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9호] 마트 계산대에서
  • 조회 수: 4106, 2019-12-15 19:21:24(2019-08-15)
  •       마트 계산대에서


           무겁고 긴 발을 끌고 들어와

    시간의 목을 쥐고 걷듯이 가게를 한 바퀴 돌고

    마침내 천 원짜리 아이스티를 한개 갖다 놓고

    꼭 다문 지갑을 열어

    보풀이 인 고지서들을 주섬주섬 꺼내놓다가

    지갑의 바닥엔 바닥뿐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주워 담는 동안

    여기저기 삐져나온 살들 숨쉬며

    오래 묵은 번뇌를 흘리고

    퉁퉁한 큰 손이 작은 호주머니를 몇 번 파더니

    우물 밑처럼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건

    먼지, 단추, 돌멩이, 그리고 수많은 주름을 가진

    지전 한 장!


    다시 먼지들을 주머니 깊이 묻어두고

    두 손을 받쳐 아이스티를 가슴에 품고

    느릿느릿 무겁고 긴 발을 끌고 환한 세상으로

    나가시는 기나 긴 그림자


    詩 ㅣ 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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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대문짝 


    대문짝에 폐업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가게

    그의 슬픔도 대문짝만했을 것이다

    절을 한번 할 때마다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백팔 배를 하고,

    천팔십 배를 하고,

    삼천 배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참새처럼 종종 뛰며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뱃속이 사리로 가득 찰 때까지

    친구도 끊고

    술도 끊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을 것이다

    희망과 놀람을 거쳐 오기와 끈기,

    다음은 겸허와 근면이었으나,

    허무에 와서 무릎이 꺾인 그는

    열망이 그를 다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폐업을 써 붙이면서

    누군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똥 싸고 해탈할 시간도 없이 살지 않기를

    잠시 기도했지만

    절 한 번에 시를 한편씩 쓰는 마음으로

    매일 삼천 배를 하는 정성 가지고는

    이 문짝 안에서 성공할 수 없으리라고

    대문짝은

    폐업을 덧바르면서

    자꾸 얼굴이 두꺼워져 갔다.


    詩 ㅣ 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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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 소개>


      박상화 朴橡樺

      (필명 상화橡樺는 상수리나무와 자작나무 곁에서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지음)

       

      1968년 서울생.

      뿌림글 동인.

      동인시집 <거대한 뿌리>/2000

      해방글터 동인.

      동인시집 제1<땅끝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문예미학사/ 2001

      2<다시 중심으로>/ 삶이보이는창/ 2003

      3<하청노동자 전태일>/ 풀무질/ 2005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음

      #박상화 시인의 첫 시집 『동태』가 출간되었습니다.

      #코뮤니스트는 박상화 시인의 작품 게재에 감사드리며, 첫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시집_동태에 대한 코뮤니스트 독자-지지자들의 많은 구독과 관심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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