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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천 복간 2호」 계급투쟁 100년과 노동자계급의 험난한 길
  • 조회 수: 7043, 2019-06-21 13:10:43(2019-06-21)
  • 계급투쟁 100년과 노동자계급의 험난한 길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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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맑스주의 연속성과 혁명, 반혁명

     

    1. 현재 자본주의와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있어, 맑스주의 방법의 본질은 계급투쟁의 관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계급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당면한 정세를 계급투쟁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새로운 세계의 주인으로서 착취사회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다. 1 인터내셔널은 상승하는 자본주의 능력 때문에, 2 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3 인터내셔널)은 코뮤니스트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사회주의를 참칭하였고, 양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의 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결국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2. 1차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과정과 결과는 러시아와 유럽에서 혁명 물결을 넓혀나갔고, 세계 노동자계급에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역사적 과제를 최초로 시도하게 했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191710월 혁명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이 시기 경험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신의 국가(조국)를 지지해서 노동자계급 간 상호 살육을 묵인, 방조함으로써 사회배외주의로 전락하고만, 사회민주주의 본질을 명확히 폭로하였다. 이로써 제2 인터내셔널 다수당들은 파산을 맞이하였고, 새로운 유형의 혁명 정당, 코뮤니스트당의 시기가 열렸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의 고립과 유럽혁명 실패 그리고 관료주의 반혁명 공세, 이에 맞선 좌파의 패배, 1927년의 마지막 혁명 물결(1926년 베를린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의 비극적 패배는, 노동자계급이 세계 곳곳에서 펼친 장기간의 혁명투쟁과 패배의 시대를 마감했다. 1930년대에는 이미 혁명 물결의 마지막 파고가 소멸하고 말았다. 반혁명 과정은 코민테른 소속 당에 세계혁명이 아닌 러시아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을 부과했고, 또한 노동자계급을 배신한 사회민주주의 전략과 전술로 후퇴하게 했다.

     

    코뮤니스트당은 민족수호의 정당이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테러는 혁명운동이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나라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 대학살(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는 추방과 탄압과 옥죄는 고립에 처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 저하와 부르주아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반혁명 경험은 혁명가들에게 국가··계급 사이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도록 요구했다.

     

    3. 1920년대 중반 국제적인 혁명의 물결이 패배한 이래 노동자계급에 이른바 사회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그리고 맑스주의라는 용어보다 더 왜곡되고 남용된 것은 없다. 이전 동구권 스탈린주의 체제와 현재의 중국, 쿠바, 북한과 같은 국가들이 사회주의나 맑스주의의 표현이라는 주장은 양 진영의 지배계급이 영구화시킨 가장 큰 거짓이다.

     

    1935년에서 45년까지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동안에는 반파시즘민주주의의 수호와 함께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라는 거짓이 인류역사상 가장 커다란 살육에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주도권 아래 두 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 사이 경쟁이 지배적이었던 1945~89년 사이에 훨씬 더 강력하게 이용되었다. 동구 블록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블록에서는 제국주의 충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로 이용되었다. 특히 서구블록에서는 소련 전체주의에 맞선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허위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면서 노동자계급 의식을 왜곡했다. 이것은 결국 동구 블록이 붕괴하자 사회주의의 패배’ ‘맑스주의의 파산’,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종말이라는 가장 큰 악선전으로 이어졌고, 혁명운동의 침체로 이어진다. 이러한 부르주아의 선전에 자발적으로 가담한 세력은 청산주의 세력이고, 스탈린주의 체제를 방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에 봉사한 세력은 이른바 좌익을 자임하는 세력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이데올로기 왜곡은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맑스주의 연속성과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맑스주의를 왜곡하는 옹호자들은 여전히 운동 사회 내부의 주류이거나 영향력을 가졌지만, 맑스주의를 혁명적으로 계승하려는 옹호자들은 더욱 억압받거나 소수로 전락하여 영향력 없는 세력으로 주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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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반혁명의 세 가지 흐름과 공범 관계

     

    4. 맑스주의와 적대하는 반혁명은 세 개의 흐름이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에 깊은 상처를 낸 그들은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는 이러한 세 가지 흐름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완전한 전쟁 경제, 모든 반대의 격멸, 무시무시한 착취율, 광범위한 강제 수용소 등의 기조를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후 삶과 죽음에서 스탈린주의의 가장 최악의 유산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자본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인 양, 제국주의 확장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 양 세계에 팔려나갔다. 10월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는 많은 노동자가 이런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신화를 믿었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질이 계속 폭로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모든 사상에 등을 돌렸다.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전망, 노동계급 혁명이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가한 피해는 막대하다. 스탈린주의가 구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 계급 운동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정당을 타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7,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ICC)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계급에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운동의 변절자들로부터 출발한 운동인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분파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 -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전쟁 동원을 완수하는 것 - 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있는 비합리성의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근대적 기술 사용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나치즘은 독일에서 더욱더 파괴적인 패배의 산물이었는데, 중세적 대학살을 안정화, 산업화시키고, 결국 자기-파괴를 향한 광적인 행진으로 타락한 대중들을 끌고 가는 등 비합리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동계급은 전체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생각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반대로 반파시즘의 유혹 -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뭉치자는 주요한 호소 - 에는 훨씬 취약했다. 그러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전례 없는 공포는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 곧 코뮤니즘의 전망 에 대한 타격이었다." (같은 글)

     

    선진 산업화 국가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주요한 형태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형태에 대해 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끝장낼 때, 스탈린주의 정권과 전쟁에서 연합하여 히틀러 독일을 상대할 때에는 파시즘 지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 무너져 버린 파시즘이나, (중국과 기괴한 북한 정권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 위기의 압박과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 이를 국가 조례 등으로 회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 경쟁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무너져 버린 파시즘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민주주의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고, 이제는 서구의 오랜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남은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2차 세계대전 시기 파시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할 필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정면 뒤에 지배계급의 독재가 있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기각된다.” (같은 글)

    스탈린주의, 파시즘, 민주주의는 서로 적대하고 경쟁하지만,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지배하고 탄압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자 권력,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코뮤니스트 혁명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반혁명 세력이라는 점에서 공범이다.

     

    레닌의 사망과 스탈린의 집권, 그리고 일국사회주의 선포 등 일련의 과정은 러시아 혁명을 패배로 몰아갔다. 혁명의 실패 이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제도는 자본주의의 한 가지 변형일 뿐이었고 반혁명의 첨병이었다. 그 제도가 불과 몇 년 전 소비에트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맹렬히 싸운 세계 여러 나라의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열렬한 지원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34년에는 실제로 이와 같은 부르주아계급이 레닌이 설립 당시 도적들의 소굴로 묘사했던 국제연맹에 소련이 가입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것은 1917년의 볼셰비키를 야만인으로 보았던 세계 여러 나라의 지배계급이 스탈린을 존경할만한인물로 인정한 상징적인 일이 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이 스탈린을 자신들 동료의 일원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그 후로 전 세계의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람은 바로 스탈린주의에 반대했던 수많은 코뮤니스트와 혁명가들이었다.

    스탈린이 비인간적인 각종 범죄를 저지르며 강제 수용소에서 수많은 코뮤니스트와 노동자, 농민을 처형한 것은 이와 같은 세계 부르주아계급과의 공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그 후로도 미국과 유럽의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아시아와 중동,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자신들이 필요하다면 독재자와 학살자들을 기꺼이 지원하며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독재세력의 공범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스탈린주의의 여러 범죄를 가장 극단적이고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민주주의 미덕의 모델로 자칭하는 세력이 바로 민주주의국가들이다.” (코뮤니스트4,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파산한 제도이다, 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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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부활과 한계

     

    5. 노동자계급에 암흑기였던 1930~40년대에는 맑스주의와 국제주의적 입장을 지키고 있던 혁명적 소수도 급격히 감소한다. 종전(終戰)은 새로운 혁명을 등장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혁명의 교훈을 노동자계급보다 먼저 학습한 부르주아지가 독일 도시에 융단 폭격을 했고, 1943년 북부 이탈리아의 대대적 파업을 진압했다. 결국, 종전은 노동자계급의 패배를 심화시켰다. 게다가 전후 경제는 더 심각한 불황에 돌입하지 않았고,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본주의는 진정한 확장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암흑기에 혁명적 소수는 두 가지 길을 걷는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여전히 대중을 지도하기 위해 혁명적 원칙을 포기하는데, 노동자계급을 배신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속으로의 "프랑스 전환(French turn)" 회귀, 반파시즘으로의 투항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 연속성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빌랑(Bilan) 주변의 이탈리아 좌파는 당시의 임무를 명확히 정의했다. 첫째, 제국주의 전쟁을 향한 행진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혁명 물결 특히, 러시아혁명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만들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에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합한 교훈을 끌어낼 것 등이다. 스페인에서 전쟁은 당시 혁명가들에게 특히 혹독한 시험이었다. 많은 혁명가는 반파시즘의 나팔 소리에 사로잡혀서 그 전쟁이 양 진영 모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이며,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총연습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빌랑(Bilan)은 꿋꿋이 나서서 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이 양쪽 진영 모두를 비판했듯이, 파시스트와 부르주아 공화파 양자 모두에 대항한 계급투쟁을 호소했다.

     

    6. 전후 재건 시기는 부르주아계급 내부에서, 그것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확실히 극복했다는 그리고 1929년의 지독한 위기는 이제 추억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1960년대 말 경제위기 재발의 첫 징후들이 나타나 자본주의 세계를 흔들면서 이 환상은 사라져갔다. 그리고 위기 재발과 더불어 전쟁의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다. 1939년의 독일처럼 1960년대 말의 소련은 자신의 주요한 제국주의적 경쟁자에 의해 군사적으로 포위당하고, 승리한 전쟁의 성과물에 의해서만 보상될 수 있는 엄청난 비용의 전쟁 무기를 부담해야 했다. 세계적으로 강력한 두 개의 제국주의 세력의 군대와 대리자들이 민족해방이라는 수많은 충돌 속에서 서로 싸웠고, 독일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세기말적인 위협을 안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사력의 축적을 가진 철의 장막양쪽에서 대치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답은 프랑스에서의 19685월 사건에 있다. 1968년 프랑스는 9백만 이상의 노동자 파업으로 나라 전체가 완전히 정지했고 그것은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이었다. 프랑스에 이어 1969년의 이탈리아, 1970년과 1976년의 폴란드의 노동자폭동, 1973년 영국의 광산노동자 파업, 그리고 코르도바 산업 지역의 통제권을 사실상 노동자들이 행사했던 19695월 아르헨티나까지, 계급투쟁의 물결은 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 모두에서, 그리고 미소 제국주의 블록을 나누는 철의 장막 양측 모두에서 세계의 산업 지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각성과 더불어, 소수로 전락한 기존 혁명그룹의 발전과 새로운 그룹의 출현 속에서 정치의식이 고양되었다. 새로운 정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세대 간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혁명가들이 과거 계급투쟁과 연결을 시도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을 재발견하게 된다. 판네쿡, 호르터, KAPD(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 로자 룩셈부르크, 보르디가가 재출간되었다. 그들은 또한 반혁명에 의해 단절된 국제적 유대를 복원한다. 분명히, 이들은 극소수였고 계급투쟁에 대해 어떠한 중대하고 직접적인 영향력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그리고 특히 반혁명과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이 진행하는 한 과정의 전조를 나타냈다. 새로운 세대는 전후의 붐과 경제 위기의 시작과 맞닥뜨려 미래를 위한 커다란 희망을 품은 투쟁의 물결 속에서 대응하였다.

     

    7. 68투쟁 10년 후인 1979, 계급투쟁의 고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1945년 이래 최초로 소련이 자신의 블록 외부, 직접적인 영향력 밖의 국가를 침공한 것이다. 소련은 경제 위기에 의해,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경쟁자 미국에 맞서 세계 2위의 제국주의 권력으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무기생산의 엄청난 무게에 눌려 점점 쇠퇴해가고 있었다. 1914년과 1939년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권력 중에서 더 약한 자가 다시 한번 세계를 전면전의 위험에 빠트렸는데, 이번에는 배후에 핵전쟁의 위협을 안고 있었다. 이에 세계는 중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 1970년대 투쟁으로 열었던 혁명을 향한 진로가 뒤집힐 것인가? 부르주아계급이 자본주의의 경제 위기에 대한 자신의 해법, 즉 세계대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1980년 폴란드 노동자들의 장대한 투쟁이 해주었다. 폴란드 노동자들은 미소 두 블록 사이의 결정적인 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유럽 노동자계급에 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련 블록의 이른바 사회주의국가든 아니면 미국 블록의 민주주의국가든 상관없이 민족국가의 이해를 위해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기초 위에 투쟁과 자신의 조직을 발전시킨 폴란드 노동자들은 확실히 바르샤바 조약의 군대로 끌려가서 전쟁에 동원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1980년의 폴란드 투쟁은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을 막았다. 하지만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노동자계급이 계속 지배계급의 위기 전개에 저항하고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았다. 결국, 1980년대에 계속된 평탄하지 않은 계급투쟁의 발전은 노동자계급이 패배하지 않았고 세계대전으로의 길은 닫힌 채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투쟁의 물결은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과 광주민중항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유럽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8. 1980년대는 1930년대와는 달리 계급투쟁의 강력함이 지배계급 그들의 위기에 대한 자신의 해법’, 즉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활 조건 방어를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했고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민주주의의 수호의 깃발 아래 자신을 편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그들의 존재를 즉각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는 투쟁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대부분 노동자는 1960년대와 재건기의 조건으로의 회귀가 가능했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임금인상을 위해, 또는 해고에 반대하여 파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르주아계급의 공격이 이런저런 국가수반(예를 들어 마가렛 대처나 로날드 레이건 같은 반동들’)의 신자유주의와 같은 나쁜 정책때문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그래서 198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하나의 난관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부르주아계급은 전쟁으로 나갈 수 없었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적인 공세를 개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난관의 결과로서, 냉전은 1914년이나 1939년의 그것과 같은 전면적인 제국주의적 대학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 개의 제국주의 블록 중 하나의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종결되고 결국 제국주의 경쟁자의 부재로 인해 다른 블록의 해체를 가져왔다.

    이에 뒤이은 시간은 노동자계급에 심각한 혼란의 시기가 되었다. 스탈린주의의 붕괴,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눈앞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의 약점과 부패와 후진성이 폭로되자 (그것이 과장되고 편파적이었어도) 세계 전역에서 승승장구하던 부르주아계급에 사실상, “이것이야말로 너희들이 코뮤니즘을 건설하려 할 때 얻게 될 현실이다" 또는 대안적으로 코뮤니즘은 멋진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을 한번 보아라라고 떠드는 거대한 캠페인을 벌이도록 했다. ‘코뮤니즘의 패배에 대조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부르주아계급은 자본주의는 완벽하지 않을지 모르나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이고 자본주의의 영향력에 대항해서 투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요소가 수많은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이 계속 표현됨에도 왜 1990년대가 명백한 계급투쟁과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 그리고 맑스주의자의 운명 모두에 심각한 퇴조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국제주의의 깃발을 여전히 높이 들고 있는 이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스탈린주의 하수인들로 그리고 기껏해야 회복할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힌 몽상가들로 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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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깊어지는 위기, 노동자계급의 험난한 길

     

    9. 2003년 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대규모 분출은 1989년 이후의 계급투쟁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그것은 1968년 이래 가장 긴 퇴조기 이후 노동자들의 전투성 회복에서 첫 번째 중요한 단계였다. 물론 1990년대에 이미 이러한 전투성의 간헐적인 표현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운동의 동시성은 계급투쟁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2003년 투쟁의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노동자들의 연금에 대한 국가의 공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점이다. 부르주아계급은 1970년대 대량실업의 도래에 대해 일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복지대책으로 대응했는데, 그것은 오늘날 국가부채의 엄청난 증가의 주요 요소 중의 하나이다. 1930년대는 대량실업과 더불어 어떻게 절대적 빈민화가 폭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에 그 직전의 패배가 없었다면, ‘자본축적의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은 그것의 반대편인 혁명의 법칙이 될 만큼 위험으로 치달았을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은 역사적 기억이 있다. 계급 정체성의 상실에도 악화하는 위기로 인해 이 기억이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대량실업과 사회적 임금의 삭감은 이제 1930년대의 기억을, 전면화된 불안정과 빈곤화의 영상을 환기했다.

     

    10.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2003년 이후 노동자계급에 1930년대의 기억을 강력하게 그리고 직접 환기해주는 데에는 불과 4~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07~2008년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최대의 자본의 위기는 단순한 주기적’, ‘순환적의미의 경기침체를 넘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모순으로부터 생겨난 피할 수 없는 위기와 파국을 맞이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무능과 끝 모를 혼란을 보여주는 위기는, 아프리카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유럽과 남미의 노동자 투쟁, 북미와 아시아의 노동자 투쟁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강타했다. 위기에 빠진 지배계급은 온갖 교묘한 금융적인 술책과 함께 위기의 부담을 노동계급에 전가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그것은 2008년 이래 임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과 사회적 복지를 통한 간접적인 공격이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쇠퇴하는 자본주의 위기와 파국의 진행은 노동자 투쟁을 고조하기도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장기 실업 계층과 불안정(비정규직) 고용 노동자 사이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11. 1930년대 대공황이 패배한 노동자계급의 사기를 더욱 악화시킨 것처럼 2007~2008년의 금융위기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동안의 금융화과정은 금융기관과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수많은 프롤레타리아는 채무자가 되었고, 신용 경제의 전례 없이 세련되고, 교활하고 불안정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복지국가의 해체와 국가부채 증가, 재정 불안은 그것에 의존하는 프롤레타리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공공부문,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이제 신분처럼 고착되었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빚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를 훈육하는 새롭고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이른바 금융과 유로 위기는 1989년 이후 계급의식, 계급 정체성과 전투성의 장기간의 심각한 퇴조에 치료 약이 되는 대신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일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에서의 연대 상실의 치명적인 효과는 심각하게 증대했다. 특히, 우리는 희생양 현상, 이 사회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세계의 모든 악이 투영된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대량학살로 가는 문을 연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 속에 퍼져 있는 문제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것은 협력을 약화하고, 원자화, 그리고 상호 의심과 약탈의 발전을 부추긴다.”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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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결론

     

    12. 1968년의 대대적 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은 계급투쟁을 계속해오고 있지만, 현재는 방어적이고 경제적인 투쟁마저 힘에 겨운 상황이다. 한국의 촛불 투쟁 이후 상황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더해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급투쟁 성과물이 사라지고 있다. 평의회적인 토론, 사상투쟁, 아래로부터의 파업투쟁, 노동자/프롤레타리아/소수자 연대와 대중총회, 국제주의 실천과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의 부재 등.

    이제는 계급의 미래(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지 않고서는 운동을 한 걸음도 발전시킬 수 없다.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을 넘어 국제적 수준으로 나아가야 하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발전해야 하고, 방어적 투쟁에서 공세적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은 코뮤니즘의 목표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그 모든 주장이 구호에만 그치도록 계급 운동이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거리 곳곳에서 공장에서 농성장에서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그것을 넘어설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한계가 있더라도 이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지, 그리고 현재의 질서와 체제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조직적 수단과 계급의 무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변했지만, 아직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 분열과 분할은 지금까지 부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혁명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긍정적으로 유효하다. 불안정 노동과 만성적인 실업, 빈곤의 증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사회시스템의 붕괴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세대에게 비참함을 안겼다. 하지만 동시에 족쇄 이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현실도 안겼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더는 개선되거나, 전쟁과 빈곤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거나, 친환경적이 되거나, 최소한의 인간의 얼굴을 가진다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사회 억압에 고통받는 사회계층의 근본적 욕구 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결코 이기적인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다수의 이해를 위한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인 운동의 기초이다.” (코뮤니스트선언)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최종 목표와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에 고통받는 사회계층의 근본적 욕구는 코뮤니즘으로 일치한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공격에 맞서, 착취와 빈곤과 전쟁의 야만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코뮤니스트 혁명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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