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 당 건설 특집]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1
  •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1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

    (보고서 1부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우리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이하 ICC) 창립 40년 이후 우리 활동의 대차 대조표는 무엇이며 전망은 무엇인가?”라는 이전의 글에서 밝혔듯이, 2015ICC 21차 대회는 ICC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를 채택했다. 보고서1,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분파 개념의 역사적 맥락과 그것의 환기를 시켜준다. 2부는 우리 조직이 이러한 측면에서 책무를 어떻게 이행해오고 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이다. 보고서의 첫 번째 부분을 아래에 공개하는데, 이는 ICC가 직면한 특수한 문제를 넘어서는 전반적인 관심사에 관한 것이다.

     

    21차 국제 대회는 ICC40년간의 존재에 관한 비판적인 평가를 관심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대차 대조표는,

     

    - 첫째, ICC가 해온 일반적인 분석과

     

    - 둘째, ICC가 미래의 당 건설에서 자체의 역할을 설정하는 방식에 관련되어 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관한 해답이 분명하게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역사의 현시기, 즉 계급 대립의 노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질 조직인 혁명당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ICC가 떠맡는 역할이 잘 정의되어 있다는 점이다 :

     

    이 유기체의 역사, 즉 당의 역사를 탐구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유기체를 계급의 운동이 겪어오는 여러 단계, 계급에 부과된 문제, 그리고 매 순간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그것에 적절히 대응하며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그 교훈을 미래의 투쟁을 향한 발판으로 활용하려는 유기체의 노력 일반적인 맥락 안에 놓고 살펴보아야 한다. 정치 정당은 계급의 발전에 주요한 요소인 한편, 그것은 동시에 계급의 역사에서 주어진 순간에 계급의 진정한 상태의 표현이다.”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노동자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당을 불구로 만들고 부패시키며 그 당의 진정한 기능을 왜곡하는 경향을 가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노출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에 대응하여 코뮤니즘의 입장을 가다듬고 명확하게 좀 더 정밀하게 만들 목표를 가지고 혁명 분파들이 출현했다. 3 인터내셔널로부터 출현한 코뮤니스트좌파(the communist left)는 확실히 이러한 경우였다. 그래서 당 문제를 이해하려면 국제 코뮤니스트좌파 전체의 경험과 성과를 이해하고 동화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

     

    그런데, 그 시기가 발전하는 계급투쟁의 시기인가 아니면 패배나 후퇴의 시기인가에 따라 혁명가 조직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밝힌 점에서 특별한 공헌을 한 것은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였다. 이탈리아 분파는 이러한 두 시기 각각 혁명 조직이 어떤 형태를 띠는지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경우에는 계급투쟁에 어떤 중개도 없이 직접 영향을 갖게 될 조직의 형태, 즉 당의 형태를 띤다. 두 번째 경우에는 계급의 직접적인 삶에 훨씬 더 미약한 영향력을 갖는 수적으로 제한된 조직의 형태를 띤다. 이탈리아 분파는 이러한 두 번째 유형의 조직에 분파(fraction)’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했다. 이때 분파는 계급투쟁 발전의 두 시기, 즉 당(the party) 존재의 두 순간 사이에 존재하면서 과거의 당과 미래의 당을 연결하는 고리, 즉 유기적인 가교를 구성한다.” (영문판 국제평론35, ‘당 그리고 당과 계급의 관계에 관하여9)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 노동자 운동 역사의 다른 순간에서 이러한 분파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어떤 지점까지 ICC분파로 간주할 수 있는가?

     

    - 분파의 임무 중에서 ICC에 어떤 것은 적용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

     

    - ICC는 어떤 특별한 임무를 가지며, 혁명 조직의 임무 중에서 어떤 것은 분파의 임무에 속하지 않는가?

     

    이 보고서의 1부에서 우리의 성찰에 역사적인 윤곽을 세우기 위해 4가지 질문 중에 첫 번째를 주로 다룰 것이다. 이것으로 보고서 2부에 더 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된 핵심적인 질문, ICC가 미래의 당을 준비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어떤 대차 대조표를 그려낼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해답을 제시할 것이다.

     

    노동자 운동 역사의 다른 순간에서 분파의 개념을 검토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시기를 구분한다:

     

    - 노동자 운동 초기, 코뮤니스트동맹(Communist League)과 제1 인터내셔널로도 알려진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의 시기;

     

    - 성숙기, 2 인터내셔널의 시기;

     

    - ‘전쟁과 혁명의 시기’(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표현에 따르면)

     

    그러나 먼저 프롤레타리아 당의 역사에 대한 아주 짤막한 환기를 포함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분파의 문제를 다루려면 우리는 어떨 수 없이 당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당은 분파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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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동자 운동 역사에서 당

     

      당 개념은 노동자운동의 경험(코뮤니스트동맹, 국제노동자협회, 2 인터내셔널의 당, 코뮤니스트당)을 통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점진적으로 정련되었다.

     

    불법조직이었던 코뮤니스트동맹은 여전히 종파의 시기에 속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동틀 무렵인 19세기의 전반부에는 여전히 형성 단계에 있던 노동자계급은 지역적이고 고립적인 투쟁을 벌였고 교조적인 학파, 종파 그리고 연맹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코뮤니스트동맹은 이 시기의 가장 선진적인 표현이었던 한편 동시에 그것의 선언문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앞으로 다가올 시기를 예고했다.”(‘프롤레타리아계급 당의 본질과 기능’, Internationalisme38, 194810)

     

    국제노동자협회(IWA)의 임무는 정확히 바로, 종파를 넘어서서 유럽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결집 그리고 그들의 의식에 무게를 둔 많은 혼란과 관련한 규명 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질적인 구성(노동조합, 협동조합, 선동그룹 등등) 때문에 그것은 이후 제2 인터내셔널의 내부에서 당이라는 단어가 얻게 된 근대적인 의미의 당은 아니었다.

     

    1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유럽 주요 나라에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무대 위에 효과적으로 등장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조직화된 역량을, 계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함께 결집했다. 1 인터내셔널은 경제적, 교육적, 정치적 그리고 이론적인 노동자 투쟁의 모든 흐름과 모든 우발적 측면 두 가지 모두를 함께 모이게 했다. 그것은 모든 다양성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단일 조직의 최고점이었다.

     

    2 인터내셔널은 임금노동의 경제투쟁과 사회적 정치투쟁 사이 분화의 시기를 나타냈다. 자본주의사회가 완전히 꽃핀 이 시기에 제2 인터내셔널은 개혁 투쟁의 조직이자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확인을 위한 정치적 정복의 조직이었던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이고 혁명적 사명의 이론적 기초를 명확히 하고 정련함으로써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구분에서 더 높은 단계를 나타냈다.” (같은 글)

     

    계급의 일반 조직(노동조합)과 계급의 역사적 강령의 방어를 임무로 하는 특수 조직, 즉 당 사이의 구분은 제2 인터내셔널에서 분명하게 이루어졌다. 구분은 제3 인터내셔널(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창립될 당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최초로 역사의 현안으로 된 순간에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있어서 계급의 일반 조직은 더는 노동조합(그 어느 순간에도 노동자계급 전체를 조직하지 않았던)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로 구성되었다 (이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안에서 노동조합 문제와 당의 역할 문제에 관해 많은 쟁점이 불분명하게 남아있긴 했을지라도).

     

    이러한 다양한 조직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계급투쟁의 진로에 영향력을 갖고 이런 의미에서 이라는 명칭이 부여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동맹이 민주주의 운동의 좌익으로서 주로 활동했던 1848~1849년의 혁명 시기에는 코뮤니스트동맹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그래서 맑스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라인 지방과 그 밖의 독일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은 직접적으로 연맹의 기관지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의 기관지로 제시되었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 동맹은 지금은 분쇄되어버린 대중적인 대중운동에 대항해서는 너무 약한 지렛대임이 증명되었다(‘코뮤니스트동맹의 역사에 관하여’, 188511).

     

    이러한 미약함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미약함 자체에 놓여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산업 발전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엥겔스는 동맹이 독일에서 중요성을 가진 유일한 혁명조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고 지적했다. 그런데 국제노동자협회의 영향력은 훨씬 더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유럽에서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2 인터내셔널(사실상 그것을 구성하는 다른 정당을 통해서)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대중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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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노동자운동 초기의 분파개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강령, 즉 코뮤니스트 혁명을 옹호하는 선봉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않을 때 그 당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이미 맑스의 시기에 제기되었지만, 그 뒤에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질문에 역사는 다른 해답을 제시했다. 그 첫 번째 답은 당의 존재 조건이 존재하지 않을 때 당은 해체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코뮤니스트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의 경우에 해당되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맑스와 엥겔스는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반혁명의 승리를 확인한 쾰른 코뮤니스트 재판이 있고 난 뒤, 185211월 맑스와 엥겔스는 코뮤니스트동맹의 해체 선언을 중앙위원회에 요구했다. 반동의 시기에 혁명적 소수의 활동 문제는 동맹 내에서 1850년 가을에 이미 제기되었었음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해 중반에 맑스와 엥겔스는 경제회복의 결과 때문에 혁명 물결이 잠잠해지는 썰물의 시기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번영의 상황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력이 부르주아 생산 관계 내부에서 가능한 한 풍부하게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혁명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혁명은 오직 이러한 두 요소 근대 생산력과 부르주아 생산양식 - 가 서로 상충하게 되는 시기에만 가능하다.” (맑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4)

     

    맑스와 엥겔스는 그래서 윌리치-샤퍼(Willich-Schapper)의 당면주의적 소수에 대항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소수는 그러한 썰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봉기를 계속해서 요구하기를 원했다.

     

    특히, ‘다음 혁명의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 위상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지난번 논쟁에서 , 중앙위원회의 소수 회원들이, 지난번 회람과 모순되는 심지어 선언(Manifesto)’과도 모순되는 견해를 제시했다. ‘선언의 전반적인 견지 대신에 독일 수공업자들의 민족 감정에 아첨하는 독일 민족주의의 견해가 자리를 차지했다. ‘선언의 유물론적 논지 대신에 관념론적 논지가 강조되었다. 실제의 관계 대신에 의지가 혁명에서 주요 인자로서 강조되었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15, 20, 50년의 내전을 겪어야만 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대신에 우리는 당장 권력을 잡아야만 하거나 아니면 잠이나 자러 갈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민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듯이 그렇게 이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가 단순한 문구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 문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그냥 모든 소부르주아를 프롤레타리아라고 선언해 버리고, 그렇게 사실상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소부르주아를 대변하면 될 터이다. 실제의 혁명적 발전 대신에 그냥 혁명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면 될 터이다.” (맑스, 1850915일 코뮤니스트동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행한 연설, 쾰른 코뮤니스트 재판(1)사전준비에서 인용)

     

    마찬가지로 1872년 헤이그대회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회를 바쿠닌주의와 라살레주의 경향의 영향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총회를 뉴욕으로 옮기는 결정을 지지했다. 한편 이러한 경향은 파리코뮨의 분쇄로 유럽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요한 패배를 경험했던 시기에 성장했다. 총회를 유럽 밖으로 옮기는 것의 의도는 국제노동자협회가 해체 이전 단계인 잠복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고, 그 해체는 결국 18767월의 필라델피아대회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을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당을 해체한다는 것이 코뮤니스트동맹과 국제노동자협회의 경우에는 그 뒤보다 훨씬 쉬운 편이었다. 동맹은(1848~1849년 혁명 당시를 제외하면) 작은 비밀조직으로서 사회에서 어떤 공식적인위치도 갖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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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노동자협회의 경우, 형식상의 소멸은 모든 구성요소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영국노동조합이나 독일노동자당(SAP)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소멸에도 살아남았다. 사라진 것은 다양한 구성요소 사이를 묶는 형식적인 끈이었다.

     

    그 뒤 사정이 변했다. 노동자의 당은 더는 사라지지 않았다 - 오히려 적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기관이 되어버렸고 이점은 남은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했다.

     

    코뮤니스트동맹이 해체되었을 때, 미래에 언젠가 출현하게 될 새로운 당을 향한 가교를 건설할 임무를 띤 어떤 형식적 조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시기에 맑스와 엥겔스는 이론적 정련화 작업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자신이 발전시킨 이론에 숙달한 사실상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이 작업의 수행을 위해서 어떤 형식적 조직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코뮤니스트동맹의 많은 전() 회원들, 특히 영국에서 망명 중이던 전 회원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심지어 1856년에는 맑스와 샤퍼 사이에 화해가 있기도 했다. 코뮤니스트동맹의 중앙위원회 전 회원이었고 영국 노동자운동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던 에커리우스(Eccarius)1864년에 맑스에게 세인트마틴홀에서 928일 열린 유명한 회합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그곳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의 창립이 결정되었다(2).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회는 그래서 에커리우스(Eccarius), 레스터(Lessner), 로허너(Lochner), 판더(Pfaender), 샤퍼(Schapper) 그리고 물론 맑스와 엥겔스와 같이 동맹의 전 회원 상당수를 포함했다.

     

    국제노동자협회가 사라졌을 때, 이미 보았듯이, 2 인터내셔널 창립의 기원에 놓이게 될 조직이 남아있었는데, 특히 독일의 당이 그중 하나였다. (SAP)1875년의 통합으로 출현했는데 아이젠나허(Eisenachers)로 알려진 베벨(Bebel)과 리프크네히트(Liebknecht)와 같이 당의 맑스주의 인자들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두 조직이 창립당시 수행하려고 의도했던 역할에 대해 논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코뮤니스트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코뮤니스트동맹은 머지않은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보게 될 것을 기대했다.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간파했다. 마찬가지로, 국제노동자협회의 창립 당시 (그 규범에 따르면) (상호주의자들과 집산주의자들 등 국제노동자협회의 여러 다른 구성요소로 인해 다양한 전망이 이 문건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 다가오는 짧은 또는 그리 길지 않은 시기에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존재했다.

     

    파리 코뮨의 패배로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한 조건이 미성숙함을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파리코뮨 이후 시기는 대대적인 자본주의 확장의 시기로서 특히, 독일이 산업 열강의 하나로 출현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20세기 초 독일은 영국을 추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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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 인터내셔널에서의 분파

     

      혁명적 전망이 멀리 놓여있던 이 시기(3)에 사회당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특히 독일에서) 주요성을 획득했다. 이러한 증대하는 영향력은, 대부분 노동자의 정신이 혁명적이지 않던 시기에 사회당이 그들의 강령 안에는 사회주의의 전망을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간신문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개혁이라는 최소강령을 옹호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서, 최종목표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운동만이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 베른슈타인(Bernstein)과 같은 사람들과 사회주의라는 최종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과격주의로부터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결정적 요소이다, 전체 노동자 운동이 자본주의 질서를 개선하려 헛수고하지 않고 질서에 대항해 계급투쟁을 벌이도록, 질서를 억누르도록 전환키는 유일한 요소이다 -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질문, ‘개량이냐 혁명이냐는 사회민주주의에는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베른슈타인 및 추종자들과의 논쟁에서 당의 모든 이들이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점은, 그것이 투쟁의 이런저런 방법에 관한 또는 이런저런 종류의 전술 사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존재 자체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서문) 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이 형성되었다. 베른슈타인의 테제들이 독일사회민주당(SPD)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부되긴 했지만, 이 전망은 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서 (특히 당 기구 안에서) 그리고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경험은 비()혁명적인 상황으로 표현되는 연장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당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인해 준다. 2 인터내셔널 당이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은 조직의 오랜 부패를 드러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조직이 갖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침투성에 대한 취약성과 그래서 언제라도 그것에 의해 침투당할 가능성은 계급투쟁의 기나긴 정체와 후퇴 시기에 점점 더 정도가 심해져서 결국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해 버리고 당은 불가피하게 모든 원래의 계급 내용을 잃고 대신 적대 계급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 정당의 본질과 기능(Nature and function of the political party of the proletariat)”, Internationalisme, 38, 194810(4))

     

    이러한 문맥 속에서, 최초로 진정한 분파들(fractions)이 출현했다. 최초의 분파는 볼셰비키분파로서,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대회 이후 처음에는 조직에 관한 문제를 놓고 그다음에는, 러시아와 같이 반봉건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임무와 관련된 전술 문제를 놓고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이때 주목할 점은, 1917년까지는 볼셰비키분파와 멘셰비키분파가 서로 독자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수행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당,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ussian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 RSDLP)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윈쿱(Wijnkoop), 반 라베스테즌(van Ravesteyn) 그리고 세톤(Ceton)이 주도했지만, 호르터(Gorter)와 판네쿡(Pannekoek)도 참여한 주간지 트리뷴(De Tribune)을 중심으로 발전한 맑스주의 경향이 1907년부터 네덜란드사회민주노동자당(Dutch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 Dutch SDAP) 내부에서 유사한 작업에 관여했다. 여기에서 이 경향은 당내의 기회주의적 기류(주로 트로엘스트라(Troelstra)와 의회분파에 의해 대표된)에 대항해 싸웠고, 그 기류는 1908년 당대회에서 트리뷴의 폐간을 제안했다. 트로엘스트라가 결국 데벤터 임시대회(19092)에서 승리하고 이 대회는 트리뷴의 폐간과 편집인 3명의 당으로부터의 제명을 결정했다. 트리뷴주의 지도자들을 동조자로부터 분리할 목적을 띤 이 정책은 실상 동조자로부터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최종적으로, 트로엘스트라의 이러한 제명 정책은 중재를 목적으로 요청된, 개량주의자가 지배적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국제서기국의 후원을 받았고, 3명의 편집인이 네덜란드사회민주노동자당(SDAP)로부터 결별하려던 열망(한편 호르터는 이러한 결별을 원치 않았다(5))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제명 정책으로 인해 트리뷴주의자들은 19093월 새로운 당,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DP)을 결성하게 된다. 이 당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선거에 거의 영향력이 없이 극히 작은 소수로 남아 있었지만, 인터내셔널 내부의 좌파로부터, 특히 볼셰비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지를 통해 당은 (190911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국제서기국으로부터 한번 거부당한 뒤) 결국 1910년 인터내셔널에 다시 합류해서 1910년 코펜하겐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 (네덜란드사회민주노동자당의 7명에 비해서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리인 한 명을 파견할 수 있었다. 1차 대전 동안, 네덜란드는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과 식량부족 등 부담이 노동자계급에 과중했던 전쟁 동안 사회민주당(SPD)은 국제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리고 노동자 투쟁을 지원한 덕분에 선거에서 영향력을 획득했다. 결국, 191811월에, 심지어는 독일 코뮤니스트당(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의 창립 이전에 사회민주당은 네덜란드 코뮤니스트당(Communsit Party of the Netherlands: CPN)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한 한 당의 내부 분파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 번째 경향은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을 창립하게 된다. 전쟁차관이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포함해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191484일 저녁, 몇몇 국제주의 투쟁가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당내에서 지도부와 대다수의 국수주의적 정책에 대항해 싸우길 원하는 모든 인자를 규합할 방법과 투쟁 전망을 모색했다. 이 투쟁가들은 논쟁을 당 내부에서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여러 도시에서 평당원들은 당의 의회 내의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한 점을 비난했다. 심지어 리프크네히트도 당 규율 때문에 84일 차관을 지지한 점을 놓고 비판을 받았다.

     

    122일에 이루어진 두 번째 표결에서 유일하게 리프크네히트만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뒤이은 두 번의 표결에서는, 우선은 오토 륄레(Otto Rühle)가 그 다음번엔 점점 더 많은 수의 의원들이 그를 따랐다. 1914~1915년 겨울부터 불법 전단지가 유포되었다. 특히 그중 하나는 적은 국내에 있다(Der Feind steht im eigenen Land)”였다. 19154월 인테어나치오날레(Die Internationale) 최초이자 유일한 발간호가 간행되어 바로 그날 저녁에 5000부가 팔렸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레오 요기헤스(Leo Jogiches),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및 클라라 체트킨(Klara Zetkin)을 중심으로 한 그룹에 인테어나치오날레(Internationale)’라는 명칭을 제공했다. 불법이라는 조건 하에서 탄압에 노출된 채(6), “스파르타쿠스그룹(Spartakusgruppe)”을 그다음엔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kusbund)”을 이름으로 채택한 극히 작은 그룹은 전쟁과 정부에 반대한 투쟁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우파와 중앙파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스파르타쿠스 멤버들이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그룹, 특히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의 다른 그룹(판네쿡(Pannekoek), 라덱(Radek), 프뢸리히(Fröhlich)가 활동함)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국제주의적 정책을 옹호했다. 1917년 초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내에서 반대파의 입지가 진전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반대파들을 제명했고, 반대파 그룹은 자치적으로 계속 활동한 반면,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들은 중앙파의 독립사회민주당(Unabhangige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USPD) 내부의 한 분파로서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이러한 다른 경향들은 19181231,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창립 순간에 함께 결집하지만, 새로운 당의 근간을 이룬 것은 명백하게 스파르타쿠스동맹 멤버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좌파분파가 러시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보다 약간 뒤늦게 형성되었다. 이 분파는 나폴리에서 보르디가(Bordiga)와 그의 동지들이 191812월부터 간행한 신문, ‘소비에트(Il Soviet)’를 중심으로 한 기권주의자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이 분파는 의회 선거에서 기권할 것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됨)이었는데, 공식적으로는 191910월 이탈리아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y:PSI)의 당대회에서 한 분파를 이루었다. 사실상, 일찍이 1912년에 이미 청년 사회주의자 연합(The Federation of Young Socialists) 안에서 그리고 이탈리아사회당(PSI)의 나폴리연합(Naples federation) 안에서 보르디가는 비타협적인 혁명적 경향에 생명을 불어넣었었다. 이탈리아좌파의 형성이 이렇게 지체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보르디가가 군대에 징집됨으로써 1917년 이전에는 정치 생활에 개입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 설명되지만, 무엇보다도, 전쟁 동안에는 당의 지도부가 좌파의 손에 놓여있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1912년 대회는 개량주의적 우파를 축출했고 1914년 대회는 프리메이슨들을 축출했다.

     

    이탈리아사회당의 신문 아반티(Avanti)는 무솔리니(Mussolini)가 운영했는데, 그는 이 대회에서 축출 안건을 제출했다. 그는 지위를 이용해서 19141018일에 절대적인 중립성에서 행동과 업무의 중립성으로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는데, 사설은 이탈리아가 협상의 편에서 전쟁에 가담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는 지위에서 해직되었지만, 그 뒤에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장래에 프랑스코뮤니스트당 지도자가 될 마르셀 카셍(Marcel Cachin)이 가져온 기금 덕분에, 프랑스 정부와 협상에 친화적인 포롤로 이탈리아(Il Popolo d`Italia)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무솔리니는 그해 1129PSI에서 제명되었다. 그 뒤 세계대전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인해 좌파, 우파 그리고 중앙파로의 선명한 입장 표명이 요구되자 당의 지향은 우파와 좌파 사이 다시 말해 맑스주의적입장과 개량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1917년 로마 대회에서 우파와 좌파 사이의 대립이 굳어졌다. 우파는 17,000표를 좌파는 14,000표를 얻었다. 러시아혁명이 이미 진행 중이던 시점에 투라티(Turati), 트레베스(Treves) 그리고 모딜리아니(Modigliani)의 승리는 피렌체, 밀라노, 토리노 및 나폴리에서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분파의 형성을 재촉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0년에 가서야, 러시아에서의 혁명,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형성 그리고 또한 이탈리아에서 특히 토리노에서 노동자 투쟁의 자극을 받아서 기권주의 분파는 당내에서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것은 또한 그람시(Gramsci)가 주도한 신문, 신질서(Ordine Nuovo)를 중심으로 모여든 경향과 접촉하게 되었다. 두 경향 사이에는 중요한 이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람시는 선거참여에 호의적이었고, 일종의 혁명적 노동조합을 옹호했으며, 우파와 중앙파로부터 단절하고 자치적인 분파를 형성하는 것을 주저했다).

     

    “...10월 밀라노에서 통합코뮤니스트분파가 결성되었다. 투라티의 우익을 배제하고 코뮤니스트당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내놓았고, 코민테른의 제2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서 선거 보이콧을 포기했다(같은 글). 192012월 이몰라(Imola)대회에서 분열 원칙이 결정되었다 : 하나의 분파로서 우리의 업무는 지금 중단되고 중단되어야 한다 () 표결을 통해 우리가 다수가 되거나 또는 소수가 되거나 결과에 상관없이 표결이 끝나자마자 즉시 당과 (SPI) 대회를 떠나야 한다. 이것에 () 중앙과의 분열이 뒤따른다.” (같은 글). 1921121일에 시작된 리보르노(Livorno)대회에서 이몰라 안건은 총 172,487표 중 그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58,783표를 얻었다. 소수는 대회를 떠나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으로 정착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한 지부가 될 것을 결정했다.” (같은 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당 내부에서 형성된 주요한 분파의 (아주 신속한) 활동을 종합해 보면:

     

    · 하나의 분파에 주어진 주요한 역할은 바로, 퇴행하는 당 내부에서 혁명 원칙의 방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이러한 원칙을 위해 대다수 투사들을 결집하고 당으로부터 우파와 중앙파의 입장들을 배제하며

     

    · 그런 다음, 상황에 따라서 당 자체를 새로운 혁명당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편집자 강조)

     

    주목할 만한 점은 좌파의 모든 경향이 실천적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당내에 남아 있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트리뷴주의자의 분파(호르터와 판네쿡은 조급함에 동의하지 않았었지만) 그리고, 1917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반대파가 축출된 뒤 (스파르타쿠스동맹과는 달리) 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던 라덱과 판네쿡과 프뢸리히 주도 하의 급진좌파였다. 배반한 옛 당으로부터 좌파의 분리는 제명을 통해서 또는 혁명 물결의 선봉이 될 새로운 당 건설의 필요로 인해서 이루어졌다.

     

    또한, 좌파의 행동이 퇴행하는 당 내부에서 늘 소수로 남아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사회당(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ére, SFIO)의 투르(Tours)대회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가담을 요구하는 좌파의 안건이 대다수에 의해 통과되었다. 그래서 투르에서 창립된 코뮤니스트당은 조레스(Jaurès)가 창간한 뤼마니테(L`Humanité)를 계속 유지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SFIO의 사무총장 프로사르(Frossard)가 유지했는데, 그는 한동안 프랑스코뮤니스트당(PCF)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좌파분파들이 당장 새로운 당을 건설한 이러한 역량은 오직, 낡은 당의 배반과 혁명 물결의 갑작스러운 출현 사이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 뒤 상황은 상당히 달라진다.  <계속>


    <>

     

    1. “Minutes of the Central Committee Meeting of 15th September 1850” in Marx: The Revolutions of 1848, Penguin, 1973, p341 ) 맑스엥겔스저작집(MEW) 8, 598

     

    2. 이때 주목할 만 한 점이 있다. 이 회합 직후 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맑스는 에커리우스가 이전에 건설을 시도했고 그래서 맑스를 초대했었던 조직이 맑스에게는 인위적으로 여겨졌던 반면에 이번에는 그 노력이 진지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 초대를 이번에는 받아들였다고 한다.

     

    3. 이 부분과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2개의 주요 나라, 즉 영국과 프랑스의 당을 검토함이 없이 4개의 다른 당, 즉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당 안에서의 분파에 중점을 둘 것이다.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이름값을 할 만한 좌파 분파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주요한 이유는 내부에서 맑스주의 사상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제1차 대전에 대항한 초기의 조직된 반응이 사회당 안의 소수에게서가 아니라 CGT노동조합 내부의 소수로부터, 즉 노동자의 삶(La Vie Ouvriere)를 간행한 로스마(Rosmer)와 모나트(Monatte)를 주변의 그 핵심인자로부터 나왔다.

     

    4. 국제평론 (International Review)153, ‘프로레타리아당의 본질과 기능에 재수록되었다.

     

    5. “나는 트리뷴의 편집진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주위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패한다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싸운 뒤에 우리의 모든 노력이 실패한다면, 그때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다시 말하자면, 트리뷴에 대한 억압을 수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1909216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당 내에서 우리의 힘이 강해질 수는 있지만, 당 밖에서의 우리의 힘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데벤터대회에서 호르터의 개입 발언 (참조:‘네덜란드좌파 (The Dutch Left; 1900-1914), 3: 트리뷴운동’, 국제평론47))

     

    6. 탄압을 당한 여러 투쟁가 중에서, 전쟁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처음에는 징집되었다가 그 다음엔 191651일 시위에서 전쟁과 정부를 비난한 후 요새에 감금당했던 칼 리프그네히트의 경우, 그리고 70살이 넘은 나이에 수감되었던 프란츠 메링의 경우를 우리는 인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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