 본질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과 권력의 불편한 역학관계에서 권력의 성격은 문학의 성격을 강제로 규정하려고 든다. 이 과정에서 문학은 끊임없이 왜곡되고 대중은 권력의 질곡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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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대적 반항으로서의 문학

     

      보수 언론의 문학 때리기는 한마디로 반정부적인 기질과 반항심을 가진 작가 때리기다. 예컨대 사춘기 전후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겐 적대적 반항 장애 (Oppositional Defiant Disorder)라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한 정의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이며,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부모나 선생님과 같은 권위적인 대상에게 적대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문학에는 바로 이런 적대적 반항 기제가 있다. 더구나 작가에게는 지속적인 외부의 억압을 부정하는 숨길 수 없는 정서가 잠재되어 있다. 강제된 질서와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권위적인 지배세력에게 본능적 적대성을 보이는 것은 작가에게 장애가 아니라 일종의 정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근대적인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 굴종적인 체제에서 문학 선전대 노릇을 하는 작가들도 있기 마련이었지만,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고선 대부분의 작가들은 적대적 반항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술의 특수성이거나 작가의 예외적 기질이 아니라 예술의 보편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애국주의로 무장한 보수권력과 이들에게 야합한 극우적 언론에게 적대적 반항 장애를 가진 작가집단은 한마디로 처치 대상이었다.

      신경숙 소설가는 적대적, 또는 반항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먼 작가다. 현실을 오롯이 끌어안으려는 그녀의 문장과 작품 세계는 오히려 순응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문단 일각과 언론의 기조는 신경숙 표절 2라운드를 공공연히 부추기고 있다. 6월 표절 논란이 뚜렷한 방향도 없이 한바탕 소용돌이가 끝나는 물결처럼 겉도는가 싶은 시점에서, 이른바 문학 권력=출판 권력으로 비판받던 주요 출판사에서 자사가 발행하는 문예 계간지 가을호를 통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놨기 때문이다. 문학동네는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전설우국의 표절이다. 한 번 제기한 문제를 소홀히 넘긴 것에 대해서 어떤 평론가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사과했다. 강태형 대표와 1기 편집위원의 동반퇴진이라는 고강도 쇄신책도 내놓았다. 창비도 라디오 책방에서 올해 말 50주년 기념행사를 즈음해 백낙청 전 편집인이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계간 <창작과 비평>의 백영서 편집주간은 '표절과 문학 권력 논란을 겪으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저희는 그간 내부 토론을 거치면서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면서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 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문학동네와 창비의 공식 입장은 신경숙의 작품에서 표절은 인정하면서도 약간 상반된 태도를 취하였다. 문학동네는 편집진이 책임을 지고자 하는 실질적인 명분을 선택했고 창비는 출판사를 단죄하는 분위기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무튼, 문예지 가을호가 나오면서, 표절의 이분법적 접근방식이 관련 특집에서 일제히 다루어졌고 자못 진전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권희철 평론가는 전설의 표절 여부에 대해서 전설과 우국의 차이를 평하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라고 전제하고, “문제가 된 문장의 유사성이 있다. 분명히 표절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두 작품은 다른 주제의식이 있고, 문장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질감에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층 정교한 표절 논의가 가능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최원식 평론가는 문학동네에 게재한 비평문에서 문제가 된 대목이 표절이라고 해도 작품 전체를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구성과 모티프의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삽화들은 변형되고 세부는 사뭇 다르다. 결정적인 것은 작의다. ‘우국은 파시즘을 찬미하는 것이지만 전설은 반전(反戰)”이라며, 두 작품은 기본적으로 표절 관계가 아니라 영향 관계라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윤지관 평론가는 한국작가회의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신경숙의 변호를 자처하며, 신경숙 소설가가 '우국'을 표절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활용한 것이며 이를 통해 작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다른 평론가들이 즉각 반박하고 나서면서 표절사태를 둘러싼 2라운드의 서막을 열렸다.

      그런데 평론가나 작가가 벌이는 표절 논의는 제2라운드가 아니고 그들이 감당해야 할 당연한 몫이다. 그것은 문학평론가와 작가끼리 편을 갈라서 싸우는 이권 다툼도 아니고 한국문학의 진로를 가로막는 걸림돌도 아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작가들을 불온시하고 그 불온함의 온상이라 할 수 있었던 창비를 적대시했던 건 보수세력과 보수언론들이었다. 신경숙은 작가로서의 성향을 떠나 그들에게는 보기 좋은 먹잇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보수에 의한 정치, 사회적인 폐단이나 오류를 놓고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신경숙과 창비를 싸잡아 공격하는 것만 봐도 그 저의의 일단을 알 수 있다. 7, 80년대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창비와 함께 겪어온 창비의 독자와 작가들은 창비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곡진하다. '강제폐간''출판사 등록취소'에 온몸으로 저항해온 창비는 문학의 적대적 반항이 담긴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작가회의 이시영 이사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새삼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분단체제론'을 비롯해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 '87년 체제론' 등 창비가 지금까지 수행해온 지속적인 작업과 탐구, 그리고 한국사회에 던진 담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므로 신경숙 표절 사태를 들어 창비를 무조건 폄훼할 일은 아니다.”

     

      이 글의 전후 맥락과 근저에는 근래 퇴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창비에 대한 애증도 깔려 있다. 창비와 같은 독특한 역사와 권위를 갖는 출판사는 한국문학의 자랑이자 보람이기에 이를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지이다. 맞는 말이다.

      표절은 표절을 근절시킵시다!’라는 캠페인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아마 신경숙 표절 사태는 우리 문학계에 그다지 큰 영향은 주지 못하리라고 본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표절 논란이 있었는데, 그때는 침묵하고 유야무야로 넘어갔던 일이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아무리 떠들어도 표절은 작가정신과 작가 양심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표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표적만 남게 되는 상황은 그 어떤 작가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의 작가들은 이제 좀 더 적대적인 반항으로 변해야 한다. 예술작품이란 게 자본이 투입돼 수익을 창출하는 상품으로 여겨지고 문학이 개인 소유물로서 작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본주의적 산물이라면 앞으로도 표절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며,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되풀이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반항의 정서에서 무슨 표절의 유혹이 싹틀 수가 있겠는가? 문학과 권력의 불화, 문학과 대중의 비대칭, 그 긴장된 관계의 복사기에 재사용 불가 도장이 찍힌 표절이라는 이면지가 끼어 있다.

     

      201511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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