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트로츠키 평가와 트로츠키주의 비판]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기원
  • 조회 수: 3633, 2020-09-02 10:19:33(2020-08-26)
  •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기원

     

     1918-01-01-trotsky-dragon.jpg

    "혁명적 실천에 커다란 공헌을 한 트로츠키는 결국 사회민주주의의 반혁명적 오류로 돌아온 운동에 그의 이름을 부여했다."


    트로츠키주의 기원

     

    우리는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그들의 지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의 기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열렬한 주장은 트로츠키가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과 적군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1940년 스탈린주의의 순교자로서 얻은 위신에 그 근거가 있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유효한 비판은 그의 1917년 이전 멘셰비키의 과거를 밝혀내는 스탈린주의 방법과는 공통점도 없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론과 실천 모두에 그가 기여한 공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1905년 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과 소비에트의 출현은 트로츠키가 1917년 동안 레닌이 이해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을 명백하게 내다보았다.

     

    그러나 정치적 운동으로서 트로츠키주의는, 비록 혁명과 함께 그 기간에 시작했다 해도, 근본적으로 그 이후 시기의 산물이다. 그 시기는 트로츠키주의가 통합적 부분이 되었던 반혁명의 시기이다.

     

    유럽 혁명 기간 일어난 운동은 패배의 과정이었지만 러시아 내부에서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일어났다. 헝가리에서 백색테러가 일어나고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는 과정이었으며, 독일의 부르주아지를 전복할 노동계급 일부의 노력은 1921년 3월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노동계급의 저항은 이 이후에도 분출되었지만(1923년 독일, 1926년 영국, 1927년 중국), 그들은 고립되었고 파편화된 상태였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4년간의 고립과 내전은 이전에 있었던 혁명적 노동자 계급의 실질적 제거로 귀결되었다. NEP(신경제정책)의 도입,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의 통일전선 전략의 적용과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정치, 군사적 동맹 (1922년 독일과의 라팔로조약)은 모두 유럽 혁명의 실패가 러시아에서 반혁명을 불러일으켰음을 보여줬다.

     

    트로츠키는 이 변질의 과정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변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사실 이 주요 설계자 중 하나였다. 1920년대 적군의 승리를 조직하고, 노동의 군사화가 러시아의 재건을 위한 규율을 지키기 위해 전 노동자 계급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 바로 그였다. 1921년 10차 당 대회에서 노동자 반대파에 반대하여 당내 모든 분파를 금지하도록 한 사례를 보여준 것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1922년 제국주의 독일과 비밀 군사동맹을 조직한 것도 트로츠키였다. 이후에 계속된 트로츠키의 이론과 실천이 과거의 오류와 단절되었다면,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사실 1923년부터 계속, 트로츠키는 이 오류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가 보여주는 것에 대한 그의 “반대” 분석으로써 그 후 이어지는 사상의 틀 속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좌익 반대파와 연합 반대파

     

    1923년에 일어난 좌익 반대파(Left Opposition)로 일컬어지는 것은 트로츠키와는 그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트로츠키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반대파들은 물론 트로츠키의 「새로운 길」(New Course)이 막 등장했을 때 환영했지만 말이다. 이 반대파는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국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념과 관계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이론이 발표되기 이전에 좌익 반대파가 끝났다는 간단한 이유다. 좌익 반대파는 1923년의 가위 위기(Scissors crisis) 기간 동안 일어났는데, 이 시기는 공산품 가격은 올라가고 농작물 가격은 내려가 일어난 경제적 혼란기였다. 반대파는 당의 관료적 지도자들이(이 당시에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부하린)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며 싸웠는데, - 즉시 그렇게 나타났다. 반대파에 따르면 NEP(신경제정책)의 시장경제는 작은 계획, 즉 농민에 대한 과세를 통한 느린 산업화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에게는 이것이 다음을 의미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사회주의 기반의 중추로서의 국가산업의 발전”

    (「새로운 길」(New Course), p.120)

     

    당연히 반대파는 전 조직을 통제하지 않았으므로,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이 민주주의가 왜 견인차로 기능하는지를 산업화는 동떨어지게 어떤 지침도 주지 않았다. 반대파는 외교 문제와 관계가 없었고, 1921년 이래로 어떤 정책 (통일전선 혹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국교 회복)도 비판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이 문제에 관해 썼지만, 그는 통일전선과 독일의 민족 볼셰비즘의 보증자로서, 외국에서는 당의 우파로 여겨졌다. 그동안 독일 당의 좌파 (매슬로우(Maslow), 피셔(Fischer), 텔만(Thaelman))는 지노비예프와 스탈린을 그들의 동맹으로 삼았다.

     

    트로츠키의 1924년 「10월의 교훈」(1924)과 같은 외교 정책의 위험한 개입은, 1917년에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또한 1923년 독일에서 혁명적 기회를 잡는 것을 실패한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서서히 권력의 압박을 받음에 따라, 트로츠키는 지노비예프를 이길 수 있는 수단으로 섹소니(Saxony)와 써린지아(Thuringia)의 통일전선 정부가 혁명을 일으키는 데 실패한 것을 포착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는 지노비예프를 스탈린보다 더 주요한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통일전선 정책을 승인했었고,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 이른 여름, 독일에서 통화의 붕괴를 이르게 하는 진정한 계급적 운동이 있었을 때, 트로츠키는 정부를 전복하는 여러 시도에 맞서 나섰다.

     

    “루르(Ruhr)에 대한 프랑스 침공은 혁명적이지 않다. ...피가 고갈된 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린) 평화의 유지에 실로 관심이 있다.”1)

     

    왜 그랬을까? 이때 트로츠키는 독일, 러시아 대 영국, 프랑스 동맹의 최고 중재자였다. 그런 정책은 독일 우파와의 동맹을 의미했고, 루르에 대한 프랑스 점령에 반대하는 것은 파시즘과 민족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의미했다. 이를 민족 볼셰비즘이라고 부르며, 이는 좌익 반대파 지도자의 한 사람인 라덱(Radek)의 생각이었다. 트로츠키가 “혁명적”으로 전환되었던 것은 그의 권력으로부터 점진적인 몰락과 독일에서 친연합군 정권의 등장이었다.

     

    정치적 강령의 빈곤과 실질적 부재와 함께 좌익 반대파는 노동계급의 지원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어떤 특정 순간에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적 지원이 거의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대파는 반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섰다고 알려졌으며, 또 대부분의 반대파는 1923년에 생활조건의 악화로 인해 일어난 대중파업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반대파는 노동계급보다 당 관료와 산업 경영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이 시기의 반대파가 그들의 편으로 성공적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당의 대중은 산업 노동자 계급이었다. 경제나 정치적 강령 그 어떤 것도 노동자의 상상력을 따라잡지 못했다.”2)

     

    관료 당국은 좌익 반대파의 요구를 조금 들어주었지만, 13차 당 대회에서 반대파는 비난받고 1924년 초 그들은 사라졌다. 그런 반대파는 좌익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했는데, 이는 반대라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1923년 당국과 반대파 사이의 투쟁에 관해 이야기했던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한 마디만 이야기하자.

     

    “노동자들은 아마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뭐가 다르냐고 묻겠지만, 솔직히 난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3)

     

    이 간단한 프롤레타리아 문장이 좌익 반대파의 본질을 요약해 준 문장이다.

     

    이 이후에 당내의 책략은(그 이후의 사건에 힘입어) 기괴한 모양을 그리게 된다. 스탈린이 1923년 트로츠키에 적대하여 지노비예프과 동맹을 맺었고, 그 이후 스탈린과 부하린이 지노비예프에 적대했으며,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암묵적인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지노비예프가 여전히 주요한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25년 1월, 정치국이 전쟁사령관 자리에서 트로츠키를 축출했을 때,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예전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지노비예프가 그를 당에서 제명하고자 한 주장을 막았다. 이때는 이미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진행시켜 나간 때였다. 이에 반대하는 것이 트로츠키의 투쟁에서는 대부분이었던, 바로 그 이론 말이다. 1925년까지 이 유명한 투쟁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주요한 적이 스탈린이 아니라 관료주의적 변질의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였기 때문이다.

     

    점차 스탈린-부하린 그룹이 권력투쟁의 정점에 서게 됨에 따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그라드 반대파를 만들었다.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무관심했으나 곧 지노비예프 그룹과 함께했다. 1926년 7월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크룹스카야와 그는 13인 선언(중앙위원회 위원)에 서명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연합 반대파 (United Opposition)를 형성하도록 했는데 1927년 12월까지 활동했다. 연합 반대파는 계획과 산업화의 요구를 떠안았고, 네프맨과 쿨락(Nepmen and Kulaks)과의 투쟁에 대한 요구도 책임졌다. 그들은 1921년 10차 대회에서부터 억압의 도구화된 당내 민주주의의 부활을 요구했다. 만약 연합 반대파들이 노동계급의 진정한 이해를 표현했다는 주장이 정당하다면,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스탈린에 의해 적용된 정책(반대파 대부분의 입장이었던 것)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벌어진 일에 대한 결론으로부터 간단히 유래한 것은 아니다. 1929년까지는 그렇지 않았던 반대파는 그 이후 스탈린에게 기꺼이 항복했고, 심지어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마저도 트로츠키의 지속적 반대는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4)

    또다시 반대파는 노동자 계급의 유의미한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다시 한번 그 주요 힘은 그들이 비판하였으나 그 원칙은 의문시하지 않은 관료주의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트로츠키 본인에게 있었다. 스탈린의 좌익화(Left Turn)는 부하린의 우익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트로츠키에게 1928년의 이러한 배경 아래의 동맹을 제안한 이는, 그제야 당 내부 민주주의를 위한 목소리에 함께한 부하린이었다. 자주 부하린 우파에 반대하여 중앙주의자인 스탈린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낸 트로츠키가 이 기회주의자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추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1929년 1월 스탈린에 의해 추방당하고 신화창조의 시기가 진지하게 시작되었기에, 좌익 반대파에 대한 이것의 효과를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

    <주>

    1) 트로츠키, E.H.Carr의 「The Interregnum」에서 인용, 66쪽

    2) Carr, 위의 책, 326쪽-327쪽

    3) 「트로츠키주의 학술 저널 비판 4」(Troskyite academic journal Critique4)에서 인용, 44쪽

    4) 「The Conscience of the Revolution, R.V.Daniels, 374쪽-375쪽

    <출처> 트로츠키트로츠키주의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 노동자 조직(CWO)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notice communistleft 284 2024-02-23
notice communistleft 218 2024-02-14
notice communistleft 218 2024-02-08
notice communistleft 212 2024-02-03
notice communistleft 237 2024-01-29
notice communistleft 241 2024-01-17
notice communistleft 243 2023-12-22
notice communistleft 281 2023-11-14
notice communistleft 1072 2023-04-24
440 communistleft 961 2023-04-29
439 communistleft 813 2023-04-10
438 communistleft 1196 2023-03-16
437 communistleft 747 2023-03-14
436 communistleft 1373 2023-03-07
435 communistleft 1573 2023-02-21
434 communistleft 1537 2023-02-10
433 communistleft 1613 2023-02-05
432 communistleft 1115 2023-02-01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