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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11호] 코로나19, 그리고 다른 상상에 대한 짧은 이야기1.
  • 코로나19, 그리고 다른 상상에 대한 짧은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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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엔 수많은 이야기로 넘쳐난다. 여기서 이야기란 인간이 살면서 표현하며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세상에 살아왔고 살아가는 인간의 수만큼, 그리고 그들이 머물렀고 머무르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맺었을 만남의 모습과, 아직 오지 않은 오늘에 비례하여 무한 수에 가깝게 많고 다양할 것이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고 싶다.

     

    이렇게 이야기가 다양하고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물의 뇌는 자신의 안과 밖을 이야기로 비추어 이해하고 붙들며 만나는 가운데 살아가도록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존재했고 존재할 인간의 삶에 의해 이야기는 넘쳐흘러 왔고 흐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하나하나는 각기 나름대로 살았고 사는 인간 한명 한명의 삶을 담고 있을 것이다.

     

    허나, 이 수많고 다양한 이야기 모두가 세상에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 회자되어 기억되거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중심점을 형성하여 돌기 시작한다. 중심점을 갖게 된 이야기들은 그 중심과의 거리에 의해 의미와 가치라는 평가의 서열을 갖게 된다. 그 서열은 이야기가 얼마나 기억되고 지속되는가의 힘을 갖게 한다.

     

    하나의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서열 괘도는 그것이 삶에 의해서 태어난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삶과 그것의 이야기들을 거꾸로 다시 규정한다. 가장 중심의 이야기는 강력한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되고, 괘도의 밖으로 밀려난 이야기들은 무의미와 무가치의 세상에서 떠돌다 결국 이야기라는 이름마저도 잃게 되기도 한다.

     

    이 중심점과 괘도는 그 중심이 형성되며 돌기 시작할 때의 힘만큼의 영역으로 다르게 만들어진 궤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거나 겹쳐진다. 그러다 결국 그 중심점은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중심점에 의해 사라지거나, 새로운 중심점이, 이전의 궤도와는 사뭇 다르게 만든 이야기의 서열 안에 재구성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야기의 흐름은 이어지고 오늘에 이른다.

     

    거기에 맞추어 이야기의 중심 괘도에서 멀어진 많은 이야기들을 담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의 존재가 아닌, 계량적으로 헤아려지는 숫자로 남거나 무시되어 이야기마저 상실할 처지에 놓인다.

     

    이 중심점은 왜 생기고 변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다양한 이야기로 발견되었고, 될 것이지만, 나는 그것은 삶의 필요와 요구에 의한 필연적인 움직임에 의한 것이며, 삶의 필요와 요구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기에는 결핍이 있었기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삶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인간의 삶에서, 바닷가 모래알의 수만큼 떠다니는 이야기 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아 괘도를 만든다고 말하고, 삶에서 이야기가 필요하고 가져야 한다는 것은, 삶이란 이야기의 공허함 속에서, 그저 무의미와 무가치라는 말과 다른 말들과의 경계를 나누며,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넘어가기 위한 뇌의 속임수일 뿐, 아무런 쓸모도 필요도 없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은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필연적인 필요와 쓸모 있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무언가를 가져야 하는 데는 그만큼 살고자 하는 노력과 수고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 삶은 누군가의 노력과 수고를 빼앗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눈 감고 귀 막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인·(·)이란 말로 규정되어 이야기되는 생물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지금 인간은 그 결정적인 결핍을 만드는 제약을 넘어설 수도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은 인간 스스로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흐르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삶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지속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어, 하나하나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이야기로서 모두에게 회자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 그 전에 현재에 가장 강력한 중심점으로 작용하는 이야기의 괘도를 파괴하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장 강력한 중심점으로 괘도를 만드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너무 당연한 것일지 모르나, 그것은 자본주의 세상을, 상품 더미 위에 올리어진 세상을, 살아있는 노동력이 상품이 되어 거래되는 세상을, 부르주아지의 자기화한 세상을 지탱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확대하고 강화시켜주며 지탱해주는 과학과 기술, 학문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거대한 정보와 지식의 집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도 상품의 목록에 올려져 있다. 종교, 예술, 법 등등을 포함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른다. 또 낡고 대책 없는 철 지난 이야기로 세상과 삶을 환원하고 협소화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제대로 된 답도 없이 무언가로의 강제를 반복하려는 것이라고.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할 필요와 요구가 우리에게 던져진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란 바이러스로 연유되어 벌어진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대란, 자가 격리 등과 같은 말들로 회자되는 최근의 일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필연적으로 그것을 요청한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것이 오늘날 이야기의 중심점을 살피고 질문하라고 필연적으로 요청했을까? 그건 간단한 이유다. 세상의 중심점으로 모든 이야기를 돌리고 있는 이름하여 자본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부실하고 나약한 것인지를, 최근의 현미경으로나 봐야 알 수 있는 미생물과 세포보다 더 작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이야기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강력해서 쉬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본주의의 이야기를 팬데믹이란 이야기가 짧은 시간에 흔들면서 멈출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만들고, 어쩌면 다른 중심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요구를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이라는 방식으로 발견되는 물리의 시간과 생물 진화의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짧은 인간의 시간, 사회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이야기에서, 긴 시간 제약과 결핍으로 작용했던 것을 그 긴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인간이 넘어서도록 이끈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단 몇 개월의 시간이 넌 끝났어!’라고 말하며 조롱하는 것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삶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삶은 어찌 됐든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죽음의 소식 역시 이어지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충분히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일을 할 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자본주의란 중심점이 아니어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데 왜 하필 이야기라는 조금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테두리로 장황하게 글을 이어가고 있는가? 나는 연극이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연극이 공연 예술의 한 형태이기에, 위에서 언급한 중심 궤도를 벗어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최근에 벌어진 코로나19 사태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삶을 사는 이들보다 심각할 정도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침소봉대일까? 코로나19로 벌어지는 상황 아니어도 이 일을 업으로 하며 사는 데는 늘 생존 그 자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더 커진 건 사실이다.

     

    연극이라는 일은, 만들어진 이야기-공연을 위한 대본에서 시작하여 배우와 여러 효과를 통해 구성된 무대, 그 무대를 지켜보는 이들-관객이 만나는 현장에서, 이미 지정된 경로로 진행되나 현재로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직접 대면의 형태로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거리두기, 마스크, 자가 격리 등이 강조되는 현시점에선 연극이란 일 자체가 쉽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또한, 연극과 같이 유사한 형태로 이야기를 만드는 여러 일 중에서 이 일은 세상 이야기의 중심점에서 외곽의 괘도에 위치하며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엄살일지 모르나 사실이 그렇다. 오죽하면 국가 시스템에서 마치 던져주듯 지원하는 국가 보조금 아니면 연극을 하면 사는 삶 그 자체의 존립마저도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연극인들은 최근 두 달여 동안 멈춰진, 그러나 조심스럽게 준비하며 어떻게든 이 일을 계속하려고 궁리한다. 왜 그런지 그 속내를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나는,........

     

    거꾸로 생각하면 어쩌면 그만큼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자유로울 수도 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힘들다면 이왕 편한 맘 먹고 전혀 다르게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고 설마 굶어 죽는 일이 벌어질까? 전혀 그런 개연성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경우의 수는 다수의 다른 일을 하며 사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 열리고 있는 분명히 뭔가 다른 현실에서 연극이라는 일을 하는데, 내게 필요한 요구되는 요청은 과연 무엇일까? (다음 호에 계속.....)

     

    연극연출가 | 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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