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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11호] 엥겔스 탄생 200주년 : 마르크스를 번역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 조회 수: 5392, 2020-09-24 20:27:14(2020-09-18)
  • 엥겔스 탄생 200주년 : 마르크스를 번역할 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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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엥겔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올가을 예정된 평가와 계승에 대한 토론에 앞서 혁명 동무 맑스와의 마지막 우정을 보여주는 편지글, 맑스 저서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하자는 엥겔스의 글을 소개한다.



     자본1권은,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공공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영국 사회주의 집단 안에서는 번역이 마르크스 유작 관리자의 책임 아래 준비되고 출간될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잘 알려졌지만, 텍스트가 충실하고도 제대로 변환되기만(rendered: translate와 구분하기 위해서 변환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옮긴이) 한다면 그 번역이 다른 사람에 의해 먼저 이루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투덜거릴 권리가 없다.

     

    존 브로드하우스(John Broadhouse)에 그런 식으로 시도한 번역 첫 몇 페이지가 투데이(To-Day) 10월호에 실렸다. 분명하게 말하겠는데, 그것은 결코 텍스트의 충실한 변환이 아니며, 이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마르크스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자질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몇 명의 옥스퍼드 대학생이 노가 네 개 있는 보트로 노를 저어 도버 해협을 건너고 있을 때, 그들 중 한 명이 노를 헛 저었다(caught a crab)”1)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쾰른 신문(Cologne Gazette)의 런던 통신원이 이것을 그의 신문에, 문자 그대로 그리고 충실하게, “게가 노 젓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노에 걸려 잡혔다라고 보도했다. 런던 한복판에서 수년간 살아온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기예의 기술적인 용어들에 마주치게 된다면 바로 그와 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겠지만, 단순한 독일어로 된 책에 대해서 꽤 쓸 만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독일 산문 작가 중에서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글을 번역하는 일에 착수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이제 정말로 브로드하우스 씨가 게를 잡는 일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이 더 있다. 마르크스는 이 시대에 가장 정력적이고 간결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를 적절하게 변환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뿐 아니라 영어에도 통달해야만 한다. 하지만 브로드하우스 씨는 분명 존경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재주와 언어 구사력을 지녔지만, 관습적인 유명 문필가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사용되는 제한된 범위의 영어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너무 쉽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영어는 자본이 번역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강력한 독일어는 그것을 변환하기 위해 강력한 영어가 필요하며 최상의 언어 자원에 의존해야만 한다. 새로 만들어진 독일어 용어는 영어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브로드하우스 씨가 그러한 어려움에 봉착하자마자, 그의 언어 자원은 그를 저버리고 그의 용기마저 꺾어버렸다. 이단 같은 모험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제한된 밑천을 아주 조금 확장하고, 일상적인 문헌의 관습적인 영어에 아주 조금 혁신을 가하면서, 그는 자신의 귀에는 거슬리지 않지만, 저자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다소 불명확한 용어로 어려운 독일어 단어를 변환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그 용어가 다시 등장할 때, 전문 용어는 언제나 같은 어구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완전히 다른 용어들로 그것을 번역한다. 그리하여 그는 첫 번째 절의 제목에서, grösse가 크기 또는 한정된 양에 상응하는 명확한 수학 용어지만, 규모(extent)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Werthgrösse가치 규모(extent of value)”라고 번역한다. 그리하여 Arbeitszeit의 뜻으로 단순히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들로 변환한다. (1) “시간-노동,” (2) “노동의 시간,” (3) “노동-시간,” 그리고 (4) “노동 기간.” (1) “시간-노동은 오히려 시간으로 지급한 노동이나 힘든 노동에 시간을 제공하는사람이 수행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4) “노동 기간2권에서 마르크스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했던 용어(Arbeitsperiode)이다. 지금은 잘 알다시피, 노동-시간의 범주는 책 전반에 걸쳐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중의 하나인데, 10쪽도 안 되는 곳에서 그것을 네 개의 서로 다른 용어로 번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상태 그 이상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떤 상품이 자신을 나타내는 첫 번째 측면은 유용성의 대상이라는 측면이고, 그와 같이 그것이 지닌 질이나 양으로 고려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완전체, 즉 수많은 질이나 속성들의 총체이고,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유용할 수 있다. 이 서로 다른 방식들, 따라서 어떤 물건의 다양한 용도를 발견해 내는 것은 역사 행위이다. 유용한 물건들의 양을 측정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척도를 찾아내고 확정하는 일 또한 그렇다. 상품을 측정하는 방식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는 측정되는 대상의 본성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관습 때문에 발생한다.”2)

     

    이것이 브로드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변환한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들, 결국 대상이 유용하게 쓰일 다채로운 양식은 간의 과업이다. 결국. 유용한 물건들의 양의 사회적 측정 수단을 발견하는 일 또한 그렇다. 상품들의 크기(bulk)의 다양성은 부분적으로 그 서로 다른 본성 때문에 발생한다.”

     

    마르크스에게서, 물건들의 다양한 유용성을 찾아내는 것은 역사 진보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브로드하우스 씨에게서, 그것은 시간의 과업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인정된 공통의 척도를 확정하는 데도 같은 조건이 적용된다. 브 씨에게서는, 또 하나의 시간의 과업유용한 물건들의 양의 사회적 측정 수단의 발견에 있는데, 마르크스는 분명 측정 수단의 종류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Masse(측정 수단) Masse(크기)로 오인하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잡힌 가장 멋진 게들 가운데 하나를 마르크스에게 뒤집어씌우기에 이른다.

     

    더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용가치는 부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건 그 부를 구성하는 재료를 형성한다.”(부의 사회적 형태: 그것에 의해서 부가 보유되고 분배되는 전유의 특별한 형태). 브로드하우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용가치는 항상 사회적 형태를 띠는 부의 실질적인 토대를 구성한다.”

     

    그런데 그것은 가식적인 상투어이거나 완전히 무의미(터무니없는 말)이다.

     

    상품이 자신을 나타내는 두 번째 측면은 그것의 교환가치이다. 모든 상품은, 교환가치를 지니는 것들 사이의 대비를 통해서 변화하는 비율로, 교환 가능하다는 점, 이 사실은 모든 상품이 그것들 모두에게 공통된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여기서 마르크스 책에 있는 가장 섬세한 분석들 가운데 하나를 재생산할 때 저지르는 부주의한 방식은 건너뛰고, 바로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구절로 나아가겠다. “모든 상품에 공통된 이 무엇이 기하학적, 물리학적, 화학적 또는 기타 자연적 속성일 수는 없다. 상품들의 물질적 속성들은 그 상품들을 유용하게 만드는 한에서만, 즉 그것들이 상품들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한에서만 고려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상품들의 교환관계의 특징점은 분명히 상품들의 사용가치로부터 추상()을 만드는3) 바로 그러한 행위이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의 사용가치는, 그것이 같은 비율로 제공되는 한에서, 다른 어떤 사용가치와 동등하다.”

     

    이제 브로드하우스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겉보기에 분명하게 상품들의 교환-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추상적인 형태의 이것들의 사용가치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용가치는 그것이 동일한 비율로 존재하는 한에서 꼭 다른 사용가치만큼 가치가 있다.”

     

    따라서 사소한 실수를 제쳐놓더라도, 브로드하우스 씨는 마르크스가 말한 것의 정반대 것을 말하도록 만든다. 마르크스에게서, 상품들의 교환관계의 특징은 추상 전체가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로 구성되며, 그것들은 사용가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고려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해석자는 교환율(여기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의 특징은, “추상적인 행태에서취해질 뿐인, 바로 그것들의 사용가치라고 말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에 몇 줄 지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문장을 제시한다. “사용가치들로서, 상품들은 오직 다른 질일 수 있고, 교환가치로서 그것들은추상적이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은, “오직 다른 양일 수 있으며, 따라서 사용가치를 조금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당신이 읽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거듭해서 같은 오해를 반복하는 브로드하우스 씨를 발견하게 될 때,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막 인용한 그 문장 다음에,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상품들의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면) “그것들에는 오직 하나의 속성, 즉 노동 생산물들이라는 속성만 남는다. 그러나 이 노동 생산물조차 이미 우리 수중에서 변화를 겪었다. 우리가 그것의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고 하면, 우리는 또한 노동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드는 유형의 요소와 형태들로부터 추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브로드하우스 씨에 의해 영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사용가치를 상품들의 실질적 재료로부터 분리한다면, 오직 하나의 속성, 즉 노동 생산물의 속성만 남는다. (어디에? 사용가치에 아니면 실질적 재료에?: 엥겔스) 그러나 노동 생산물은 이미 우리 수중에서 변형되었다. 우리가 그것에서 그것의 사용가치를 추출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의 사용가치를 구성하는 스태미나와 형태를 추출하는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관계에서, 그것들의 교환가치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사용가치와는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노동 생산물의 사용가치에서 추상을 만든다면, 앞에서 우리가 확정한 것처럼, 우리는 그것들의 가치에 도달한다.” 이것을 브로드하우스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율에서 그것들의 교환가치는 우리에게 그것들의 사용가치와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제 노동 생산물들에서 사용가치를 사실상 추출한다면, 그때 확정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것들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브로드하우스 씨는 서랍이나 금고에서 돈의 추출과 같은 유형의 것들 이외에 어떤 다른 추상 행위나 양식들에 대해서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추상과 빼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번역가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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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어의 의미를 영어의 무의미로 변화시키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마르크스의 가장 우수한 연구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이중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자로 여겨진 노동은, 같은 노동이 가치 생산자로 여겨질 때의 노동과는 다른 특성의 것이고, 다른 자질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방적·직조·쟁기질 따위의 구체적인 종류의 노동이고, 후자는 방적·직조·쟁기질 따위에 공통된, 인간의 생산적인 활동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하나의 공통된 용어, 즉 노동(labour) 안에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전자는 구체적인 형태의 노동이고, 후자는 추상적인 형태의 노동이다. 전자는 기술적 노동이고, 후자는 경제적 노동이다. 요약하면(영어에는 양자에 대한 용어가 존재한다) 전자는 labour는 별개의 것으로서 work이고, 후자는 work와 별개의 것으로 labour이다. 이 분석 이후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처음에 상품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것으로,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타났다. 그다음에 우리는 노동도, 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에서, 그것이 지닌 능력으로서 그것에 속하는, 사용가치 창조자와 같은 특성을 더는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았다.” 브로드하우스 씨는 자신이 마르크스의 분석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면서, 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는 첫 번째로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혼합물 간주했다. 그다음에 우리는 노동이, 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한에서, 그것이 사용가치 생성자인 한에서의 저 특성을 소유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마르크스가 희다라고 말할 때, 브로드하우스 씨는 왜 검다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더욱 재미있는 것을 보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민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상품 구매자로서 이 모든 상품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법적 가설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시민 사회(Civil Society)라는 표현은 전적으로 영어이고, 퍼거슨(Ferguson)시민 사회의 역사에 관한 책은 백 년도 더 된 것인데도, 브로드하우스 씨에게는 이 용어가 이해하기 힘겨운 것이다. 그는 그것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으로 변환하고, 그래서 그 문장을 무의미로 바꾸어버린다. 그들이 구매해야 하는 상품의 본성과 가치에 무지하여, 소매업자들 등에 의해 사기당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의 생산(Herstellung)사용가치의 확립으로 변환된다. 마르크스가 만약 아주 적은 양의 노동으로 석탄을 다이아몬드들로 변형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들의 가치는 벽돌의 가치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라고 말할 때, 보아하니 브로드하우스 씨는 다이아몬드가 탄소 동소체 형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석탄 콜라로 바꿔버린다. 그와 비슷하게 그는 브라질 다이아몬드 광산의 총 산출량모든 산출량의 이윤 전체로 변형시킨다. 그의 수중에서 인도의 원시적 공동체들숭고한 공동체들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그 고유의 목적에 알맞은 일정한 생산 활동 또는 일정한 유용 노동이 들어 있다.” [“들어 있다(contained)” 독일어(steckt)는 잘 번역된 것이다. 상품의 사용가치 생산은 그 시점에 이미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브로드하우스 씨는 분명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일정한 양의 생산 능력 또는 유용한 노동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질을 양으로 바꾸어버릴 뿐 아니라 막 소비된 생산 활동을 소비될 생산 능력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제 그만하자. 나는 브로드하우스 씨가 모든 면에서 마르크스를 번역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보다 열 배 더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특히 그는 정말로 진지한 과학적인 저작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ederick Engels)

    188510월 작성

     

    옮긴이 | 김종원




    <주>

    1. 단어 그대로 옮기면, “게를 잡았다”가 된다. (옮긴이)

    2. 이 구문과 다음 구분에 있는 강조는 모두 엥겔스가 추가한 것이다.

    3. “make abstraction from”으로, 사용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고, ‘추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추상’이라는 말을 살리기 위해 이렇게 옮겼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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