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10호] 코민테른과 러시아 ‘좌파’ 분파
  • 조회 수: 3545, 2020-01-21 20:11:06(2020-01-21)
  •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코민테른과 러시아 ‘좌파’ 분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93월에 창설되었다. 그 당시 아주 극소수의 코뮤니스트당이 이미 존재했다(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그리고 몇몇 주목받지 않던 다른 나라에서의 코뮤니스트당). 하지만 그 당시 최초의 (그리고 그렇게 선언한) ‘좌파분파가 주요한 당 내부에서, 즉 러시아 코뮤니스트당(19183RSDLP 7차 대회에서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을 채택했음) 내부에서 출현했다. 1918년 초 이 경향은 코뮤니스트(Kommunist)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오신스키(Ossinsky), 부하린(Bukharin), 라덱(Radek) 및 스미르노프(Smirnov)가 주도했다. 이 분파가 당의 공식적인 방향과는 달리 가진 주요한 불일치점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k-Litovsk)에서의 협상을 두고서였다. ‘좌파코뮤니스트는 그 협상에 반대하고 다른 나라로 혁명을 무력적으로 수출하는 혁명전쟁을 권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분파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권위적인 방법을 비판했고 노동자 대중이 광범위하게 권력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행한 비판과 유사하다(그의 팸플릿을 참조 바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의 승인은 이 분파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린은 당의 우익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오신스키와 같은 이 분파의 몇몇 인자들은 그 뒤에 출현한 좌파 분파에 가담하게 된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앞으로 코뮤니스트당을 출현시키게 될, 사회당 내부의 몇몇 분파들이 아직 형성되기 전에 (보르디가가 주도한 기권분파는 191812월에 가서 형성된다) 이미 러시아혁명가들은 자국의 코뮤니스트당에 영향을 미치는 일탈에 대항해 (분명히 매우 혼란스러운 방식이긴 하지만) 투쟁을 개시했다. 여기서 (이 현상을 지금 여기서 분석할 필요는 없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20세기 초 수 년 동안 러시아혁명가들이 다음과 같이 일련의 모든 주요한 문제에 있어서 선봉에 있었다는 것이다. ,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제 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형성,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선명한 입장, 침머발트에서 좌파를 주도한 것,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 필요성의 인식, 19183월 최초의 코뮤니스트당의 건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에 대한 자극과 정치적 방향설정 등에서.


      그리고 이러한 조숙함은 코뮤니스트당 내부에서의 분파의 형성에서도 발견된다. 사실상, 권력을 잡게 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코뮤니스트당으로서 그것의 특별한 역할로 인해서, 러시아당은 (명백히, 전 세계적인 혁명 물결의 패배와 더불어) 당이 부패하면서 주요 인자에 대한 압력을, 즉 당의 국가로의 융합을 겪는 최초의 당이기도 했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당의 이러한 퇴행 과정에 직면해서 비록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일찍 저항의 형식을 시작했다.


      그때 이후 러시아당에서 상당수의 다른 좌파경향이 출현했다.


      - 1919년 오신스키와 사프로노프(Sapronov)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주중앙집중주의그룹은 산업에서 개인적 권위에 대항해 싸웠고 국가기구의 부문화와 관료주의적 억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서 집합적 또는 우의적인 원칙을 옹호했다.(우의의 원칙과 개인적 권위에 관한 테제).


      - 또한 1919년에 많은 수의 민주중앙집중주의그룹 구성원이 군사적 반대파에 참여했는데, 이 파는 적군(Red Army)을 전통적인 부르주아 군대의 범주에 따라 변형시키려는 경향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19193월에 잠시 구성되었었다.


      내전 동안 당 정책에 관한 비판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백군(White Armies)의 위협 때문에 그 빈도가 더 낮게 표면화되었지만, 내전이 백군에 대한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그러한 비판의 강도는 배가되었다.


      - 1921년 초, 10회 전당대회와 노동조합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계기로, ‘노동자 반대파가 형성되었고, 철강노동자인 쉴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와 메드베데프(Medvedev), 그리고 특히, 강령을 작성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가 주도했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처럼 이 반대파는 국가의 관료제 대신에 노동조합에 경제의 관리를 맡기기를 원했다(7). 바로 이 전당대회(크론슈타트봉기 동안에 개최된)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분파가 금지된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해체되고 콜론타이는 나중에 스탈린(Stalin)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다.


      - 1921년 가을에 노동자의 진리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주요 구성원은 지식인 그리고 주요 조직가인 보그다노프(Bogdanov)처럼 프롤레타리아문화(Proletkult)’의 추종자들이었다. 다른 반대파 경향과 함께 이 그룹은 당과 국가의 관료화를 비난했지만, 동시에 반()-멘셰비키적 입장을 취했는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이 러시아에서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점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근대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점(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 경향의 입장이 된다)에서 그러했다.


      - 1922~23년에 노동자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주도자는 우랄지방의 노동자 미아스니코프(Miasnikov)였다. 그는 10차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 왕당파에서 아나키스트까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1921년 볼셰비키당 안에서 두각을 드러냈었다. 이 문제에 관해 논쟁하려던 레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스니코프는 요구의 철회를 거부했고 결국 1922년초 당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다른 투쟁가들과 함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RCP; 볼세비키)의 노동자그룹을 창설했고 러시아 코뮤니스트당(RCP)12차 대회에서 그룹의 선언문이 배포되었다. 이 그룹은 당의 노동자 사이에서 불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의 파업 물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 같다. 당시 이 그룹은 대대적인 시위를 요구했고 일차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이 시위에서 그룹의 활동으로 인해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는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미아스니코프를 포함한 그룹의 주도자들은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룹의 활동은 (망명 중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192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파리로 망명했고,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옹호하는 코뮤니스트노동자(L´Ouvrière Communiste)의 간행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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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미아스니코프(사진 중앙), 「노동자그룹」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 그룹”으로 불린다.


      볼셰비키당의 퇴행에 맞서 투쟁을 벌인 모든 경향 중에서 확실히 노동자그룹(Workers´ Group:WG)이 가장 정치적으로 명확했다. 그것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에 매우 가까웠고(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이 그룹의 문건을 출판하고 그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특히, 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혁명의 국제적인 전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그들은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그리고 경제의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었던 다른 그룹의 경우와는 상반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I)의 첫 4번의 대회를 참조점으로 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과는 달리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제3차 및 4차 대회의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을 거부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좌익과 노동자그룹(WG)의 인자 사이에 (특히 망명 중에) 토론이 있었다


      노동자그룹(WG)은 일관되게 하나의 분파처럼 활동했던,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출현한 아마도 유일한 경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혁명가에 대해 시작한 (그리고 차르의 탄압보다 훨씬 더했던) 혹독한 탄압은 이들의 경로를 따라 발전할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예상대로 그는 즉시 실종되었고, 코뮤니스트좌파의 미약한 역량은 가장 용감한 투사를 잃고 말았다.


    정리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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