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9호]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Ⅰ, Ⅱ
  • <기고>

    레닌의 4월 테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양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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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2월 혁명이 터진 뒤, 레닌이 러시아로 귀환하자마자 발표한 “4월 테제는 혁명운동에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투쟁, 인민전선주의와의 투쟁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레닌의 귀환 직전까지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공식 입장과 전술은 자칭 구 볼셰비키들의 주도 하에 나왔다. 혁명의 성격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전제 하에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하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로 기운 구 볼셰비키노선이 만약 볼셰비키 당을 계속 지배했다면 과연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 중대한 시점에, 볼셰비키라는 그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 4월 테제를 통해서 제 때 노선 전환과 강령 · 전술상의 재무장을 기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혁명이라는 행복한 성공적 결말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은 무슨 레닌의 권위로 간단히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레닌이 당내 반대로부터 <4월 테제>를 방어하는 가운데 구 볼셰비즘노선을 고물보관소에나 수용해야 한다고 공격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 테제가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과 발본적 쇄신의 내용을 담고 있어 볼셰비키 당 내에서도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논쟁적 문투로 <4월 테제>를 공세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전술에 관한 편지><이중권력>, 이어서 테제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정교화 시킨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정세 보고와 결의안) 등이 4월 테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쟁 글들이다.

     

    479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글인 <4월 테제>10개의 테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1순위의 긴박한 사안으로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및 그와 관련한 권력 및 국가체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월 혁명 이후 신정부(임시정부) 하에서도 전쟁의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이 정부의 자본가적 성격 때문에 여전히 제국주의적 약탈적 전쟁이지, 결코 혁명적 전쟁이 아니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 문제에서 혁명적 [조국] 방위주의에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방위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 반대’/패전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이에 동조하는 빈농에게로 넘어갈 때에만, 즉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 경우에만 혁명적 방위주의가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자본을 타도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지 않고서는 이 전쟁을 끝장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소비에트 대중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해야 한다.

    () 국가권력을 소비에트로!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경찰, 군대, 관료의 폐지!

    그 밖에, 농업강령에서는 무게 중심을 농민이 아니라 농업노동자대표 소비에트로! 토지 국유화! 모든 은행을 단일 국립은행으로 통합, 이에 대한 소비에트의 통제. 생산과 분배를 소비에트의 통제 하에! 당 강령 개정 (a.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하여, b.국가에 대한 태도 및 코뮌 국가라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c.시대에 뒤떨어진 우리 최소강령의 수정) 당명 변경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당의 재무장) 새로운 인터내셔널.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 발발 이래 19172월 혁명 전까지 레닌이 발표한 글들에서 줄곧 제시되고 있는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적 방침, 특히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과 혁명적 패전주의(전쟁 반대/‘조국방위거부/‘국 정부의 패전을 위한 투쟁) 전술을 상기해본다면, <4월 테제>의 이러한 내용이 볼셰비키 사이에서 특별히 생소하거나 낯선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4월 테제가 당내 논쟁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는가? 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그러한 정세인식 · 정치방침이 레닌 개인의 견해로 머물지 않고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로까지 표명되어 왔음에도 말이다. 정작 내란으로의 전화의 시작2월 혁명이 터진 상황에서 <4월 테제>레닌 개인의 견해일 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것이라는 당 지도부 일각의 반대는 대체 어찌 된 것인가? 다른 어떤 노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테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것으로 기각한 것인가?

     

    이후 우리는 이 논쟁의 전말을 살펴볼 것인데, 일단 이 반대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들 당 지도부(당시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국인 카메네프, 스탈린, 무라노프)2월 혁명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제국주의 전쟁이 아닌 혁명적 전쟁, 혁명적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지켜야 하는 전쟁이 되었으므로 방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좌로부터 압력을 넣는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토지 문제 미해결 등으로 인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하며, 지금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서,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정세 국면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노선이 충돌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는지, 그 의미와 성격, 그리고 4월 테제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닌의 귀국 이전인 2월 혁명 직후 조성된 정세와 이에 대해 볼셰비키 당이 취했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2월 혁명으로 차르 군주제가 타도되자 이제 국가권력을 누가 잡느냐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극히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노동자와 병사(군복 입은 농민)의 봉기로 차르를 퇴진시켰는데, 기존 차르 체제의 의회인 두마의 자유주의 정치가들, 밀류코프와 구치코프와 로잔코 등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자들이 스스로 임시혁명정부를 선포한 것이다. 봉기를 이끈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호소한 바도 없는 자들이 말이다. 이들은 오히려 봉기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힘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군주제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들 임시혁명정부는 현 제국주의 세계전쟁에서 영국 · 프랑스에 대한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 중지!”에 반대하였고,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제헌의회 소집과 토지 개혁 등의 과제를 미룰 것을 요구했다. 또 병사들은 병영으로 복귀하고, 무장한 노동자들은 무기를 국가에 반납하라고 명령했다. 임시정부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영 · 불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노동자정부를 구성해서 전쟁 종결에 나서는 것인데, 실제로 2월 혁명 직후 권력은 많은 부분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부르주아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정부가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임시정부 지지를 선서했다. 여기에 힘입은 임시정부는 콘스탄티노플과 폴란드 동부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 · 프랑스가 러시아의 몫으로 인정해준 영토 를 탈취하고자 전쟁 계속을 결정했다. 한편 소비에트의 노동자 · 병사 대중은 강화 협상이 열려서 무병합 · 무배상의 전쟁 종결이 신속히 이루어지길 원했다. 소비에트 집행부의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 계속을 결정한 정부에 입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장은 거부 입장을 취했다.(물론 얼마 안 있어 입각하고, 나아가 임시정부를 떠맡기까지 하지만 이들 또한 전쟁을 계속한다.) 소비에트 대의원들 대다수도 임시정부 지지에 동의했는데, 그러나 한편으론 집행부와는 독립적으로 임시정부를 감시한다는 취지의 감독위원회를 설립했다. 나아가 이 감독위원회 이름으로 유명한 1호 명령을 내려 모든 부대 이동은 소비에트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여 모든 항명 부대들과 병사를 사실상 소비에트의 통제와 지휘 아래 들어오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 정세가 성립되었다. 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세력 사이에 일시적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노동대중은 소비에트를 단지 투쟁의 무기로뿐만 아니라 통치권력으로 보았다. 단순히 노동조합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협조적인 소비에트 집행부(멘셰비키 · 사회주의혁명가당)가 불어넣고 있는 환상,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 아래 부르주아지와의 협력관계를 이루어 이 혁명을 완수해나갈 수 있다는 환상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했다.

     

    2월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이와 같은 이중권력 상황은 볼셰비키 당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볼셰비키가 1905년 혁명 이래 품어 왔던 혁명 전략 및 예측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멘셰비키와 달리 볼셰비키는 올바르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는 반혁명적 역할을 할 뿐으로, 민주주의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장애물로 나설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끌어낸 결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당이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 농민과 동맹하여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주 권력인 차르 군주제를 타도하는 무장봉기를 이끌어 노동자 · 농민의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인데, 구체제를 겨냥하여 이 정부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적 조치들로 인해 이 임시혁명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농민과의 동맹을 통한)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화에서 보듯이, 이 정부가 취할 조치들은 1903년 강령의 최소강령 부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는(자본주의의 기초를 건드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강령의 최소요구 부분은 멘셰비키도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민주공화제’,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가 그 주요 항목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어떤가?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당과 농민 대표자가 아니라 담당하고 있는 정부가 아닌가. 이 임시정부는 우리의 전략 속에서 만들어내려고 했던 그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전히 현 국면은 무장봉기에 의해 그것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인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노동자 ·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해야 하는 상황인 것인가?). 예측 시나리오에 맞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노동자와 병사가 만들어낸 권력은 민주공화제를 넘어서는 구조들을 취하고 있다. 실로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 (그리고 그 지휘 하에 있는 민병과 공장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구현한 국가(“코뮌 국가”)의 맹아다. 그런데 이런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대의원 다수파로서 멘셰비키 당 · 사회주의혁명가당에 의해 소비에트가 주도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자의 다수자가 지지하는 정부를 겨냥하여 봉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되는데, 우리가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를 지지하는 블랑키주의자가 아닌 이상 이건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맞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우리 예측 공식 의 핵심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위원회는 34, “임시정부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범민주 인민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 임시정부의 권력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임시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과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내 지배적인 멘셰비키 방침에 그 어떤 직접적 도전도 하지 않겠다는, 그냥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집행위원회 내 볼셰비키 위원들 대부분이 정부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한 멘셰비키의 결의안에 찬성투표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페트로그라드 시의 산업 중심지인 비보르그 지구 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대한 불신을 표하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 성명 역시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담고 있었다. 쉴리아프니코프, 몰로토프, 잘루츠키로 구성되어 있는 재외 중앙위원회 러시아 사무국은 좀 더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 처음에 이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당들로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 당들 간의 협정으로 (위로부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대체한다는 이러한 구상은 곧바로 거부되었다. 멘셰비키 당과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노동자 정부나 노동자·농민 정부 같은 것은 지금 필요 없다며, 부르주아 당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를 지지하길 원했다. 나아가 멘셰비키 당 다수파(원래는 반전 입장이었던)는 이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혁명의 성과물을 지키는 전쟁이 되었다며 전쟁 반대를 내리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내걸었다. 이에 대해 쉴리아프니코프 등의 러시아 사무국은 왼쪽으로 더 이동하여 322일에는 소비에트를 새로운 국가권력의 맹아라고 성격 규정을 내리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레닌이 스위스에서 발전시키고 있던 입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반면,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국은 볼셰비즘 내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었다. <<프라우다>> 37일의 논설에서는 우리로서는, 지금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타도가 아니라, 전제정과 봉건제의 타도다라고 선언했다. 또 카메네프와 함께 <<프라우다>> 공동 편집자인 스탈린은 이렇게 썼다. “임시정부는 실제로 혁명적 인민이 쟁취한 성과물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 현재로선 부르주아 층의 퇴출을 재촉하여 사태를 강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언젠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러한 지지 입장은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급기야 전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 315일에 편집국의 카메네프는 <<프라우다>>의 지면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내걸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 우리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카메네프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군대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가장 정신 나간 정책일 것이다. 이것은 평화의 정책이 아니라, 자유 인민으로서는 혐오감을 느끼며 거부할 노예제의 정책이 될 것이다. 인민은 총탄에는 총탄으로, 포탄에는 포탄으로 응수하며 당당히 자신의 진지를 지킬 것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혁명의 무력을 해체시키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날 <<프라우다>> 지면에서는 스탈린이 전쟁 중지!’라는 공허한 외침은 혁명적 군대의 해체를 요구하는 슬로건이 될 수 있다며, 직접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평화협상 개시에 앞장서도록 요구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해결책은,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즉각적인 평화협상 개시에 동의한다고 임시정부가 선언하도록 하는 것이다. 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은 집회와 시위를 배치하여 임시정부에게, 모든 교전국을 즉각 평화협상에 착수하도록 끌어내는 일에 공개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비판했듯이, “이 정부, 자본가의 정부에 제국주의적이기를 그만두라는 식의 환상을 심는 요구’”로서, 사실상 임시정부 지지를 전파하는, “용납할 수 없는것이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주장하는 논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시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향후 수립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최적의 투쟁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현재로선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카메네프-스탈린 지도라인에 의해 볼셰비키는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왼쪽 날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317일에는, 2월 봉기에서 선봉 역할을 한 비보르그 지구의 평당원 노동자 세포들이 프라우다 편집국을 당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럼에도 당내에 협조주의 조류, 즉 임시정부를 수용하고 멘셰비키 · 사회주의혁명가당의 소비에트에 대한 통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투쟁을 제한, 축소하는 조류(이후의 용어로 말하면, ‘인민전선주의적 조류)가 당 내에 확대되고 있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때 레닌이 스위스에서 긴급하게 써 보낸 <먼 곳에서 보낸 편지> 그 주요 지침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일절 지지하지 말 것, 전쟁 반대 당론을 바꾸지 말 것, ‘전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을 위해 투쟁할 것 <<프라우다>> 편집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 보내온 편지 네 편 중 하나만이 <<프라우다>>에 실렸는데, 그것도 중요한 내용이 삭제되는 등 편집된 상태로였다. 그 삭제된 내용 중 하나는, 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자는 그 누구든 노동자에 대한 배반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 평화와 자유의 대의에 대한 배반자로 낙인찍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레닌이 유명한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귀국하여 핀란드 역에 도착했을 때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당 지도부가 레닌을 맞으러 나왔다. 그 때 지도부의 일원으로 함께 나온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지도자 라스콜니코프는 레닌이 카메네프에게 보낸 첫 인사를 이렇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당신이 <<프라우다>>에 쓴 거, 그 쓰레기는 뭡니까? 우리가 몇 호 보면서 정말로 당신 욕을 했소.”

    레닌은 당 회합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그의 소리를 들으러 핀란드 역에 나온 군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인 멘셰비키 당의 치헤이제가 공식 환영단을 대표하여 레닌에게 민주파 대열의 결속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레닌은 둘러싼 군중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곧 유럽 자본주의 전체가 끝장날 것이다. 여러분이 이룩한 러시아 혁명이 그 길을 닦았고 새 시대를 열었다. 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다음날 44, 볼셰비키 당 소속 소비에트 대의원 70명이 모인 타우리드 궁 회합에서 레닌은 처음으로 4월 테제를 낭독했다. 이 때의 반응을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회상>>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동지들은 일순 좀 당황했다. 많은 동지들이 일리치 [레닌]가 너무 투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는 심지어 한 친구에게 일리치가 미쳐버린 걸로 보일까봐 두렵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같은 날 오후, 레닌은 지노비에프의 요청으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합동회의에서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연설했는데, 이 회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재통합 전망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것으로서 카메네프-스탈린 라인이 추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였다. 멘셰비키 쪽에서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미치광이의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의 지지도 냉담했고, 회의에 배석했던 콜론타이만이 레닌의 입장에 찬성 발언을 했다.

     

    당내 투쟁이 뒤따랐다. 카메네프를 비롯한 일단의 지도부가 레닌의 볼셰비즘에 맞서겠다며 스스로를 구 볼셰비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4월 테제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제시해달라는 당원들의 요청으로 이 때 레닌은 <전술에 관한 편지>와 이어서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부제 :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를 제출했다. 414-22일의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와 뒤이은 24-29일의 7차 전 러시아 협의회가 내부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레닌에게 이 투쟁은 혁명의 명운이 걸린 긴박한 순간에 신속히 구 볼셰비즘고물보관소에 수용해버리고, 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을 이루어내는 투쟁이었다. 그런 만큼 이러한 레닌의 투쟁은 당내 구 볼셰비키로부터의 쓰디쓴 저항에 부닥쳤다. 카메네프는 47<<프라우다>>에 레닌의 <테제>를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달았다. “레닌 동지의 일반적 도식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도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료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서는 이 글이 레닌 개인의 견해이며, 당의 견해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역사적인 볼셰비즘 노선을 청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레닌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볼셰비키의 슬로건과 사상이 옳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역사에 의해 확증되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사태는 누구도 예상 못한 다른 꼴을 취했다. 사태는 누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독특하고 더 특이하며 더 복잡하다.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새로운 생생한 현실의 특수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대신에 암송한 공식들을 분별없이 되뇜으로써 우리 당의 역사에서 그리도 개탄스런 역할을 한 것이 이미 한 두 번이 아닌 저들 구 볼셰비키를 닮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어서 레닌은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러시아 혁명에서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 이것이야말로 생활에 의해 이미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그 공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버렸다. 생활은 그것을 공식의 왕국에서 현실의 왕국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것에 뼈와 살을 입혔고 그것을 구체화시켰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수정한 것이다.”

     

    당의 모든 지구 및 세포 단위들에서 3주간의 논쟁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레닌의 쇄신된 볼셰비즘이 최종적 다수를 획득했다. 이제 혼란과 동요를 뒤로 하고 당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즉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체하는) 2,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타도를 향한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방침 쪽으로 대중을 전취하기 위해 나섰다. 이미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경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모순, 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을 주장하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한 구 볼셰비키노선은 고물보관소에 영구 수용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그것도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의 형태로 이미 파리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정세에서) 여전히 민주주의 독재와 최소강령의 틀 안에 혁명을 한계 지으려 하고, 사회주의 혁명과의 사이에 차단벽을 쌓으려 한 구 볼셰비즘이 폐기, 극복된 것이다. 당이 이제 노동자권력/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의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무장했다.

     

    4월 테제와 그 후속 글 <전술에 관한 편지>,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등은 10월 혁명으로의 길을 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획기적인 성취이자, 세계사회주의혁명으로 가는 길에 가로놓인 낡은 관성과 한계에 대한 단절과 돌파를 대표한다. 4월 테제를 둘러싼 당내 논쟁, 당의 재무장을 위한 레닌의 투쟁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새기기 위해 우리는 이 논쟁에서 정세인식/전술방침 상의 차이가 어떠한 전략 규정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특히 필요한 것은, 4월 테제의 의의를 최소화하고,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 · ‘돌파의 의미를 부정하면서, 단지 전술상의 착오를 바로잡는 수준의 논쟁일 뿐이었다는 식으로 덮어버리려는 평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의 원조가 이른바 스탈린 당사’, 1939년 스탈린의 직접적 지도하에 작성된 악명 높은 <<소 교정>>(小 敎程 Short Course : 전연방 공산당사 소교정)이다. 이 날조된 볼셰비키 당사는, 처음부터 스탈린은 논쟁에서 레닌의 편에 서 있었던 것으로 그려놓고, 논쟁은 단순히 일시적인전술 차이에 불과했던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4월 테제는 볼셰비키에게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기보다는 1905년 혁명 이래 줄곧 볼셰비키의 전략노선을 대표했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그 돌파’, ‘쇄신의 의의를 부정하고 있다.    <계속>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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