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당 건설]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에 대하여 2
  • 조회 수: 5019, 2020-08-25 18:29:35(2020-07-30)
  •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에 대하여

    2. 노동자운동에서 분파의 역사와 좌익분파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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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2 인터내셔널의 배신과 분파의 출현

     

    19세기 동안 맑스와 엥겔스가 이룩한 거대한 이론적 성취의 상속자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였다. 20세기 초, 이들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건강하게 제2 인터내셔널의 테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기에 비추어 혁명가들의 역할을 명확히 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투쟁과 코뮤니스트 혁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 사이의 분리에 집중되었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당의 일부로서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을 보지 못했던 '멘셰비키에 반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그는 대중 정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버렸다. 레닌에게 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경제적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변환시킬 소수 전위 정당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 일탈에 대해 반대했다. 룩셈부르크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통일을 주장했고, 방어적인 투쟁은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최종적 정치 투쟁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만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의해 의제가 된 코뮤니스트 혁명의 필요성을 단언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제2 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을 결정적으로 삼켜버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1915년 침머발트에서, 그리고 1916년 키엔탈에서 단호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진전은 대부분의 국제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독립적인 좌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침머발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레닌, 지노비에프와 라덱으로 구성된 침버발트 좌파 서기국을 설립했다. 1916년 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레닌이 예측한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첨예화되었다.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침머발트 다수와 좌파 사이의 큰 차이는 균열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레닌은 침머발트의 늪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로만 구성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을 즉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코뮤니스트 9, 이형로)


    2 인터내셔널의 반동적 퇴행 속에서 최초로 진정한 분파가 출현했다. 최초의 분파는 볼셰비키분파로서,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대회 이후 처음에는 조직에 관한 문제를 놓고 그다음에는, 러시아와 같이 반봉건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임무와 관련된 전술 문제를 놓고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1917년까지는 볼셰비키분파와 멘셰비키분파가 서로 독자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수행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당,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ussian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에 속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트리뷴을 중심으로 발전한 맑스주의 경향이 1907년부터 네덜란드사회민주노동자당(Dutch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 내부에서 비슷한 작업에 관여했다. 이 경향은 당내의 기회주의적 기류에 대항해 싸웠고, 1909 3월 새로운 당,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을 결성하게 된다. 1918 11월 사회민주당은 네덜란드 코뮤니스트당(Communsit Party of the Netherlands)이라는 당명을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창립 이전에) 채택한다.

     

    2 인터내셔널의 내부 분파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 번째 경향은 독일 코뮤니스트당을 창립하게 된다.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포함해서 만장일치로 전쟁차관을 통과시킨 1914 8 4일 저녁, 국제주의자 투쟁가들은 당내에서 이러한 지도부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인다. 1914~1915년 겨울부터 불법 전단지가 유포되었다. 불법이라는 조건 하에서 탄압에 노출된 채, ‘스파르타쿠스그룹(Spartakusgruppe)’을 그다음엔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kusbund)’을 이름으로 채택한 극히 작은 그룹은 전쟁과 정부에 반대한 투쟁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우파와 중앙파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스파르타쿠스 멤버들이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그룹, 특히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의 다른 그룹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국제주의적 정책을 옹호했다. 이러한 다른 경향은 1918 12 31,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창립 순간에 함께 결집하지만, 새로운 당의 근간을 이룬 것은 명백하게 스파르타쿠스동맹 멤버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좌파분파가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에서 보다 약간 뒤늦게 형성되었다. 이 분파는 나폴리에서 보르디가(Bordiga)와 그의 동지들이 1918 12월부터 간행한 신문, ‘소비에트(Il Soviet)’를 중심으로 한 기권주의자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이었는데, 공식적으로는 1919 10월 이탈리아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y)의 당대회에서 한 분파를 이루었다. 1920 10월 밀라노에서 통합코뮤니스트분파가 결성되었다. 투라티의 우익을 배제하고 코뮤니스트당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내놓았고, 코민테른의 제2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서 선거 보이콧을 포기한다. 1920 12월 이몰라(Imola)대회에서 분열 원칙이 결정되었고, 1921 1 21일에 시작된 리보르노(Livorno)대회에서 소수는 대회를 떠나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으로 정착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한 지부가 될 것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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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좌익분파의 투쟁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9 3월에 창설되었다. 3 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세기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제3 인터내셔널은 하나의 먼 전망으로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긴급한 그리고 실천적인 필요성으로서. 노동자의 권력 장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하나의 세계적으로 집중화된 정치조직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너무 늦게 창설되었고,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 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회민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International Review 57,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코민테른 안에서 이러한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운동의 가장 암흑의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했던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이 점을 상기 하면서 코민테른 내부의 좌익분파의 투쟁을 살펴보겠다.

     

    러시아 좌익분파의 투쟁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에 대한 의견 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의 발생은 멈추었다. 당시 러시아의 코뮤니스트좌파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당 내부 분파 중 가장 선명했던 노동자그룹 1922~23년에 결성되었다. 그룹을 주도한 것은 우랄지방의 노동자 미아스니코프(Miasnikov)였는데,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다른 투쟁가들과 함께 러시아코뮤니스트당의 노동자그룹을 창설했고 당의 12차 대회에서 그룹의 선언문을 배포했다. 이 그룹은 당과 노동자 사이에서 불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의 파업 물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이 그룹은 대대적인 시위를 요구했고, 일차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이 시위로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는 당에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고, 미아스니코프를 포함한 그룹의 주도자들은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룹의 활동은 1920년대 말까지 불법적인 방법으로 계속되었다. 이때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를 탈출해서 파리로 망명했고,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옹호하는 코뮤니스트노동자(L´Ouvrière Communiste)의 간행에 참여한다.

    볼셰비키당의 퇴행에 맞서 투쟁을 벌인 모든 경향 중에서 노동자그룹이 가장 정치적으로 명확했다. 특히, 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혁명의 국제적인 전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와 경제 관리에 중점을 두었던 다른 그룹과는 상반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코민테른의 첫 4번의 대회를 참조점으로 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과는 달리 코민테른의 제3차 및 4차 대회의 통일전선 정책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좌익과 노동자그룹의 인자 사이에 (특히 망명 중에) 토론이 있었다.

    노동자그룹은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일관되게 하나의 분파처럼 활동했던 유일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혹독한 탄압은 혁명가들이 이들의 경로를 따라 발전할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예상대로 그는 즉시 실종되었고, 코뮤니스트좌파의 미약한 역량은 가장 용감한 투사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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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민테른 5차 대회 이후 시기는 코뮤니스트당의 지속적 볼셰비키화와 코민테른 우선회로 특징지어졌다. 당 대회에서의 논쟁 밖에서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레닌이 정치 활동을 포기하게 만든 이래 코민테른과 소련코뮤니스트당을 이끈 3두 체제(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1925년 말 와해된 것이었다. 1929년 봄 소련코뮤니스트당 15차 당 대회 준비를 위해, 트로츠키의 최초의 반대파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크룹스카야가 합세한 통일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반대파 결성에 스탈린은 억압을 강화했다. 게페우는 지도자를 당에서 축출함으로써 반대파의 지역조직을 폐쇄했다. 1927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소련코뮤니스트당 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지노비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항복은 러시아 좌파가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모욕, 위협, 당으로부터의 추방도 노동계급의 진정한 투사를 막을 수 없었다. 연속되는 새로운 타격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성원과 그 대표인 라코프스키는 계속되는 투항과 소련에서의 트로츠키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투쟁을 계속했다. 함정, 협박, 암살에도 불구하고 라코프스키와 반대파 중핵은 1934년까지 조직화된 투쟁을 지속했다. 그들 대부분은 진영 내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라코프스키가 투쟁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지노비예프와 그 추종자들이 했던 부끄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독일과 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다른 나라에서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와는 다른 형태를 취했지만, 이들도 아주 일찍부터 코민테른 내부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노동자운동은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두 나라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사이의 관계 측면에서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의 입장은 판네쿡, 호르터 및 얀 아펠과 같은 혁명가들로 대표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일 노동자계급의 혁명 투쟁의 열기 속에서 단련되어 반동적인 차리즘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독일혁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형집행인과 그들의 노동조합 심복에 대항했다. 이들은 제국주의 전쟁과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으로 나타난 시대변화의 여러 의미를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된다. 노동자계급 이해의 옹호를 위한 의회의 이용 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하사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 새로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투쟁은 혁명 물결의 퇴조와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실패와 함께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이들은 정치조직 자체의 문제와 역사적 진로(계급 간의 힘의 균형)의 문제에 있어서 취약했다이들의 최종적인 실패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에 힘의 균형의 진화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혁명가들이 가질 필요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1921 7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지도부는 호르터의 지원을 받으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

    호르터와 그의 지지자들의 오류는, 하나의 국제적인 좌파코뮤니스트 경향으로 재편성될 수 있는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이 코민테른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 인위적으로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실수는 독일혁명 운동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21년 즈음 세계혁명의 퇴조는 유럽에서 명백했고 이러한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경로가 여전히 혁명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라는 이론을 가진 호르터와 에쎈 경향의 KAI 선언에는 특정 논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틀렸다.” (독일과 네덜란드좌파, Philippe Bourrinet)


    이후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일부는 1930년대 동안러시아에서의 혁명의 패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결정적인 문제와 직면하여, 볼셰비키당이 국가자본주의의 기관으로 변형된 것을 혁명 패배의 결과이기보다는 원인이라고 잘못 파악했다그래서 불가피하게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이론화하고 노동자평의회를 현시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조직 형태로 간주했다. 결국, ‘평의회주의 경향으로 된 그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자신의 무용성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과 교훈

     

    독일·네덜란드 좌파와는 반대로 이탈리아 좌파는 전쟁 동안 그리고 코민테른의 창설까지는 볼셰비키의 특징과 같은 비타협성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들에게는 원칙에 대해 타협하고 원칙을 흐리게 만들어 혁명을 향한 지름길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가치도 없었고, 그러한 지름길은 패배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사실상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선두에 있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비타협성은 1920년 계급투쟁의 패배에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의 등장을 대항해 모범적으로 표현했다. 실천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비타협성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직면해서 (진보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부르주아의 어떤 당과도 동맹을 맺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점에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오직 자신의 영역에서, 경제파업과 자기방어를 위한 노동자민병대의 조직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현상에 대한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진지한 분석을 했다. 그는 이 분석을 코민테른 제4차 대회의 대표단에 제시하며 코민테른의 분석을 거부했다.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산물도 아니고 부르주아 지주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겪은 패배의 산물로서, 그 패배는 우유부단한 쁘띠-부르주아 계층이 파시스트 반동 세력을 지원하게 만들었다. (...)

    파시즘은 봉건적 반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밀라노와 같이 모든 산업대도시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상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필수 불가결하게 보완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러한 비타협성은 통일전선정책, 사회당과 그 부수체에 대한 관대정책과 관련해서도 표현했는데, 보르디가는 노동자의 정부라는 구호는 코뮤니즘의 정치강령을,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위해 투쟁하도록 대중을 준비할 필요성을 사실상 부정한다.” 고 비판했다. 또한, 비타협성은 1924 7월 코민테른 5차대회에서 추진된 코뮤니스트당(CP) 볼셰비키화정책에 반대한 것에서도 표현되었다.

    보르디가는 1926 2월부터 3월까지 코민테른의 제6대 확대 행정위원회 동안 마지막 전투를 벌인다. 그는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비난했고,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고 분파는 병도 아니고 병의 증상도 아니라 기회주의적 영향에 맞선 방어 반응임을 시인하면서 이 문제가 당장의 사안이 될 것으로는 내다보지 않으면서 분파의 문제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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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부터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망명지에서 계속되었다.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활동가는 감옥에 있거나 보르디가처럼 섬에 갇혀 있었다. 좌파는 활동가 다수가 축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당과 코민테른 내에서 싸웠다. 그들의 기본목적은 퇴행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경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 조직 내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탈리아 좌파의 교훈은 아래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코뮤니스트 소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운명의 한 표현으로서 영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소수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갖는 영향력은 그것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 의식성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공개적이고 점점 더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시기에 만이 소수는 영향력을 갖기를 바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코뮤니스트 소수는 하나의 당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역사적으로 퇴조하고 반혁명이 승리하는 그러한 시기에 혁명적 입장이 중요성을 띠고 계급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시기에는 유일하게 가능하지만, 극히 중요한 일은 바로 분파의 일이다, 즉 계급 역량의 균형이 또다시 코뮤니스트 입장이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에게 영향력을 갖도록 가능하게 만들 그때를 대비해 미래의 당 건설을 위한 정치적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좌파 분파는 프롤레타리아당이 기회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말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 당에 침투함으로써 퇴행되어갈 때 형성된다. 혁명적 강령을 지지하는 분파의 책무는 당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분파가 성공한다면 그것의 원칙이 승리하고 당이 구출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당은 퇴행을 계속하여 무기와 짐을 모두 넘겨주고 결국 부르주아 진영 안으로 전향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당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전향의 가장 중요한 징후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생활이 당 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좌파 분파의 책무는 당을 바로잡을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당 내부에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좌파 경향은 코민테른의 당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런 당은 종종 야비한 술책까지 동원해서 이들을 제명했다. 프롤레타리아당이 일단 자본주의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면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을 향한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하고, 분파의 역할은 적에게로 넘어가 버린 낡은 당과 미래의 당 사이에 놓인 가교가 되는 것으로, 미래의 당을 위해 강령적 기초를 세워야 하고, 당의 골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이 일단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 버리면 당 안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탈리아분파와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 International Review 90,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후 이탈리아 좌파의 이론적 발전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떠나서 프랑스와 벨기에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탈린주의화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 채 그들은 미래의 당을 위한 이론적 틀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배운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1933년 빌랑(Bilan)그룹을 형성했다. 빌랑은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대한 분석과 미래의 이행기의 문제에 대한 탐구, 경제 위기와 자본주의 쇠퇴의 토대에 대한 작업을 수행했다. 빌랑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당과 분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었다. 빌랑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빌랑이 혁명은 당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을 때, 이것은 혁명이 가능해지기 위해서 당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의 건설 자체가 혁명 문제를 제기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의 능력의 표현이라는 의미였다.  <계속>


    (「실천 복간 3호」, 이형로, 201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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